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테레즈 도트里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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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테레즈 도트里슈
Marie-Therese d'Autriche
프랑스와 나바르의 王妃
在位 1660年 7月 9日 ~ 1683年 7月 30日
前任 안 도트里슈
後任 마리 레슈親스카
이름
Marie-Therese d'Autriche
身上情報
出生日 1638年 9月 10日 ( 1638-09-10 )
出生地 스페인 에스코레알
死亡日 1683年 7月 30日 ( 1683-07-30 ) (44歲)
死亡地 프랑스 베르사유
家門 混戰: 합스부르크 王家
渾厚: 부르봉 王家
父親 스페인의 펠리페 4歲
母親 엘리자베트 드 부르봉
配偶者 프랑스의 루이 14歲
子女 度烹 루이
안 엘리자베트
마리 안
마리 테레즈
앙주 공 필립 샤를
앙주 공 루이 프랑수아

마리 테레즈 도트里슈 ( 프랑스語 : Marie-Therese d'Autriche , 1638年 9月 10日 ~ 1683年 7月 30日 )는 프랑스 의 王妃로, 루이 14歲 의 아내이다. 같은 이름의 프랑스 公主 마리 테레즈는 그의 7臺孫女가 된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王家의 遺傳的 疾病을 看破한 프랑스 王室 拷問 쥘 마자랭 樞機卿 은 루이 14世와 마리 테레즈의 結婚을 背後에서 성사시켰고, 後날 1700年에 그女의 孫子인 필리프 가 스페인의 國王 펠리페 5歲 가 되어 스페인 부르봉 王家의 始祖가 되었다. [1] [2]

루이 14歲 太陽王은 그의 男便이자 外四寸 오빠였다. 肖像畫 속의 外貌와는 달리 實際로는 작은 키와 뚱뚱한 體軀이며 주걱턱이었다 한다. 一說에 依하면 마리 앙투아네트 의 "빵이 없으면 케이크라도 먹지"라는 發言은 마리 테레즈가 했던 말이 惡意的으로 歪曲된 것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뒤집어씌워진 것이라는 說도 있다. [3] [4]

初期 生涯 [ 編輯 ]

幼年期 [ 編輯 ]

1653年

스페인 마드리드 近郊의 엘 에스코레알 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합스부르크 가의 스페인 펠리페 4歲 , 어머니는 프랑스 앙리 4歲 마리 드 메디시스 의 딸인 엘리자베트 드 부르봉 이다. 그의 外三寸은 루이 13歲 로, 루이 14世는 外四寸 오빠가 된다. 어머니 엘리자베트는 마리테레즈가 6살되던해인 1644年에 죽었고, 그女의 오빠 발타사르 카를로스도 1646年에 일찍 夭折했다.(오빠 나이 16歲)

발타사르 카를로스와 結婚하기로 했던 마리아 폰 外스터라이히 가 아버지 펠리페 4歲 의 後妻로 들어오게 되었다. 새엄마가 된 마리아 폰 外스터라이히는 마리 테레즈의 姑母인 스페인의 마리아 안나 神聖 로마 帝國의 皇帝 페르디난트 3歲 의 딸로, 姑從四寸 언니가 된다. [5]

마리 테레즈의 할아버지인 펠리페 3歲 는 같은 합스부르크 家 出身인 오스트리아 의 마르가리타와 近親婚을 하였고, 펠리페 3歲의 아버지인 펠리페 2歲 亦是 같은 합스부르크 家 出身으로 神聖 로마 帝國 의 皇帝 막시밀리안 2歲 와 自身의 親 누이인 에스파냐의 마리아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아나 와 結婚하였으므로, 本人은 近親婚으로 태어나지 않았 지만, 마리 테레즈는 近親婚의 進數로 태어난 셈이다. 그런 탓인지 스페인系의 합스부르크 王家는 주걱턱과 더불어 各種 遺傳性 疾患이 많은 것으로 有名했고, 마리 테레즈 亦是 이러한 家門의 遺産으로 보기 싫게 불거진 합스부르크 特有의 입술과 작은 키, 多少 鈍한 知能을 가지고 태어났다.

婚談과 結婚 [ 編輯 ]

約婚과 破婚 [ 編輯 ]

마리테레즈는 兄弟姊妹 일곱名이 모두 夭折한 가운데 장성한 長女였기에 王室의 相續女로 일찍부터 注目을 받았다. [6] 스페인은 1474年에 이사벨 1歲 가 女王으로 卽位한 以來 女性의 王權 相續 傳統이 維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7] 그女는 어린 時節부터 프랑스 루이 14世와 婚談이 오고갔으나, 스페인은 같은 합스부르크 家門인 오스트리아 皇室과의 婚姻에 더 무게를 두고 姑母인 스페인의 마리아 아나 와 神聖 로마 帝國의 皇帝인 페르디난트 3歲 의 長男이자 四寸 오빠이며 로마인의 王 페르디난트 4歲 皇太子와의 約婚을 推進하였다. [8] 參考로 페르디난트 4世는 마리 테레즈의 의붓어머니人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의 親오빠이기도 했다. 萬若 스페인 國王 펠리페 4世가 後繼없이 死亡할 境遇에 王權이 같은 家門으로 넘어가길 바랬기에 推進한 約婚이었다. 이를 통해 過去 카를 5歲 의 時代처럼 다시 同君聯合이 誕生하여 옛 榮光이 再現될 수도 있는 狀況이었기 때문이다. [9] 그러나 皇太子 페르디난트 4歲 가 1654年에 갑자기 死亡하고 말았다. [10] 婚談은 페르디난트 3歲 의 次男인 레오폴트(後날 레오폴트 1歲 )와의 婚姻與否를 놓고 다시 進行되었으나 쉽게 成事되지 못했다. [11] [12]
마리테레즈의 혼인

戰爭과 叛亂 [ 編輯 ]

1517年 宗敎改革 以來 獨逸地域의 宗敎葛藤은 1555年 아우크스부르크 和議 로 一段落되었다. 그러나 彌縫策에 지나지 않았기에 [13] [14] 17世紀 들어 다시 獨逸內 新舊敎 榮州間에 30年戰爭 이라는 武力衝突이 벌어졌다. [15] 萬一 獨逸地域이 카톨릭勢力으로 統一될 境遇에 스페인과 獨逸 사이에 낀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家門에 依해 國家安危가 위태로워질 素地가 있었다. [16] [17] 1631年 以後 新敎諸侯들을 물밑에서 돕던 [18] 프랑스는 新敎勢力의 戰勢가 繼續 不利해지자, 1635年에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家門에 宣戰布告를 하고 本格的으로 戰爭에 뛰어들었다. [19] 지리한 戰爭은 1648年에 베스트팔렌 條約 으로 幕을 내렸다. [20]

그러나 베스트팔렌 條約 에도 不拘하고 葛藤이 持續된 스페인과 프랑스는 接境地域에서 戰爭을 이어갔다. 스페인에서는 1640年에 포르투갈의 獨立鬪爭이 始作되었고 [21] [22] 카탈루냐 地方에서 叛亂이 發生했는데, 프랑스가 포르투갈과 카탈루냐를 支援하였다. [23] 그러자 스페인은 1650年에 프랑스에서 發生한 2次 프롱드의 亂 을 支援하며 應酬했다. 兩國間에 戰爭은 프랑스軍이 1658年 6月에 됭케르크 戰鬪에서 勝利하며 幕을 내린 가운데 終戰協商에 들어가게 되었다. [24]

페레네 條約 [ 編輯 ]

스페인과 프랑스는 終戰協商을 통해 여러事項에 合意를 했으며, 마리테레즈와 루이 14歲 의 婚談에 對해서도 論議하였다. 스페인의 펠리페 4歲 도 再婚한 王妃 마리아나 로부터 1657年과 1658年에 王子를 두名씩이나 얻었기 때문에 負擔感이 적은 狀況이었다. [25] 1659年에 兩國은 피레네 條約 을 締結하며 結婚에 最終的으로 合意하였다. [26] 이番 結婚은 아들이 합스부르크 王家 와 結合하기를 願했던 루이 14歲 의 母后 안 도트里슈 의 希望에서 이루어진 것이기도 했지만, 同時에 프랑스의 宰相 마자랭 의 政治的 判斷에 依해 推進된 일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結婚 條件 中의 하나는 마리 테레즈가 스페인의 王位 繼承權을 抛棄하는 代身 50萬 에퀴의 莫大한 持參金을 프랑스에게 支拂한다는 것이었다. [27] 그러나 오랜 戰爭으로 財政難을 겪고 있던 스페인 王室은 到底히 持參金을 完拂할 能力이 없었고, 얼마 못 가 代가 끊어져 마리 테레즈와 같은 女戒나 그 後孫에게 王冠이 돌아갈 可能性이 높은 狀況이었다. 마자랭의 노림數는 以後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스페인은 持參金을 支拂하지 못했으며 [28] 結局 카를로스 2歲 를 끝으로 後繼가 斷絶되었다. 以後 스페인의 王位는 마리 테레즈를 통해 母系血統을 이어받은 루이 14歲 의 孫子 펠리페 5歲 에게 돌아갔고, 오늘날까지 스페인 부르봉 王家 가 이어지고 있다.

結婚 生活 [ 編輯 ]

루이 14世와 마리 테레즈의 結婚式
마리 테레즈와 度烹 루이

1660年 6月 9日 프랑스 루이 14歲 와 結婚하였다. 마리 테레즈는 같은 합스부르크 王家 親戚들처럼 狂氣에 빠지거나 유별나게 肉體的인 障礙를 겪지는 않았지만 全 유럽에서도 가장 複雜하고 多難하기로 손꼽히는 프랑스의 宮廷 生活을 維持하기엔 지나칠 程度로 아이처럼 單純했다. 信仰이 篤實했던 王妃는 하루의 大部分을 媤어머니이자 고某이고 外叔母人 안 도트理슈와 함께 祈禱하며 보냈고, 政治나 文學에 對해서는 關心이 全혀 없었기에 時間이 나면 카드 놀이를 조금 하는 程度였다. 그러나 恒常 판돈은 크게 걸면서 룰은 거의 몰랐기 때문에 엘뵈프 共匪와 같이 困窮한 貴族들은 王妃의 그러한 點을 利用해 벌어들인 판돈으로 生活을 꾸려나가기도 하였다. 같은 스페인 公主였던 安 도트理슈는 처음에는 同質感에 며느리를 여러모로 도와주려 애썼지만 나중에는 다른 宮廷 사람들처럼 마리 테레즈를 無視하게 되었다.

루이 14世는 自身이 생각했던 王妃와는 距離가 매우 먼 마리테레즈에 對해 失望했다. 적어도 一國의 王妃라면, 어머니 안 도트理슈처럼 知性的이고 賢明하며 아름다워야 했던 것이다. 宮을 活力에 넘치게 했던 母后 안 度트리시와 比較해 볼 때, 自己 夫人인 마리-테레즈는 너무나 不足한 點이 많았다. 그女는 너무 順從的이고 서투른데다가 甚至於 남의 嘲弄感이 되곤했다. [29] [30]

아무튼 루이 14世는 結婚 첫 해동안은 아내에게 忠實했으나 이내 바람氣를 참지 못하고 마음이 떠나고 말았다. 精力的이었던 王은 平生 수많은 政府들과 艶聞을 뿌린 것으로 有名한데, 막상 가장 銳敏하게 男便의 바람氣를 把握해야 할 그의 아내는 宮廷에서 가장 늦게 비로소 王의 政府가 누구인지를 알아채곤 했다. 그러나 王位 繼承을 위해 後繼者를 봐야 한다는 생각과 宮廷 禮法에 對한 意識이 아주 剛했던 루이 14歲 는 1週日에 세 番 아내의 寢室을 訪問하곤 하였다. [31]

매우 篤實했던 데다가 王을 崇拜했던 마리 테레즈는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 , 마담 드 몽테스팡 等 男便의 政府들을 참고 견뎠지만 그의 無信仰에 對해서는 恒常 憤慨하였고, 지나치게 世俗的인 宮廷을 嫌惡하게 되었다. 結局 마리 테레즈는 漸次 宮廷을 떠나 修女院 等에서 지내는 時間이 늘어났고, 몇몇 重大한 外交 行事를 除外하고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랬던 그女에게 唯一하게 慰安이 되는 것은 스페인에 있을 때부터 몹시 좋아했던 마시는 초콜릿과 充實한 侍女들뿐이었다. [32]

末年과 죽음 [ 編輯 ]

末年 [ 編輯 ]

루이 14世는 中年에 이르러 1680年 邪惡한 詛呪 事件에 휘말린 마담 드 몽테스팡을 버리고 篤實한 마담 드 맹트농 의 姦淫罪를 더 以上 짓지 말라는 助言에 따라 비로소 王妃에게 눈을 돌리고 좀 더 그女에게 神經을 쓰기 始作하였다. 夫婦사이가 좋아지자 마리테레즈는 맹트농에게 고마워했다. [33]

死亡 [ 編輯 ]

마리 테레즈는 1683年 7月 30日 베르사유 에서 45歲로 死亡하였다. 王妃의 죽음이 지나치게 이르고 갑작스러웠을 뿐 아니라 王室 醫師인 罷工의 誤判으로 그 時代의 基準으로도 相當히 適切하지 못한 醫學的 治療를 받고 死亡한 탓에 以後 한동안은 그女가 독살당했다는 所聞이 宮廷 內에 퍼졌다. 그러나 現代의 觀點으로 봤을 때 마리 테레즈의 死因은 癌으로 여겨진다. [34] 王妃가 死亡하자 루이 14歲 는 "그女가 나를 처음으로 슬프게 하는군"이라는 말을 남겼다.

事後 [ 編輯 ]

루이 14世는 마담 드 맹트농 과 祕密裏에 結婚하였다. [35] 그러나 結婚은 公表되지 않아 맹트농은 正式으로 王妃가 되지는 못했다. 마리 테레즈는 3男 3女의 子女를 낳았지만 長男인 '그랑 度烹' 루이 만을 除外하고 모두 일찍 夭折하고 말았다. 長男 루이 亦是 王位를 繼承하지 못한채 1711年에 死亡하였고, 그가 낳은 마리테레즈의 孫子 3名中에 2名 亦是 이른 나이에 死亡하였다. 1715年 男便 루이 14歲 가 死亡할 當時에 마리 테레즈의 直系後孫中 살아있던 子孫은 孫子 펠리페 5歲 와 曾孫子 루이(後날 루이 15歲 ) 두名 뿐이었다.

孫子 펠리페 5歲 는 1700年에 스페인 國王으로 卽位하였다. 스페인 王位繼承戰 을 통하기는 했으나 孫子 펠리페 5歲 가 스페인 國王으로 卽位할 수 있던 것은 할머니 마리테레즈를 통해 물려받은 母系血統을 認定받아 卽位하게 된 것이었다.

에피소드 [ 編輯 ]

一說에 따르면 프랑스 루이 16歲 의 아내인 마리 앙투아네트 가 한 말로 有名한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지( Let them eat cake )"는 그女가 王妃가 되기 20年 前에 이미 張자크 루소 가 自身의 著書 《告白論》에서 어느 公主가 굶주린 사람들을 보고 그런 말을 했다고 言及하고 있는데, 實際로는 마리 테레즈가 했던 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3] [36] 事實 이 말 自體도 보다 惡意的으로 歪曲된 것으로, 實際로 마리 테레즈가 한 말은 百姓들이 빵이 없어 굶주린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아파진 나머지 "빵이 없다면 파이 껍질이라도 갖다 주라( S'il ait aucun pain, donnez-leur la croute au loin du pate )"였다고 한다.

子女 [ 編輯 ]

寫眞 이름 生日 死亡 기타
王世子 루이 1661年 11月 1日 1711年 4月 14日 (49歲) 膝下 3男
안 엘리자베트 1662年 11月 18日 1662年 12月 30日 腰絶
마리 안 1664年 11月 16日 1664年 12月 26日 腰絶
마리 테레즈 1667年 1月 2日 1672年 3月 1日 (5歲) 腰絶
필리프 샤를 1668年 8月 5日 1671年 7月 10日 (2歲) 腰絶
루이 프랑수아 1672年 6月 14日 1672年 11月 4日 腰絶

各州 [ 編輯 ]

  1. 윤선자 <이야기 프랑스史> 청아출판사 2005.12.10 p210
  2. 펠리페 5世는 카를로스 2世의 조카孫子, 正確하게는 진외종손 資格으로 王位繼承權을 獲得하였다.
  3. 베른트잉그마르구트베를레트, 《歷史의 誤謬》 이지영 驛, 열음사, p.212, 2008, ISBN   9788974271909
  4. 이 때, 케이크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生크림 케이크 種類가 아니다. 原文에선 '브리오슈'라고 稱했으며, 이는 버터가 더 들어간 빵의 한 種類이다.
  5. 마리아는 곧 自身의 外三寸과 結婚한 것이다.
  6. [네이버 知識百科] 마리 테레즈의 幼年時節 (프랑스 王과 王妃, 2006. 8. 10., 김복래)
  7. 이사벨 1歲 事後에 그女의 딸 狂女 후아나 가 女王으로 卽位하였다. 이로써 父系인 男孫後繼만 相續받는 살리카 法 을 스페인에는 適用받지 않는 傳統이 생겼다.
  8. “Ferdinand IV: Vain hopes” . The World of the Habsburgs . 2015年 8月 1日에 確認함 .   ...Promising marriage plans were also drawn up for him. The crown prince was betrothed to the eldest daughter of the Spanish king Philip IV, Maria Teresa, yet another case of marriage between two closely related members of the two Habsburg lines. Philip was the brother of Ferdinand’s mother and Maria Teresa was thus his first cousin.
  9. [네이버 知識百科] 마리 테레즈의 幼年時節 (프랑스 王과 王妃, 2006. 8. 10., 김복래).....필립 4歲(1605~1665)는 이미 머릿속에서 오스트리아 大公, 스페인 國王, 神聖로마 帝國의 皇帝를 同時에 지냈던 카를 5歲(1500~1588)의 廣大한 帝國을 構想하고 있었다. 萬一 오스트리아 大公에게 딸을 시집보낸다면? 萬一에 하나 스페인의 相續者(어린 王太子)가 死亡하는 境遇에, 마리-테레즈는 스페인의 王位를 물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합스부르크가의 두 家門은 하나로 합쳐질 것이 아닌가! 結婚과 相續을 통한 이 같은 大帝國의 시나리오는 當時 스페인 王家의 古都死亡率과 어린 王太子의 허약한 體質을 勘案한다면 얼마든지 可能한 일이었다
  10. 〈Ferdinand IV (King of Bohemia)〉 . 《 Encyclopædia Britannica . 2013年 12月 14日에 確認함 .   ....The eldest son of the emperor Ferdinand III and his first wife, Maria Anna, daughter of Philip III of Spain, Ferdinand was destined for the imperial crown. He was brought up to rule and, at his father’s insistence, was elected king of the Romans at Augsburg on May 31, 1653, and crowned at Ratisbon on June 18. However, Ferdinand died prematurely the next year, at age 21; and, when his father died in 1657, the imperial crown went to Ferdinand III’s younger son, Leopold I, a milder individual who had been destined for the church.
  11. [네이버 知識百科] 마리 테레즈의 幼年時節 (프랑스 王과 王妃, 2006. 8. 10., 김복래).....다른 좋은 婚處 때문에, 필립 4歲의 마음이 흔들리기 始作했다. 마리-테레즈에게는 빈에 또 다른 四寸이 한 名 있었다. 그는 바로 對共 레오폴드 1歲(後日 神聖로마皇帝 레오폴드 2歲)였다. 필립 4歲(1605~1665)는 이미 머릿속에서 오스트리아 大公, 스페인 國王, 神聖로마 帝國의 皇帝를 同時에 지냈던 카를 5歲(1500~1588)의 廣大한 帝國을 構想하고 있었다. 萬一 오스트리아 大公에게 딸을 시집보낸다면? 萬一에 하나 스페인의 相續者(어린 王太子)가 死亡하는 境遇에, 마리-테레즈는 스페인의 王位를 물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합스부르크가의 두 家門은 하나로 합쳐질 것이 아닌가! 結婚과 相續을 통한 이 같은 大帝國의 시나리오는 當時 스페인 王家의 古都死亡率과 어린 王太子의 허약한 體質을 勘案한다면 얼마든지 可能한 일이었다.
  12. 結局 레오폴트 1世와의 婚姻은 펠리페 4歲의 장성한 次女 마르가리타 테레사 와 成事되어 1666年에 結婚式을 올렸다.
  13. [네이버 知識百科] 30年 戰爭 - ‘로마帝國’은 ‘神聖’해야 하는가? (戰爭史, 함규진)
  14. 서희석<유럽의 첫 番째 太陽 스페인> 乙類文化史 2015年 p372 ~ 378....루터파만 인정받았고 칼뱅파는 除外되었다. 영주가 宗敎를 選擇할 수 있다고는 하였지만 追加로 改宗을 하는 領主는 領地와 公職을 返納해야 한다는 前提가 있었으므로 實質的으로 追加的인 改宗을 막았다. 또한 이미 改宗을 한 住民들을 카톨릭 영주가 다스려야 하는 等 영주와 住民들의 宗敎가 다른 境遇가 많았기 때문에 葛藤은 如前했다.
  15. [네이버 知識百科] 30年戰爭 [Thirty Years' War, 三十年戰爭] (두산百科).....獨逸의 新敎(프로테스탄트)와 舊敎(가톨릭) 兩校度 間의 反目은 1555年에 있었던 아우크스부르크和議(和議) 以後에도 그 응어리가 가시지 않아, 17世紀 初 洋파의 諸侯(諸侯)들은 各其 新敎 聯合과 가톨릭교 聯盟을 結成해 對立했다. 이와 같은 情況 속에서 1617年 가톨릭교도인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의 王位에 올라 가톨릭 絶對 信仰을 强要하려 하자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프로테스탄트 貴族들이 叛亂을 일으켰다.
  16. 윤선자 <이야기 프랑스史> 청아출판사 2005.12.10 p201
  17.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一族이 統治하고 있었다. 스페인은 1492年 레콩키스타 完成以後 宗敎純血主義에 立脚하여 異敎徒를 追放하고 카톨릭 國家가 되었다. 또한 1516年부터 합스부르크 家門이 스페인을 統治하고 있었다. 그런데 獨逸地域에 影響力을 行使하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度 카톨릭을 支援하고 있었으므로 獨逸地域이 카톨릭火 될경우에 합스부르크 家門에 依해 둘러싸이게 되는 프랑스는 國家安危가 深刻한 挑戰에 直面하게 된다. 이는 지난 16世紀 前半에 카를 5歲 의 統治領域이 肥大해져 유럽의 힘이 均衡이 무너졌던 境遇와 비슷한 狀況이 再現되는 것이다.
  18. [네이버 知識百科] 30年戰爭 [Thirty Years' War, 三十年戰爭] (두산百科)....프라하의 和議 直後인 1635年, 1631年 以來 背後에서 新敎 勢力을 밀었던 프랑스가 前面에 나서서 獨逸에 出兵하고 에스파냐에도 宣傳을 布告, 스웨덴과 聯合戰線을 폈다.
  19. [네이버 知識百科] 드디어 프랑스가 움직이다 - 30年 戰爭 (戰爭史, 함규진)
  20. 윤선자 <이야기 프랑스史> 청아출판사 2005.12.10 p202
  21. 이강혁 <스페인 歷史 100場面> 嘉藍企劃 2003.5.14 p227
  22. 포르투갈은 지난 1580年에 펠리페 2歲 에 依해 倂合되었으나 스페인의 오랜戰爭, 海上權 喪失, 差別政策, 景氣沈滯 等을 契機로 叛亂을 일으켰다.
  23. 이강혁 <스페인 歷史 100場面> 嘉藍企劃 2003.5.14 p225
  24. 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歷史> 까치글房 2013.3.11 p189
  25. 王子가 두名이나 태어났으므로 스페인 王權이 오랜 宿敵인 프랑스로 넘어갈 確率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스페인 國王 펠리페 4世도 負擔感이 적어서 婚姻協商에 입하게 되었다.
  26. Maland, David (1966). Europe in the Seventeenth Century (1991 ed.). Macmillan. ISBN 978-0-333-02341-9. p227
  27. 腸 카르팡티에, 《프랑스人의 歷史》, 소나무, 1991, p.208, ISBN 2003725000667
  28. Wolf, John B. (1968). Louis XIV . W.W. Norton & Company, Inc. p117
  29. [네이버 知識百科] 멩트농 否認 (프랑스 王과 王妃, 2006. 8. 10., 김복래)
  30. [네이버 知識百科] 마리-테레즈의 憂鬱한 宮廷生活 (프랑스 王과 王妃, 2006. 8. 10., 김복래).....마리-테레즈는 今方 周圍의 모든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그女는 潑剌한 基地에 넘치는 言語의 微妙한 뉘앙스를 理解하지도 못했고, 藝術感覺이나 趣味도 都統 몰랐다. 또한 王妃로서의 素養과 氣品을 갖추기는커녕, 그女의 精神年齡은 언제나 幼兒狀態에 머물러 있었다. 王妃의 評判은 그만 땅에 떨어졌다. 사람들은 이제 그女를 慇懃히 ‘바보’로 取扱하기 始作했다.
  31. 이지은, 《貴族의 隱密한 私生活》 지안出版社, 2012, p.106, ISBN   9788993966138
  32. [네이버 知識百科] 루이 14歲의 첫사랑 마리 만시니 (프랑스 王과 王妃, 2006. 8. 10., 김복래 ).....李 스페인 王女는 單 한 番도 프랑스語를 제대로 배우려고 努力한 적도 없었을뿐더러, 노상 초콜릿을 끼고 살았다. 또한 人生의 大部分을 寢臺에서 자는 것으로 消日했다.
  33. [네이버 知識百科] 멩트농 否認 (프랑스 王과 王妃, 2006. 8. 10., 김복래) .....그女는 國王이 罪를 짓고 있으며, 이러한 放蕩한 生活을 淸算할 것을 慇懃히 暗示했다. 卽 이는 自身을 雇用했던 몽테스팡 夫人과 國王과의 不倫關係를 가리키는 것이다. 1680年에 國王은 마리-테레즈 王妃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勿論 이것은 王妃의 사랑의 再確認 때문이 아니라, 멩트농 夫人의 부드러운 勸誘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勿論 공교롭게도 그女 亦是 國王의 政府였지만 말이다! 멩트농은 매우 篤實한 가톨릭 敎徒였다. 그女는 自身의 告解神父로부터 많은 感化를 받았다. 國王은 멩트농 夫人의 忠告에 따라, 그동안 王妃에게 單 한 番도 보여 준 적이 없었던 깊은 關心을 보였다. 어리석은 王妃는 이에 感激해마지 않았다. 멩트농 夫人의 正體를 알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의 冷笑와 비웃음에도 不拘하고, 정작 王妃 自身은 “神은 멩트농 婦人을 움직여, 내게 國王의 사랑을 도로 찾게 해주었다”며 고마워했다.
  34. [네이버 知識百科] 멩트농 否認 (프랑스 王과 王妃, 2006. 8. 10., 김복래)..... 1683年 7月 30日 王妃가 갑자기 死亡했다. 왼 팔에 생긴 腫瘍의 副作用으로 4日 만에 숨을 거두었다.
  35. [네이버 知識百科] 멩트농 侯爵 婦人 (프랑스史, 2005. 8. 1., 김복래, 위키미디어 커먼즈)
  36. 양창순, 《CEO 마음을 읽다》 위즈덤하우스, 2010, p.132, ISBN   9788960862661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안 도트里슈
프랑스의 王妃
1660年 7月 9日 ~ 1683年 7月 30日
後任
마리 레슈親스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