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경구
(呂慶九,
文化語
:
려經句
,
1913年
2月
~
1977年
)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化學 工學者이다. 獨立運動家
여운형
의 5寸 조카 關係가 된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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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年
2月
京畿道
廣州郡에서 태어났다.
1929年
에
中央高等普通學校
를 卒業하고 外國留學을 떠나
日本
와세다 大學校
應用化學과를
1936年
에 卒業했다.
1937年
부터
1941年
까지
여운형
이 몇 次例 걸쳐
日本
도쿄
에 訪問하였을 때 5寸 조카인 여경구가 居處를 提供해 주었다.
와세다 大學校
를 卒業한 後
도쿄
에서 日本人이 經營하는 硏究所에서 勤務했다가
1945年
8.15 光復
直前 歸國했다.
歸國直後
1945年
10月
,
서울大學校
敎授로 活動했다. 그러나 이듬해
1946年
에 越北하게 된다. 呂運亨의 딸
여원구
의 證言에 따르면 '6寸 오빠(여경구 指稱.)는 呂運亨의 勸告에 따라
1946年
3月에 越北했다.'고 했다. 越北 後 여경구는 곧바로 興南地球人民工場 技師長으로 登用됐고
1948年
에는 北韓의 첫 化學硏究基地이자 現 咸興分院 前身인 興南硏究所長으로 拔擢됐다.
韓國 戰爭
時期에는 新設된 科學院 候補院士와 敎授로 任命됐으며 美軍의 爆擊에 重傷을 當하고 홀로 隊列에서 떨어졌을 때에는
金日成
이 보낸 自動車를 타고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고 한다.
1958年
에는 10餘年동안 繼續해온 鹽化비닐硏究를 完成, 生産導入에 成功해 김일성의 높은 評價를 받았으며 興南硏究所가 咸興分院으로 擴張되면서 副院長職責을 맡았다.
1962年
과
1967年
에 열린 第3.4期
最高人民會議
1次會議에서는 代議員으로 選出되기도 했다.
1977年
에 死亡했다.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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