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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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상
吳演相
出生 1957年 1月 27日 ( 1957-01-27 ) (67歲)
性別 男性
本館 海州
學歷 서울大學校 大學院
經歷 중앙대학교병원 內科 醫師
所屬 오연상內科 院長
前職 중앙대학교 醫科大學 敎授

오연상 (吳演相, 1957年 1月 27日 ~ )은 大韓民國 醫師 이다.

1987年 1月 14日 南營洞 對共分室에서 물拷問으로 죽은 朴鍾哲 을 檢案한 後, 拷問致死 可能性을 最初로 提起하는 勇氣있는 行動으로 事件 現場의 眞實을 밝히는데 決定的인 役割을 하였다.

박종철 拷問致死 事件 關聯 [ 編輯 ]

第5共和國 末期였던 1987年 중앙대학교 용산病院 專任講師로 在職하고 있었다. 1月 14日 11時 45分쯤 對共分室에서 온 搜査官 3名과 看護師 1名과 함께 앰뷸런스를 타고 對共分室 5層 509號 調査室로 往診을 갔다.

現場에서 팬티만 입고 寢臺에 누워있는 젊은 男子에게 心肺蘇生術을 實施하고, 心臟에 强心劑를 注射했는데도 蘇生할 幾微가 없어 30分 뒤 死亡診斷을 내렸다. 對共分室에서는 毯요로 屍體를 싼 뒤 들것에 실어 용산病院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오연상은 緊急히 病院으로 連絡하여 屍體를 病院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여 “病院 應急室에 들어왔을 때까지 살아 있었다”고 우기려는 試圖를 미리 막았다. 1月 16日 찾아온 記者들에게 물拷問을 證言하고, 그 날 저녁 龍山 그레이스호텔(現在 身元빌딩)에 끌려가 24時間 동안 檢察 調査를 받았다. 1月 17日 新吉産業 看板을 단 신길동 對共分室에서 다시 調査를 받고, 一週日間 逃避生活을 했다.

以後 脅迫과 非難에 시달렸으며 警察의 監視가 이어졌다.

以後 [ 編輯 ]

政治權으로부터 많은 政界入門 勸誘를 뿌리치고 醫師의 길을 걸어왔다.

워낙 獨裁政權의 서슬이 퍼렇던 時節이어서 眞實을 말하는 데 負擔이 있었지만 어영부영 넘어가는 것도 危險하긴 마찬가지였다. 狀況을 確實하게 밝혀서 陳述 飜覆이나 事件 隱蔽가 不可能하게 해야 한다고 判斷했다. 박종철君 事件은 내 人生의 轉換點이 됐다. 當時 恐怖心에 말을 못했거나 쇼크死라고 認定했다면 平生 마음에 짐을 안고 살았을 것

중앙대학교 에서 醫師 및 敎授로 在職하면서 糖尿病 에 對해 많은 硏究를 하였으며, 現在는 서울特別市 銅雀區 에서 오연상內科를 運營하고 있다.

受賞 [ 編輯 ]

박종철 拷問致死 事件 眞實 糾明에 寄與한 功勞로 1987年 韓國基督敎敎會協議會(KNCC) 人權委員會에서 第1回 KNCC 人權賞을 받았다.

罪悚하다. 烈士가 되는 것 보다 살아서 돌아갔으면 좋았을 텐데…

? 人權賞 首相 當時 朴鍾哲 父母를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