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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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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바르
2005년 에곤 바르
2005年 에곤 바르
獨逸 特需 擔當部 聯邦 長官
任期 1972年 ~ 1974年
前任 호르스트 엠케
後任 베르너 마이호퍼

獨逸 經濟 協力部 聯邦 長官
任期 1974年 ~ 1976年
前任 에르하르트 에플러
後任 마리에 쉴

身上情報
出生日 1922年 3月 18日
出生地 獨逸 튀링겐 트레프루트
死亡日 2015年 8月 20日 ( 2015-08-20 ) (93歲)
死亡地 獨逸 베를린 베를린
國籍 獨逸
正當 獨逸 社會민주당
配偶者 아델하이드
子女 3子女

에곤 바르 ( 獨逸語 : Egon Karl-Heinz Bahr , 1922年 3月 18日 ~ 2015年 8月 20日 )는 獨逸 社會民主黨 (SPD)의 政治人이다. 그는 1969年부터 1972年까지 獨逸의 第4代 總理 빌리 브란트 (獨逸語: Willy Brandt )의 祕書로 함께 일하며 東邦政策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後 1972年부터 1990年 사이에는 獨逸聯邦共和國의 下院議員으로 活動하였고 1972年부터 1976年 사이에는 獨逸聯邦政府의 長官職을 歷任하였다. 바르는 또한 東獨과 西獨사이의 協商過程에서 恒常 主要 人物이었고 獨逸과 소비에트 사이에서의 協商過程에서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바르는 빌리 브란트 와 함께 東邦政策을 推進하며 모스크바 條約과 바르샤바 條約 等 協約을 맺는 데에도 큰 寄與를 하였다. 2015年 8月 20日 他界하였다.

初期 生涯 [ 編輯 ]

바르는 獨逸帝國의 튀링겐 注意 트레프루트(獨逸語: Treffurt )에서 高等學校 敎師인 칼 바르와 그의 反유대人 夫人 헤드윅사이에서 태어났다. 바르는 1940年에 中高等敎育을 끝낸 後, 베를린에 있는 라인메탈 보르지히 武器會社에서 그의 産業技術者로서의 敎育을 繼續해 나갔다. 바르는 第2次 世界大戰동안인 1942年부터 1944年까지 獨逸國防軍의 軍人으로 參戰하였고, 結局 獨逸 空軍戰術學校의 士官候補生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할머니가 유대人이라는 理由로 '非아리안系'로 分類되어 轉役했다. 戰爭이 끝난 後에는, 西獨의 著名한 一日 新聞社인 베를리너 차이퉁(獨逸語: Berliner Zeitung )에서 記者로서의 일을 始作하였고 얼마 있지 않아 有名 定期刊行物人 알게마이너 차이퉁(獨逸語:Allgemeine Zeitung)과 데어 타 게스 슈피겔(獨逸語:Der Tagesspoiege)의 擔當 記者로 일하게 되었다. 이처럼 西獨의 저널리스트로 이름을 날리던 바르는 1956年 社會民主黨 (SPD)에 入黨 後, 1960年 서베를린 市場이던 빌리 브란트 의 代辯人으로 拔擢되며 그의 政治活動을 始作하였다. [1]

政治 活動 [ 編輯 ]

政治 入門 [ 編輯 ]

Bundesarchiv B 145 Bild-F030521-0007, Egon Bahr, 1969年 에곤 바르

바르와 빌리 브란트 의 만남 [ 編輯 ]

바르가 後에 自身의 모델로 삼은 빌리 브란트 를 만난 것은 베를린에서였다. 빌리 브란트 亦是 新聞記者로 이때 當時(1950) 이미 사민당의 떠오르는 別로 指目되고 있었다. 빌리 브란트 가 1960年 서베를린의 市場으로 當選되었을 때, 바르를 公報 擔當官으로 임명했다. 바르는 빌리 브란트 가 1966年 西獨 外務長官이 될 때까지 繼續 이 業務를 맡았다. 이 過程에서 바르는 빌리 브란트 의 親한 親舊이자 政治的 同伴者로 더욱 密接한 關係를 持續 하게 되었다. 바르는 사민당의 젊은 黨員들 클라우스 쉴러, 하인리히 알베르트와 함께 빌리 브란트 의 非公式的인 諮問 集團인 'brain trust'에서 市場의 얘기를 들어주고 市場에게 助言하며 市場에게 새 政策을 提案하는 役割을 맡았다. [2]

바르의 政治 手腕 [ 編輯 ]

獨逸이 西獨과 東獨으로 나뉘고 베를린 障壁이 세워진 後가 바르가 眞正한 政治的 手腕을 發揮한 時期였다. 베를린 障壁의 建設은 東獨의 共産主義 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希望을 散散조각내 버렸다. 빌리 브란트 와 바르를 包含한 그의 同僚들은 그들의 正잭 原則; ‘東獨을 無視하지 말고 繼續 議論하자’ 下에 市民들이 絶望에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 서둘러 措置를 取했다. 이는 곧 壁을 부수는게 아닌, 쉽게 건너 갈 수 있는 壁으로 만들자는 目標로 發展 했다. 그 努力의 一環으로 그는 東獨의 擔當者와의 끈질긴 說得을 통해 1962年 '베를린 通行 協定'을 맺게 된다. 그리고 그 結果 크리스마스에 東獨과 西獨 市民들 120萬 名이 壁을 넘어 서로 만날 수 있게 하는 成果를 냈다. [3] 빌리 브란트 가 1966年 西獨 外務長官이 되었을 때 빌리 브란트 는 바르를 海外 計劃處 事務室의 總責任者로 임명했다. 빌리 브란트 가 1969年 聯邦長官으로 當選되고 바르는 빌리 브란트 의 事務室의 總責任者로 任命되었다. 外交部, 그리고 長官事務室에서 바르는 後에 東方政策 으로 불리는 西獨과 蘇聯, 東유럽國家들 그리고 獨逸 民主 共和國과의 條約들을 성사시키는 政策들과 外交 戰術들을 생각해냈다. [4]

東邦政策의 實現 [ 編輯 ]

東邦政策의 始作 [ 編輯 ]

바르는 그와 빌리 브란트 가 本으로 가기 몇 年 前부터 東方政策 의 밑거름이 되는 생각들을 發表했다. 1963年 7月 그가 發表한 有名한 투稱擧 아카데미 演說이 西獨의 外交 政策에 重大한 轉換點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르는 相對方에게 '接近'하여 接觸을 통해 相對方의 '變化'를 誘導하자는 것을 骨子로 하는 政策과 같은 생각들을 “接近을 통한 變化”라는 알기 쉬운 標語로 整理했다. 1969年 그는 "接近을 통한 變化"에서 한 발 더 進步的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卽, 旣存의 視角에서 벗어나 東獨을 한 國家의 體制로 認定하고 蘇聯을 비롯한 東歐圈 國家들과 交流를 하자는 것이 核心이었다. 그는 東獨이 西獨의 宿敵이라는 以前의 政策들을 拒否하고 獨逸 民主共和國과 蘇聯은 東獨과 西獨이 分斷을 克服할 수 있게 해줄 核心 役割을 한다고 剛하게 主張했다. 다시 말하면 東獨으로 가는 길은 모스크바를 통해서 열릴 것이라는 것을 意味韓 셈이다. 東方政策은 一般的으로 西獨과 蘇聯, 東유럽, 그리고 東獨을 비롯한 바르샤바 條約 同盟國들 間의 和解를 摸索하기 위한 緊張緩和 政策으로 描寫된다. 그러나 바르가 본 長期的 目標는 ‘작은 발걸음’을 通한 獨逸의 統一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獨逸 나치의 殘忍함을 견뎌내야 했던 國家들의 歡心을 사야만 했다. 勿論, 되돌아보면 獨逸과 東유럽의 變化가 그 때의 바르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보여줬지만 그 當時에 그의 생각은 많은 論難을 불러 일으켰다. 右翼言論, 東獨에서 追放된 政治 亡命者들 等이 바르를 非難했다. 特히 基督敎 민주당은 바르가 모든 西獨 政黨들이 보는 앞에서 反共産主義 聯合을 버리고 蘇聯의 東獨과 東유럽에 對한 支配 野慾에 屈服 했다고 非難했다. [3]

東邦政策의 結果 [ 編輯 ]

그런데 1970年 동서독 間의 頂上會談이 成事되면서 동서독 關係는 薰風을 맞게 된다. 1971年의 郵便 協定과 旅行 및 訪問 協定, 1972年의 交通 協約 等의 잇따른 締結로 동서독 間의 交流는 急激히 增加하여 동서독間에 年 700 ~ 800萬 名의 人員이 交流하게 된다. [3] 1982年 지난 10年 동안 締結한 條約들에 對해 바르가 말한 바에 따르면 바르는 東方政策 이 東獨과 西獨間의 緊張을 緩和시키고 結局에는 두 國家間의 자유로운 交流에 一助했다는 點에 宏壯히 자랑스러워 했다고 한다. 그는 政策을 推進하면서 ‘安定(現 體制)과 變化(統一)’라는 두 要素를 對立的인 것으로만 여기지 않고, 時差를 두고 그 矛盾을 끌어안음으로써 ‘安定 그리고 變化’로 탈바꿈시켰다. 바르는 또한 東方政策 이 더 나아가 東獨 政權의 存續을 侵蝕했다고 認識했다. 바르와 빌리 브란트 가 障壁을 쉽게 넘어 갈 수 있게 만들자는 政策 趣旨 또한 障壁이 結局 허물어지게 만드는데 一助했다고 보았다. [5]

統一의 設計 [ 編輯 ]

Bundesarchiv B 145 Bild-F079280-0005, Munster, SPD-Parteitag, Bahr, 1988年 SPD에서의 에곤 바르

統一을 위한 外交 [ 編輯 ]

1969年 10月 사민당 執權後 빌리 브란트 와 聯邦 總理室 警務長官을 맡은 바르는 “1945年의 現實을 直視하라”는 생각을 實際에 適用시키고자 하였다. 東方政策은 導入하기 어려운 政策이었지만, 바르는 西獨과 蘇聯과 共産主義 國家들間의 條約을 맺는 等의 交流의 門을 여는데 核心的인 役割을 했다. 1970年 1月 바르는 蘇聯 外務長官 안드레 그롬쿄와의 協商을 맡았다. 이 協商은 後날 1970年 10月 西獨과 蘇聯의 바르-그롬쿄 公式 條約을 맽는 基盤이 되었다. 이 協約이 締結되고 나서 폴란드, 체코, 그리고 헝가리와의 協約이 이어서 締結되었다. 다른 政治人들과 달리 그는 分斷 現實을 受容하고 現實注意 立場에서 統一政策을 펴야 한다고 主張했다. 西獨이 東獨의 存在를 認定하는 代身 ‘自決權’을 蘇聯으로부터 認定받은 모스크바 條約은 그 具體的인 成果物이었다. [1] 渦中에 바르는 東獨에 對한 關心 亦是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70年 동서독 間의 첫 頂上會談이 열렸고 1972年 特需 擔當 聯邦 長官이 된 바르는 東獨 特需 擔當 聯邦 長官인 미하엘 콜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둘은 獨逸 聯邦 共和國과 獨逸 民主 共和國의 새로운 發展을 約束한다. 둘은 東獨과 西獨사이의 運送에 關한 厖大한 量의 條約들을 성립시키며 西獨과 東獨이 서로를 잘 알게 되는 契機를 만들었다. 이러한 條約들은 1989年 가을 東獨에서 共産主義 政權이 逐出되기까지 두 國家間에 特別한 關係를 形成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2]

統一을 위한 超黨的 努力 [ 編輯 ]

1974年 빌리 브란트 의 個人 祕書가 東獨의 스파이로 밝혀지자 빌리 브란트 는 辭任을 强要 받았다. 바르는 헬무트 슈미트 內閣의 經濟協力 長官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와 슈미트는 잘 맞지 않았고 結局 2年後 바르는 內閣에서 辭任했다. 빌리 브란트 는 政府를 떠나고 사민당의 黨首로 任命되었다. 그리고 바르는 사민당의 事務 總長이 되면서 다시 한番 브란트와의 密接한 關係를 持續하게 된다. 不幸히도 바르는 以前의 外交部와 長官事務室에 있을 때 만큼 成功的인 手腕을 發揮하지는 못했다. 1983年 社民黨은 1961年 選擧에서의 慘敗 以後 가장 큰 慘敗를 當한다. 그 後 바르는 社民黨 事務總長에서 辭任을 하지만 持續的인 政治 活動을 선보였다. 바르는 統一 問題는 政權을 뛰어넘는 事案이라 생각하고 몸소 實踐했다. 所屬 政黨은 社民黨이었지만 1982年 政權이 基督민주당(기민당)으로 넘어갔어도 헬무트 콜 總理를 만나 옛 蘇聯에 있던 自身의 秘線까지 고스란히 넘겨주고 助言을 아끼지 않았다. 獨逸 統一이라는 大業을 위한 超黨的 決行이었다. 1990年 西獨 下院 議員이자 유럽議會 交替議員이 된 바르는 未來의 유럽의 保安 協約에 對한 問題에 關해 執筆했다. [2]

其他 政治 活動 [ 編輯 ]

MSC 2014 Ischinger-Bahr Kuhlmann MSC2014, 2014年 第50回 뮌헨 安保 會議에 參席한 에곤 바르

바르는 1984年부터 1994年까지 함부르크 大學에서 平和 硏究와 安保 政策에 關한 監督과 名譽 敎授職을 맡았다. 바르는 또한 2014年 第50回 뮌헨 安保 會議에 參席하였고 2015年 7月 全 소비에트 書記官 고르바초프 를 러시아에서 만나 우크라이나 事態에 對한 러시아와 獨逸 사이의 冷戰을 中止할 것을 要請하는 等 政界 隱退 以後 2015年까지도 꾸준한 政治的 行步를 이어 왔다. [6]

私生活 [ 編輯 ]

바르는 도로시아 그롭과의 關係에서 두 子女를 얻었고 카렌 니에호프와의 사이에서 딸을 하나 얻어 膝下에 세 子女를 두고 있었다. 2015年까지 세番째 夫人 아델하이드 바르와 베를린에서 居住 中이었다.

認容 [ 編輯 ]

[7]

빌리 브란트 와의 파트너십 [ 編輯 ]

"强大國에 맞서 獨自的인 힘을 誇示하고 베팅하는 것은 悲劇的인 挫折이나 豫期치 못한 成功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러한 것이 브란트와 내가 獨逸을 위해, 그리고 獨逸에 앞서 複合的인 安全保障을 위해 數없이 나눈 對話의 核心 主題였다."

"나를 紹介하는 '緊張緩和政策의 設計者'라는 名稱을 나는 '建築主는 브란트'라는 말로 받아들였다. 브란트는 指令을 내렸고 언제 어디에서 내가 自身에게 質問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建築主가 없었다면 나는 決코 設計者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브란트와 나의 파트너십을 누구보다 잘 把握했던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는 後날 이렇게 말했다. " 빌리 브란트 와 에곤 바르, 서로 180度 다른 두 人物이 만나 前無後無한 協力을 이뤄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도움을 바탕으로 비로소 各自의 公翰 才能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獨逸의 統一 [ 編輯 ]

"베를린 障壁은 戰後 獨逸 歷史의 轉換點이었다. 베를린 障壁은 獨逸의 緊張緩和政策을 惹起시켰으며, 이 緊張緩和政策을 土臺로 유럽 中央에서 두 獨逸은 4個 勝戰國들의 客體에서 主權을 가진 主體가 되었다. 緊張緩和政策 없이 獨逸의 統一은 當然히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미하엘 콜과 나는 '接近을 통한 變化'를 檢證했고, 個人的으로도 接近을 통한 變化를 經驗했다. 우리는 分明 戰爭 以後 처음으로 西獨과 서베를린間의 民間 往來를 위한 法的 基盤을 마련했다."

"1990年 10月 3日 以後에도 옛 故鄕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의 물결은 없었고, 西獨에서 얻은 經驗 德分에 사람들은 훨씬 成熟해졌다. 民族이 갈라지고 오랫동안 分斷되어 있는 韓國人들의 悲劇 을 우리는 겪지 않았다."

國家觀 [ 編輯 ]

"國家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와 自國民에 加한 많은 犯罪가 國家를 否定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獨逸이 分斷되어 있는 한 우리는 國家가 아니다. 統一된 하나의 國家를 抛棄한다는 것은 우리 民族의 自殺이고 民主主義 에 對한 背反이 될 것이다."

評價 [ 編輯 ]

外信들의 評價 [ 編輯 ]

英國의 가디언지는 '東邦政策의 實現에 核心的인 役割을 한 人物이며 그의 接近을 통한 變化 政策이 東西獨逸의 統一을 이끌었다'고 評하였다. [4]

獨逸의 슈피겔誌는 '統一의 創始者'라고 評하였다. [8]

英國의 텔레그래프誌는 '東獨의 共産主義者들에게 接近을 통한 變化 政策을 實踐한 西獨 東邦政策의 提唱者'라고 評하였다. [9]

美國의 뉴욕타임즈지는 '獨逸 統一의 基礎를 마련하였다'고 評하였다. [10]

英國의 로이터지는 '冷戰 時代의 東方政策 데탕트의 先驅者'라고 評하였다. [11]

美國의 워싱턴포스트지는 '東쪽과의 紐帶 關係를 改善하도록 도운 西獨의 政治人'이라고 評하였다. [12]

美國의 비즈니스인사이더지는 '東邦政策의 開拓者'라고 評하였다. [13]

美國의 LA타임즈지는 '統一 獨逸의 礎石을 만들었다'라고 評하였다. [14]

英國의 인디펜던트지는 '東獨과 소비에트에게 接近을 통한 變化政策을 實行한 빌리브란트를 助力한 政治人'이라고 評하였다. [15]

美國의 야후뉴스는 '東方政策 先導者'라고 評하였다. [16]

獨逸의 DW는 '東方政策 뒤에 숨은 브레인'이라고 評하였다. [17]

緊張緩和 政策에 對한 批判 [ 編輯 ]

[18]

바르에 對해서는 普通 위와 같은 肯定的인 評價가 主를 이루지만 베르너 캄페터 博士에 따르면 빌리 브란트 와 바르가 推進한 緊張緩和 政策에 對한 肯定的 批判과 否定的 批判도 共存한다.

周邊國들에게 信賴 形成 [ 編輯 ]

빌리 브란트 와 바르가 推進한 緊張緩和 政策은 周邊國들에게 獨逸의 統一에 對한 信賴感을 造成하였다. 勿論 東獨을 비롯한 東歐圈 共産主義 國家에 對한 和解 協力 政策이 처음부터 받아 들여졌던 것은 아니었다. 初期에는 特히 美國이 이 大膽한 行步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對話를 통한 和解 協力이라는 政策은 漸次 周邊國들에게 徐徐히 信賴를 쌓으며 周邊國들을 說得시켜 갔으며 이를 통해 獨逸은 統一 獨逸의 基盤을 닦을 수 있었다.

平和가 가져온 肯定的 副産物 [ 編輯 ]

緊張緩和 政策은 平和라는 結果物을 만들어 냈다. 平和가 가져온 副産物은 戰爭과 軍事的 衝突에 對한 費用의 減少와 交流의 擴大였다. 이에 따라 國防費가 減少했을 뿐만 아니라 이와 더불어 동서독 內部間의 交流에 더해 獨逸 外部로의 交流까지 모두 擴大되는 結果를 가져옴으로써 유럽 全體의 交流 擴大까지 效果를 誘導할 수 있었다.

西獨의 一方的인 主導 [ 編輯 ]

緊張緩和 政策은 基本的으로 東獨과의 相互 平等과 尊重을 基本으로 한 政策이었다. 後日에 方法論的으로는 平價切下 되기도 하지만 그 當時 緊張緩和 政策이 意圖한 바는 東獨과의 相互 平等과 尊重을 基礎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意圖와는 다르게 緊張緩和 政策은 實際로는 東獨과의 統一 過程에 있어서 西獨의 一方的인 主導로 이루어졌다는 批判도 함께 받게 되었다. 統一 過程에 있어서 西獨의 主導的인 役割만 있었을 뿐 東獨의 參與는 微微했다는 것이다.

社會 經濟的 準備 疏忽 [ 編輯 ]

또한 緊張緩和 政策이 社會 經濟的인 視角에서 東獨 住民들의 統一 以後의 融合에 對한 對備가 未備했다는 批判 亦是 統一 以後에 뒤를 이었다. 동서독 統一 過程에서 東獨의 住民들이 西獨의 民主主義 體制에 社會的으로 無難히 適應하리라는 것은 誤判이었으며 經濟的으로도 統一 以後의 東獨 地域의 經濟的인 發展에 對한 準備 未洽으로 東獨의 經濟的 狀況이 오히려 더 惡化되었고 社會 經濟的으로 莫大한 統一 費用이 生成되었다는 것이다.

受賞 經歷 [ 編輯 ]

1973年 바르는 聯邦十字大勳章 ( Bundesverdenstkreuz )을 受賞했으며 2002年 베를린 名譽市民으로 選定되었다. 2007年 그는 獨逸-노르웨이 빌리 브란트 財團에 依해 빌리 브란트 賞을 受賞했고, 2008年 괴팅겐 平和 上( Gottingen Peace Prize )와 Marion Donhoff Preis 를 모두 受賞했다. 2008年 Internationales Hochschulinstitut Zittau 로부터 名譽博士學位를 받았다. 2010年 1月 功勞 勳章( Verdienstorden )을 받았다.

著書 [ 編輯 ]

Was wird aus den Deutschen?: Fragen und Antworten (1982)

Zum europaischen Frieden: Eine Antwort auf Gorbatschow (WJS Corso) (1988)

Sicherheit fur und vor Deutschland: Vom Wandel durch Annaherung zur Europaischen Sicherheitsgemeinschaft (1991)

Zu meiner Zeit (1996)

Deutsche Interessen: Streitschrift zu Macht, Sicherheit und Aussenpolitik (1998)

Der Nationalstaat: Uberlebt und unentbehrlich (Brandt-Heft) (1998)

Ostwarts und nichts vergessen! (2012)

Gedachtnislucken by Peter Ensikat (2013)

Das musst du erzahlen (2014) [7]

Ostwarts und nichts vergessen (2015)

年譜 [ 編輯 ]

1922年 ? 트레프루트 出生.

1942年 - 獨逸 國防部의 軍人으로 活動

1946年 ? 第2次 世界大戰 終戰以後 記者로 活動

1956年 - 獨逸 社會民主黨 (SPD, 에스페데)入黨

1960年 ? 서베를린 市場 빌리 브란트 에게 公報擔當官으로 任命됨

1966年 - 西獨 外務長官이 된 빌리 브란트 가 바르를 海外 計劃處 事務室의 總責任者로 任命

1969年 ? 獨逸 第4代 總理 빌리 브란트 의 祕書로 일함

1970年 ? 빌리 브란트 와 함께 東方 政策 推進. 모스크바 條約과 바르샤바 條約 締結

1972年 ? 獨逸 聯邦 特需 擔當 長官 就任

1974年 ? 기욤 事態로 인한 빌리 브란트 辭任 後 헬무트 슈미트 內閣의 經濟 協力 長官으로 남음

1976年 ? 헬무트 슈미트 內閣에서 辭任

1980年 - 올로프를 委員長으로 하는 軍縮과 安全保障에 關한 獨立委員會의 一員으로서 活動

1984年 ? 함부르크 大學의 平和 調査와 安全 政策 機關의 監督으로 活動(後에 名譽敎授로 就任)

1991年 ? 潛在的 獨逸 平和 團體 設立에 對한 討論 推進

2002年 ? 베를린 名譽市民으로 任命됨

2007年 ? 獨逸과 노르웨이의 빌리 브란트 財團으로부터 빌리 브란트 賞을 受賞

2008年 ? 괴팅겐 平和賞과 Marion Donhoff Preis 受賞

2010年 - 노스라인 베스트팔렌 의 獨逸聯邦主로부터 功勞勳章 取得

2015年 - 別世

같이 보기 [ 編輯 ]

빌리 브란트

헬무트 콜

헬무트 슈미트

고르바초프

東方政策

데탕트

獨逸의 再統一

各州 [ 編輯 ]

  1.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8201802171&code=100402
  2. “保管된 寫本” . 2017年 7月 1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5年 10月 9日에 確認함 .  
  3. http://newstapa.org/28647
  4. http://www.theguardian.com/world/2015/aug/27/egon-bahr
  5. http://news.donga.com/3/all/20150821/73166302/1
  6. http://mobile.reuters.com/article/idUSL5N10V1M520150820
  7. 《獨逸 統一의 主役, 빌리 브란트 를 記憶하다》, 에곤 바르 지음, 박경서 오영옥 옮김, 北路그컴퍼니, 2014, ISBN   978-89-94197-70-8
  8. http://www.spiegel.de/politik/deutschland/egon-bahr-ist-tot-willy-brandts-engster-vertrauter-a-1048965.html
  9. http://www.telegraph.co.uk/news/obituaries/11880025/Egon-Bahr-Ostpolitik-proponent-obituary.html
  10. http://www.nytimes.com/2015/08/21/world/europe/egon-bahr-who-helped-reunify-germany-dies-at-93.html?_r=0
  11. “保管된 寫本” . 2015年 10月 1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5年 10月 9日에 確認함 .  
  12. https://www.washingtonpost.com/local/obituaries/egon-bahr-west-german-statesman-who-helped-improve-ties-with-the-east-dies-at-93/2015/08/21/88f8a86c-482b-11e5-846d-02792f854297_story.html
  13. “保管된 寫本” . 2015年 9月 1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5年 10月 9日에 確認함 .  
  14. http://www.latimes.com/local/obituaries/la-me-0821-egon-bahr-20150821-story.html
  15. http://www.independent.co.uk/news/obituaries/egon-bahr-statesman-who-assisted-willy-brandt-in-his-policy-of-rapprochement-with-east-germany-and-10468160.html
  16. http://news.yahoo.com/german-ostpolitik-pioneer-egon-bahr-dies-93-075410173.html
  17. http://www.dw.com/en/brains-behind-german-ostpolitik-egon-bahr-dies-aged-93/a-18659368
  18. 《獨逸 統一의 奇跡과 그 敎訓》, 베르너 캄페터 博士, 프리드리히 에버트 財團, 2010

參考 文獻 [ 編輯 ]

《獨逸 統一의 奇跡과 그 敎訓》, 베르너 캄페터 博士, 프리드리히 에버트 財團, 2010

《獨逸 統一의 主役, 빌리 브란트를 記憶하다》, 에곤 바르 지음, 박경서 오영옥 옮김, 北路그컴퍼니, 2014, ISBN   978-89-94197-70-8

《Egon Bahr and the concept of a ‘European peace order’ (1963?1970)》, Rachele Raus, 2015

外部 링크 [ 編輯 ]

https://www.perlentaucher.de/autor/egon-bahr.html

前任
호르스트 엠케
第7代 獨逸聯邦共和國 特需 擔當部 聯邦 長官
1972年 - 1974年
後任
베르너 마이호퍼
前任
에르하르트 에플러
第5代 獨逸聯邦共和國 經濟 協力部 聯邦 長官
1974年 - 1976年
後任
마리에 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