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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源榮 (191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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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源榮 (李元榮, 1910年 1月 24日 ~ 1985年 8月 12日 )은 日帝强占期 의 言論人이자 大韓民國 의 企業人 兼 政治人으로, 본적은 서울特別市 西大門區 弘恩洞이며 京畿道 廣州郡 出身이다.

生涯 [ 編輯 ]

1936年 3月 25日 경성제국대학 법문學部 英文科를 卒業했으며 같은 해 4月 京城日報 編輯局에 入社했다. 1938年 2月부터 1941年 까지 每日申報 도쿄 特派員으로 活動했고 每日申報 政治部長(1941年 11月)과 政經部長(1942年 4月 ~ 1944年 8月), 論說委員(1943年)을 歷任했다. 1943年 1月부터 1944年 6月까지 國民總力朝鮮聯盟 慘事 兼 事務局 經濟委員會 委員을 歷任했으며 朝鮮航空工業株式會社 總務課長 兼 朝鮮航空事業社 支配人(1944年 8月), 朝鮮言論輔國會 評議員(1945年 6月)을 歷任했다.

1942年 6月 18日 《每日申報》에 실린 記事 〈새 子婦(慈父, 仁慈한 아버지)를 맞이하는 2千 4百萬의 幸福 - 昨日(昨日, 어제), 고이소(小磯, 小技) 總督 釜山에 上陸〉에서 고이소 구니아키 朝鮮總督의 就任을 "젊은 朝鮮에 다시 따사한 기운을 불어 줄 새 主人"이라고 讚揚했고 같은 해 8月 雜誌 《 東洋地廣 》에 寄稿한 글 〈고이소(小磯, 小技) 新(新)總督론〉에서도 "고이소 구니아키 總督의 進步的인 洞察力과 確固, 不屈의 信念에 運命을 맡긴 朝鮮은 幸福하다."고 讚揚했다.

1944年 4月 雜誌 《東洋地廣》에 寄稿한 글 〈全國(戰局)의 緊迫과 靑年에게 要望〉에서 "日本이 大東亞 戰爭( 太平洋 戰爭 )에서 진다면 동아는 滅亡이 있을 뿐이고 奴隸化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半島(朝鮮) 靑年들은 全體 東亞 民族의 生存을 위해 分期해야만 할 때이며 現在에는 自己를 멸망시키고 將來에는 朝鮮을 멸망시키는 罪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國家를 지키고 東亞(東亞)를 求한다는 正義感에 불타올라 只今 卽時 떨쳐 일어나야만 한다."며 日本의 侵略 戰爭에 自發的으로 參與할 것을 主張했다. 이러한 經歷으로 인해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者 名單 의 言論/出版 部門,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 包含되었다.

光復 以後에 朝鮮木材株式會社 專務理事(1947年 8月), 敵産家屋居住者協會(敵?家屋居住者協會) 總務部長(1949年 4月)과 韓國遠洋漁業株式會社 代表理事(1958年 7月), 南韓祭祀株式會社 代表理事(1958年 8月), 大寒千社會 理事長(1966年 3月), 社團法人 大寒잠社會 理事長(1973年) 等을 歷任했으며 1967年 民主공화당 所屬 第7代 比例代表 國會議員으로 當選되었다. 1985年 8月 12日 서울特別市 강남구 대치동 韓寶 미도아파트 110棟 808號 自宅에서 享年 75歲를 一期로 死亡했다.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選擧名 職責名 臺數 正當 得票率 得票數 結果 當落
第7代 總選 國會議員(全國區) 7代 民主공화당 50.6% 5,494,922票 全國區 26番 전국구 국회의원 당선

參考資料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