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용 (1926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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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용 (李炳勇, 1926年 4月 29日 ~ 2013年 3月 7日)은 大韓民國의 法曹人 兼 政治人이다.

生涯 [ 編輯 ]

이병용은 1949年 演戱大學校(現 延世大) 政外科 在學中 第3回 朝鮮辯護士試驗에 合格해 法曹人의 길을 걷기 始作했다. 以後 1951年 大田地檢 檢査, 서울地檢 檢事, 서울地方法院·서울高等法院 判事(1955) 等을 歷任했으며, 서울地方法院 在職 時에는 조봉암 先生 事件 1審 裁判部의 陪席 判事로 參與하기도 했다. 서울高法 判事로 勤務하던 59年부터 2年間 身分을 감추고 筆名 ‘이견생’으로 法律新聞에 ‘법창野花’를 連載했다. 法官들 사이에 오간 隱密한 對話나 法院 內部에서 일어난 일들을 紹介한 뒤 잘잘못을 直說的으로 指摘하는 글을 실어 當時 法曹人들 사이에서 人氣를 끌었다.

1964年 辯護士로 開業한 後에는 서울市 法律顧問, 서울回 會長, 第32代 大韓辯協 協會長 (1983.05~1985.02), 民主化推進協議會 副委員長 等을 지냈으며, 1979年 10·26事態 때는 김재규 前 中央情報部長의 國選辯護人과, 朴正熙 前 大統領 祕書室長이었던 김계원氏의 私選辯護人을 맡기도 했다. 1985年에는 第37回 世界人權宣言記念日을 맞아 無窮花章을 受賞했다. 1988年에는 第13代 全國區 國會議員(民主正義黨)李 되었다.

2013. 3. 7. 宿患으로 別世했다. 박희태 前 國會議長은 “작은 文句에 얽매이기보다는 大汎하게 일處理를 하고 무척 정의로운 분이셨던 걸로 記憶한다. 한마디로 對人倍이셨다”고 回顧했다. 遺族은 夫人 김혜선氏와 아들 웅규(前 샘표식품 副社長)·成規(金앤張 辯護士)氏, 딸 希願氏, 사위 최영진 駐美大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