餘서문자. 右에서 左로 쓴다.
餘서문자
(女書文字,
中國語
簡體字
:
女?
,
正體字
:
女書
,
병음
:
N?sh?
뉘수
[
*
]
)
[1]
[2]
는
中華人民共和國
湖南省
융藷芋視
장융현
에서 쓰이는
音節 文字
이다. 女性들만 使用하고 어머니가 딸에게만 傳授하기 때문에 여서(女書)라는 이름이 붙었다.
特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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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字
와 달리
表音文字
,
音節文字
이다. 글字 數는 約 600~700餘個에 이르며,
야오족
의 청관 方言의 表記에 쓰인다. 글字 數는 청관 方言의 約 ½에 該當하는 數字이며, 나머지 音節(聲調 包含)은 符號를 덧붙여 나타낸다. 청관 方言이
따이까다이어족
에 屬하는지,
中國語
의 方言인
샹어
의 一種인지는 明確하지 않다.
여서 文字의
글꼴
은 漢字의 影響을 받았으나 明確한 對應 關係를 이룰 程度는 아니며 위아래로 긴 點과 線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自首
文樣과도 많이 닮았는데, 實際로 刺繡의 形態로 文字를 記錄하는 일이 많다. 여서 文字는
우종서
로 主로 쓰인다.
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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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前부터 現代에 이르기까지 장융현의 女性들은 文字 卽 男性들의 專有物로 여겨진 漢字를 使用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이 때문에 女性들의 意思 表示의 道具로서 創製되어 男性들의 눈을 避해 祕密裏에 代代로 傳授 되어 온 것이 여서 文字다. 文字의 傳授는 어머니나 義姊妹가 맡았다. 때때로 裝飾 무늬 等으로 僞裝하기도 했다. 大部分의 글씨는 5字나 7者로 構成된 詩의 形態로 記錄되었다. 이 詩는 主로 女性들만의 哀歡이나 所望, 希望 等의 內容을 이루고 있다.
1930年
日本의 中國 侵略
當時에
日本軍
은 여서 文字가 暗號로 使用되는 것을 憂慮하여 이 文字의 使用을 禁止했다. 實際로 이 文字는
抗日 가요
等을 짓는 데 쓰이기도 했다. 여서 文字는 世界에 거의 알려지는 일 없이 存在하다가, 學者들이 1983年에 그 存在를 알리게 되었다. 中華人民共和國 建國 以後 文字 普及이 全 國民을 對象으로 實施되면서, 여서 文字의 利用 價値가 喪失되었고 배우려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現在는 中華人民共和國 政府가 學術 硏究 및 保存 對策 等을 實施하고 있는 程度이다.
여서 文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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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서 文字는 大部分 《三曹서》(三朝書)라는 冊의 形態로 가장 많이 記錄되어 있다. 이 文書는 媤집 간 딸에게 結婚 後 3日(세 番의 아침) 後에 건넨다고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 主로 딸을 보낸 슬픔과 幸福을 祈願하는 內容이 적혀 있다.
近來 現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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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年 여서 文字 最後의 能熟自認
양환이
(陽煥宜)가 98歲를 一期로 死亡했다. 現 政府는 主로 홍콩의 資金 等을 投資 받아, 여서 博物館 設立을 推進하고 있으나, 正式的인 여서 文字 繼承者가 없는 狀態여서 苦心하고 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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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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