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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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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페론
Maria Eva Duarte de Peron
身上情報
本名 에바 마리아 이바르舊렌
性別 女性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데 페론 ( 스페인語 : Maria Eva Duarte de Peron , 本名: 에바 마리아 이바르舊렌 (Eva Maria Ibarguren), 文化語 : 에바 뻬론, 1919年 5月 7日 ~ 1952年 7月 26日 )는 아르헨티나 大統領 을 지낸 후안 페론 의 두 番째 夫人이다. 愛稱인 에비타 (Evita)로 불린다.

出生과 初期 生涯 [ 編輯 ]

1941年의 에바 두아르테

부에노스아이레스주 의 작은 마을 로스톨도스 의 農場에서 富裕한 農場主人 후안 두아르테와 그의 政府인 후아나 이바르舊렌 사이에서 태어났다. [1] 아버지 후안 두아르테는 正式 夫人이 따로 있었고, 후아나와의 사이에서 난 에바 및 다른 딸들을 法的으로 認定하지 않았다. 生父에게서 버림받은 에바는 母親 및 다른 姊妹들과 함께 곧 後닌 으로 옮겨 그 곳에서 가난한 生活을 하며 지냈다.

그들은 後닌에서 한동안 房 한칸짜리 아파트에서 매우 가난하게 살았으나, 生母의 家族의 도움으로 더 큰 집으로 옮길 수 있었다. 에바는 學窓 時節, 學校 演劇과 演奏會에서 才能을 發揮하며 注目을 받으며, 映畫俳優가 될 꿈을 키웠다. 에바는 15살인 1934年 , 부에노스아이레스 로 옮겨 演藝界 進出을 試圖했다. 처음에는 모델 로 活動하다가, 演劇俳優, 映畫俳優, 라디오 聲優 等으로 차츰 이름을 알려 1940年 頃부터 有名 演藝人이 되었고, 라디오 放送局을 所有하는 等 經濟的으로도 크게 成功했다.

후안 페론과의 만남 [ 編輯 ]

후안 페론과 함께

1944年 , 산후안 에서 地震 이 發生하여 6千名 以上이 死亡하는 慘事가 일어났다. 陸軍 大領 出身으로 當時 政府의 勞動部 長官이던 후안 페론 은 罹災民 救護를 위한 基金을 마련하려고 했으며, 이때 에바 두아르테와 후안 페론은 처음 만났다. 첫 番째 夫人을 잃고 獨身으로 살던 후안 페론은 에바 두아르테의 젊음과 美貌에 빠져들었으며, 두 사람은 곧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基金 마련으로 下層民들에게 좋은 印象을 남긴 후안 페론은 곧 副統領 자리에 오르며 軍部와 大衆의 支持를 同時에 確保했다. 후안 페론과 에바 두아르테는 1945年 正式으로 結婚했으며, 그 다음해 大統領 選擧를 準備했다.

慈善 事業과 女性 運動 [ 編輯 ]

에바 페론 財團에서의 活動
演說하는 에바 페론

에바는 男便의 選擧 遊說 자리에 同行하며 大衆으로부터 暴發的인 人氣를 얻었다. 에비타 라는 愛稱으로 불린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후안 페론은 大統領 選擧에서 勝利, 1946年 6月 正式으로 就任했다.

에바는 政府 內에서 公式的인 職責에 오른 적은 없으나, 勞動者 및 下層民들에게 厚한 政策을 펼칠 수 있게 하는 것을 可能하게 해주며 事實上의 보건부 長官 자리에 있었다. 1947年 에는 유럽 여러 나라를 訪問하였으며, 大統領인 男便보다 더 많은 關心을 받았다. 스페인 에서는 가난한 兒童들에게 救護 活動을 펼쳤고, 프랑스 에서는 샤를 드 骨 을 만나 食糧 支援을 約束했다.

한便 正義黨 의 分派인 女性 페론당을 結成하여 그 代表로 있었으며, 이를 통하여 女性 參政權 導入 等의 女性 運動에 寄與하였다. 그리고 勞動團體, 企業 等의 獻金으로 運營되는 에바 페론 財團 을 設立하여 그 代表를 겸했다. 에바 페론 財團의 基金은 學校, 病院, 養老院 等을 建立하고 各種 慈善事業을 하는 데 쓰여지며 民衆의 支持를 받았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上流層 및 軍部와의 關係는 惡化되기 始作하였다.

死亡 [ 編輯 ]

차츰 그의 改革에 對한 矛盾이 드러나는 가운데, 그는 1950年 , 子宮癌 診斷을 받았다. 健康이 차츰 惡化되어 가는 가운데, 1951年 副統領 候補로 指名되었다. 그러나 軍部는 副統領 指名을 撤回하도록 强要하여, 10月 副統領 候補 자리에서 물러났다. 11月 大選에서 男便은 再選에 成功했으나, 에바의 健康은 더욱 惡化되어 갔다. 그 다음해 두 番째 任期가 始作되기 前에 男便은 그를 '靈的 指導者'의 자리에 올렸다. 그러면서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 國民들을 위해 自身의 病魔를 이를 악물고 숨겨왔다. 그러나 그의 癌은 狀態가 더욱 惡化돼, 1952年 7月 26日 33歲의 젊은 나이로 生을 마감했다.

死亡 以後 [ 編輯 ]

에바 페론의 葬禮式

國民의 哀悼 속에 局長이 치러졌고, 以後로도 國民들은 그를 畏敬스러운 存在로 記憶했다. 아르헨티나는 그에 對한 評價로 以後 큰 混亂을 겪게 되며 勞動者와 民衆에서는 그를 聖女 로 推戴하려는 試圖를 한 反面, 그의 政敵들은 國民들에게서 그의 痕跡을 없애기 위하여 努力했다. 이런 가운데 改革의 缺陷으로 인하여 男便은 政治的 窮地에 몰렸으며, 結局 1955年 쿠데타 로 逐出되었다. 쿠데타로 執權한 새 政府에서 먼저 한 일은 페론主義의 象徵인 그를 아르헨티나 政界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防腐 處理되어 있던 그의 屍身을 隱匿하여 이탈리아 로 빼돌렸다. 1971年 屍身은 스페인 에 亡命中이던 후안 페론側에 引渡되었고, 1975年 후안 페론의 다음 婦人인 이사벨 페론 李 大統領이 된 後 아르헨티나로 送還하여 大統領宮에 安置하였다. 그러나 다시 쿠데타가 일어난 後 軍事政權은 遺骸를 除去했으며, 遺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레콜레타 區域의 共同墓地의 두아르테 家族墓地에 安葬되었다.

에바 페론의 墓

評價 [ 編輯 ]

후안 페론이 에바에게 權力을 向한 길을 열어주었다면, 에바는 勞動者와 農民들을 本能的으로 理解하여 후안 페론에게 利益을 가져다주었다. 페론 夫婦는 世界 歷史上 가장 큰 權力을 지닌 夫婦였지만, 그들의 夫婦 關係가 圓滿했던 것은 아니며, 그들이 남긴 발자취로 가장 論爭의 餘地가 많은 커플로 記憶된다. [1] 에바 페론에 對해서는 贊成과 反對 意見이 크게 共存하고 있으며, 世上을 떠난지 50年이 넘은 現在까지도 追慕 熱氣는 繼續되고 있다. 弱者를 위한 福祉 政策을 내놓아 大衆의 稱頌을 받았으나, 아르헨티나 經濟를 망친 張本人이며, 후안 페론의 獨裁를 위한 防牌幕이었다는 批判도 많다.

文化的 描寫 [ 編輯 ]

그女의 이야기는 여러 次例 文學과 映畫, 演劇 等으로 다루어졌다. 가장 代表的인 作品은 다음과 같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