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베유 (哲學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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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one Weil (1921)
시몬 아돌핀 베유
學者 情報
出生 1909年 2月 3日 ( 1909-02-03 )
프랑스의 기 프랑스 파리
死亡 1943年 8月 24日 ( 1943-08-24 ) (34歲)
잉글랜드의 기 잉글랜드 켄트주 애시포드
宗敎 로마 가톨릭교회
時代 20世紀 哲學
地域 西유럽
學派 基督敎 哲學 , 신플라톤주의 , 神祕主義

시몬 아돌핀 베유 ( 프랑스語 : Simone Adolphine Weil , 1909年 2月 3日 - 1943年 8月 24日 )는 프랑스 의 哲學者, 神祕主義者, 政治 活動家이다. 20世紀 左派 知識人 사이에서 異例的인 行步를 選擇한 그는 漸次 宗敎的이고 神祕主義的인 것에도 關心을 갖게 되었다. 平生 동안 글을 썼지만, 大部分의 글은 死亡 前까지는 많은 關心을 끌지 않았다. 1950年代, 1960年代에 들어 그의 글들이 유럽 大陸과 英語圈 世界에서 名聲을 얻었다. 그의 思想은 廣範圍한 分野에 걸쳐 폭넓은 學問的 主題를 다룬다. 알베르 카뮈는 시몬 아돌핀 베유를 "우리 時代의 唯一한 偉大한 精神"이라고 描寫하기도 했다. 오빠인 앙드레 베유 니콜라 부르바키 클럽의 一員이기도 했던 數學者 였다.

生涯 [ 編輯 ]

시몬 베유는 醫師인 아버지 베르나르 베유와 加漆리엔(現在의 폴란드 의 한 地域) 出身의 어머니 살로메 라인헤르츠 사이에서 파리 불바르 드 스트라스부르 에서 태어났다. 兩親은 유대人으로서 母系쪽으로는 거의 유대人 傳統에서 벗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9年 리세(Lycee) 페넬롱에 入學하였고, 1924年 에는 리세 빅토르 뒤루 로 轉學하여 프랑스 의 哲學者인 르네 르 센 밑에서 工夫한 後 다음해 有名한 리세 第4 앙리에서 假名 알랭으로 잘 알려진 哲學者 에밀 샤르티에 의 指導를 받으며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로의 入學을 위한 準備班에 들어간다. 1927年 에 에콜 노르말 入學 試驗에 떨어지지만, 다음 해에 合格하여 알랭의 激勵와 指導를 통해 데카르트 , 플라톤 , 칸트 哲學 을 理解하는 데에 熱中하다. 1930年 에 에콜 노르말을 卒業한 後, 다음 해에 哲學으로 아그레가시옹 을 땀으로써 리세의 先生 資格을 取得한다. 이 時期에 시몬은 社會主義 및 勞動運動에 많은 關心을 갖기 始作하며 여러 番에 걸쳐 農場에서 農夫들 틈에 섞여 일을 하면서 勞動의 뜻을 몸소 느끼고 배운다. 1931年 에는 勞動組合 聯合會議 (CGT)에 參席함과 同時에 階級鬪爭에 關한 隨筆을 써 雜誌 《레포르》(L'Effort)에 發表하며 얼마안가 이 雜誌에서 勞動組合을 위해 積極的으로 活動한다. 1932年 여름, 獨逸에서 滯留하며 1789, 1871, 1917年 革命의 歷史와, 當時 獨逸의 狀況을 分析하는데, 그를 통해 共産主義者들의 安逸함을 깨닫고, 官僚化되고 革命의 反逆者가 되어버린 소비에트 聯邦을 糾彈하기에 이른다 [1] . 1933年 에는 甚至於 蘇聯 에서 追放된 레프 트로츠키 파리 에 있는 그女의 父母의 집에 묵게 하였으며, 트로츠키 와 蘇聯과 勞動者階級을 主題로 열띤 論爭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4年 12月 에 시몬은 알스톰 電子會社에 就職하여 다시 勞動者로 일을 하지만 허약한 健康 狀態 때문에 1月에 한 달間 休息을 取한 後 다시 4月까지 鐵鋼工場에서 일을 한다. 이와 같은 끈질긴 勞動 體驗은 1936年 까지 繼續된다.

1937年 4月 에 시몬 베유는 이탈리아 旅行을 하던 途中에 밀라노 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의 《 最後의 晩餐 》을 觀覽하였고, 以後 아시시 에 있는 산타 마리아 大聖堂 조토 가 그린 프레스코 를 觀覽하면서 神的 靈感을 받는다. 여기서 只今까지의 自身의 삶에 커다란 轉換點을 맞게 되었다. 1938年 에 두 番째로 이탈리아 旅行을 하면서 이를 다시 體驗한다. 第2次 世界 大戰 이 勃發하자 나치즘 의 歷史的 背景을 일리아스 에 敍述된 暴力을 例로 삼아 1939年 에서 1940年 까지 長篇의 隨筆인 《 일리아드 또는 暴力의 詩 》(L'Iliade ou le poeme de la force)로 整理한다. 以後 나치 獨逸 의 軍隊가 체코슬로바키아 의 首都인 프라하 를 占領하였다는 消息을 듣고 그女가 固守하던 平和主義 에 懷疑를 갖는다. 나치즘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곧 바뀌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女의 눈에는 共産主義가 希望이 될 수는 없었다. 오히려 프롤레타리아를 彈壓하는 싸워야 할 敵으로 看做한다 [2] .

1940年 에 시몬은 古代 印度哲學에 깊은 關心을 갖고 바가바드기타 우파니샤드 를 熱心히 읽는다. 그러나 같은 해 6月 에 獨逸軍이 파리 에 入城하자 베유 家族은 툴루즈를 거쳐 마르세유 로의 避難길에 나선다. 避難의 渦中에도 시몬은 自身의 내면적 省察에 關한 內容을 手帖에 적었고, 그 內容이 그女의 事後에 《 카이에르 》( 프랑스語 : Cahiers )라는 冊으로 出刊되었다. 시몬이 이 時期에 摩尼敎 , 그노시스 의 原電과 關聯 書籍을 읽으면서 그리스도교의 本質과 發展에 對해 깊이 硏究한다. 같은 해에 샤를 드 骨 自由 프랑스 를 宣言하자 이에 反對하면서도 나치 獨逸 의 蠻行과 프랑스 占領 에 抗議하는 等의 레지스탕스 活動을 하였다. 그러나 이도 오래가지 못해 끝내 베유 家族 全體가 英國 으로 亡命하여 런던 에 定着한다. 1942年 에는 家族들과 함께 美國 으로 旅行을 하였고, 이때 그女는 뉴욕 을 訪問하고 그곳에 큰 靈感을 얻었다. 그러나 美國 旅行에서 돌아온 後에 健康이 惡化되었고, 結局 營養失調 結核 으로 쓰러진 시몬 베유는 1943年 켄트주 애시포드 에 位置한 療養所에서 死亡하였다.

哲學 思想 [ 編輯 ]

"가장 人間的인 文明은 肉體勞動을 最高의 價値로 삼는 文明"이라고 이야기 했던 적이 있다. 바로 이 點이 한 가지 端緖가 된다. 社會의 分業化와 體系化의 核心에는 恒常 精神勞動과 肉體勞動의 二分法이 도사리고 있고, 肉體勞動에 비해 精神勞動을 重視하는 價値 評價가 內在되어 있다. 體系는 最高의 上級者가 가장 精神的인 勞動에, 그리고 最下의 階層은 가장 肉體的 勞動에 重視하는 構造로 作動한다. 베유는 바로 이 構造를 崩壞 시켜야 한다고 한다. 單純한 結果지만 어떤 上級者라도 모두 類似한 肉體的 勞動에 從事하게 되면, 그 社會의 體系는 決코 肥大해 질 수 없다. 따라서 베유가 提案했던 人間的인 文明이 實現된다면, 人間 個體 한名 한 名을 작은 手段들로 看做해 온 國家 같은 巨大 體系들은 더 以上 발을 붙일 수가 없을 것이다.

著書 [ 編輯 ]

시몬 베유의 著書들은 몇몇 雜誌에 寄稿한 글들을 除外하고는 大部分이 死後에 出版된 冊들이었다.

  1. Sarrot, Jean-Christophe (2005). 《Balades litteraires dans Paris (1900-1945)》. nouveau monde. 108쪽.  
  2. Sarrot, Jean-Christophe (2005). 《Balades litteraires dans Paris (1900-1945)》. nouveau monde. 1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