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훔의 誕生 100周年을 맞아 獨逸에서 發行한 記念郵票
오이겐 요훔
또는
오이겐 要쿰
(Eugen Jochum,
1902年
11月 1日
-
1987年
3月 26日
)은 獨逸의
指揮者
이다.
獨逸
의
바벤하우젠
(
아우크스부르크
近處)에서 태어났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1922年까지 피아노와 오르간을 배우고,
뮌헨
에서 指揮를 배웠다. 처음에는 묀헨글라드바흐(Monchen-Gladbach)에서 피아노 演奏를 했으며, 킬(Kiel)로 옮겼다.
1926年
뮌헨 필하모니
를 指揮하면서 데뷔하였고 이 때의 프로그램은
브루크너
의
交響曲 7番
였다. 그 해 킬에서 指揮者로 指名되었으며, 첫 시즌에
彷徨하는 네덜란드人
,
薔薇의 記事
,
투란도트
를 包含하여 17個의 오페라를 指揮하였다.
그 後
만하임
으로 옮겨
푸르트뱅글러
에게 激讚을 받았다. 當時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에서 12個의 演奏會를 付託받았지만 그의 레파토리와 指揮 經歷이 不足하다며 스스로 辭讓했다 (1958年까지 美國에는 가지 않았다). 그 後 뒤스부르크(Duisburg)에서 1930年부터 1932年까지 音樂 監督으로 있었다. 1932年
베를린 라디오 交響樂團
의 常任 指揮者가 되었으며,
도이체 오퍼
에서
베를린 필하모니커
와 16 連奏 시즌을 指揮했다.
1934年
칼 뵘
을 이어 함부르크 國立 오페라와 함부르크 필하모닉의 音樂監督이 되었다. 그의 回顧에 依하면
나치
時節
함부르크
는 '充分히 리버럴'하여 나치에 加入하지 않고도 音樂監督職을 維持할 수 있었다. 또한 그 當時 나치에 依해 禁止된
힌데미트
나
버르토크
와 같은 作曲家의 曲을 指揮할 수 있었다. 거기에서 1949年까지 있었다.
第2次 世界大戰
이 끝나고 1949年까지
바이에른 라디오 交響樂團
에 있었다.
로얄 콘서트虛바우 오케스트라
에 定期的으로 客員 指揮를 했으며, 1941年부터 43年까지, 當時 常任 指揮者인
빌렘 멩겔베르크
體制에서, 第1指揮者(eerste dirigent)를 歷任했다. 1961年부터 63年까지는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와 함께 共同 常任 指揮者(joint chief conductor)를 지냈다. 當時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LSO)에서도 단골 客員 指揮를 했다. 1975年에 LSO는 그를 名譽 指揮者로 委囑했다.
잘츠부르크
에서도 定期的으로 指揮했으며, 1953年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로 바이로이트에도 데뷔했다.
브루크너
에 對한 解釋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도이체 그라모폰
에서
베를리너 필하모니커
와, 또한
EMI
에서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와 全集을 남겼다. 이 둘은 처음 錄音한 뒤 各 레이블의 카탈로그에서 사라진 일이 없다. 또한
바흐
,
베토벤
,
브람스
,
모차르트
,
하이든
,
슈만
,
바그너
,
칼 오르프
의 演奏도 뛰어나다. 그는 1932年
에드빈 피셔
와 함께 모차르트
피아노 協奏曲 20番
을 始作으로 錄音을 많이 남겼다.
요훔은
뮌헨
에서 84歲로 숨졌다. 그의 夫人 마리아는 그 前인 1985年에 死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