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브루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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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브루크너
Anton Bruckner
1868年의 모습
基本 情報
本名 요제프 안톤 브루크너
出生 1824年 9月 4日 ( 1824-09-04 )
오스트리아 帝國 안스펠덴
死亡 1896年 10月 11日 ( 1896-10-11 ) (72歲)
오스트리아-헝가리 帝國
性別 男性
職業 作曲家 , 오르가니스트
장르 西洋古典音樂
樂器 오르간

요제프 안톤 브루크너 ( 獨逸語 : Joseph Anton Bruckner , 1824年 9月 4日 ~ 1896年 10月 11日 )는 오스트리아 作曲家 利子 오르가니스트 이다. 交響曲 , 宗敎音樂 , 모테트 로 有名하다. 그의 作品은 豐富한 火星, 複雜한 폴리포니 , 誘導動機, 긴 演奏時間으로 有名하여 獨逸 - 오스트리아 의 浪漫派 最後의 象徵으로 여겨지고 있다.

生涯 [ 編輯 ]

브루크너는 敎師이자 오르가니스트人 아버지에게 音樂을 배우기 始作했다. 그는 補助敎師로도 일했고 마을 樂團에서 바이올린을 켜기도 했으며 마침내 性 플로리안 聖堂 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生前에 오르가니스트로서 國際的인 名聲을 얻었으며, 特히 卽興 演奏 에 能했다고 한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繼續 여러 스승에게 作曲 이나 對位法 等을 배워나갔으며 빈 音樂院 빈 大學 에서 敎職을 맡기도 했다. 그러면서 열한 個의 交響曲 과 세 個의 미사 , 테 데움 等의 宗敎 音樂 을 作曲했다. 그러나 그의 音樂은 살아있는 동안 많은 非難을 받았는데, 이는 그가 바그너의 追從者(바그너派)로 알려져 브람스 를 信奉하는 많은 批評家(브람스派)의 條件 없는 攻擊 對象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의 音樂을 있는 그대로 理解해주는 사람이 周邊에 드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弟子인 페르디난트 뢰베, 프란츠와 요제프 샬크 兄弟 等은 恒常 그의 音樂을 聽衆들이 더 '理解하기 쉽게' 한다는 名分으로 改作하도록 브루크너를 壓迫했고 이에 브루크너 自身의 柔弱함 乃至 꼼꼼함이 덧붙어 只今까지도 問題가 되는 수많은 改訂版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브루크너는 生涯의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제 7番과 第 8番 交響曲, 테 데움 의 成功을 맛볼 수 있었으나 때는 너무 늦었다. 그는 빈에서 死亡했고, 그의 遺骸는 性 플로리안 聖堂 오르간 아래에 安葬되어 있다.

作品 性向 [ 編輯 ]

브루크너의 重要한 作品으로는 交響曲과 宗敎音樂을 꼽을 수 있다. 以外에도 室內樂 作品이나 피아노 獨奏曲 等을 音盤으로 찾아볼 수 있다. 19世紀 西洋古典音樂 에서 브루크너 作品의 位置는 슈만, 브람스가 繼承한 新古典主義的인 構造와 슈베르트가 보여준 個性化된 內容의 結合이며 이러한 傾向은 구스타프 말러 로 繼承된다.

한便, 가톨릭 信者이기도 했고 敎會 오르가니스트였기에 브루크너의 宗敎音樂은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 以後 浪漫主義 宗敎音樂의 脈을 잇는 役割을 했다는 點도 看過할 수 없다. 그의 宗敎音樂은 大規模 合唱과 交響樂의 結合으로 대변될 수 있으며 이러한 傾向은 루트비히 版 베토벤 의 장엄미사의 脈을 잇는 것이다.

作品 [ 編輯 ]

브루크너의 作品目錄

作品 番號"WAB"는 음악학자 레나토 글라스베르거(Renate Grasberger)가 編纂한 "브루크너 作品 目錄"(Werkverzeichnis Anton Bruckner)의 番號이다. 番號는 149番까지 한다.

交響曲 [ 編輯 ]

바短調 交響曲(00番)은 브루크너가 習作用으로 作曲해 첫 番째로 始作되는 一連番號를 붙이지 않은 曲이다. 交響曲 0番은 後年에 愛情을 느껴 破棄할 수 없다고 느낀 作曲者가 故意로 第0番으로 한 것이지 實際로는 첫 作曲 後에 다룰 수 있는 作品이다. 또한, 마지막 交響曲 第9番은 未完成 作品이다. (實質的은 半쪽 完成)

仔細한 內容은 各 交響曲의 文書로 다룬다. 以上 外에 1869年에 着手했지만, 完成을 보지 못한 交響曲 내림나長調의 存在가 確認되고 있다. 스케치의 短篇만 남아 있다.

合唱曲 [ 編輯 ]

室內樂曲 [ 編輯 ]

管絃樂曲 [ 編輯 ]

브루크너와 바그너 [ 編輯 ]

두 사람의 交際 [ 編輯 ]

브루크너가 바그너 音樂을 接하게 된 것은 그가 31歲 때인 린츠에 옮겨서부터이다. 그 무렵 그는 지몰 第히터에게 對位法을 배우기 위해 때때로 빈으로 갔었는데, 그때에 바그너가 指揮하는 演奏會에 갔던 일이 있었다. 그것이 언제부터였고 그가 어떤 印象을 받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로부터 8年 後인 1863年에는 當時 作曲 스승이었던 오토 키츨러 의 勸誘로 [탄호이저]의 스코어를 硏究하여 매우 興味를 갖게 되었고, 게다가 그 해 안에 린츠에서 [탄호이저]의 實際 上演을 接하여 電擊的인 衝擊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後에 키츨러 自身이 指揮하는 로엔그린 彷徨하는 네덜란드人 을 보고 브루크너는 여태까지 그가 接했던 것과는 全혀 다른 音樂에 强한 感銘을 받았다. 2年 後인 1865年에는 뮌헨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의 初演이 열리게 되었는데, 브루크너는 이 樂劇을 보기 爲해 뮌헨으로 갔다. 그곳의 호텔 彼我 야레스차이덴(4계 호텔)에는 有名한 音樂家들이 宿泊하고 있었는데 브루크너는 거기에 가서 안톤 루빈스타인 한스 폰 뷜로 에게 自身이 만든 交響曲 1番의 樂譜를 보이기도 했다. 뷜로가 바그너에게 이 젊은 作曲家에 關한 이야기를 해주었기 때문에 바그너도 興味를 갖게 되어 두 사람의 첫 會見이 實現되었다. 브루크너는 처음에는 大先生님을 만날 勇氣가 없었으나 勸誘를 받아 바그너를 찾아갔다. 그때 어떠한 話題가 있었는지는 傳해지지 않았으나, 브루크너에 依하면 바그너는 매우 親切했었다고 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初演이 延期되었기 때문에 브루크너는 一旦 린츠로 돌아왔으나 6月 19日에는 다시 뮌헨으로 나가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第3回 公演을 보고 '感激 때문에 自己를 잊어버릴 程度'였다고 한다. 린츠에서 브루크너는 大聖堂 오르가니스트 外에도 프로陣이라는 男性 合唱團 指揮者를 맡고 있었는데, 1868年 이 合唱團의 記念 祝賀公演에 노래하는 合唱團을 위하여 바그너에게, 以前에 作曲한 것이라도 좋으니 무엇이든지 한 曲 빌려줄 수 없는가 하고 付託했다. 바그너는 기쁜 마음으로 最近 作曲된 뉘른베르크의 名歌手 5幕의 一部를 건네주었다. 한스 작스의 演說에서 이어서 나오는 '歡喜의 合唱'이었다. 4月 4日에 이것을 指揮한 브루크너의 感激은 매우 컸었다. 1872年 5月, 그 무렵 빈에 살았던 브루크너는 바그너가 빈에 온다는 消息을 듣고 逆으로 마중하러 나갔다. 거기에는 빈 音樂界의 面面들이 櫛比하였는데 列車에서 내린 바그너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브루크너 쪽으로 달려와서 "오, 오! 브루크너 이리 와요. 자네는 내 同僚이다."고 말했다. 이미 그 무렵에 브루크너는 빈 音樂院과 大學에서 音樂 理論을 가르치고 있는 名講師, 敎授였다.

그 이듬해 브루크너는 바이로이트에 가서 바그너를 訪問하고 者作인 2番과 3番을 보여준 이야기는 너무나도 有名하여 여기서 되풀이할 必要는 없을 것 같다. 브루크너 自身이, 보르초겐에게 보낸 便紙로 이 會見에 對해 詳細히 말했는데, 그 가운데에서 그는 바그너가 交響曲 3番의 [第1部]를 다 훑어보았다고 썼다. 이때 제4악장은 아직 스케치뿐이었기 때문에 바그너에게는 그것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브루크너는 이 交響曲 3番을 바그너에게 獻呈하였는데 그 때문에 뒤에 이 曲은 [바그너 交響曲]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다음에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875年 바그너가 또다시 빈에 나타났을 때이며 브루크너가 그를 찾아갔을 때, "자네 交響曲을 연주해야 한다!"고 외쳤다. 바그너는 브루크너를 만날 때마다 "자네 交響曲을 연주해주겠다"고 말했지만 結局 한 番도 實現되지 않았다. 이것은 헛소리로 말했던 것은 아니다. 몇 番이나 빈 필하모닉에게 연주해 주도록 勸했었지만, 樂團 쪽에서는 批評家 한슬리크의 不滿을 사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採擇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882年 7月 파르지팔 初演 直前에 바이로이트에서였다. 브루크너는 검은 禮服을 입고 바그너 집 앞에서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바그너는 브루크너를 보자마자 손을 내밀며 또 "내가 자네 交響曲과 모든 作品을 上演하겠다."고 말했다. 브루크너는 "오, 오! 先生님, 저는 先生님을 崇拜합니다."라고 感激에 차서 말할 뿐이었다.

서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런데 正말 바그너는 브루크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브루크너는 바그너를 얼마만큼이나 崇拜하고 있었을까?

프리드리히 브루메는 바그너가 브루크너의 崇拜를 正當하게 評價하고, 純粹하게 尊重하기에는 너무나도 自己中心的이었다고 말했다. 바그너는 分明히 브루크너를 種種 稱讚했지만, 바그너 쪽에서 接近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브루크너의 모든 作品을 上演하겠다고 말해 놓고는 交響曲 3番 '바그너' 以外의 作品을 알려고 하는 關心조차도 없었다는 것은 事實일 것이다. 指揮者 한스 리히터는 바그너가 種種 交響曲 3番을 眞心으로 稱讚하는 말을 들었다고 했고, 브루크너의 才能을 높이 評價했다고 말했다. 베르너 볼프를 따르면, 바그너의 아들 지크프리트는 그 뒤에 말하기를 "아버지가 브루크너의 모든 交響曲을 自身이 연주하겠다고 말한 것은 本心에서 우러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以上으로 보아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眞相에 가까울 것이다. 바그너는 브루크너의 交響曲 3番 '바그너'를 높이 評價하여, 實際로 上演될 수 있도록 努力한 것은 事實이다. 그러나 自身이 指揮하여 上演한다는 것이나 上演을 위하여 獻身的으로 힘을 쓴다는 意志는 없었던 것이다. 바그너는 브루크너뿐만 아니라 다른 藝術家들을 世上에 認定시키기 爲한 努力은 (그것이 特別히 自己에게 利益을 주지 않는 以上)하지 않았었고, 게다가 自己 作品의 創作과 自作의 上演을 위한 일 때문에 時間을 뺏겨서 그럴 틈조차 없었던 것이다.브루크너 自身도 바그너에 依해 自作이 上演될 것이라고는 거의 期待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또한 그 自身이 너무나도 强하게 바그너 黨에 끌어들여 지는 것을 回避하였다는 것도 事實이다. 그러나 브루크너 自身은 淳朴한 性格이었기 때문에 말 뿐인 約束만 하는 바그너에 對해서는 若干 좋지 않은 氣分을 가졌을 것이다. 뒤에 親舊에게 "바그너는 注意하는 것이 좋겠다. 自己 利益이 될 때에는 親切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全혀 無關心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니벨룽의 半指 도 파르지팔度 바이로이트 音樂祝祭에서 보았고 彷徨하는 네덜란드人 以後의 바그너 오페라를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作曲家 바그너에 바친 커다란 崇拜의 마음은 끝내 바꾸지 않았던 것이다.

브루크너 交響曲(作品)에서의 바그너의 影響 [ 編輯 ]

브루크너의 바그너 樂劇에 對한 感歎의 마음은 全的으로 音樂에만 限定되었었다. 이 先輩의 樂劇 思想이나 그 活動에 對해서는 全혀 關心이 없었다. 브루메에 따르면, 브루크너는 트리스탄의 피아노 스코어를 熱心히 私報하였으나 거기에 붙여진 텍스트를 베끼기는커녕 읽지도 않았다고 하며 발퀴레를 보았을 때 그 끝幕에서 '브륀힐데는 왜 火刑에 處하는가'하면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물었다고 한다.

브루크너가 最初의 交響曲을 쓰기 始作하기 前부터 그는 바그너 音樂을 接했었고 또한 키츨러로부터 바그너 作品을 硏究하도록 勸誘를 받기도 했었다. 브루크너보다 10살 아래인 李 린츠의 樂章은 第히터처럼 對位法 理論에만 集中하지 않고 베토벤에서 바그너에 이르는 作品, 分析을 브루크너에게 하게 시켰다. 브루크너가 바그너에게서 배운 것 中의 하나는 크로마틱(半音階)와 엔하모닉(딴 이름 한 소리)의 넓은 利用法이었다. 키츨러 指導로 作曲된 交響曲 0番과 그 뒤의 1番에는 이와 같은 바그너의 새로운 手法이 發見된다. 樂器 使用法에서도 1番 1樂章의 트롬본은 브루크너가 처음으로 接한 바그너 作品인 탄호이저 를 생각나게 한다. 交響曲 2番에서는 1樂章에 바그너의 리엔値 中의 '리엔値의 祈禱'에 나오는 動機가 거의 그대로 오보에에 나타난다. 그러나 브루크너가 意識的으로 바그너에게 기울어짐을 나타낸 것은 交響曲 3番 '바그너'인데, 巨匠에게 獻呈된 曲인 만큼 火星이나 樂器法에 바그너의 影響을 엿볼 수 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발퀴레 에서 引用한 것도 몇몇 보이지만, 이러한 引用은 나중에 作曲家 自身이 除去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바그너적 色彩가 完全히 사라진 것이 아니고, 特히 제2악장 全體에는 발퀴레 의 安定된 浪漫的 雰圍氣가 짙게 나타난다. 主婦인 제2주제인 졸림의 動機 에 恰似하다. 第4樂章조차도 半音階的 火星의 活用이나 玄의 細密한 音型, 그리고 끝맺음에 이르는 壯大한 金管樂器의 부르짖음 等 탄호이저 以後의 바그너 世界를 彷彿케 한다. 1878年 作曲된 絃樂5重奏 F長調 에 關하여, 가이링거는 "그 火星이나 調바꿈에 있어서 '지크프리트'의 放浪者 場面에서 影響을 받은 것 같이 생각된다."고 말했다. 또한, 이 曲의 끝 樂章에는 뉘른베르크의 名歌手의 베크메이서의 動機와 恰似한 旋律도 나타난다. 브루크너는 마지막 세 個의 交響曲에 바그너 튜바를 使用함으로써 바그너에게 對한 崇拜의 마음을 表示하였다. 第7交響曲 第2樂章의 스케치가 1883年 1月 22日에 完成되었는데 그 무렵부터 브루크너는 바그너의 죽음을 豫感하게 되었다고 한다. 같은 해 3月 13日 바그너는 베네치아에서 世上을 떠났는데 다음날 14日 브루크너는 그 通報를 받았다. 이때 브루크너는 音樂院에서 이 第2樂章 아다지오의 마지막 部分을 作曲 中이었는데 葬送의 뜻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아다지오의 코다로 35마디를 덧붙여 썼다고 한다. 이 部分의 처음과 끝에 오는 무거운 金冠 合奏에서는 바그너 튜바의 울림은 勿論이고 全體가 [半指]와 [파르지팔]을 彷彿케 한다. 그로부터 2年 後 브루크너는 性플로리안에서 이 코다의 音樂과 神들의 黃昏 의 지크프리트 葬送 音樂을 결부시켜서 卽興演奏를 했다고 한다. 그 以前에도 그는 間或 바그너의 旋律을 主題로 한 오르간의 卽興演奏를 하였다.

7番, 8番, 9番이라고 하는 3曲의 交響曲에서는 모두 느린 樂章이 特히 바그너 手法에 對한 接近을 보여준다. 8番의 第3樂章 아다지오는 터치가 부드럽고 깊숙한 音響에서 트리스탄과 共通된다. 氣分을 풀 길이 없는 不安한 主題의 半音階的人 움직임, 特히 그 伴奏의 당김音에 依한 셋잇단音標의 흔들림, 無限旋律, 그리고 半音階 和音의 上昇 等은 트리스탄과 이졸데 2幕의 世界이다. 初期의 브루크너에 關해서는 想像도 못할 程度인 纖細한 美가 바그너를 통해서 꽃피었다. 한슬리크가 말했듯이 여기서 하프를 使用한 것도 바그너에 對한 接近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에 비해 交響曲 9番의 첫머리는 파르지팔 을 상기시킨다. '第1主題는 바그너의 파르지팔 第3幕의 前奏曲, 聖 金曜日의 音樂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慰勞받지 못하는 氣分 속에서 開始되지만, 곧 '創意 動機'의 聯想을 거치면서 '그랄(聖杯)'的인 上昇을 이룬다. 다만 이 브루크너의 白鳥의 노래 가 바그너의 白鳥의 노래 와 다른 點은 後者가 드라마의 客觀性이 갖는 氣分을 傳하려고 하는 데 비해 前者는 絶對音樂이며 그 背後에 아무것도 없는 淸潔함을 가졌다는 點이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는 아주 氣分 나쁠 程度의 莊嚴함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바그너가 브루크너의 後記 交響曲을 듣지 못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는 틀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感激했을 텐데 말이다.

브루크너와 나치의 專用 [ 編輯 ]

브루크너는 바그너와 함께 專用(專用)되었으며 그의 交響曲은 나치 獨逸 時節 徹底하게 나치의 宣傳用으로 利用되었다. 그러나 바그너와 달리 브루크너는 一般的으로 직접的인 나치와의 過去 問題에 때문에 큰 汚名을 얻지는 않았다. 또한, 그가 게르만 民族主義, 反유대主義者가 아닌 게 밝혀졌고 유대人 音樂家 구스타프 말러 와 親한 師弟關係였다는 事實이 알려졌다. 그의 作品은 오스트리아와 獨逸에서 별다른 外部 抵抗 없이 레퍼토리로 利用되었고, 이스라엘에서도 그의 音樂은 演奏禁止가 되지 않았고 자주 演奏된다.

브루크너와 오스트리아의 合倂, 나치 修正主義와 專有의 政治學 [ 編輯 ]

1937年, 레겐스부르크의 잊을 수 없는 惡名높은 寫眞에서 나치의 軍服을 차려입은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作曲家인 브루크너의 大理石 胸像을 존경스러운 듯이 바라보며 서 있다. 國家 社會主義 寫實主義에 따라서, 아돌프 로덴베르거가 만들어낸 이 胸像은 鐵十字를 잡아채고 있는 禿수리가 새겨져 있는 나치 紋樣과 그 곁에는 金으로 둘러싸인 祭壇 위에 올려져 있다. 브루크너는, 1841年에 바이에른의 루드비히 1歲의 指示 아래, 파르테논 神殿을 본떠 만들어진 레겐스부르크의 神殿, 卽 過去 獨逸의 文化的 英雄들로 가득한 이 神殿에 獨逸 文化의 또 다른 先覺者로서 合流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브루크너는 제3제국 속으로 充分히 들어올 資格이 있는 獨逸 作曲家들 속으로 브루크너를 充分히 偶像化시켜 합류시키는 것이 그 目的이었으나, 實際로 이것은 8個月 後의 獨逸의 오스트리아에 對한 合倂의 徵兆였다.

피터 街블, 막스 아우어(國際 브루크너 協會 會長), 괴벨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에 依한 演說 等을 包括하는 이러한 레겐스부르크의 行事는 一連의 音樂會, 國際 브루크너 協會의 行事, 그리고 獨逸 나치 黨의 모임 等을 包含하는 다양한 音樂 政治的 行事의 가장 核心的이었다. 브루크네리안의 偏狹한 視角으로 이 行事를 살펴본다면 그것은 但只 지난해의 브루크너 死亡 40周年 記念行事를 마무리하는 行事 程度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30年 後半의 나치의 政治的 戰略의 더욱 넓은 觀點에서 볼 때, 이것은 正確하게 말하면 그들의 合倂을 위한 하나의 出發點에 不過한 것이었다.

1936年은 이러한 브루크너 死亡 40週期를 包含하여, 괴벨스에 依하면, 모든 베르사유의 '束縛'에서 解放되는 해였다. 獨逸은 다시 强力한 軍事力을 갖추었으며, 1936年이야말로 오스트리아, 체코, 그리고 폴란드로 領土를 넓혀가기 위해 前進하는 해였다. 이제 괴벨스가 스스로 '危險 地帶'라고 명명했던 動員의 時期인 1936年 時期에 同時에 이루어졌던 複雜한 國內 宣傳 캠페인 속에 이 作曲家의 이미지가 어떻게 造作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國家 社會主義의 文化的 偶像으로서의 브루크너의 重要性은 單純히 大理石 胸像부터 出發하여, 旗발, 鐵十字에 이르기까지 注目받았으며, 甚至於는 게르만의 文化的 愛國主義로까지 擴大되었다. 브루크너를 第3帝國의 文化的, 政治的 目的에 連結하려는 行事들은 시시한 것에서 藝術的으로 매우 模糊한 것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고, 只今 現代 사람들의 귀에는 매우 純粹하게 들리는 그의 音樂도 1930年代와 1940年代의 大衆들의 귀에는 매우 다른 意味로 刻印되었다.

히틀러 個人의 關心 [ 編輯 ]

萬若 히틀러가 個人的으로 브루크너를 한 人間으로서, 作曲家로서, 그리고 北오스트리아의 같은 兄弟로서 브루크너를 생각하고, 關心을 두지 않았다면 브루크너를 美化하는 나치의 宣傳 캠페인은 全혀 없었을 것이다. 實際로 히틀러는 幼年 時節, 브루크너의 交響曲에 매우 感動되었다. 히틀러의 藝術家로서의 젊은 時節의 鬪爭은 매우 잘 알려졌다. 브라나우에서 온 이 平凡하고 젊은 藝術家는 빈의 美術界에 들어가려고 하나 結局 失敗하게 된다.그리고 그는 分明히 이러한 그의 身世를 初期에 빈의 藝術界로부터 村사람으로서 아웃사이더나 다름없었던 브루크너와 同一視하게 된다.

괴벨스의 1941年 3月 13日의 日記를 보면, 또한 히틀러가 빈과 關聯해서 크게 傷處받았고, 이는 結局 直接 브루크너와 連結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性 플로리안으로 가라! 브루크너가 作曲하던 修道院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바로크 建物인가! 우리는 이곳으로부터 나온 聖職者에게 關心을 돌려 그 音樂同僚와 브루크너 協會를 위한 보금자리를 찾아내었다. 얼마나 張大한 計劃인가! 그의 音樂으로 世界를 征服한 시골 靑年! 오늘날 이 區域이 얼마나 文化, 歷史, 甚至於 藝術的 힘에 있어서 풍요로운가! 偉大한 總統 아돌프 히틀러는 여기에 文化의 中心地를 세우려고 한다. 빈과 平衡을 이루는 平衡錘로서, 그리고 빈은 徐徐히 撤收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는 빈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린츠를 더욱 좋아한다. 그는 純全히 그의 費用으로 性 플로리안에 그 代案을 만들려고 한다."

한스 크레크치의 卓越한 論文은 從前까지의 히틀러의 브루크너에 對한 執着, 特히 그의 個人的 保護 아래 性 플로리안을 바이로이트처럼 만들려는 計劃을 비롯하여 詳細하게 記錄하고 있다. 이러한 所謂 '브루크네리안 바이로이트'는 세 가지의 目的을 갖고 있었다.

첫째, 性 플로리안은 '브루크너의 不滅 作品을 위한 성스러운 殿堂'(브루크너의 傳統을 維持하고 促進하기 위해)이 되어야 한다. 둘째, 바이로이트와 같이 브루크너 페스티벌의 場所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性 플로리안은 音樂 協會의 場所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프로젝트와 別途로, 브루크너의 音樂(交響曲)은 라이브 音樂會와 라디오 放送에서 公式的인 의전을 위해 使用되었다. 알버트 스피어는 뉘른베르크에서의 大規模 黨 行事에서의 그의 文化에 對한 演說에 앞서 每番 브루크너 交響曲의 한 樂章이 演奏되는 光景을 다음과 같이 回想한다. 1937年 6月 30日의 惡名높은 '健康한' 獨逸 藝術을 讚揚하는 나치 主催의 퍼레이드는 브루크너 3番 交響曲의 팡파르로 始作되었다. 지타가 公認하듯, 브루크너의 멜로디는 어떠한 莊嚴하고, 儀禮的인(ceremonial) 面이 있고, 더욱 重要한 것은, 그것은 바로 바이로이트의 代 作曲家에게 獻呈된 3番 交響曲과 關聯하여 바그너 自身이 言及한 바로 그 主題였다는 點이다. 바그너와 바이로이트는 히틀러가 政權을 잡은지 첫해에 이미 새로운 體制에 依해 政治化되었다. 그리고 나치는 이제 브루크너의 常套性을 '바그너-審포니스트'로서 强調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더욱 많은 것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한 觀點은 1934年에 있었던 'Die Musik'에 드러난 나치의 親衛隊 音樂會 批判으로 더욱 擴張된다, 그 論評者는 베토벤을 第3帝國의 先驅者로서 包含한다.

"바이로이트의 巨匠, 卽 獨逸 變革의 가장 重要한 開拓者 中의 한 사람이며, 第3帝國의 가장 大膽한 祭司長인 바그너는 '彷徨하는 네덜란드인'의 序曲에 依해 描寫되었다. 그리고 브루크너의 紀念碑的인, '에로이카(英雄)'로 불릴 수 있는 7番 交響曲은 英雄的으로 全體 作品의 音調에서 뿐만 아니라 느린 樂章의 葬送行進曲에서도 베토벤의 英雄交響曲과 連結되어 있다. 브루크너의 그 느린 樂章은 또한 어떤 英雄의 죽음을 슬퍼하는 비가와도 같은데, 그 英雄은 바로 바그너와 關聯이 있다."

1945年 4月, 7番 交響曲의 아다지오가 獨逸 라디오의 히틀러의 죽음 消息에 이어 흘러나올 때, 그 브루크너의 音樂은 또다른 '英雄'의 죽음을 記念하기 위해 種種 使用되었을 것이다.

브루크너, 바그너, 그리고 國際 브루크너 協會 [ 編輯 ]

初期, 나치와 바이로이트와의 緊密한 關係는, 그들의 友好的인 關係에도 國家社會主義者들과 國際 브루크너 協會 間의 些少한 摩擦을 誘發한다. 히틀러가 政權을 잡기 前에, 이 協會의 目的은 매우 單純했다. 卽 그들의 目的은 안톤 브루크너의 作品을 널리 퍼뜨리고, 作品들의 眞正한 에디션을 위한 作業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非公式的인 두 個의 目的이 또한 있었다.

브루크너를 널리 流布된 브람스派의 패러다임과 어울리게 合理的이고, 論理的인 作曲家로서 紹介하는 것이었고, '바그너-審포니스트'로서의 브루크너의 版에 박힌 이미지에 反對하는 것이었다. 國際 브루크너 協會는 나치의 財政的 支援에는 매우 기뻐했으나(괴벨스는 그의 레겐스부르크 演說에서 眞正한 브루크너 에디션을 위한 資金의 支援을 公開的으로 約束했다.), 이러한 相互 滿足 뒤에는 브루크너와 바그너에 관계된 풀 수 없는 緊張의 要素가 잠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緊張은 1937年 5月, 레겐스부르크 演說이 있기 한 달 前에 아우어가 두 作曲家 사이의 確然한 스타일에서의 差異點을 이끌어내는 論文을 發表하게 되자, 表面化되었다. 아우어의 目的은 劇音樂의 世界에서 바그너의 뿌리를 브루크너의 敎會 오르가니스트로서의 그것과 對比시키는 것이었다. 重要한 差異點은 오케스트레이션과 관계되었다. 브루크너의 言語는 오르간 走者로서의 그의 經驗으로부터 나오며, 그 音響은 바그너의 影響을 除去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의 後期 交響曲에서는 바그너 튜바가 使用되기도 한다. 그런데 아우어의 論文에서 異常한 點은 自身과 協會는 反 바그너主義를 '主張하거나 主張했던' 것은 아니라는 註釋을 있다는 點이다. 그것도 더블 스페이스로 매우 强調한 狀態로 말이다. 이러한 拒否의 政治的 含蓄의 意味는, 特히 體制 그 自體와의 衝突을 무릅썼던, 第3帝國 時代의 바그너를 批判하는 音樂 解說者에게는 그 意味가 確實한 것이다. 아우어 自身은 明白히 브루크너와 바그너를 分離하기 위한 그의 努力에서 主要 흐름을 거스르기는 했지만, 그의 努力은 그가 바이로이트 音樂祝祭가, 오페라가 演奏되지 않는 날, 브루크너의 交響曲을 연주함으로써 브루크너 音樂祝祭와 잘 統合될 것이라고 말한 바로 그 報告書에 依해 똑같은 理由로 평가절하되었다.

괴벨스는 레겐스부르크 演說에서 機會를 보고 있었다. 卽 兩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行事의 共同 後援者인 協會를 侮辱하고 싶지도, 두 作曲家를 連結하려는 널리 普及된 國家 社會主義 文化 觀點을 毁損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두 番 그의 演說에서 바그너를 暗示하였다. 初期에 그의 演說에서 그는 브루크너의 音樂을 '바그너 藝術의 交響樂的 歪曲'이라고 본 사람들을 批判하였다. 이러한 觀點은 누구도 否認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브루크너의 '오르가니스트-交響曲 作曲家 패러다임'의 支持者인 아우어는 괴벨스가 다음과 같이 言及했을 때, 그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브루크너의 바그너에 對한 經驗은 그의 音樂的 言語의 共鳴에서 거의 革命에 가까운 影響을 주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만이 그것을 우리가 眞正한 브루크너의 스타일로서 認識할 수 있다. 바로 그 瞬間부터 앞으로, 그 敎會 音樂家는 同時에 거의 完全하게 後退하여, 그로부터 나와 特有한 交響曲 作曲家가 된다."

괴벨스가 言及한 것은, 바그너에 依해 刺戟된 變形(metamorphosis)이다, 卽 敎會音樂街로부터 交響曲 作曲家로의. 더욱 孤高한 世俗的 領域에로의 브루크너 格上의 이미지는 괴벨스의 1936年 以後의 國內 宣傳 캠페인의 必須的이었다.

브루크너의 音樂과 國家 社會主義者들의 '美學' [ 編輯 ]

히틀러의 個人的 關心과 바그너와의 關聯性 外에, 나치에게 있어서 브루크너 音樂의 魅力은 무엇이었을까? 音樂에서 '獨逸的인 것'에 對한 探究는 第3帝國 동안 音樂 批評家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問題였다. 그것은 獨逸 文化에서 重要한 歷史와 關聯된, 人種的인 숨겨진 脈絡으로부터 分離될 수 없는, 그리고 19世紀 中盤에 있었던 反 멘델스존 캠페인과 그 世紀 後半에 있었던 브람스-브루크너 論爭 等에 關한 探求였다. 그러한 이슈는 第1次大戰이 끝난 後에 조금은 다른 形態로 다시 表面化되기 始作했는데, 그 當時는 國家의 傷處받은 自尊心이 學者들과 言論家들 사이에서 文化的 同質性을 위한 探究를 促進하던 때였다. 이러한 探究 中 初期 1次 大戰 後의 내셔널리즘의 몇 가지 例는 가볍고, 별로 深思熟考한 듯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지만, 그것의 大部分은 1930年에 이르러서는 매우 强力하게 이데올로기化되고, 公開的으로 人種差別的으로 되었다. 그때까지 얻은 結論은 매우 簡單했다. 卽 아리안의 音樂은 英雄的이고, 高尙하고, 體系的이고, 崇高하며, 哲學的이고, 그리고 靈的이다. 反面, 비아리안의 音樂은 매우 시시하고, 皮相的이고, 劣等하고(특히 유태的인 特性이 있다고 여겨짐), 內容 없이 裝飾的이며, 折衷主義的이고, 그리고 뿌리 없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W. 헤르조그 는 게르만 패러다임에 적합한 특별한 例를 提示하였다. 바흐의 平均率, 푸가의 技法, 베토벤의 합창교향곡과 레오노레 序曲 3番,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리고 브루크너의 5番과 9番 交響曲 等이 그것이다. 그는 特別히 브루크너 交響曲 中에서 5番의 푸가的인 피날레와 9番 交響曲의 아다지오 樂章을 例로 들었다. 헤르조그의 글은 特히 푸가를 强調하였는데, 그것은 貴族的인 獨逸의 歷史가 있었으나, 1次 大戰 後, 그것의 '英雄的인 性格'을 喪失하게 되었다. 푸가와 코랄, 卽 聖스러운 獨逸 藝術의 두 個의 軸은 '黃金의 20世紀' 동안 타락됐던 것이다. 그것들은 例를 들어 쿠르크 바일의 作品, 'Die Dreigroschenoper' 等에서 甚至於 戱畫化되어 왔다. 바이마르 時代의 悲觀主義, 冷笑主義 等의 認知된 背景에 反對하여, 卽 都市의 文化的 價値가 시골의 그것에 비해 널리 流布되고, 그리고 室內 交響曲이 새로운 交響樂的 패러다임으로 된 그곳에서 브루크너의 音樂은 分明히 時代錯誤的인 것으로 나타났음에 틀림이 없다. 北오스트리아의 敎師였던 브루크너는 疾風怒濤의 理想的인 象徵으로서 待接받았고, 푸가와 코랄은 그의 音樂的 表現에서 核心이었으며, 그의 敍事的인 交響樂的 設計는 그 規模에 있어서 甚至於 그 當代에도 前無後無한 것으로 여겨졌다. 國家 社會主義者들에게 呼訴하였던 것은 바로 莊嚴함과 華麗함, 그리고 靈的인 面을 지닌 바로 이러한 그의 音樂이 지닌 紀念碑的인 規模였다. 히틀러 自身은 브루크너 交響曲의 피날레를 鑑賞하였고, 特別히 그는 1937年 뉘른베르크에서의 黨 行事에 이 音樂을 엔딩 音樂으로 使用하였다.

그러나 브루크너만이 19世紀에 깊고, 重厚한, 그리고 大規模 管絃樂團을 위한 音樂을 作曲하고, 푸가를 作曲했었는가? 브람스도 亦是 그의 4番 交響曲의 피날레에서 莊嚴하고, 重厚한 푸가를 使用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브람스는 나치의 모델에 어울리기에는 너무나 聯關이 없는 부르주아 빈 音樂界의 主流에 屬해 있었다. 그는 疾風怒濤의 이미지에 맞기에는 너무나도 인텔리的이었고, 都市的이었다. 그럼 大規模 管絃樂曲을 즐기던 그 當時 生存했던 偉大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같은 作曲家는 나치의 宣傳에 어울렸을까? 잘 알려진, 不便했던 1930年代 中盤의 슈트라우스와 나치의 關係는 世界的으로 有名한 살아 있는 作曲家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을 例證시켜주었다. 그들은 너무도 獨立的이었고, 利己主義的이었고, 너무도 믿을 수 없었다. 甚至於 내셔널리스트였던 한스 피프츠너 亦是 信賴할 수 없는, 窮極的으로는 第3帝國의 政治的 目的에 非友好的이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렇다! 오직 죽은 作曲家만이 나치의 文化部 宣傳 目的에 效果的으로 利用될 수 있었으며, 바로 브루크너가 理想的이었다.

그에 關한 많은 逸話, 便紙, 그리고 出版된 많은 印刷物에도, 브루크너는 恒常 音樂 뒤의 人間에 對해서는 그의 一代記를 숨길 수 있었기 때문에 理想的이었다. 리하르트 柁樓스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歷史는 아마도 空虛함을 싫어하며, 歷史的 大衆作家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

브루크너의 大衆作家는 아마도 괴벨스였고, 그의 레겐스부르크에서의 17分間의 演說은 이 오스트리아의 作曲家를 再創造하는 캠페인에서의 正初를 提供하였다.

괴벨스의 레겐스부르크 演說 [ 編輯 ]

히틀러 自身은 이날 아침, 意識에서 演說하지 않기로 했다. 브루크너를 再創造하는 任務는 宣傳 擔當 長官인, 괴벨스에게 맡겨졌는데, 그는 매우 卓越하게 簡潔하고, 效率的인 演說로 그 任務를 훌륭히 完遂하였다. 演說은 3個 部分으로 되어 있었는데, 첫 番째 部分은 브루크너의 시골 出身으로서의 뿌리를 浪漫的으로 言及하였고, 두 番째는 그에 對한 音樂 批評家들의 非難에는 그가 犧牲羊이었음을 强調하였으며, 마지막으로는 브루크너를 그의 天才性과 靈的인 面이 '敎會의 모든 束縛으로부터 그 自身을 自由롭게' 한 作曲家로서 規定하였다. 이 마지막 部分은 가장 重要한 部分으로서, 1936年의 나치와 바티칸 間의 關係의 崩壞와 一致하는 것이었다.

시골 審포니스트 [ 編輯 ]

괴벨스는 그가 言及하는 이 作曲家의 感傷的인 肖像畫 속에서 다양한 상투 語句를 羅列한다.

그는 그의 知的인 好奇心에 依해 汚染되지 않은 純粹한 어린아이 같음이 如前히 남아 있던 謙遜한 사람이었으며, 그는 作曲家로서, 그의 '초라한 事務室'에도 不拘하고, 그의 '獨逸 音樂의 創造性'의 威力을 통해 成功하고, 有名하게 된 사람이었다. 괴벨스는 또한 브루크너의 村婦로서의 一代記를 强調하고, 그의 大地와의 聯關性, 그의 '自然과의 神祕로운 親和性', 그리고 그의 損傷되지 않은 村婦로서의, 卽 히틀러와 나누어 가진 그러한 뿌리를 强調하였다. 따라서 이 시골 天才의 逆說은 오직 血統과 人種의 要素的인 힘을 理解함으로써 說明될 수 있다. 그가 시골 出身이라는 것 外에도, 브루크너의 '儉素한 事務室'의 가장 核心的인 部分은, 괴벨스에 依해 强調된 部分인 그의 敎師로서의 그의 作品이었다.

히틀러는 그것을 認知하였고, 第3帝國의 千年王國을 成功하게 하기 위해서는, 나치의 敎化 政策의 先鋒은 敎育되어야만 생각했던 것이다. 나치主義에 同調하는 敎師들은 그들이 上昇한 責任의 位置에 있음을 發見하였으나, 그들의 任務는 바이마르 時代 동안 持續하여오던 그것과는 너무도 關聯이 없었다. 知的인 發達에 焦點을 맞추기보다는, 나치의 敎育者들은 아리안의 人種的 敎化를 包含하는 個人의 人格을 形成해야만 했다. 敎育 雜誌들은 人種的·政治的 도그마를 强化하는데 奉仕하였다. 實際로, 'Der Deutsche Erzieher'(獨逸 敎育家)의 全體的인 이슈는 브루크너에게 바쳐졌다. 그 속에는 레겐스부르크에서의 브루크너 祝祭 後에 얼마 되지 않아 出版된 論文이 包含되어 있었다. 이들 에세이의 大部分은 똑같은 形態를 取하고 있는데, 卽 그것은 브루크너를 슈베르트와 막스 레거의 좋은 同僚로 認識되게 하는 職業인 그 自身의 敎師와 敎師의 아들로서의 브루크너를 强調하였던 것이다. 敎育家로서, 브루크너는 人種的으로 純粹하였고, 北 오스트리아 土壤과 그의 關係는 世代에까지 미쳤다.

브루크너, 유대人 批評의 犧牲羊 [ 編輯 ]

邪惡한 빈 批評의 犧牲羊으로서의 브루크너를 强調한 괴벨스의 演說의 두番째 部分은, 더욱 廣範圍한 文化的 目的을 充足하였다. 한슬리크와 그 一派들에 對한 猛烈한 非難은 괴벨스로 하여금 最近에 形成된 이데올로기的인 敎義, 卽 音樂 批評의 견딜 수 없음(또는 더욱 一般的으로는 藝術批評)에 對해 宣言하도록 하였다. 1936年의 가을에, 괴벨스는 音樂, 藝術, 그리고 映畫 等의 저널에 널리 流布된 信條인 '藝術 批評(Kunstkritik)'에 反對하는 公的인 宣言을 하게 이른다.

藝術 批評은 이데올로기的인 背景을 따를 때에만 適切하며, 그렇지 않으면 '藝術에 對한 註釋과 說明'만이 저널리즘에서 許容될 수 있는 形態라는 것이었다. 괴벨스는 브루크너를 이러한 새로운 信條의 形成과 關聯하여 認定한다.

"萬若 藝術에 對한 註釋과 說明의 公開的인 實踐이 '새로운' 獨逸 안에서의 公式的인 채널에만 依해서만 可能하도록 法으로 制限됐다면, 우리는 또한 그를 괴롭히는 批評家들에 依해 죽을 때까지 苦痛받았던, 孤獨 속에서 鬪爭했던 브루크너의 恩惠를 갚았다고 믿는다."

이러한 反유대主義的人 言及은, 그것이 오늘날에는 거의 反響을 일으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의 聽衆들에게 影響을 미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한 言及은 유대人을 非生産的이고, 甚至於는 寄生한다고 非難하는 나치 이데올로기와 完全히 그 脈絡을 같이 하고 있었다. 에두아르트 한슬리크 막스 칼벡 은 作曲할 수 없었고, 그들은 作曲을 했던 創造的이고, 正直한 藝術家들에 對해서 쓰거나 어쩌면 破壞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萬若 괴벨스의 演說이 브루크너, 批評과 國際的인 反유대主義 사이의 關係에 對해서는 매우 模糊하다고 할지라도 프리츠 스코르체니 의 아래와 같은 言及은 그러한 模糊性을 完全히 除去시키고 있다.

"브루크너가 그의 藝術家로 사는 生活을 始作했을 때, 國際的인 反유대主義 유럽 自由主義란 탈을 쓴, 이미 獨逸의 精神的인 것에 對해서 鬪爭을 着手하기 始作하였는데, 그것은 特히 藝術에서 刺戟的이고, 煽動的이었다."

이러한 歪曲된 유대人에 對한 認識, 卽 한몫 보려 돌아다니는 떠돌이로서의 유대人의 典型的인 모습은 괴벨스에 依해 個人的으로 만들어진 프로젝트인 'Der ewige Jude'라는 宣傳用 映畫 속에서 그 後 가장 尖銳하게 나타났다. 이 映畫는 工場 속에서 奮鬪하는 健康한 아리안의 勞動者의 솜씨 있는 場面을 操心스럽게 疑心할 것도 없이 熱心히 일하는 아리안에 依해 만들어진 商品을 놓고 昇降이를 벌이는 게토의 淺薄하고 鬚髥을 기른 유대人과 나란히 比較하고 있었다

브루크너와 信仰 [ 編輯 ]

그러나 괴벨스는 브루크너 修正主義의 가장 重要한 部分을 마지막 演說을 위해 남겨 두었다. 그것은 브루크너가 바그너와 알게 된 後, 敎會 音樂家로서의 役割로부터 後退하고, 바그너의 影響으로부터 빠져나온 後에 어떻게 獨步的인 交響曲 作曲家가 되었는지에 對한 巧妙한 電氣 敍述이었다. 바그너의 世界와 關聯을 맺은 後에 브루크너는, 禮拜式에 對한 義務的인 位置를 넘어서, 交響樂에서의 絶對的인 地位로 上昇하였다.

"여기서 그의 天才性은 敎會에 束縛된 모든 拘束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는 形式을 만든다는 意氣揚揚한 陶醉感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自由에 對한 한없는 熱望이 그의 靈魂 內部에서 울부짖었다."

勿論 테데움과 詩篇 150篇과 같은 後半部의 성스런 作品들은 無視되었는데, 이는 게르만 音樂 學者들과 批評家들 모두가 決코 試圖한 적이 없는 失手였다. 브루크너가 로마 가톨릭에 獻身했다는 事實이나 甚至於는 그가 篤實한 가톨릭 信者이었다는 事實조차 레겐스부르크의 演說에서는 完全히 省略되었다. 그의 宗敎的 信念은 簡單히 "神에 對한 믿음"(Gottglaubig)이라고 描寫되었는데, 이는 나치의 빈틈없는 非基督敎的 思想을 담은 政治的인 作品이나 다름없었다. 信仰心(Gottglaubigkeit)의 內容을 理解하기 위해서 우리는 1933年부터 36年까지 敎會와 關聯된 一連의 事件들에 簡略하게 注目할 必要가 있다. 1936年에는 團地 브루크너의 記念日을 定하고 藝術 批評 禁止令을 내렸을 뿐 아니라, 한便으로는 重大한 事案을 담고 있었던 1936年 7月의 會則과, 그로부터 겨우 4個月 後에 公式的이면서 對案的인 宗敎 告白으로서의 'Gottglaubig'의 成立으로 더욱 增幅된 國家 社會主義者들과 로마 가톨릭 間의 關係가 深刻하게 冷却될 兆朕이 보이기 始作했다.

나치와 敎會의 關係는 히틀러의 公的으로 問題를 避하려고 한 히틀러 個人의 欲望으로 더욱 複雜하고 巨大한 主題가 되었다. 甚至於는 '나의 鬪爭'(Mein Kampf)은 이 이슈를 더욱 避해 갔다. 그러나 히틀러의 班 敎權的人 信念은 內部에서는 全혀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었고, 宗敎의 問題는 總統과의 協商 過程에서 다시금 問題化된 것이었다. 헤르만 라우스稱(Hermann Rausching) 은 히틀러가 "게르만의 基督敎는 하나의 歪曲이며, 게르만人이 되거나 아니면 基督敎人이어야 한다. 둘 다 될 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마음속에서 神을 믿고 느끼는 자유로운 人間들을 必要로 한다." 고 個人的으로 言及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言及이 內包하고 있는 것은, 不確實한 死後世界에 對한 믿음은 無益할 뿐 아니라, 懦弱함의 表示라는 點이라는 것이었다. 組織化한 宗敎, 特히 基督敎에 對한 이러한 敵愾心은 古代 그리스가 현대 獨逸의 重要한 모델이라는 觀點과 19世紀 中盤부터 後半에 이르기까지 나타난, 特히 니체와 바그너를 包含하는 獨逸 藝術家와 知識人들에 依해 支持가 된 確信이었다.

히틀러는 組織化된 宗敎에 對해 初期에는 宥和政策을 使用하였고, 그는 皇帝의 退位 直後에, 政治的 方向이 없었던 改新敎徒들에 關해서는 일찍이 成功的이었다. 이 獨逸 改新敎徒들에게 있어 反유대主義는 그다지 問題가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反유대主義는 그다지 크게 가톨릭 敎會를 妨害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公式的인 關係에 深刻한 妨害物은 나치의 所聞에 들리는 '共産主義的' 性格이었다. 게다가 바티칸은 볼셰비즘을 히틀러의 1933年 全體主義의 原形이 되었던 그들의 무솔리니와의 1929年의 라테란 協定으로 例示된 것과 같은 全體主義보다 더욱 重大한 國際的 威脅으로 看做하고 있었다.

獨逸의 11月 革命 以後에 敎皇廳은 바이마르 共和國과의 公式的인 協定 調印을 막으려고 努力했으나, 그들은 히틀러를 이길 수 없었다. 1933年의 이 國家的 協定은 로마에 對한 많은 問題를 다음과 같이 明確히 하였다. 敎會에 對한 財政的 支援, 聖職者의 法的 地位 保障,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일이나 바티칸에 對한 直接 聯關 等에 干涉하지 않겠다는 나치의 誓約, 그러나 높은 稅金이 賦課될 豫定이었다. 왜냐하면, 敎會는 모든 水準에서 國家 政治의 하나로서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곧 나치가 가톨릭의 일에 對해 傍觀하지 않을 것임이 明白해졌다. 그들은 非公式的인 脅迫을 爲한 能熟한 戰略을 세웠고 그것에 依해 說敎는 監視받고, 新婦들은 괴롭힘을 當했으며, 勿論 가톨릭교회의 權威를 損傷시키는 宣傳活動度 나치의 靑少年 組織을 통해 이루어졌다.

1936年까지 獨逸과 바티칸 사이의 關係는 漸次 돌이킬 수 없는 地境에 이르게 되었다. 그 頂點은, 젊은이들에게 反유대主義와 反基督敎注意를 政治的으로 注入하고 市民의 自由를 侵犯했을 뿐 아니라 總統(Fuehrer)을 神格化한 나치를 非難하는 敎皇의 會則(Mit brenner Sorge)이었다. 國家 社會主義者들은 卽刻的으로 敎會에 對한 政策, 特別히 바티칸에 對한 政策이 失敗했음을 認識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치즘을 하나의 宗敎 그 自體로 認識하고, Gottglaubig를 公式的인 用語로 만들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用語는 "게르만의 本性에 맞는 種族的이고 適切한 信仰" 이라는 意味가 있었다. 異敎徒的인 것도 아닌 이러한 非基督敎的인 志向은 敎會를 떠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自身이 如前히 宗敎的이라고 믿게끔 하였으나, 그것은 또한 그들의 信仰을 버린 유대人들이 獨逸人에게 包含될 수는 없다는 것을 保證해 주는 것이었다. 한 個人의 敎會 밖에서의 靈的인 本性을 維持하는 것의 重要性은 物質的이고 無神論的인 볼셰비즘에 對한 反對가 나치 敎義의 不變的인 要素라는 點에서 必須的이었다.

要컨대 第3帝國은 그들이 믿는 모든 것, 卽 國家 社會主義者들의 '革命'은 政治的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精神的이라는 그 무언가를 公式的인 것으로 만들었다. 獨逸 藝術은 漸次 성스런 藝術이 되어 갔으며, 音樂은 나치의 가장 성스런 顯示였다. 성스런 藝術로서의 音樂에 對한 觀點이 나치가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19世紀 後半 獨逸 全般에 퍼져 있었던 儀式이었고, 作曲家들과 哲學家들에 依해서 同時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바이마르 時代의 一角에서는 이러한 哲學에 疑問을 提起했지만, 성스런 藝術로서의 音樂은 1903年代에 不安한 政治的 소용돌이와 함께 곧 蘇生되었다. 1937年 레겐스부르크 記念式은 브루크너를 性 발할라(Valhalla) 寺院의 하나의 神으로 指定했다. 그의 音樂은 성스런 言語와 나치즘의 神話的 宗敎가 될 것이었다. 日曜日 아침의 브루크너 記念式과 3帝國의 새로운 宗敎 戰略 間의 連結은 바로 그날 午後 群衆의 大集會를 통해 더욱 鞏固해졌다. 레겐스부르크에 모인 約 200,000名의 사람에게 하는 演說을 통해서 히틀러는 처음으로 깊은 믿음(Gottglaubigkeit)이라는 用語를 公式 使用했다.

"나는 決코 그 누구도 이 民族을 다시 흩어지게 하거나 宗敎的 見解差로 인한 싸움으로 우리를 어렵게 만들도록 許容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民族은 앞으로 代代로 우리 歷史 속에서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旗幟는 늘 우리 마음속에 刻印되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 民族과 靈光, 自由, 우리의 共同體를 위한 義務를 實踐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神에 對한 깊은 믿음(Gottglaubigkeit)을 가지고 未來로 精進해 갈 것입니다. 神이 우리를 돕지 않았다면, 우리가 只今껏 이룬 모든 것들이 어떻게 可能했겠습니까?"

篤實한 브루크너는 그 '神聖한 神'의 메신저가 될 것이었다. 그의 交響曲, 特히 슈베르트의 "天上의 範圍(Heavenly Length)"를 凌駕하는 靈魂的인 느릿한 進行은 하나의 宗敎的인 體驗으로 看做할 만했고, 血緣과 地緣을 나눈 이들만이 完全히 그 메시지를 理解할 수 있었다. 이러한 現象은 1940年代 初盤, 빈의 音樂祝祭(Dunkelkonzerte)에서 가장 잘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은 어두운 빈의 콘서트하우스가 敎會에 參席하는 것과 같은 效力을 지닌, 브루크너의 音樂을 듣는 성스런 곳으로 바뀌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다른 作曲家들도 그런 프로그램에 參加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이라이트는 언제나 브루크너의 交響曲이었다. 그러한 한 프로그램 案內書의 寫本은 이러한 强力한 宗敎的인 意味를 잘 보여준다. 中間休息 前에는 모차르트의 레지나 챌理가, 直後에는 브루크너가 唯一하게 神 自體에 獻呈했던 第9番 交響曲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作曲家는 國家 社會主義者들이 그를 '神의 메신저'로 만들기 위해서는 基督敎로부터 分離되어야만 했었을 것이다. 敎會 音樂家로서의 브루크너는 完全히 無視되었던 것이다. 疑心할 바 없이 레겐스부르크에서의 記念式과 同時에, 1937年의 한 記事의 作成者는 브루크너의 가톨릭 主義에 對해 非難을 하려고 試圖했다. 피터 라베(Peter Raabe)는 物質世界에 對한 브루크너의 "超然함(deafness)"을 强調했다. "神聖함은 마음의 純粹함으로부터 나온다." 라고 宣言하면서 그는 "왜냐하면 그들은 神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덧붙였다. 라베는 "神과 對話하는" 交響曲 作曲者를 描寫하면서, 그러나 그가 重要하지도 않은 敎會 音樂을 쓰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矛盾은 信仰心(Gottglaubigkeit)의 脈絡 以外에서 認識되지 않을 수 없다.

베르너 코르테(Werner Korte)는 한瑟르크(Hanslick)의 猛烈한 非難에 對한 根據로 브루크너의 가톨릭的인 뿌리를 引用했으나, 브루크너를 "가톨릭 精神의 殉敎者" 로 보거나 그의 音樂을 "基督敎를 위한 謝罪 行爲"로서 認識하는 데에는 反對를 했다. 라인홀드 짐머만(Reinhold Zimmermann) 은 實質的인 問題에 接近했는데, 卽 "가톨릭的인 것"과 "아리안"的인 것은 矛盾된 槪念이라는 것이었다. "브루크너를 完全히, 甚至於는 源泉的으로 가톨릭的이라고 보는 것은 根本的으로는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그의 人性과 業績을 評價하는 데 있어 疑心할 바 없이 支配的인 位置에 있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의 作品이나 人生의 人種 志向的인 認識이다." 짐머만의 생각은 모든 사람은 게르만人이던가, 아니면 基督敎人이라는, 히틀러가 헤르만 라우스稱(Hermann Rausching)에게 보내는 至極히 個人的인 論評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괴벨스의 레겐스부르크 演說은 莊嚴하고 意識的인 그 瞬間을 오스트리아 合倂의 必然性과 聯關시키면서 祝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온 대로, 그의 戰略은 이를 하나의 敎條的인 宣傳 道具로 利用하려는 보다 廣範圍한 目標를 達成하는 데 있었다. 1940年代의 性 플로리안에 對한 잘 짜인 히틀러의 計劃은 좀 더 나아가 戰爭을 통해 어떻게 브루크너를 나치의 文化的 偶像으로 남길 것인지를 描寫하고 있다. 비록 브루크너의 그러한 上昇이 決코 完全히 實現되지는 않았지만, 린츠 帝國 브루크너 오케스트라 (Linzer Reichs Bruckner Orchestra)와 브루크너 合唱團은 1942年 獨逸 라디오와 因緣을 맺었고 一般 公演과 放送을 통해 1945年 봄까지 公演을 繼續했다.

前後 時期 [ 編輯 ]

브루크너 交響曲(音樂)에 對한 나치의 轉用은 前後에 어떤 結果를 가져왔을까? 아니면 이것은 어떻게 濫用된 것일까? 或者는 아마도 特히 原作이 없거나 덜 實用的인 音樂이 時代를 不問하고 그러한 濫用에 抵抗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音樂은 그저 自傳的인 修正主義의 複雜한 그물 속의 한 가닥 줄이었고, 그 안에서 브루크너의 人生은 急進的인 政策들을 支持하고, 'Kunskritik에 對한 攻擊을 有效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政治的 神話를 위해 宗敎的 偶像을 만드는데 다시 쓰였다. 同時代의 獨逸 觀客들이 나치의 宣傳을 믿었든 안 믿었든 間에, 또 그들이 아다지오에선 神과 疏通하고 푸가의 피날레에서는 튜턴族(게르만)의 英雄主義를 느끼게 하는 田園的인 스케르초에서 그들 共同의 나라(領土)를 느꼈던 안 느꼈는지는 아직 解決되지 않은 또 다른 重要하고 複雜한 問題이다. 境遇가 어떠하든 間에 나치의 브루크너 캠페인에 對한 戰後의 卽刻的인 國內의 影響은 오래가지 않은 것 같았다. 린츠 브루크너 오케스트라는 聯合國 支配下에 있던 1945年 5月에 필하모닉 브로드캐스팅 오케스트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것의 브루크너에 對한 志向은 겨우 한 달 後 눈 깜짝할 새에 그 이름을 브루크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바꾸게 했다. 틀림없이 이 작고 單獨的인 事件은 前後 브루크너의 評判에 좋은 影響을 주었다. 바그너와 달리 브루크너는 一般的으로 직접的인 나치와의 過去 問題 때문에 큰 汚名을 얻지는 않았다. 그의 作品은 오스트리아와 獨逸에서 별다른 外部 抵抗없이 레퍼토리로 利用되었고, 이스라엘에서도 그의 音樂은 보이콧되지 않았다.

그러나 樞軸國 外에서의 브루크너에 對한 待接은 그다지 單純하지 않았다.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特히 獨逸에 점령당했던 유럽地域에서 特히 1940年에서 50年代에는 브루크너의 音樂이 必然的으로 獨逸 占領을 상기시킬 만하였다. 戰後 美國에서는 브루크너의 音樂이 울려 퍼질 수 없었다. 그의 音樂은 나치의 文化的 캠페인에 對해서도 亦是 모르고 있던 大部分의 콘서트 觀客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事實 40年代 後半에는 美國에서 브루크너 르네상스의 一抹의 徵兆가 보이는 듯도 하였다. 그것은 1948年에 美國 브루크너 協會가 協會誌 코드 앤 디스타드(Chord and Dischord)를 再發刊했을 때를 전후해서였다. 그 會誌는 發刊 空白에도 不拘하고 1969年까지 잘 運營되었으며, 그 때에는 더는 브루크너의 公演이 神奇한 것이 아니었다. 오이겐 요훔(Eugen Jochum)과 後에는 베르나르트 하이팅크(Bernard Haitink),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클라우스 텐슈테트(Klaus Tennstedt), 그리고 其他 여러 音樂家가 브루크너 交響曲을 音盤化하는데 熱情을 보였다. 좀 더 最近에는 CD의 發達과 함께, 그런 作業은 그의 第2番, 第3番, 第4番, 第8番 交響曲의 元本 버전과 같은 眞品들도 만들어 냈다.

브루크너에 關한 記事들은 戰爭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時期에 獨逸과 오스트리아의 雜誌에서도 繼續 나타났다. 勿論 나치의 캠페인이 벌어지던 時期의 規模와는 比較가 안 되었다. 戰後의 學問은 더욱 實證的인 論調를 띠었다. 人種과 民族에 關한 硏究는 社說이나 分析的인 問題들에서나 볼 수 있었다. 獨逸 學者들은 熱烈한 게르만 民族主義者도, 反유대主義者度 아니었다고 判明된 브루크너에 對해 謝過를 해야 할 必要를 느끼지 않았다. 또한, 그 雜誌들과 編輯長들은 나치 支配 동안 바로 그들 雜誌에 揭載된, 人種과 宗敎와 브루크너에 關聯된 歪曲들에 對해서 억지로 否認해야 할 必要를 느끼지도 않았다. 國家 社會主義者들의 問題는 大部分 言及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過去의 回想보다는 再建이 重要하다는 노판트(Nullpunkt) 政策의 影響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沈默은 前後를 넘는 期間까지 擴張되었는데, 레오폴트 노바크(Leopold Nowak)의 브루크너 傳記인 뉴 그로브(New Grove)는 그 좋은 例가 된다. 나치의 그 엄청난 이데올로기的이고 煽動的인 技士들은 盧바크의 參考 資料에서 除外되었다. 그러한 그가 利用한 얼마 되지 않는 나치의 케케묵은 著作들은 大部分 그 어떤 政治的인 內容도 담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2次大戰 終戰 이듬해는 브루크너 死亡 50周忌가 되는 해였고, 린츠에서는 國際 브루크너 協會의 記念行事가 있었다. 1946年 7月 27日에는 名望 있는 協會의 議長이었던 막스 아우어(Max Auer)가 지난 12年間의 沈默에 對해서 注目할 만한 演說을 했다. 그의 演說은 다음과 같은 文句로 始作했다.

"우리는 안톤 브루크너 死亡 50周忌에 그를 기리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죽음을 哀悼하기보다는 그의 삶과 새로운 復活을 祝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宣言 아래에서 뭉칠 것입니다. 王은 죽었지만, 그 王은 우리 곁에서 永遠히 살 것입니다(The king is dead, long live the king). 브루크너는 王입니다. 絶對 音樂의 王입니다."

비록 言及되지는 않았지만, 히틀러와 바그너의 歡迎(幻影)은 아우어의 말들에 나타났다. 表面的으로 아우어는 브루크너의 죽음을 기리고 있었으며, 다시 브루크너를 硏究하고 待接하는 새로운 時代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 裏面에는 또 다른 幽靈들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王이 죽고, 卽 總統의 죽음에 잇따라서, 오스트리아의 作曲家 브루크너는 나치 煽動의 잿더미로부터 復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絶對音樂의 王"은 리하르트 바그너와의 音樂的, 政治的 聯關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었다.

아우어의 숨겨진 또 다른 言及은 1937年, 그가 總統에게 브루크너 메달을 授與했던 그 해에 있었다. 그 言及은 겨우 1年 前에 그가 發表한 內容을 다시 되풀이했던 것일까? 그 때 괼러리히-아우어(Gollerich-Auer) 自敍傳의 最終판의 序文에서 그는 바이마르 時代의 物質主義(卽物主義)에 對한 攻擊을 徐徐히 敢行하기 始作했다. 그 때는 바로 "藝術的인 볼셰비즘이 極端的으로 行해지고 있었던" 때였고, 브루크너의 "신을 神聖視하는 藝術"은 (總統을) 보다 나은 世上 1936年의 世界로 이끄는데 이바지했다. 10年 뒤에 아우어의 린츠 演說은 브루크너의 오스트리아 血統과, 그의 國際的인 影響力과 나치 敎理를 分明히 否認하는 그의 主張 모두를 强調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演說이 成功的으로 아우어 自身의 以前 發言들을 相殺시켰던 것일까? 그가 過去에 對한 言及은 全혀 없이도 模糊하게 새로운 時代를 宣言하기에 充分했던 것일까? 分明히 그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브루크너 協會를 再建하려고 애쓰고 있을 때 더 많은 公演을 위해 또 더 많은 觀客層의 確保를 위해서 누가 過去의 傷處들을 다시 꺼내고 싶어했겠는가?

브루크너와 獨逸의 政治的 狀況은 決코 戰爭 以前이나 戰爭 中이나, 或은 戰後에도 코드 앤 디스타드지에 言及된 적이 없다는 데에는 意見이 紛紛하다. 勿論 美國에서 브루크너는 美國 內의 政治的 爭點이 되지 않았다. 그는 國家 社會主義者로서의 活動 때문이 아니라 그의 作曲 스타일이 그 當時 美國 學界에 蔓延되어 있던 論理나 均衡, 規模를 重視하는 브람스的인 패러다임에서는 낯선 것이었기 때문에 主流에서 벗어났다. 그의 音樂은 오히려 最近에 콘서트의 레퍼토리나 音盤 目錄으로 더 잘 알려졌다. 그러나 브루크너라는 사람과 그의 作品들은 如前히 美國의 音樂的 談論의 바깥에 자리하고 있다. 事實 現在의 브루크너 作品集은 그저 그러한 傾向에 若干의 動搖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리고 비록 社說的, 歷史的, 文化的, 그리고 分析的 問題와 같은 重要한 이슈들이 여기서 처음으로 或은 새로운 觀點으로 論議되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只今 가지고 있는 브루크너에 對한 이미지가 意識的이든 無意識的이든 얼마나 나치의 宣傳에 影響을 많이 받았는지에 對한 問題意識을 느끼고 硏究해야 할 많은 것들이 남아 있다. 例를 들어 前後 브루크너에 對한 重要한 解釋(느린 템포들이나 豐富한 하모니를 그 例로 들 수 있다)이 나치의 宗敎的 偶像으로서의 브루크너의 性向을 無意識的으로 現代의 交響曲 舞臺나 錄音 스튜디오에 옮겨다 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오늘날 "率直함", "純粹性", "有機體" 等과 같은 말들이 나치 時代의 브루크너에 對한 談論들과 함께 明白하게 政治的으로 記號化되었다는 事實을 無視한 채 브루크너를 分析하고 修正할 수 있을까? 分明히 그러한 質問들은 이 에세이가 다룬 領域 外에서도 廣範圍하게 論議될 수 있다. 그러나 그 質問들은 窮極的으로는 解明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브루크너 硏究는 過去 事實에 對한, 特히 第3帝國 時代 동안의 브루크너에 對한 어두운 評價를 外面한 채로는 絶對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參考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