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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宇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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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宇同
於宇同

身上情報
本名 朴驅魔
朴丘麻 [1]
別稱 於宇同(於宇同) 또는 어을우동(於乙宇同)
出生 ?
朝鮮 忠淸道 陰城郡 음죽
死亡 1480年 10月 18日 (享年 41歲)
朝鮮 漢城府 에서 賜死됨.
職業 詩人, 書藝家, 作家, 思想家, 畫家, 舞踊家
學歷 漢學 數學
宗敎 遊學 性理學
分野 詩文學, 書畫
父母 박윤창(簿), 정귀덕(某)
配偶者 태强手 移動(離婚)
子女 이番座(딸)
親戚 박성근 (오라비)
主要 作品
影響

於宇同 (於宇同, 1440年 ~ 1480年 10月 18日 )은 朝鮮 電氣의 詩人, 書藝家, 作家, 妓生, 舞姬였다. 그女도 本來는 兩班家 出身 女性으로 男便에게 離婚된 後 妓女 가 되었으며, 朝鮮 成宗 때 朝廷의 高位 官僚들이 連累된 性 스캔들 事件의 主人公이기도 하다. 本來는 王族 태强手 移動의 아내였으나 태强手 移動에 依해 버림받았다. 詩와 書畫에 能하였으나 그女의 作品은 大部分 湮滅되거나 實戰되었다.

일찍이 銀장이 (銀匠)을 불러 銀器(銀器)를 만드는데 어우동이 銀장이를 보고 좋아하여 거짓으로 계집종처럼 하고 나가서 서로 이야기하며 가까이하려고 했다. [2] 그 事實이 알려져 어우동은 親庭으로 쫓겨가게 되었다. [2] 그러나 이는 陋名이라는 反論도 提起되고 있다. 그 뒤 여러 男性과 사귀었고, 그의 詩, 거문고 等의 재주를 높이 사서 當代의 名士와 儒生, 婦女子들까지 그의 집에 隨時로 出入하였다. 單純한 詩文과 書信을 주고받는 사이와 戀人 等 다양한 사람들이 存在했으며, 離婚한 뒤였는데도 王族의 아내였다는 理由로 姦通으로 몰려 죽게 된다.

1480年 (成宗 11) 어우동과 關聯된 性紊亂 行態가 發覺되어 김종직 , 士林派 , 이덕숭 (李德崇 [3] ) 等의 彈劾을 받고 어우동은 義禁府 에 잡혀갔다. 이때 風紀紊亂으로 問招를 當했으나 男性들은 모두 嫌疑를 否認했다. 그女가 逮捕되었을 때 防産수 이난 이 그를 辯護하였고, 그의 勸告로 事實을 밝혔다. 어유소 , 노공필 , 김세적 , 金稱 , 김휘 , 정숙지 等의 士大夫 高官인 男子들은 모두 嫌疑를 否認하였고 中인이었던 朴江倉 , 홍찬 等은 下獄되었다. 朝廷에서는 이 事件을 두고 死刑과 流配로 主張이 나뉘었으나 結局 士林派 勳舊派 의 猛攻을 받고 三從之道 (三從之道)를 紊亂하게 했다는 罪名으로 혼자 社史당했다. 朝鮮 兆 最大의 스캔들 事件의 主人公이었으나 그女와 通情한 人物들은 모두 赦免되었고, 그女만 死刑당하여 同情輿論이 일기도 했다.

詩文과 作品을 남겼으나 陰部의 作品이라는 理由로 燒却되거나 破壞되었다. 유감동 , 황진이 , 離垢地 , 帶方郡夫人 宋氏 等과 함께 오래토록 不渡를 어긴 女性의 代名詞로 罵倒당하고 指彈받았다. 또한 희빈 張氏 , 장녹수 , 文定王后 等과 함께 朝鮮 社會의 惡女의 한사람으로 批判받아오다가, 1910年 (隆熙 4年) 大韓帝國 滅亡 以後 復權되었다. 흔히 於宇同 (於宇同) 또는 어을우동 (於乙宇同)이라 부른다. 本貫은 陰性 (陰城)이다. 忠淸北道 陰城郡 음죽현 出身.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어우동은 承文院 知事 박윤창 (朴允昌)의 딸로서 忠淸北道 陰城郡 음죽현 出身이다. 正確한 出生年代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本名은 博究마로, 於宇同 또는 어을우동 等으로 불렸다. 慵齋叢話에는 於宇同(於于同), 實錄에는 어을우동(於乙于同)이라 하였으며, 송계만錄(松溪漫錄)과 大東詩選 , 海東詩選 , 燃藜室記述 등에는 어우동이라고 하였다.

아버지 박윤창 은 音步로 官職에 올랐으며 世宗11年 同進士試驗에 合格하여 사예 [4] 等을 지내고 承文院 支社에 이르렀다.

宗室인 태强手 移動 (泰康守 李仝)에게 出家해 外命婦의 品階인 惠人 (惠人)으로 封爵되었다. [5] 그러나 그 後 어우동의 이름은 王室 族譜에서 削除되었고, 親庭어머니 鄭氏 亦是 親庭과 媤宅의 族譜에서 削除되었으며, 於宇同, 鄭氏, 박성근 事件 等으로 인해 朴輪唱 亦是 族譜에서 削除되어 仔細한 家計는 알려져있지 않다.

傳說에 依하면 於宇同에게는 일찍부터 마음에 두었던 이웃집 男子가 있었지만, 그 男子의 집안이 韓美하여 父母가 反對하였고, 그女는 눈물의 離別을 한다. 그 뒤 집안의 政略에 依해 宗室인 태强手 移動과 結婚하게 된다.

結婚과 離婚 [ 編輯 ]

太宗 의 鉏曾孫子 태强手(泰江守) 移動(李仝)과 結婚하였으며 番座라는 딸이 태어났다. 이동은 世宗의 둘째 兄이며 太宗의 次男인 孝寧大君의 다섯째 아들 永川郡의 庶子였다. 태强首와 結婚後 딸만 1名 얻었을 뿐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後嗣를 잇지 못한다는 理由로 어우동은 媤宅의 無視와 冷待를 견뎌냈다. 그러던 中, 어우동은 딸 番左와 함께 버려졌다.

그女가 逐出된 背景은 年經費라는 妓生 또는 妾을 사랑해서 억지로 어우동의 허물을 잡아 쫓아내었다는 說과 어우동이 집에 銀그릇을 만들려고 찾아온 銀장이와 姦通을 해서 移動이 쫓아냈다는 說 [2] 이 存在한다. 그러나 成宗 이 내린 判決에 따르면 이때 어우동의 姦通事件은 無罪였고, 妓生을 사랑한 男便 移動의 잘못으로 여겨져 離婚 은 無效化되었다. 태强手 이동은 妓生 또는 妾에게 빠져서 함부로 夫人을 버린죄로 削奪官職을 當했고, 婦人과 再結合하라는 命令을 받았으나 이동은 이것을 拒否했다. 그리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宗親이었던 이동은 몇個月뒤 官職을 되찾았고 어우동은 法的으로는 태强首의 夫人이었지만 버림받은 處地가 되었다.

作品, 自由 戀愛 活動 [ 編輯 ]

離婚 以後 [ 編輯 ]

그 뒤 어우동은 딸과 種을 데리고 親庭으로 갔으나 아버지 박윤창 이 받아주지 않아 길가에 집을 마련하고 居處하였다. 그러던 中 그가 홀로 앉아 슬퍼하며 歎息하자 한 계집종이 그를 慰勞하였다. "사람이 얼마나 살기에 傷心하고 歎息하기를 그처럼 하십니까? 오종년이란 이는 일찍이 司憲府 의 官吏가 되었고 容貌가 아름답기가 太康數보다 越等히 나으며, 身分도 賤하지 않으니 配匹을 삼을만 합니다. 主人께서 萬若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불러오겠습니다. [2] "라고 했다.

어느 날 계집종이 오종년 을 맞이하여 오니 어우동이 이를 맞이하였다. [2] 그러나 나중에 오종년 過度 訣別하였다. 男便 移動 에게 이혼당한 뒤 그는 오히려 數十 名의 선비, 朝官 및 儒生들과 關係를 가졌으며 그와 關係를 맺은 男子들과 그 當時 스캔들의 昭詳한 內容이 大東野乘 , 慵齋叢話 , 成宗實錄 等에 記錄으로 남아 傳한다. 以後 그는 正式으로 妓女 授業을 받고 妓女가 된다.

그 뒤 餘種과 함께 妓生 行世를 하며 妓房에 出入하던 中 男便의 6寸인 世宗 의 鉏孫子로 계양군 의 庶子 防産수 (方山守) 이난(李瀾)을 만나 사귀게 된다. 防産數는 世宗 의 庶子 계양군의 넷째 庶子로 어우동은 춤과 時, 재色에 能했는데 이難은 어우동의 재色에 魅了되어 以後 그女를 자주 찾았다. 二難은 自身의 팔뚝에 어우동의 이름을 새기기까지 했다. [6] 그 情이 매우 두터웠던 나머지 二難은 自己 팔뚝에 이름을 새기기를 請하여 먹물로 새겼다. [2] 뒤에 逮捕되었을 때 끝까지 그女를 辯護하고, 善處를 呼訴한 人物은 防産수 二難이었다.

作品, 文筆 活動 [ 編輯 ]

그러나 性關係에만 局限되지 않고 詩文과 伽倻琴을 잘 다루고 춤을 잘 추었던 탓에 여러 文士들이 그女를 보고자 直接 찾아오기도 했다. 그女는 自身의 身分을 妓生 或은 內禁衛의 貼, 或은 寡婦라 紹介했고 이들 여러 男性과 兩班들이 그의 집에 出入하였다. 모든 男性을 性的으로 誘惑하지는 않았고 詩文과 書信만을 주고받는 關係도 있었다. [7]

어우동은 '敢히' 글쓰기를 하며 世上에 挑戰한 主人公이 되었다. [8] 妓生이라는 身分을 利用해 수많은 男子들과 閭閻집 女子들이 꿈도 못 꾸는 自由로운 文友活動을 했다. [8] 女子가, 妓生이 글을 쓰고 書藝를 한다고 士大夫들이 비웃었지만 그는 繼續 그림과 書藝를 繼續 했고, 사람들을 歎服시킬 程度로 實力을 갈고 닦았다.

科擧 及第者 戱弄 [ 編輯 ]

그러나 어느 過去 及第者를 戱弄한 일로 所聞이 擴散된다. 이미 더以上 꺼리낄 것이 없는데다 大膽해진 그女 쪽에서 積極的으로 나서기도 했다. [2] 한番은 科擧에 合格하여 遊街(遊街)를 하는 홍찬 [2] 본 어우동은 문득 姦通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9] 그 後 길에서 만나자 소매로 그의 얼굴을 슬쩍 건드렸다. 이에 홍찬이 그女의 집으로 가 情을 통하기도 했다. [9]

그 相對가 兩班에만 局限된 것은 아니었다. 서리(書吏) 감意向이 길에서 어우동을 만나자 戱弄하며 그女의 집에까지 따라가 姦通하기도 했다. 어을우동을 사랑하여 등판에 이름을 새겼다 한다. [9] 이러한 自由奔放한 生活은 마침내 調整에까지 알려졌으며, 風俗을 어지럽혔다는 理由로 체포당하게 된다. [9]

自由 戀愛 遍歷 [ 編輯 ]

그 뒤 男便의 8寸이자 定宗 의 아홉째 아들 석보군의 鉏孫子인 水産수 (守山守) 이기(李驥)를 만나 姦通하게 된다. 이기는 그의 美貌에 惑하여 어우동의 몸종을 불러내 누구의 딸이나 아내인가를 물었고, 女종은 內禁衛 (內禁衛)의 첩(妾)이라고 하자, 이기는 어우동을 불러들였다.

以後 그밖에 內禁衛 (內禁衛) 口傳 (具詮)·學諭(學諭) 홍찬(洪燦)· 生員 (生員) 이승언(李承彦), 서리(書吏) 감意向(甘義享), 署理 誤種련(吳從連)·감의형(甘義亨), 生徒(生徒) 朴江倉(朴强昌)·陽인(良人) 이근지(李謹之)·私奴(私奴) 지巨碑(知巨非 [10] )와 姦通하였다. 어유소 (魚有沼)· 노공필 (盧公弼)· 김세적 (金世勣)·金稱(金?)·김휘(金暉)·정숙지(鄭叔?) 等도 擧論되었고, 防産수 二難은 “어유소는 일찍이 어울우동의 이웃집에 被接(避接)하여 살았는데, 隱密히 사람을 보내어 그 집에 맞아들여 祠堂(祠堂)에서 姦通하고, 뒤에 만날 것을 期約(期約)하여 玉가락지[玉環]를 주어 信標(信標)로 삼았습니다. 김휘는 어을우동을 社稷洞(社稷洞)에서 만나 길가의 認可(人家)를 빌려서 情(情)을 통하였습니다.”라고 陳述했지만, [6] 防産수 二難은 스스로 이것이 無故(誣告)였음을 밝혔다. [11]

김휘는 어을우동을 社稷洞(社稷洞)에서 만나 길가의 認可(人家)를 빌려서 情(情)을 통하였다. [6] 그러나 그女의 行跡을 偶然히 接하게 된 承政院 都承旨 김계창 의 追跡과 줄기찬 彈劾이 있으면서 公論化되었다.

그女는 自身의 마음의 든 사내에게는 特別히 自身의 이름을 文身하도록 强要했다. [5] 典醫監 生徒였던 朴江倉은 팔뚝에 於宇同이라는 글字를 새겨넣게 되었고, 서리 감의동은 登板에다가 사랑하는 女人의 이름을 새겨넣기도 했다. [5] 또한 그女가 가장 사랑하여 팔뚝에다가 그의 이름을 새겼다 한다. [2] 그와 關係를 맺은 男子들과 當時 스캔들의 昭詳한 內容이 《慵齋叢話》, 《成宗實錄》 [12] , 《大東野乘》 等에 記錄되어 傳한다.

1480年 (成宗 11) 어우동의 戀愛 스캔들이 漢城府 內에 所聞이 돌면서 眞相을 要求하는 公論이 形成되었다. 김종직 과 그가 이끄는 士林派 出身 司諫院 , 司憲府 의 言官들과 勳舊派 에 依해 集中攻擊, 彈劾을 받고 義禁府 에 끌려갔다. 士林派와 一部 勳舊派는 그를 繼續 攻擊했고 死刑에 處해야 된다는 主張을 하였으나 一部 勳舊派와 宗親들은 死刑까지는 過하다 하여 重刑이나 邊方流配, 奴婢 定速 等을 代案으로 提示하였다.

生涯 後半 [ 編輯 ]

逮捕와 投獄 [ 編輯 ]

그女를 어떻게 處罰할 것인가를 놓고 열띤 論議가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들과 姦通했는가 하는 것도 關心事였다. [9] 成宗 은 이를 不文律에 부치고 넘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新進 士林派 言官들은 每日 어을우동의 이름을 言及하여 公論化시킨다.

風紀紊亂으로 問招를 받았으나 어우동은 처음에는 嫌疑를 否認하였다. 獄中에 收監된 人物들은 兩班에서 中인, 儒生 等 다양한 階層이었다. 그의 집에 한番이라도 出入한 經歷이 있으면 모두 逮捕되었다. 逮捕된 이들은 모두 嫌疑를 否認하였다. 그때 獄中에 있던 防産수 이난이 어을우동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유감동 이 많은 幹部로 인하여 重罪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너도 四通한 바를 숨김없이 많이 끌어대면 重罪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9] "하였다. 그러자 어을우동이 關係를 맺은 幹部들의 이름을 늘어놓았다. 問招를 받은 關係者들만 하더라도 數十 名에 이르렀다. [9] 二難은 그 自身도 嫌疑가 있었으나, 上疏를 올려 成宗 에게 어을우동의 재주가 아까움을 들어 그의 釋放을 建議하기도 했다.

그러나 唯一하게 그를 辯護하던 防産수 이난 의 勸告로 關係를 맺은 男子들을 모두 告하였지만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金稱, 김휘, 정숙지 等의 士大夫 高官인 男子들은 모두 嫌疑를 否認하였고 中인이었던 朴江倉, 홍찬 等과 生員, 進士 等은 下獄되었다. 成宗 은 適當히 流配나 投獄, 官婢로 定速시키는 線에서 事態를 마무리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女의 行跡을 問題삼은 김종직 , 司憲府 司諫院 等은 이 問題를 繼續 言及하여 公論化시켰다. 함께 國文張에 나타난 男性들은 모두 嫌疑를 否認하였다. 그러나 어우동은 內禁衛 (內禁衛) 口傳 (具詮)·學諭(學諭) 홍찬(洪燦)·生員(生員) 이승언(李承彦), 서리(書吏) 감意向(甘義享), 署理 誤種련(吳從連)·감의형(甘義亨), 生徒(生徒) 朴江倉(朴强昌)·陽인(良人) 이근지(李謹之)·私奴(私奴) 지巨碑(知巨非), 어유소 · 노공필 · 김세적 ·金稱·김휘·정숙지 等의 이름을 댔고, 國文張에 있던 防産수 이난 亦是 어유소 · 노공필 · 김세적 ·金稱·김휘·정숙지를 指目했다. 嫌疑를 받은 男性들은 大部分 否認하였고, 防産수 이난 (李瀾)만이 認定했으며, 이難은 어우동을 辯護하고 어유소·노공필·김세적·金稱·김휘·정숙지를 指目하기도 했다.

그밖에 어우동의 집에 한番이라도 出入한 經歷이 있는 선비와 成均館 儒生들, 婦女子들까지 모두 逮捕되어 義禁府 漢城府 , 刑曹 等에서 國文을 當했다. 사사로이 詩文을 주고 받고, 그의 伽倻琴, 거문고, 그림 재주를 보고 出入했던 이들 조차 逮捕되어 姦通犯이라는 疑心을 받고 지탄당하게 되었다.

旣成 官僚들의 攻擊 [ 編輯 ]

朝廷에서는 이 事件을 두고 死刑과 流配로 意見이 나뉘었다. 承政院 은 어우동의 罪를 大明律 (大明律)의 ‘男便을 배반하고 逃亡하여 바로 개가(改嫁)한 것’에 非情해 交付대시(絞不待時: 늦가을까지 기다리지 않고 卽時 兄을 執行하는 것)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以後 그女를 處刑해야 된다는 非難輿論이 繼續되었고, 成宗 은 귀양이나 流配로 兄을 定하고 不文律에 부치려 하였으나 彈劾이 繼續되었다.

心懷 는 "어을우동의 罪는 律을 上告하면 死刑에 이르지는 않으나, 士族의 婦女로서 淫行이 이와 같은 것은 江上(鋼常)에 관계되니, 請컨대 極刑에 處하여 뒷사람의 警戒가 되게 하소서"라고 極刑을 主張했다. [9] 윤필상 도 "어을우동은 綱常을 무너뜨렸는데도 죽이지 않으면 淫風이 어떻게 그치겠습니까? 男女의 情은 사람들이 크게 탐하는 것이므로, 法이 嚴格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將次 欲情을 恣行하여 鄭나라 · 위나라 의 風俗이 이로부터 일어날 것이니, 이 女子를 極刑에 處하여 나머지 사람들을 警戒하소서"라고 했다. [9]

司憲府 집의 이덕숭 (李德崇) 亦是 어우동을 攻擊하였다. 事件과 聯關된 이난(李?)·어유소(魚有沼) 等을 彈劾해 流杯할 것을 要求했고, 어우동의 死刑을 主張하였다. 김종직 士林派 亦是 그女를 死刑에 處해야 된다고 主張하였다. 司諫院 司憲府 에서는 連日 於宇同에 對한 攻擊 輿論을 造成하였다.

死刑은 過하다는 反論도 提起되었다. 김국광 강희맹 은 이렇게 議論하였다. [13] "어을우동은 宗室의 婦女로서 淫慾을 恣行하기를 다만 뜻에만 맞게 하여, 親戚과 貴賤을 가리지 않고 즐겨 서로 姦通하면서, 彝倫을 損傷시킨 것이 이보다 甚함이 없습니다. 마땅히 조종조의 法에 따라 重罰에 處하여 閨門 깊숙한 속의 淫蕩하고 醜雜한 무리들로 하여금 이것을 듣고서 警戒하고 反省하게 함이 옳겠습니다. 中國 朝廷의 禮에 依하여 저잣거리에 세워 都邑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報告書 懲戒가 되게 한 然後에, 律에 따라 멀리 流杯하소서. [13] "

最後 [ 編輯 ]

어우동을 辯護하는 人物로는 防産수 이난 과 親어머니 鄭氏 等 少數였다. 김국광 강희맹 等은 死刑은 過하다 하여 流配 程度로 足하다고 하였다. 또한 그의 詩, 거문고, 伽倻琴, 춤 等의 재주가 뛰어났기에 죽이기에는 재주가 아깝다는 理由로 同情 輿論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彈劾은 繼續되었다. 特히 同副承旨 김계창 의 끈질긴 彈劾을 받게 된다. [5] 朝廷에서는 이 事件을 두고 死刑과 流配로 主張이 나누어졌으나 結局 成宗은 承政院과 兩社의 彈劾을 承認하여 1480年 (成宗 11年) 10月 18日 에 三從之道(三從之道)를 紊亂하게 했다는 罪名으로 軍器監 앞에서 處刑되었다. 그해 11月 13日 에는 宗簿寺 의 上言으로 王室의 族譜인 璿源錄 에서 그女의 이름이 削除되었다. [14] 그러나 그와 姦通했던 사람들은 가벼운 罰만 받았고, 어우동이 죽은 뒤 모두 赦免되거나 失職에 復歸하였다. 어우동은 詩文에도 뛰어나 많은 作品을 남겼으나 大部分 사라졌다.

事後 [ 編輯 ]

어우동은 事後 유감동 , 離垢地 , 帶方郡夫人 宋氏 와 함께 朝鮮 王朝가 滅亡할 때까지 淫女의 代名詞로 罵倒당하였다. 그女의 詩, 거문고, 伽倻琴, 춤 等의 재주는 잊혀졌고, 다만 淫蕩한 女人의 代名詞처럼 口傳되어 왔다. 以後 野談과 小說 및 演劇의 主人公으로 口傳되거나 劇化되었으며, 1897年 (高宗 34年) 光武 改革 以後부터 演劇과 口傳 文學, 戱曲, 映畫 等의 素材로 活用되기 始作하였다. 1910年 (隆熙 4年) 朝鮮 滅亡 以後부터 同情이나 再評價 輿論이 나타났다.

어을우동과 姦通한 嫌疑가 있던 男子들에 對한 處罰은 寬大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擧論되어 實際로 問招를 當하기도 했지만 大部分 罪가 면해졌다. [13] 1482年 8月 8日 成宗 13年의 實錄에 依하면, 어을우동과 姦通한 者들은 이미 모두 釋放되었다. [13]

여러 作品을 남겼으나 몇 數의 時調가 傳한다. 權應仁 (權應仁)은 自身의 著書 《 송계만錄 (松溪漫錄)에 匿名으로 言及된 어우동의 詩로 여겨지는 附與回顧詩를 紹介하면서 "陰部(淫婦)이면서 이와 같이 詩에 能하니, 이른바 재주는 있고 行實이 없는 사람이란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여 그의 詩的 才能은 認定하면서도 貶下하였다. 詩와 書畫에 能하였으나 그의 作品들은 大部分 湮滅되거나 하찮게 取扱되다가 實戰되었다.

[ 編輯 ]

玉淚丁東夜氣淸 / 구슬은 흘러 밤을 밝히고 [15]
玉淚丁東夜氣淸 / 구슬은 눈물처럼 흘러 밤을 밝히고
白雲高捲月分明 / 흰 구름은 높이 흘러가니 달빛은 더욱 밝아라
間房叔謐餘香在 / 한칸의 작은 房에는 님의 香氣가 남아 있고
可寫如今夢裏情 / 꿈결같은 그리운 情, 그림으로 그려낼수 있겠네


扶餘懷古 (附與回顧)
白馬臺空經幾歲 / 白馬臺 텅빈 지 몇 해가 지났는고
落花巖立過多時 / 落花巖 은 선채로 많은 歲月 지났네.
靑山若不曾緘? / 淸算이 萬若 沈默하지 않았다면
千古興亡問可知 / 千古의 興亡을 물어서 알 수 있으련만

評價 및 觀點 [ 編輯 ]

不倫, 姦通을 일으킨 犯罪者라는 主張과 性理學 的 道德主義에 依한 犧牲羊이라는 視角이 兩立하고 있다. 1910年 朝鮮 滅亡 以後부터 各種 喜劇과 映畫 等 藝術作品의 素材가 되었다. 朝鮮 滅亡 直後부터 그女가 먼저 男便에게 버림받았다는 點에 對한 同情 輿論이 나타났으며, 2000年 代 以後부터는 그女를 被害者로 認識하는 見解가 擡頭되고 있다. 한便 於宇同에 對한 記事는 成宗實錄에도 昭詳히 記錄되어 있는데, 그것을 적은 士官(史官)들은 그 內容의 登載를 꺼려했다 한다.

規範을 拒否한 朝鮮 女性의 한사람 [16] 으로도 評價된다. 또한 體制의 犧牲羊이라는 視角도 存在한다.

그女의 詩는 作品性이 높이 評價되었으며 그림도 그렸으나 淫亂한 女性, 不德을 어긴 女性의 한사람으로 指目되면서 大部分 湮滅, 失傳되었다. 송계만錄에 傳하는 詩에는 匿名으로 登載하여 非難을 迂廻的으로 避하기도 했던것으로 여겨지는 附與回顧(扶餘懷古)라는 詩로 一說에는 어우동이 지었다고하는 詩(詩)가 실려 傳한다. 大東詩選 에서도 그女가 지은 <附與回顧 扶餘懷古>라는 詩가 실렸으며, 송계만록의 글을 紹介하였는데, “湖西(湖西)의 窓(娼)으로 農夫의 딸이었으나, 斷定하지 않아 그 詩가 뛰어나나 싣지 못하는 바가 있다.”고 하였다.

離婚하였지만 '王族의 아내로 그女의 自由 奔放한 性生活은 當時로서는 破格的인 것이었고, 儒敎 倫理를 標榜하고 있던 朝鮮 社會가 그女를 包容할 수는 없었다. [13] '는 視角도 있다.

家族 關係 [ 編輯 ]

男便 태强首의 딸 1名과, 아버지가 不明確한 아들 1名이 있었다. 親庭오빠 박성근 은 9年 뒤 어머니 鄭氏를 殺害하여 論難이 되기도 했다.

기타 [ 編輯 ]

死刑 與否 論難 [ 編輯 ]

어우동을 處刑한 것을 綱常에 關聯된 일이라며 當然하다 보았다. 그러나 士林派 官僚인 김정국 (金正國)은 嚴한 刑罰로 아랫사람을 敎化하려는 것은 잘못이며, 어우동의 處刑을 亦是 合當하지 못한 것이라고 評價하기도 했다. [19] 成宗 은 그女를 살리려 하였으나 一部 强勁 士林派 들의 反對로 霧散되었다.

當時 朝鮮이 借用한 明나라 의 刑律人 大明律(大明律)에는 姦通의 處罰 規定이 男女 共히 腸(杖) 80臺였다. 處女든 總角이든 婚姻 外의 性關係를 가지면 姦通이고, 姦通에 對해서는 棍杖 80臺를 맞게 돼 있었다. 그런데 有夫女는 10代를 더해 90代 兄이었다. 어우동도 原則的으로는 腸 90代 型이 적합했고, 當時는 이미 離婚한 狀態였으므로 腸 80代 兄이 正確한 適用이었다.

士大夫의 謹嚴性 [ 編輯 ]

어우동의 스캔들에 連累된 人物들 中 지거費를 除外한 人物들은 모두 朝鮮朝의 兩班들로, 內禁衛將 의 妾이라고 身分을 밝혔음에도 그를 데려간 王族과 祖上을 모시는 祠堂으로 데려가서 姦通하는 等 謹嚴한 儒學者 , 儒敎的 道德性을 理念으로 한 兩班社會의 僞善이 外部에 알려지는 契機가 되었다. 이는 公公然한 祕密이었는데 김종직 士林派 의 上訴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기타 [ 編輯 ]

  • 그의 오빠 박성근 은 自身의 어머니인 鄭氏를 殺害했는데, 鄭氏의 殺害 理由는 어려서 본 어머니의 姦通 事實을 發告한 것이 原因이었다. [20]
박성근은 前(前) 郡守(郡守) 박윤창(朴允昌)의 아들이며 淫女(淫女)인 어을우동(於乙宇同)의 오라비다. 음죽현(陰竹縣)에서 살았으며, 그의 어미 鄭氏(鄭氏)도 또한 크게 淫行(淫行)함이 있어서 박성근이 어렸을 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어미가 잠잘 때에 발이 넷이 있는 것을 보았다.’ 하였더니, 鄭氏가 이 緣由로 하여 미워하고, 밤이 되면 반드시 박성근을 櫃(?) 속에 幽閉(幽閉)시켰으며, 衣服이나 飮食은 婢僕의 蘇生과 다름이 없었다. 그가 장성함에 이르러 또한 土地와 奴婢를 적게 주어서 박성근이 이것을 怨望하더니, 從兄(從兄)집의 種 內銀産(內隱山)·內銀銅(內隱同)과 共謀(共謀)하고는 鄭氏가 그의 조카 精巢(鄭韶)의 집에 가 있음으로 인하여 드디어 鄭氏의 鐘 往昔(往石)과 內銀銅·內銀産 等을 强盜같이 만들어 가서 죽였는데, 박성근이 精巢(鄭韶)와 함께 꾀했다고 供招(供招)하였으므로 長身(杖訊) 中에 玉(獄)에서 죽었다. [20]
  • 그의 어머니 鄭氏는 '사람이 누군들 情慾(情慾)이 없겠는가? 내 딸이 男子에게 惑하는 것이 다만 좀 甚할 뿐이다'라 하였다.
  • 忠淸北道 槐山 갈읍리(葛邑里)에는 그곳에서 生産되던 '고추의 品質이 뛰어나 妓生 어우동이 槐山淸潔고추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는 傳說이 傳해지기도 한다. [21]

大衆 文化에 미친 影響 [ 編輯 ]

朝鮮 이 滅亡할 때까지도 금기시되었으나 그의 美貌와 재주는 回磁化되어 많은 口傳으로 傳해졌다. 그 뒤 1910年 以後부터 各種 文學과 演劇, 映畫 等의 作品의 素材가 되었으며, 南韓과 北韓을 통틀어 그의 一生을 背景으로 하는 小說들이 많이 登場했다.

방기환 (方基煥)(1979), 신봉승 (1993), 황충기 (2008), 김경민 (2011)(異常 大韓民國 作家) 等이 그를 一代記를 바탕으로 小說 을 썼다. 또한 映畫 로도 製作되었는데, 1985年 에는 李長鎬 監督, 이보희 主演의 《 於宇同 》이 上映되고, 1987年 에는 《 妖花 어을우동 》李 金起炫 監督, 김문희 主演으로 1987年 5月 開封하였다. 2007年 SBS 에서 그가 登場하는 드라마 《 王과 나 》(配役: 김사랑 )가 放映되었다.

各州 [ 編輯 ]

  1. <燕山君日記>를 보면 어우동을 구마(丘麻)로도 부르고 있지만 確實치는 않다.
  2. 이남희, 《클릭 朝鮮王朝實錄》 (다할미디어, 2008) 153페이지
  3. 文定王后의 外할아버지이다.
  4. 박윤창:過去 入格者 情報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5. 이문철, 《通過儀禮와 性》(평단문화사, 2000) 114페이지
  6. 成宗實錄 122卷, 成宗11年(1480 庚子年) 10月 18日(甲子) 5番째記事
  7. 그러나 外間 男子와 書信을 주고받는 것 조차 問題가 되었다.
  8. 뺑덕어멈으로! 한겨레 21, 2003.01.30 第444號
  9. 이남희, 《클릭 朝鮮王朝實錄》 (다할미디어, 2008) 154페이지
  10. 지거費는 世宗大王의 庶子 밀성군의 種으로, 밀성군은 태降水에게 異腹 三寸이 된다.
  11. 《成宗實錄 122卷, 成宗11年(1480 庚子年) 8月 7日(甲) "獻納 김성경이 어을우동과 姦通한 防産수ㆍ어유소 等을 鞠問하도록 아뢰다"》.  
  12. 於宇同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3. 이남희, 《클릭 朝鮮王朝實錄》 (다할미디어, 2008) 155페이지
  14. 成宗 實錄 123卷, 成宗 11年(1480 庚子年) 11月 13日(己丑) 1番째記事
  15. 一說에는 그의 詩가 아니라 防産수 이난의 詩라는 說도 있다.
  16. 이문철, 《通過儀禮와 性》(평단문화사, 2000) 113페이지
  17. 世祖實錄 7卷 世祖 3年 5月 19日子 "義禁府에 惡妻 行 護軍 박윤창의 아내를 釋放할 것을 命하다"
  18. 태强手 移動의 아들은 아님
  19. 中宗實錄 17卷, 中宗 7年(1512 妊娠) 10月 16日(丙辰) 1番째記事
  20. 成宗實錄 219卷, 成宗 19年(1488 무신 / 名 紅치(弘治) 1年) 8月 22日(癸丑) 3番째記事 "박성근이 어미를 殺害한 罪와 奴婢들이 公募한 罪를 調律하라 이르다"
  21. 갈읍리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어우동을 演技한 俳優들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 成宗實錄
  • 大東野乘
  • 송계만錄
  • 燃藜室記述
  • 大東詩選
  • 芝峯類說
  • 金鷄筆談
  • 海東詩選

關聯 資料 [ 編輯 ]

  • 강명관 (2004年 1月 5日). 〈누가 이 女人들에게 돌을 던지는가 | 感動과 於宇同〉. 《朝鮮의 뒷골목 風景》 初 12刷판. 서울: 푸른역사. ISBN   89-87787-74-5 .   |腸= 에 지움 文字가 있음(위치 20) ( 도움말 )
  • 이덕일, 《李德一의 世上을 바꾼 女人들》 (玉堂, 2009)
  • 김용삼, 《재미로 읽는 朝鮮王朝實錄 1》(월간조선사, 2004)
  • 이상각, 《朝鮮王朝實錄:榮光과 挫折의 五百年》 (들녘, 2009)
  • 비키 레온, 《古代의 못 말리는 女子들》 (손명희 옮김, 圖書出版 꼬마이실, 2005)
  • 이덕일, 《女人列傳》 (김영사, 2003)
  • 이문철, 《通過儀禮와 性》(평단문화사, 2000)
  • 배상열, 《朝鮮飛火 (朝鮮王朝實錄에서 찾은 뜻밖의 造船社 이야기》 (청아출판사, 2008)
  • 이남희, 《클릭 朝鮮王朝實錄》 (다할미디어, 2008)
  •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民族文化大百科》 (한국학중앙연구원, 1996)
  • 韓國史事前編纂會 엮음, 韓國고중세寺社田 (嘉藍企劃, 2007)
  • 신봉승, 《어우동 上,中,下》 (甲寅出版社, 1993)
  • 심재완, 역대시조전서 (世宗文化史, 1972)
  • 김용숙, 李朝女流文學 및 宮中風俗의 硏究(淑明女子大學校出版部, 1970)
  • 이응백?김원경?김선풍, 國語國文學資料事前 (韓國事前硏究士, 1994)
  • 신봉승, 《신봉승의 造船社 나들이》 (답게, 1996)
  • 함규진, 《歷史法廷》 (포럼, 2006)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