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명
(柳子明,
류자名
,
1894年
1月 13日
~
1985年
4月 17日
)은
日帝强占期
의 獨立運動家이자 아나키스트이며 中華人民共和國에서 活動한 農學者였다. 南과 北에서 唯一하게 勳章을 받은 獨立運動家다. 改名 前 이름은
유흥식
(柳興湜)이고 本貫은
文化
이며 號는 牛筋(友槿)이고 改名한 이름
유자명
(柳子明)은 元來 別名이었다.
學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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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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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淸北道
忠州
出身이다.
忠州農業高等學校
의 前身인 忠州簡易農業學校 敎師로 勤務하던 中
1919年
3·1 運動
에 加擔했다가 陸路를 통해
상하이
로 亡命해
大韓民國 臨時政府
에 參與했다.
以後 武裝 抗日 鬪爭에 뜻을 두고
金元鳳
의
義烈團
에 加入하였으며,
이회영
,
김창숙
,
신채호
等과 더불어
아나키스트
路線에서 活動했다.
1924年
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
設立에 關與했다.
1930年
4月에는
傷害
의 프랑스 阼階에서
아나키스트
運動의 綱領과 規約을 發表했다.
中國語에 能通했던 그는 中國人, 印度人들과 함께
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
를 結成하였다. 이 團體는
김규식
李 會長을 맡았으며, 機關紙 《
東方民族
》 韓國語, 中國語, 英語로 發行했다. 유자명은
朝鮮革命自然맹
,
南畫韓人靑年聯盟
,
不滅俱樂部
等의 獨立 運動 組織에 꾸준히 加擔했다. 1930年代에는
조선의용대
指導委員, 1940年代에는
大韓民國 臨時政府
學務部 次長을 歷任하였다.
유자명은 申采浩의 〈조선혁명선언〉(1923) 基礎에 參加했을 만큼 아나키즘 理論에 밝았으며 卓越한 語學 實力과 國際的인 感覺을 갖춘 獨立 運動界의 一級 參謀였던 것으로 傳해진다.
그러나, 中國人과 다시 結婚한 뒤 光復後
韓國 戰爭
等으로 歸國 時機를 놓치면서 中國 後難(湖南)農業大學에서 敎授로 在職하다 退任했다.
湖南大學은 中國 最高의 農業大學이고, 류자名 先生은 中國에서 열손가락안에 꼽히는 農學者로 評價 받는다.
湖南大學은 류자名 記念館과 銅像을 세웠다.
[1]
死亡할 때까지
中國
에서 園藝學者로 活動하였고 後孫들도 大部分
中華人民共和國
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 있기 때문에 그동안 活動 內譯이 仔細히 알려지지 않았었다.
1991年
大韓民國
政府로부터
建國訓長
愛國章을 追敍받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서도
1978年
3級
國旗勳章
을 授與받아 南北 兩 體制에서 同時에 認定 받은 獨立 運動家가 되었다. 遺骸는
參與 政府
時節에 奉還
[2]
해
國立大前賢充員
에 韓國人, 中國人 夫人과 合掌되어 있다.
著書로 回顧錄 《나의 回憶》(1984)이 있으며, 轉機로는 《行動하는 知識人 류자名 評傳》(原題 《不滅의 知事 류자名 評傳》)(類演算 지음, 忠州市 예성文化硏究會, 2004年)李 發刊되었다. 오랫동안 류자名 先生을 記錄했던 中國의 한 女記者는 '勳章을 단 園藝學子'라는 冊도 出刊했다.
參考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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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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