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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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손
陸遜
宰相
任期 244年-245年
前任 고옹
後任 步즐
君主 孫權

의 大都督
任期 222-223/228

身上情報
出生日 183年
出生地 한나라 五軍 五鉉
死亡日 245年 4月 (62歲)
死亡地 吳나라 우창
配偶者 손책 의 딸
子女 陸港
軍事 經歷
主要 參戰 형주 攻防戰
伊陵 大戰
石亭 戰鬪
합비新星 戰鬪

육손 (陸遜, 183年 ~ 245年 2月 [1] )은 中國 後漢 말 ~ 三國時代 吳나라 의 政治家로 는 백言(伯言)이며 洋酒 五軍 五鉉(吳縣) 사람이다. 蜀漢 위나라 의 侵攻을 여러 次例 擊退하여 吳나라를 지켜냈으며, 旅夢을 도와 關羽 를 社로 잡는데 功을 세웠고, 以後 怨恨을 갚고자 侵攻한 劉備 君을 물리치는데 큰 役割을 하였다.

生涯 [ 編輯 ]

初盤 [ 編輯 ]

元來 이름은 肉의(陸議)인데, 그의 집안은 代代로 江東 地域을 다스려온 豪族이었다. 어린 時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從祖父인 여강 태수 六江 에게 養育되었다. 그러나 陸江이 當時 크게 勢力을 떨치고 있던 怨讐 과 對敵하게 되자 六江은 一族을 육손에게 맡기고 吳나라로 避身시킨다.

吳나라에서 육손은 官職으로 進出하여 玄의 管理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施惠를 베푸는 等 百姓들의 生活을 改善시키는 데 盡力하였다. [2] 또 吳나라는 當時 異民族의 숱한 襲擊으로 하루도 平安할 날이 없었는데, 육손은 住民들 가운데 志願兵을 募集해 쳐들어오는 異民族을 하나하나 擊破하고, 投降하는 者는 自己 軍勢에 加擔시켰다. 육손의 그러한 活動에 注目하던 孫權 은 그에게 兄 손책 의 딸을 시집보내어 親分 關係를 맺고 種種 政治的 問題에 對해 助言을 求하였다. 육손의 ‘異民族을 하나둘씩 平定하여 그 가운데서 精銳兵을 選拔하여 强力한 軍隊를 組織해야 한다’는 主張을 들은 孫權은 그의 意見에 同意하여 그 實行을 육손에게 맡겼다. 그래서 各地의 異民族은 육손에 依해 漸次 討伐되어 精銳兵으로 吸收되었다.

關羽와의 對立 [ 編輯 ]

吳나라와 蜀漢 間에 형주를 둘러싼 對立이 일어나고 있던 途中 戰線 司令官이었던 旅夢 이 病에 걸려 歸還길에 오르게 되었다. 旅夢이 戰線을 離脫하면 早晩間 그를 警戒해 北쪽으로의 進擊을 망설였던 關羽 가 必是 放心하여 올 것이라 여기고, 육손을 自己 陣營으로 불러들여 關羽가 放心한 틈을 노려 형주를 빼앗으라고 指示하였다. 旅夢은 吳나라로 돌아와 孫權에게 그 點을 進言하고, 自己 代身 형주 守備를 맡을 사람으로 육손을 推薦하였다.

旅夢의 後任이 된 육손은 關羽에게 매우 謙遜한 內容의 書信을 보내 그에게 自信感을 불어넣어주었다. 安心하고 위나라 를 侵攻한 關羽는 旅夢의 計略에 虛를 찔려 敗北하고 사로잡혀 處刑되고 만다.

倍잠론(裴潛論)에서 孫權은 旅夢에게 後任으로 누구를 指名할것이냐고 묻자, 旅夢은 才能은 뛰어나지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육손을 推薦했고 孫權은 육손을 편장군 兼 右部독에 任命하고 육손은 蕃盛戰鬪에서 關羽와 協約을 하였다고 한다.

伊陵 大戰 [ 編輯 ]

이 消息을 들은 劉備는 關羽의 怨讐를 갚기 위해 約 5萬 或은 8萬의 大軍을 거느리고 吳나라를 侵攻 하였다. 이에 孫權의 命을 받아 李珥, 幼兒와 함께 무현, 자귀玄을 지켰으나 李珥 等이 武絃에서 蜀漢群 先鋒將 오반, 風習에게 擊破되어 자귀縣에 駐屯하게 許容한다. 이듬해 大都督으로 任命되어 蜀漢軍과 伊陵에서 對峙하였는데, 지난해의 敗戰을 敎訓삼아 全軍에게 守備를 단단히 하고 絶對 放心해서는 안 된다고 命令을 내린다. 그 때문에 육손을 向해 怯쟁이라며 不平하는 兵士들이 많자 육손은 孫權이 親히 내린 寶劍을 뽑아들고 “只今은 한 치의 땅이라도 取할 수 있다면 어떤 욕됨이라도 참아야 할 것이오! 그대들은 各處의 要旨를 지키는 데에 全力을 기울이시오! 萬若 함부로 움직인다면 軍令을 어긴 罪로 處刑할 것이오.” 하고 忠告하여 그들을 說得하였다. 마침내 오랜 對峙狀態로 蜀漢軍이 陣을 들에서 숲으로 바꾸자 마자 육손은 卽時 化工을 加하여 擊破하였다.

劉備 事後 [ 編輯 ]

劉備가 病으로 죽자 吳나라와 蜀漢은 蜀漢의 使臣인 等地 의 意見을 받아들여 友好 關係를 回復하고 함께 위나라에 對抗하게 된다. 孫權은 軍事 面에서 육손은 吳나라에게 있어 매우 重要한 存在가 되어 魏나라가 種種 吳나라를 侵攻해오지만 그 때마다 육손의 戰略으로 가까스로 沮止시켰다. 그 後 오나라 臣僚들의 猛活躍 德分에, 마침내 孫權은 帝位에 올라 皇帝 가 되었다.

244年 육손은 고옹 의 뒤를 이어 丞相 에 任命되었다. 손화 손牌 의 後繼者 紛爭에서는 이미 太子인 손火를 支持하였고, 손牌派의 核心 人物 電氣를 그 아버지 위將軍 電鐘 이 擁護하자 이를 批判하는 便紙를 보내 全氏 一族과 사이가 벌어졌다. 육손은 孫權에게 上疏를 올려 太子를 廢하지 않기를 여러 次例 말했으며, 또 直接 首都 建業으로 가서 孫權을 謁見하기도 했다.

마침내 電鐘 富者는 육손의 外家며 太子를 支持하는 高談 , 高僧 , 妖神 等을 讒訴하여 流配보냈고, 또 육손과 便紙를 주고받은 午餐 은 그로 인해 下獄되어 주살당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孫權은 육손을 叱責하였다. 육손은 이듬해 63살의 나이로 火病으로 噴射했다.

六손이 죽은 뒤에도, 孫權은 養畜이 上訴한 육손에 對한 20가지 弔問을 들어 陸港을 禁錮했으나, 陸項이 모두 條理있게 對答하자 그제서야 孫權은 육손에 對한 疑心을 풀었고, 太原 元年( 251年 )에 孫權은 陸港에게 讖言으로 육손 富者를 攻擊한 것을 謝過했다. 經濟 臺에 이르러 蘇後(昭侯)의 諡號를 받았다.

육손의 親族關係 [ 編輯 ]

關聯 人物 [ 編輯 ]

六江  肉的  六個  陸港  六모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허숭(許嵩), 《健康實錄(建康實錄)》
  2. 五署13 육손展
前任
고옹
第3代 동오 의 丞相
244年 ~ 245年
後任
步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