이충희
(李忠熙,
1959年
11月 7日
~)는
大韓民國
의
籠球
選手, 指導者로 現役 時節 포지션은
슈팅 가드
,
스몰 포워드
이다.
全州 KCC 이지스
의 前身인 現代建設 籠球團에서 大部分의 選手 經歷을 보냈고, 選手 活動 막바지에는
中華民國
으로 건너가
훙궈 엘리펀츠
에서 뛰었다. 國際 大會에서
大韓民國 籠球 國家代表팀
의 一員으로 活動한 그는
올림픽
에 1回 出戰했고,
아시안 게임
에서 金메달 1個, 銀메달 1個, 銅메달 1個를 獲得했다. 또한
아시아 選手權 大會
에서 準優勝 4回, 3位 2回 차지했다. 隱退 後 指導者가 되어
昌原 LG 세이커스
等 여러
韓國프로籠球
와 大學 籠球팀의 監督을 맡았으며, 大學校에서 體育敎育學 敎授로도 活動하였다.
選手時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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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江原道
鐵原
에서 出生하여,
春川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고, 그 後
京畿道
仁川
에서 成長한 그는 籠球大잔치에서 12시즌 내내 得點王을 차지하였으며, 1987年
泰國
방콕
ABC大會 最優秀選手에 올랐다. 1982年 印度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當時 籠球 種目에서 大韓民國 代表팀 所屬으로 出戰하여
中國
을 꺾고 大韓民國 男子 籠球 種目 史上 두 番째 金메달을 獲得하면서 華麗한 選手 時節을 보냈다. 現役 時節에는 '슛道士'라는
別名
도 있었다. 母校 出身으로 가드지만 슈터인
김진
은 自身의 母校 後輩로 알려졌다.
指導者/解說者 時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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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選手에서 隱退한 後에는 臺灣리그 選手 兼 監督이라는 有名한 經歷이 있다. 하지만 名選手는 名指導者가 될 수 없다는 징크스답게 指導者로써의 評은 相當히 좋지 못하다.
昌原 LG 세이커스
의 初代 監督을 통하여 本格的으로 正式 監督 커리어를 始作하게 되었는데, LG 監督 時節에는 創團 첫 正規리그 2位와 플레이오프 4强으로 突風을 일으켰으나, 그 以後로는 딱히 좋은 成跡을 내지 못하면서 LG 監督職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LG 初代 監督 以後에는 母校 고려대 籠球部 監督 및 大邱 오리온스 監督을 歷任했는데, 고려대 監督으로도 性的 不振으로 1年도 못 채우고 짤렸다. 以後 母校 後輩인
김진
監督의 後任으로
大邱 오리온스
의 指揮棒을 잡았지만, 여기서도 4勝 22敗라는 深刻한 成績 不振으로 한 시즌도 다 못 채우고 自進辭退하면서
김상식
코치가 監督代行을 거쳐 監督을 맡는 試鍊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러던 中 2013年 4月 29日,
原州 동부 프로美
監督에 選任되면서 오랜만에 現場에 돌아오게 되었다. 一旦 復歸 後 開幕展부터 3連勝을 쌓으면서 無難하게 申告式을 치렀지만, 시즌이 進行될수록 이충희의 指導者로써의 問題點들이 다시금 많이 드러나기 始作했으며, 特히 作戰 타임 때 戰術的인 部分에서 如前히 對案이 보이지 않았고, 또한 同僚 監督들에 比해 無理한 主戰 選手 起用 等으로 인한 性的 不振으로 原州 동부 프로미를 創團 첫 最下位로 墜落시킨 것도 모자라 12連敗라는 屈辱的인 成跡을 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以後에 또다시 14連霸를 하며 結局 2014年 2月 1日, 成績 不振에 對한 責任을 지고 自進辭退하였다. 指導者로서는 現役 時節 先輩였던
박수교
와 後輩
박종천
에 이어 김상준,
玄周燁
,
추승균
,
李尙玟
, 정인교,
신기성
等과 아울러 籠球 分野 最惡의 指導者 中 하나로 단단히 烙印이 찍혔다. 이와는 別個로 大邱 오리온스 監督과 原州 동부 프로美 監督 前後 時節
KBS
와
KBS N 스포츠
에서는 籠球 解說委員으로도 活動하였다.
個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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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年
俳優
최란
과 結婚했다. 1988年에 雙둥이 딸이 태어났으며, 1991年에는 아들이 태어났다.
學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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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解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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放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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選手 時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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監督 經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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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履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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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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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任
김진
|
第4代
大邱 오리온스
監督
2007年 5月 14日 ~ 2007年 12月 2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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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任
김상식
(代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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