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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의 紀跡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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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의 紀跡碑

大農知事 윤창의(尹昌義; 1916.3.7 ~ 1981.1.2)는 칠원尹氏 35歲이며 忠孝공(尹桓: 門下侍中)의 後孫이다. 父親 碩學 윤재덕과 母親 全州 李氏 사이에서 莊子로 태어났다. 水利組合長 在職時 鄕吏 錦江 流域의 700ha 塵肺된 땅을 沃土로 造成함과 二重 72萬餘坪의 國家所有를 동원산업에게 分配된바 耕者有田 土地 有償分配에 先見積 果斷으로 동원산업을 引受하여 大農産業(週) 創業主로 活躍 23年間 訟事 結實의 義賊壯擧 (義蹟壯擧 )를 기리는 紀跡碑를 勤修하였다.

대농 윤창의 先生 紀跡碑 除幕式이 1998年 3月 28日 청남면 인양리 海印定 아래에서 정원영 郡守를 비롯 地域 維持와 住民 遺族 等 5百 餘 名이 參席한 가운데 있었다.


出生 : 忠南 靑陽 청남면 인양리

逝去 : 1981年1月2日(公務上 出張中 갑작스런 腦溢血로 荀의)

葬禮 : 農民張으로 膾炙됨

安葬 : 忠南 靑陽 청남면 인양리 산40


대농지사칠원윤공창의기적비해문

蘇 再 靑陽郡 청남면 인양리 路邊

建立일 1998年 3月 28日

近 찬 國家象徵諮問委員長 前國會議員 獨立記念館長 최창규

建立者 대농지사칠원윤공창의기적비건립추진위원회

해 文 鄕土史學者 尹 警 수

農의 根本은 吐露서 실하니 天下의 臺本이요 仁義 本性은 中으로 빛나니 그 光輝가 臺이다. 여기 廣闊한 平野가 門前沃畓이 되고 이 고장의 土壤이 靑陽 第一의 穀倉地帶가 되기까지에는 實로 한 匹夫 義人의 丹心과 宗德이 바로 생생한 텃밭이었으니 이로써 大農의 큰 뜻은 그 꽃을 피웠고 온 農民의 오랜 바램은 함께 그 땀의 열매를 맺었어라. 그 님이 바로 칠원윤공이니 휘는 創意요 大農은 그의 雅號다. 顯祖의 휘는 환이니 高麗末에 官은 市中이요 市는 忠孝로 十六大棗요 익은 朝鮮兵亂忠臣으로 症通訓大夫하니 八代照耀 高祖의 휘는 창열이요 曾祖의 휘는 時患이요 弔意 휘는 신국이요 고는 碩學 徽裁德이다. 1916年 丙辰三月 初七日 靑陽郡 청남면 인양리에서 出生하니 自由路 才地가 非凡하고 義俠心이 强하였다. 約款에 里長이 되자 移民을 啓導하여 堆肥增産에 힘쓴 結果 道內一等으로 當時 殊常한 金肥는 富村을 造成하는 基盤이 되었다. 壯年이 되면서는 錦江流域의 넓은 平野가 每年 沈水로 버려짐을 애석히 여겨 6.25亂의 渦中임에도 政府 當局에 水利施設을 끈질기게 交涉하여 長平水利組合의 設置認可를 받는데 成功하였다. 이 工事는 二百餘 萬坪의 塵肺된 땅을 沃土로 만드는 팔年間의 大役事였는바 이 工事가 끝날 무렵인 1958年이 地方 農民들에게는 靑天霹靂과도 같은 急報가 傳해졌다. 水利施設 蒙利面積의 3分의 1에 該當되는 72萬 餘 坪의 土地는 國家所有로서 農民들이 代代로 이 땅을 官吏 耕作하면서 修理工事의 完工展에 拂下 되기만을 鶴首苦待하여 오던 中 이 實情을 探知한 서울 所在 會社가 一攫千金을 目的으로 이 土地를 大戰地方官재국과 農民 모르게 拂下 契約을 締結한 것이다. 이에 激忿한 功은 關聯 農民 2百 餘 世代를 하여 農民의 代表가 되고 先頭에 서서 이 土地의 緣故權을 찾기 爲한 荊棘의 農民生存權鬪爭을 始作하니 이때 공의 나이가 42歲였다. 于先 國家와 會社間의 拂下 契約을 取消키 위하여 財務部訴에 訴請)을 提起하니 審議 結果 國家는 農民側 主張을 받아들여 會社와의 契約을 取消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不服한 會社는 國家를 相對로 行政訴訟을 提起하였고 農民들은 國家에 補助參加하면서 이 訴訟은 勝敗를 거듭하기 23年이 나라 最長의 訟事였다. 이 訴訟이 이렇게 長期化된 데에는 2審에서 農民의 緣故權認定으로 會社가 敗訴하자 會社도 隣近 農民을 誘引 投資시켜 僞裝緣故權을 主張하면서 부터였다. 會社의 甘言利說에 많은 農民들이 加擔하니 事勢는 擴張되고 法院의 判決은 飜覆되고 功은 氣盡脈盡 家産은 蕩盡되고 農民들은 生存權을 잃게 되자 그 鬱憤이 서울 한복판의 農民데모로 暴發되었다. 이 事實이 都下 各 新聞에 大書特筆되고 國會에서 이 問題가 上程되자 政府도 5個部處로 收拾對策委員會를 構成하여 解決策을 摸索하였으나 裁判에 繫留 中인 事件이어서 束手無策이었다. 그러나 의승리라는 信念下에 共의 農民生存權鬪爭은 繼續되었고 이에 承服한 會社는 드디어 迂餘曲折 끝에 協商을 提議하니 判決 前에 農民側이 2億 원에 會社를 引受하여 原被告를 겸함으로써 判決 結果에 關係 없이 土地를 農民들이 차지한다는 안이었다. 會社로서는 그間의 訴訟費라도 報償받겠다는 意圖였으나 農民들로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는 2億 원에 會社를 引受한 後 判決에서 會社가 敗訴하면 會社 引受金 2億 원은 고스란히 農民들이 損害 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은 만의 일을 豫斷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것은 會社 勝訴時 訴訟費 한 푼 回收치 못함은 勿論 그 땅은 永遠히 農民들 품을 떠나기 때문이었다. 이때 功은 悲壯한 決心을 하였으니 農民들의 反對를 무릅쓰고 스스로 損害 본다는 覺悟下에 理事들의 協助로 고리의 私債를 얻어 2億 원 金額을 支給하고 會社를 引受한 것이다. 공이 萬難을 무릅쓰고 會社를 引受한지 2個月 後인 1980年 2月 23日 大法院 最終判決은 會社側 勝訴로 끝났다. 實로 共의 生死를 건 先見積 果斷이 아니었던들 農民들의 20餘 年間 血鬪는 水泡化되고 農土는 빼앗기고 말았을 것이다. 공은 이어 零細農民들의 土地買入資金을 위하여 不佞이 國政에 參與할 무렵 合力으로 政府로부터 長期低利 農業開發資金을 融資받는 한便 섣달그믐임에도 土地 讓渡稅의 減免을 위하여 極度의 疲勞한 몸을 이끌고 大田地方國稅廳 出張 中 갑작스런 腦溢血로 殉義하니 享年 66歲로 그 波瀾萬丈하던 生을 客地에서 쓸쓸히 마감한 것이다. 共의 一生은 實로 이 地方을 위한 滅私奉公 殺身成仁의 龜鑑으로써 그 行跡은 足히 永世不忘하리라. 공의 갑작스런 逝去로 指導者를 猝地에 잃은 農民들은 荒唐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農民代表로 功過 生死苦樂을 같이해온 金正煥 한봉수와 윤영설 한상복 진기범 윤영각 한근수 김동순 김정덕 김향환 윤병석 윤길랑 김상배 정순명 주남석 황장현 이용구 신충식 조천구 임병준 理事들은 더욱 團結하여 合力하고 또 공의 長男 同德女大 副總長 靈筵 博士는 공의 遺志를 받들어 萬難을 克服하고 農地問題 有終의 美를 위하여 獻身하였다. 공이 會社를 引受한 後 判決에 依하여 會社의 所有가 된 土地를 農民들에게 分配함에 있어 그間 訴訟에 同參하고 訴訟費를 完納한 農民들에게는 土地臺와 賞살하고 訴訟費 한 푼 안 내고 共의 하는 일에 反對便에 섰던 農民들에게까지도 그間의 訴訟費에 該當하는 當時 市價의 三分의 일인 坪當 2千2百원에 農地를 分配하니 그 義와 德은 실로 一視同仁이였다. 이제 공 逝去 後 十유수년 共의 선혜美德에 感激한 일향의 農民維持들이 공의 義賊壯擧를 기리고 이를 後世에 傳하고자 온 誠念을 모아 이 碑를 세우나니 이로써 大農의 대단한 精誠은 世世年年 農民의 풍요로운 結實로 遺構무剛하리라.

西紀 1998年 無人 3月 日

국가상징자문위원장전국회의원독립기념관장 최창규 謹撰

瘞安後인 김영식 近西

대농지사칠원윤공창의기적비건립추진위원회 근립


參考文獻)

칠원尹氏 宗보 돈本 10號(2018. 윤경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