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선 (1896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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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선
尹永善
大韓民國 第3代 農林部 長官
任期 1950年 1月 21日 ~ 1950年 11月 22日
大統領 李承晩
副統領 이시영
總理 이범석
이윤영
신성모
次官 정구흥 農林部 次官
주석균 農林部 次官

이름
別名 號는 梧堂(梧堂), 者는 용성(龍成), 創氏名은 이토 나街센(伊東永善)
身上情報
出生日 1896年 12月 25日 ( 1896-12-25 )
出生地 조선 朝鮮 漢城府 鍾路房 全東(現, 서울市 鍾路區 견지동 68番地)
死亡日 1988年 2月 6日 ( 1988-02-06 ) (91歲)
死亡地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鍾路區 견지동 46番地에서 兵士
學歷 오하이오주립대學校 농축산과 學事
經歷 政治人
企業人
正當 無所屬
父母 윤치호 (簿), 磨崖房 (某)
配偶者 민연희
子女 아들 윤영구 , 윤승구
親姻戚 할아버지 윤웅렬 , 異腹 叔父 윤치왕 , 윤치창 , 堂叔 윤치소 , 윤치오 , 윤치영 , 6寸 조카 윤보선 , 윤원선
宗敎 儒敎 改新敎
웹사이트 해평尹氏 홈페이지

윤영선 (尹永善, 1896年 12月 25日 ~ 1988年 2月 6日 )은 日帝强占期 企業人 利子 大韓民國의 政治人 이다. 日帝强占期 美國 留學 後 歸國하여 農業과 養蠶業을 하였고 解放 後 第3代 農林部長官 과 無任所 長官을 지냈다. 1925年 부터 1945年 까지는 東亞日報社 開城支局長을 맡기도 했다. 日帝强占期 親日知識人 윤치호 와 中國人 磨崖房 의 아들이다. 大韓民國 의 第4代 大統領 윤보선 , 京畿道知事 윤원선 等과는 再從間이며, 朝鮮日報 四柱를 歷任한 방상훈 의 妻祖父가 된다. 本貫은 해평으로 號는 梧堂(梧堂), 初名은 용성(龍成), 者는 용성(龍成)이다.

日帝强占期 부터 韓國 戰爭 直前까지 京畿道 開城 開豐郡 等地에 大規模의 酪農, 牧畜業을 經營하였으며, 送稿失業, 長淵電氣 等의 企業 設立에 參與하고, 松島學院 財團 理事로도 活動하였다. 韓國 戰爭 무렵에는 農林部長官과 無任所長官을 지내고, 休戰 以後에는 敎育事業과 4H클럽 活動, 로터리 클럽 活動 等 社會活動에 專念하였으며 松島學院 의 財團 理事長을 지내기도 했다. 1950年 韓國 戰爭 이 터지자 아버지 윤치호 의 日記인 尹致昊日記 保存을 위해 一部 內容을 美國 에 있는 동생들에게 宅配로 郵送하였다. 이로써 尹致昊 日記 中 一部는 韓國戰爭 의 火를 謀免하고 保存될 수 있었다.

一代記 [ 編輯 ]

初期 活動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祖父 윤웅렬 (왼便 담배 피우는 이)

梧堂 윤영선은 1896年 12月 25日 朝鮮 京城府 鍾路房 全東(現在의 鍾路區 견지동 68番地)에서 태어난 그는 朝鮮과 大韓帝國의 啓蒙思想家, 民權 運動家 윤치호 와 中國 女人 磨崖房 의 아들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는 基督敎 信者였다. 어머니 磨崖房 은 中國 女人으로 아버지 윤치호 甲申政變 의 失敗로 淸나라 상하이 로 亡命했을 때 만나 結婚했다. 위로 누나 윤봉희가 있었고, 바로 아래로 일찍 夭折한 동생 봉선과 光線이 있었다. 동생 윤광선 은 아버지 윤치호 의 祕書일을 보았고, 解放 後에는 美軍政廳 通譯官으로 勤務했으나 1950年 韓國 戰爭 當時 拉北되었다. 그리고 바로 태어난 親女同生 윤용희 美國 留學後 日帝强占期 當時 暫時 國內에 入國했으나, 環境에 適應하지 못하고 다시 美國 으로 건너가 居住하였다.

그의 집안은 18世紀 中葉까지 名門 兩班家門이었다가 그 뒤 鄕班 (鄕班)으로 沒落하였으나 曾祖 할아버지 윤취동 이 知中樞府事가 되고 祖父 윤웅렬 , 從祖父 윤영렬 無關 으로 出世하여 中央으로 進出하면서 다시 家勢를 일으켰다. 그가 태어날 무렵 할아버지 윤웅렬 윤치호 는 開化派 政治人으로 한참 活躍中이었다.

少年期 [ 編輯 ]

어려서 그는 漢學을 배우다가 아버지 尹致昊가 設立한 한영서願 ( 松都高等學校 의 前身)에 入學하여 英語와 酪農, 牧畜 過程을 修學했다. 1905年 어머니 磨崖房 이 出産 中 疝痛으로 病院에 入院했다가 死亡했다. 아버지 尹致昊는 2年 뒤 할머니 全州 李氏 의 仲媒로 南浦 白氏 백買戾와 再婚했다. 그 사이에 이福 兄弟, 女同生 6名과 男동생 3名이 태어났다. 이 中 윤기선 피아니스트 였고, 윤장선 샌프란시스코 總領事館의 副領事와 總領事를 지냈다.

少年期에 그는 閔妃 의 親族인 민유식 (閔裕植)의 딸 민연희 (閔蓮禧 또는 閔連嬉)와 結婚한다. 민연희에게서는 아들 永久(英求), 承句(勝求), 用具(容求)가 태어난다. 영구는 교통부, 承句는 大統領 윤보선 의 祕書, 用具는 서울特別市靑 의 公務員을 歷任한다.

日帝 强占期 活動 [ 編輯 ]

靑年期, 留學 生活 [ 編輯 ]

어머니 磨崖房

아버지 윤치호 는 國力의 養成을 위해서는 實力을 갖추는 것이 必要하다 생각하고 酪農業, 牧畜, 養蠶業, 經理會計 等의 敎育을 한영서원에 導入했다. 그는 아버지 윤치호 의 뜻에 따라 한영서願(송도중, 高等學校의 前身)에 入學하였으며, 農科를 支援하여 農業과 酪農, 牧畜을 배웠다. 한영서원을 卒業한 뒤에는 1年間의 英語 過程을 追加로 修了하며 農場과 牧場을 經營하다가 美國 으로 留學을 떠나게 된다.

아버지 윤치호

1914年 한영서願 을 卒業하고 美國 으로 건너가 마운트 헤르몬 中學校 에 入學했다. 1917年 마운트 헤르몬 中學校 를 卒業하고 밴더빌트 大學 農業科에 入學했다. 그 해 10月 21日 다시 오하이오 州立 農業專門大學(the Ohio State College of Agriculture, 現 오하이오 州立 콜럼버스 오하이오 大學校 의 前身) 弄畜産科에 入學했다. 아버지 尹致昊는 그의 學校 同級生 루츠(Lutz) 等을 만나보기도 했다. 오하이오 州立 農大 在學 中, 1922年 부터는 오하이오 州立 農業專門大學校의 農林硏究所의 硏究補助員으로 入社, 勤務했다.

美國 滯留 中 아버지 윤치호 는 그에게 3百 달러의 用돈을 年間 보냈다. 1921年 7月 14日 木曜日 日記에 美國 달러 3百 달러를 알렌(윤영선)에게 送金한다 했고, 1922年 4月 10日 月曜日 日記에서 尹致昊는 아들 알렌에게 美國 金貨 1千 달러를 送金했다고 記錄하였다. 300달러는 1922年 用돈이고, 700달러는 美國에서 韓國으로 오는 經費라 한다.

1922年 6月 오하이오 州立 콜럼버스 오하이오 大學校 畜産科를 卒業하였다. 美國 滯留 中 그는 唯一한 等과 連絡하였다. 唯一한 이 있던 미시간州 와 그가 있던 오하이오 는 붙어 있었으므로 韓國 留學生 모임에서나 대한인국민회 일로 種種 만나 交流할 [1] 수 있었다. 1922年 7月 日本 요코하마 에 滯留하였고, 7月 26日 歸國했다. 歸國 以後 牧場을 經營하였고, 京城 YMCA 靑年會에 參與하여 YMCA 靑年會 理事와 總務, 考慮醫藥品株式會社 副社長 等을 歷任하였다.

1922年 6月 歸國 直後 開城 考慮靑年會 에 加入하여 活動하기 始作하였다.

農場, 牧場 經營 [ 編輯 ]

윤치호 家族 寫眞( 1930年 ), 뒷줄 맨 왼쪽이 윤영선, 앞줄 왼쪽에 앉은 이는 아버지 윤치호 , 가운데는 할머니 李廷武 女史, 오른쪽은 繼母 백買戾

1922年 8月 2日 飛行機便으로 歸國하였다. 윤영선은 開城 에서 自己 專攻을 살려 牧畜業을 하고, 얼음 保管會社를 經營하기도 했다. [1] 그러나 唯一한 의 創業도 도와주었고 會社의 進路에 對해 助言해주기도 했다. [1] 1923年 부터 그는 松都高等學校 附設 送稿 農場(松高農場)과 送稿 牧場(松高牧場)을 經營한다. 그는 한영서願 財團 理事의 한사람이 되어 財團의 業務를 맡는 한便, 한영서願 附設 農場과 牧場의 管理人을 겸하였다. 牙山과 個性에 있는 牧場과 農園을 經營하면서도 松都高普에서 運營하는 松都高普 農場과 牧場의 運營, 管理監督을 兼任하였다.

1923年 1月 個性의 日本 警察署에 牧場事業을 認可해달라는 申請書를 냈다. [2] 그러나 日本 警察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認可를 내주지 않았다. [2] 그의 아버지 윤치호 는 그들은 日本人 牧場을 保護해 주고 싶었던 것 [2] 이라 봤다. 그해 9月 에는 開城 에서 開催된 朝鮮副業품공진회 (朝鮮副業品共進會)에 밀납(蜜蠟, 벌꿀 을 抽出해서 만든 기름)을 出品하여 3等을 受賞하기도 했다. [3] 1924年 慶尙南道 梁山郡 遠東公立普通學校 의 訓導가 되어 敎鞭을 잡았다.

1924年 11月 29日 새벽 2時頃, 鍾路房 견지동 68番地 윤영선의 집에 强盜가 들어와 洋服 外套와 現金 50원을 비롯한 3百원어치의 金品을 竊盜當했다. [4]

1925年 9月 松都高等學校 失業狀의 主任대리직을 臨時로 맡기도 했다. [5] 4月 17日 개성군 松島面 北本情 18番地에 東亞日報社 開城支局이 開設되자 윤영선은 東亞日報 開城支局長에 任命되었다. [6] 以後 그는 1945年 9月 軍政이 駐屯할 때까지 東亞日報 開城支局의 일도 맡아보았다. 1926年 世界 基督敎 大會에 參席次 韓國인 基督敎 信者 代表로 美國 에 다녀왔다. 1927年 다시 梁山郡 遠東公立普通學校 의 訓導가 되었다가 1929年 까지 在職하고 그만두었다. 1927年 6月 18日 에는 과일 種子, 苗木 및 人蔘 種子 苗木을 販賣하는 株式會社 송도식山(松都殖産)의 設立에 參與하여 理事가 되었다.

叔母 이범숙 의 回甲宴( 1936年 ), 다섯째 줄 왼쪽에서 세 番째가 윤영선, 넷째 줄 가운데, 色동옷을 입은 윤치소 의 뒤側 오른便, 한진숙의 바로 뒷쪽熱은 아버지 윤치호 , 둘째 줄 왼쪽에서 일곱番째는 6寸 동생 윤보선 , 셋째 줄 가운데는 堂叔 윤치소 , 그 옆은 從祖母 한진숙 , 넷째 줄 왼쪽에서 세 番째는 堂叔母 이범숙 , 다섯째 줄 오른쪽 끝은 堂叔 윤치영

윤영선은 아버지 윤치호 의 影響을 안 받을 수 없어 日本 滿洲 政策에 對해서도 아버지 윤치호 의 見解를 잘 따르는 便이었다. [1] 1928年 송도고등보통학교 財團理事의 한사람으로 就任했고, 1929年 7月 28日 에는 開城 의 地域有志 김정호 (金正浩)와 함께 開城體育會 (開城體育會)를 組織하고 그해 9月 23日 松都高等學校 씨름場에서 前朝鮮씨름大會 를 開催하였다. 1929年 2月 18日 공성학 , 金正浩 等과 綿織物 製造 販賣와 洋襪 製造 販賣를 하는 株式會社 送稿室業場(松高實業場)의 創立에 參與하고 株主 兼 理事로 參與했다. 10月 30日 에는 長淵郡 장연면 읍내리에서 송선주 (宋善洙)와 함께 電燈 및 電氣線 製造 會社 長淵電氣 株式會社를 設立하고 共同代表로 出資하였다.

企業經營, 株主, 社會 活動 [ 編輯 ]

1929年 3月 개성군 松島面 의 송도식山(松都殖産) 理事가 되었다. 以後 企業 經營과 株主로 活動했다. 1929年 綿織物과 메리야스를 製造 販賣하던 會社인 送稿室業場(松高實業場)의 株式 340株를 買入하고, 그해 送稿室業場의 財團理事의 한 사람으로 就任했다. 그해 9月 12日 送稿室業障이 松都高等學校 附屬機關에서 獨立하고 株式會社 送稿室業場(松高實業場)으로 設立될 때 공성학 等과 함께 取締役의 한 사람으로 就任하였다. 이어 監査役에는 백낙준 , 최선익 等을 選定하고 代表職은 金正浩에게 讓步하여 그를 社長으로 推戴했다.

1931年 3月 부터는 黃海道 長淵의 電燈, 電力供給 業體 長淵電氣(週)(長淵電氣(株))의 共同代表理事로 1933年 3月 31日 까지 在職했다. 그해 3月 送稿室業場 理事가 되었다.

1931年 李舜臣 의 祠堂과 位土가 賣却危機에 處하자 윤치호 李忠武公 遺跡地 保存 事業을 推進하였다. 윤영선은 여기에 10錢을, 윤일선 은 20錢을 各各 寄附하였다. [7] 1932年 5月 25日 平安南道 成川郡 사가면 장림리에 設立된 自動車 運輸業과 運送業을 겸하는 平原運送(平元運送) 株式會社의 監査로 選任되었다. 32年 9月 23日 평양부 신창리의 妓生券番組合인 旣成券番組合(箕城券番)의 共同代表로 參與했다.

1932年 松都中學校 財團理事에 就任하고, 1933年 松島小學校 (松都小學敎)의 校長에 就任했다. 그해 6月 美國 남監理敎 宣敎部로부터 資金 支援이 줄어들어 運營難에 處한 開城 第2松島普通學校의 財政問題를 救濟하였다. 바로 김정호 , 馬從油 와 함께 松都高普 財政維持 實行委員의 한 사람이 되어 공성학 과 함께 各各 1百원의 基金을 寄附하였다. 1934年 4月 에는 開城 에서 開催된 全朝鮮陸上競技大會 啓示部員과 記錄簿원을 겸하였다. 5月 11日 松島學院 財團設立 實行委員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34年 4月 1日 松島普通學校 校長이 되어 [8] , 1950年 6月 25日 6.25로 廢校되기까지 在職하였다.

1935年 4月 1日 송도식山의 株式 100株를 買入하여 송도식山의 理事이자 大株主의 1人이 되었다. 1935年 5月 8日 天安郡 성환面 백석리의 奧地를 訪問했다가 交通便이 不便한 것을 보고, 橋梁 假說 費用 3百원을 寄附하였다. [9] 그해 7月 個性의 言論社인 考慮時報 (高麗時報)가 獨自的 財團으로 出帆 考慮시보사 (高麗時報社) 株式會社가 設立되자 考慮시보사 理事 兼 顧問으로 委囑되었다. 이어 隔週刊으로 發行되던 考慮時報 의 發行을 日刊 發行地로 變更하게끔 資金을 支援하였다.

中日戰爭, 太平洋 戰爭 戰後 [ 編輯 ]

以後 送稿室業障과 송도식山의 會社 業務에 關與하였다. 1937年 12月 오른쪽 다리에 腫氣를 앓게 되었다. 1938年 에는 동생 윤광선 이 鑛工業, 漁業 投資에 失敗하고 28萬 엔의 빚을 지자, 아버지 윤치호 와 함께 동생 光線의 債務를 代身 갚아주었다.

1939年 唯一한 等이 設立한 柳韓洋行 의 株主의 한 사람으로 參與하였다. 1940年 朝鮮 總督府 에 依해 創氏改名 齡이 떨어지자 그의 門中은 性을 '이토'(伊東)로 改名하였다. 그도 門中을 따라 이토 나가젠(伊東永善)으로 創氏改名하였다. 그러나 別途의 政治的 活動에는 參與하지 않고 農場과 牧場, 養蠶業에 從事하였다. 1940年 7月 株式會社 京仁企業 (京仁企業)의 常務理事에 就任했다. 그 밖에 牧場과 農場을 經營하기도 했다.

太平洋 戰爭 의 推移를 觀望하던 中 윤치영 으로부터 日本 이 반드시 敗亡하리라는 消息을 接하였으나, 아버지 윤치호 로부터 日本이 敗亡할 수 있지만 日本이 勝利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事態를 觀望하였다. 1941年 윤치영 等으로부터 李承晩 이 出演한 美國 放送 '美國의 소리' 短波 放送을 入手하여 視聽하였다.

1941年 11月 7日 土木建築業 및 土地賣買, 賃貸業을 하는 京仁企業(京仁企業)의 監査가 되어 1942年 8月 31日 까지 在職했다.

光復 以後 [ 編輯 ]

光復 直後 [ 編輯 ]

1945年 開城 에서 株式會社 考慮制約(高麗製藥)에 入社, 1945年 8月 光復 直後 考慮藥品株式會社(高麗藥品株式會社) 專務 取締役(專務取締役)李 되었다. 光復 以後 아버지 윤치호 親日派 로 指目되었다. 그러나 윤치호 는 곧 死亡했고, 大韓民國 政府 樹立 以後 그는 不利益이나 制限을 當하지 않았다. 그러나 解放 政局에서 그는 政治的인 發言이나 行動은 自制하였다.

1946年 3月 29日 고려제약衛生會社 副社長에 就任했다. [10] 9月 22日 서울 南大門 에서 軍政廳 常務部長 오정수(吳禎洙), 서울市 軍政官 제임스 윌슨(James E. Wilson) 等의 主導로 열린 南大門 自由市場 開場式에, 司會者로 參席하였다. [11] 그는 松島小學校 의 業務와 고려제약 經營, 開城 松島面과 牙山 둔포면을 오가며 牧場과 돼지 農場을 經營하였다. 그밖에 考慮靑年會 와 考慮靑年會 主催 開城씨름大會 에 專念하였다.

1948年 부터 開城 地域의 地域 有志들의 公義로 開城市 內에 藥學大學 을 誘致하려 하자, 윤영선은 공성학 等과 藥學大學 誘致 運動을 推進했다. 그해 10月 그는 開城 松島面에 있던 市價 3百萬원 相當 自身의 土地 5萬坪을 寄附하여 率先을 보였다. [12] [13] 그러나 곧 6.25 戰爭의 發生으로 開城市內 藥大 誘致 運動은 失敗하고 만다. 1949年 10月 26日 大韓赤十字社 代議員 6名 中 한名으로 委囑되었다.

政府 樹立 以後 [ 編輯 ]

農林部 長官 在職 [ 編輯 ]
윤영선
京鄕新聞 記者와 인터뷰中인 夫人 민연희

1950年 1月 초에는 李承晩 으로부터 農林部 長官 에 薦擧되었다. 1月 22日 前任 長官 李宗泫 의 辭退 以後 闕位中인 大韓民國 第3代 農林部 長官 에 就任하였다. 그가 農林部 長官 에 就任할 當時 農地改革法이 國會를 通過하였기 때문에 地主로부터 農地를 收買하고 그 土地를 耕者有田(耕者有田)의 原則에 따라 農民 小作人에게 分配하는 일을 擔當하였다. 食糧增産을 위하여 遊休地開發을 위한 實態調査를 하였고, 이와 더불어 有畜農業 發展에도 力點을 두었다.

또한 農林部 長官 在職 當時 政府 備蓄 糧穀의 數를 늘려, 穀價 調節과 食糧 需給의 圓滑을 期하고 展示와 凶年己의 貧民들을 救濟하고, 農水産物 價格을 안정시켰다. 또한 農水産物 增産과 品種 改良 政策 및 美國 剩餘農水産物의 國內 誘致를 推進하였다. 1950年 6月 6日 에는 政府味 쌀 放出 收益金 70億圜을 肥料差額으로 農民에 返還하였다. [14] 1950年 3月 24日 農地改革 을 目的으로 構成된 農地改革委員會 委員長에 委囑되었다. [15]

韓國 戰爭 戰後 [ 編輯 ]

6.25 戰爭 이 터지자 戰況이 不利하다는 消息을 듣고 家率들을 이끌고 바로 南下하였다. 1950年 韓國 戰爭 이 터지자 아버지 윤치호 의 日記인 尹致昊日記 保存을 위해 一部 內容을 美國 에 있는 동생들에게 宅配로 郵送하였다. 이로써 尹致昊 日記 中 一部는 韓國戰爭 의 火를 謀免하고 保存될 수 있었다. 6.25 戰爭 中 동생 윤광선 (尹光善)의 拉北 消息을 接하였다.

農林部 長官 在職 當時 農水産物 甑山의 成功과 外國의 剩餘 農水産物의 誘致를 통해 貧民과 餓死者, 乞人 等을 救濟한 功勞로 國民勳章 모란장 (國民勳章牧丹章)을 받았다. 農林部長官을 그만둔 뒤 그는 戰時內閣의 國務委員 無任所長官에 任命되어 바로 戰時 內閣에 參與하였다. 1952年 休戰 以後 長官職을 辭職하고 4H클럽活動에 專念하였는데, 4H클럽 中央委員을 거쳐 中央委員會 會長·顧問으로 일하였다. 退任 直後 考慮制約(高麗製藥) 社長에 就任하였으며, 退任 後에는 主로 社會奉仕活動에 專念하였다.

1952年 부터 30年間 松島學院 理事長을 지냈고, 1954年 에는 考慮保險(現 雙龍火災海上保險 ) 社長을 歷任하였다. 1954年 4H俱樂部 中央위委員會 會長이 되었다.

量조금地法과 엿製造 禁止法 [ 編輯 ]

1952年 ~ 1982年 學校法人 松島學院 (松都學園) 理事長이 됐다. 그는 各界의 協助와 도움으로 6.25 戰爭으로 廢校된 송도중, 松都高等學校를 仁川에서 다시 復活시키고 財團 理事長을 歷任하였다.

1952年 부터 쌀 生産量의 不足으로 李承晩 政權 에서 主潮禁止法 制定과 엿製造 禁止法을 建議하였다. 그는 이를 두고 " 막걸리 는 農民의 樣式이니까 말썽이 많을 테지만 쌀을 깎을대로 깎아가지고 만드는 定宗 과 함께 釀造禁止를 하고 또 救護物資로 들어오는 雪糖을 골고루 地方에도 配分하여 糖分을 取하자고 만드는 엿製造禁止法을 아울러 制定하면 浪費되고 있는 쌀을 節約할 수 있을 것이다. [16] "

그는 長次官을 바꾼다고 해서 쌀값이나 物價가 安定된다고 보는 것은 잘못임을 指摘했다. 한便으로 그는 "술을 만들지 못하게 해봤자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 같다고의심하면서 于先 政府에서 쌀을 팔되 市民들에게 골고루 簡便하게 分配되도록 各 洞會(洞事務所)를 통해서 파는데 생길 수 있는 弊端이 只今 方式의 弊端"보다 적으리라고 主張하였다.

그해 3月 국제산업 株式會社의 社長이 되었다. 1953年 2月 7日 에는 犯法者 啓導 目的과 法務部 諮問機關 目的을 겸하던 司法保護委員會 가 再組織되면서, 서울地檢 2層에서 박흥식 等과 함께 司法保護委員會 委員으로 追加 委囑되었다. 한便 아버지 尹致昊의 後援으로 留學을 다녀온 한경직 牧師 等이 그에게 윤치호에게서 빌렸던 돈 百원을 利子를 쳐서 百萬원을 그에게 傳達하자 그는 아버지가 쓰신 돈이니 내가 받을 理由가 없다며 限死코 辭讓하였다.

生涯 後半 [ 編輯 ]

社會 事業 [ 編輯 ]

윤영선
윤영선

1956年 부터는 興士團 에서 主催하는 金曜講座 의 演士로 招聘되었다. 그해 4月 20日 에는 大聲빌딩에서 "美國의 農村靑少年 指導"라는 題目으로 講演을 하였다. 1957年 農業銀行 ( 農協 의 前身) 中央會의 運營委員에 選任되어 農村 營農資金 供給의 不合理性을 是正하였다. 1957年 4月 農業銀行 設立委員會 運營委員에 任命되었다.

1957年 9月 西大門區 노고산동의 報道를 橫斷하다가 陸軍 憲兵隊 지프車에 치이는 交通事故를 當했다. [17]

1957年 ~ 1958年 까지 서울 로터리클럽 會長에 就任하여 韓國 로터리 再建에 積極的으로 參與하여 活動, 功勞를 남겼다. 그 뒤 서울 YMCA 靑年會 總務를 거쳐 1958年 ~ 1959年 까지 YMCA 靑年會 總務를 歷任하였다. 그 뒤 YMCA 總務에 再選되었다가 1960年 辭退했다. [18] YMCA 基督敎 靑年會 總務가 되어서는 建物敷地 마련을 위해 寄託金을 寄附하여 鍾路 3街의 建物을 짓도록 도와주었다.

1958年 3月 25日 에는 農村銀行設立委員會 運營委員, 4月 1日 에는 農業銀行 (農業銀行中央會, 農業協同組合 中央會의 前身) 民間部門 運營委員에 委囑되어 農村 營農資金 支拂 條件을 緩和시키고, 營農資金 供給의 各種 不合理性을 始政케 하였다. 1959年 10月 에는 YMCA 財團 會長이 되었다.

1960年 以後 보이스카우트活動도 參與하여 韓國 靑少年의 指導育成에 獻身하였으며, 4月 19日 4.19 革命 때는 學生들에 對한 政府의 寬大한 處分을 呼訴하기도 했다. 1960年代 以後 4H클럽中央委員會 會長, 大韓赤十字社 祕書室長을 歷任하였으며, 學校法人 松島學院 (松都學園) 理事長으로 在職하였다.

隱退와 最後 [ 編輯 ]

1968年 1月 연세대학교 博物館 에 아버지 윤치호 및 할아버지 윤웅렬 의 遺品과 官服, 敎旨 等을 寄附하였다. [19] 1975年 5月 2日 서울 의 뉴서울호텔에서 곽상훈 , 박종화 , 모윤숙 , 안호상 , 이병도 , 이갑성 等과 함께 "救國宣言文"을 朗讀하고 舊국同志會 (救國同志會)의 創立 勃起에 參與하였다.

1970年 代에는 徐徐히 아버지 윤치호 의 일기 및 遺品을 社會에 寄贈하였으며, 1980年 에는 김형찬과 함께 그동안 所藏하고 있던 윤치호 의 便紙 書信을 學界에 寄贈하였다. [20] 이는 國史編纂委員會 에서 部分 飜譯, 解讀하여 한글 로 飜譯, 刊行되었다.

1982年 松島學院 이 經營難에 處하자 開城 出身 企業家 이회림 (李會林)에게 財團을 넘기고 隱退하였다. 그해 12月 4日 에는 國民敎育憲章 宣布 10周年 記念 敎育有功者 表彰 때 國民勳章 모란장 을 授與받았다. 以後 癸卯俱樂部와 YMCA의 元老 모임에 出席하여 活動하였다. 1988年 2月 6日 서울特別市 鍾路區 견지동 46番地 自宅에서 老患으로 死亡했다. 死亡 當時 나이는 享年 92歲였다.

事後 [ 編輯 ]

2月 6日 서울 宗敎敎誨에서 發靷하였다. 2月 10日 午前 9時에 永訣式을 하고 葬地는 忠淸南道 牙山郡 둔포면 夕哭 先山에 安葬되었다.

賞勳 經歷 [ 編輯 ]

家族 關係 [ 編輯 ]

家族 寫眞, 左路부터 윤영선, 윤웅렬 , 윤치호 , 윤봉희 順
6寸 동생 윤보선
( 大韓民國 의 第4代 大統領을 지냈다.

아들 윤영구는 行政理事官에 이르렀고, 메트로 航空社 社長과 會長을 歷任하였으며, 아들 윤승구 연희전문학교 를 卒業했으며, 堂叔인 윤보선 大統領의 祕書官을 지내다가 윤보선 退任 後 個人事業을 하기도 했다.

기타 [ 編輯 ]

비슷한 時期에 그와 비슷한 同名異人 윤영선 이 있었다. 그는 윤영선과 漢字 이름字도 同名異人이며, 日帝强占期 에는 莞島郡 , 廣州府 , 광산군 의 公務院으로, 解放 훙[는 全羅南道 海南郡 出身으로 全羅南道 光州市 (光州의 廣域市 昇格 以前)의 公務員과 光州市長, 興國해운(興國海運) 社長, 第2代 國會議員 海南郡 地域區로 活動하였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조성기, 《唯一한 評傳》 (작은씨앗, 2005) 221페이지
  2. 윤치호, 《尹致昊 日記:1916-1943》 (尹致昊 지음, 김상태 驛, 역사비평사, 2001) 240페이지
  3. "個性의 婦功 受賞者", 동아일보 1923年 10月 29日子 4面, 經濟面
  4. "尹氏저에 竊盜", 東亞日報 1924年 12月 29日子 2面, 社會面
  5. 每日申報 1925年 9月 17日子, 3面
  6. "社告", 東亞日報 1925年 4月 17日子 03面 09段
  7. "忠武公遺跡保存問題로 追慕議決正體性 金答紙", 동아일보 1931年 7月 22日子 6面, 社會面
  8. 開城第一송보 윤영선氏가 經營" 東亞日報 1934年 3月 7日子 3面, 經濟面
  9. "橋梁架設비로 尹氏가 三百원", 東亞日報 1935年 5月 8日子 3面, 社會面
  10. "人事", 自由新聞 1946年 3月 29日子 01面 11段
  11. "自由市場 開場式", 自由新聞 1946年 9月 22日子, 2面 7段
  12. "開城藥學大學創立 金, 尹,공 삼씨의 特旨로", 東亞日報 1948年 10月 17日子 2面, 社會面
  13. "송跳躍臺의 發足에 曙光", 朝鮮日報 1948年 10月 7日子 2面, 社會面
  14. 農水産部, 《한국양情社》 (農水産部, 1978) 643쪽
  15. "農改 委員 名簿", 自由新聞 1950年 3月 24日子 02面 05段
  16. "長官을 가라本大字 쌀값 解決엔 별수없다", 東亞日報 1952年 3月 5日子 2面, 社會面
  17. "耳鳴은 卽死, 市內에 輪禍事件", 東亞日報 1957年 9月 9日子 3面, 社會面
  18. 自畫像을 그리듯이 1 전택부 지음 | 범우사 | 1997) 224
  19. "고 尹致昊氏 所藏品 連帶 博物館에 寄贈", 京鄕新聞 1968年 1月 11日子 3面, 生活文化面
  20. "激動期 舊韓末 再照明 윤치호 未公開書信等 180餘點 發見", 京鄕新聞 1980年 9月 30日子 5面, 生活文化面
  21. 윤치호, 《尹致昊 日記:1916-1943》 (尹致昊 지음, 김상태 驛, 역사비평사, 2001) 636페이지
  22. 윤치호, 《尹致昊 日記:1916-1943》 (尹致昊 지음, 김상태 驛, 역사비평사, 2001) 635페이지
  23. 美國 캘리포니아 LA에서 死亡
  24. [訃告] 金世容 前 安城商工會議所 會長 別世 外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中央日報 2004.03.29
  25. 7月 30日 궂긴 消息 한겨레新聞 2013.07.29
  26. https://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138444
  27. https://archive.today/20120711142007/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83675
  28. “교수신문” . 2014年 8月 2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5月 16日에 確認함 .  
  29. 오현주, 《成功하나 아픔은 아홉》 (出版社 金土, 1996) 118페이지
  30. 서울대학교 音大 第1回 卒業生
  31. 윤치호, 《尹致昊 日記:1916-1943》 (김상태 便 飜譯, 역사비평사, 2001) 636페이지

參考 資料 [ 編輯 ]

前任
李宗泫
第3代 農林部 長官
1950年 1月 21日 ~ 1950年 11月 22日
後任
공진항
前任
이윤영
第2代 無任所 長官
( 이윤영 과 共同)
1950年 11月 22日 ~ 1952年 4月 10日
後任
이윤영
許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