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이름을 가진 大韓民國의 喜劇人에 對해서는
류근일 (喜劇인)
文書를 參考하십시오.
류근일
(柳根一,
1938年
1月 30日
~ )은
大韓民國
의 言論人이며
朝鮮日報
의 前 主筆이다. 本貫은
晋州
.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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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涯 初盤과 學窓時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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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年
서울特別市
에서 出生하여,
寶城高等學校
를 卒業하고,
서울大學校
政治學科를 入學하였지만 中退하고, 다시 서울大學校 大學院 政治學科에서 碩士와 博士 課程을 修了하였다.
李承晩
政權 末期,
1958年
서울大 筆禍事件
으로 첫 獄苦를 치른 後, 5.16 直後
1961年
民通學련
事件으로 投獄되어
1961年
~
1968年
까지 監獄에서 보냈고,
1974年
維新 直後
民靑學聯
事件에 連累되어
金芝河
, 이현배 等과 함께 세 番째 投獄되었다.
言論人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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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期 言論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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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年
中央日報
記者로 入社하여,
1981年
朝鮮日報
論說委員이 되었으며,
1995年
삼성언론재단의 理事를 歷任하고 있다.
1996年
부터 韓日歷史共同硏究 運營代表로 歷任하였다.
한便
노태우 政府
時節 그는
國軍保安司令部
의 査察對象 中 한사람이 되어
노태우 政府
로부터 監視당하였다.
[
出處 必要
]
1990年
10月 4日
午後 6時40分쯤
외국어대
在學 中 民學투련 出身이었던, 脫營兵
윤석양
二兵의 暴露에 依해 밝혀졌다. 自身은 머리를 다친 後로 監視를 當한 記憶이 없었다고 한다.
[1]
윤석양
은 脫營後 서울市 연지동 基督敎會館 7層 韓國基督敎敎會協議會 人權委員會 事務室에서 「良心宣言」을 통해 脫營當時 保安司에서 갖고나온 動向把握對象者 個人索引表 신상철,이들 內容이 入力된 컴퓨터디스킷을 公開했다.
[1]
2000年代 以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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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年부터 2003年
朝鮮日報
에 論說主幹으로 在職하며 류근일 칼럼을 連載하고 停年退任하였다.
2001年
韓國
의
뉴라이트
運動이 始作된 以後 親 뉴라이트 論客으로 活動하였다. 2006年부터 2008年까지
朝鮮日報
에 客員 論說委員으로 2週 間隔으로 칼럼을 連載하였다.
2008年
뉴라이트
의
時代精神
(理事長
안병직
)과 합친
自由主義連帶
常任顧問을 歷任했다.
2011年 8月부터는
京鄕新聞
의 客說論說委員으로 지내고 있다.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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受賞 內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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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年 第4回 관훈言論賞을 受賞하였고, 2007年 第2回 임승준 自由言論賞의 論說論評 分野를 受賞하였다.
2010年 三星言論上 論評/批評部分을 受賞하였으며
[2]
2012年에는 言論人으로서 自由民主主義 體制를 支持하는 一貫된 信念과 行動을 보여온 공으로
서재필記念會
가 授與하는
서재필言論文化賞
을 受賞하였다.
[3]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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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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