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송 陽孔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本文으로 移動

송 陽孔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송 陽孔

송 陽孔 (宋襄公, ? ~ 紀元前 637年 , 在位: 紀元前 651年 ~ 紀元前 637年 )은 中國 春秋時代 宋나라 의 軍주다. (子), 自保 (?父), 시호 陽孔 , 作爲는 工作이다. 桓公 의 아들. 春秋 五霸 로 여기기도 한다.

卽位 [ 編輯 ]

紀元前 651年 에 宋나라 共의 자리에 오른다. 양공은 목이 (目夷)라고 하는 異服兄이 있었고 王位를 木耳에게 讓步하려고 했지만, 목이가 拒絶해 宋나라 公이 된 뒤에 목이를 宰相에 임명하였다.

卽位 直 後, 齊나라 桓公 이 主催하는 會盟 (會盟)에 參加하고, 그 後도 種種 會盟에 參加했다. 양공은 사사로운 日보다 例를 重視하는 理想主義者였다.

紀元前 643年 에 桓公이 死亡하였다. 제나라 國內에서는 後繼를 둘러싸 內亂 狀態가 되었다. 이것에 對해서 양공은 會盟을 열어 조나라 (曹), 위나라 (衛), 周나라 (?) 等 小國들을 거느려 일찍이 宋에 亡命해 왔던 太子 소(昭)를 齊나라로 보내고, 齊나라의 內亂을 鎭壓하여 소를 제나라 임금이 되게 하였다. 이 사람이 효공 이다. 또 會盟에 오지 않았던 등나라 先攻 을 잡고 뒤이어 늦게 온 症나라 賃金을 삶아 죽여 祭物로 바쳤다.

紀元前 639年 , 齊나라· 楚나라 와 會盟하고 宋나라가 盟主가 되었다. 예전에 목이는 宋나라가 盟主가 되는 것은 分數에 맞지 않다고 간하였으나 양공은 듣지 않았다. 곧 양공은 楚나라· 秦나라 (陳)· 蔡나라 · 虛나라 ·조나라를 불러들여 會盟하였으나, 이때 楚나라에게 監禁되어 盟主로서의 體面이 깎였다

이듬해, 양공은 雪辱을 위하여 위나라·虛나라·등나라 等을 거느리고 楚나라의 줄을 대고 있었던 鄭나라 를 쳤다. 이때에도 목이가 諫하였지만 양공은 듣지 않았다. 初 聖王은 君을 일으켜 鄭나라를 救援하러 向했고, 兩 軍은 宋나라 洪水(泓水)의 논두렁에서 戰鬪를 벌였다.

洪水 戰鬪 [ 編輯 ]

楚나라軍은 宋나라軍에 비해 壓倒的 大軍이었다. 거기서 敵이 도하하고 있는 동안에 攻擊해야 한다고 宰相인 木耳가 말했지만, 양공은 助言을 無視했다. 楚나라軍은 渡河를 다 했지만, 아직도 戰鬪 大型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木耳는 다시 여기서 攻擊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양공은 이것도 許諾하지 않았다. 마침내 樵軍은 戰鬪 隊形을 整頓해 兩軍은 激突했지만, 當然히 楚나라의 壓勝으로 끝났고, 양공은 넓적다리에 화살이 꽂혀 傷處를 입었다.

돌아온 다음에 왜 그 때에 攻擊하지 않았던 것이냐고 追窮받고 양공은 "敵의 진형이 整備되지 않았고 戰鬪態勢度 갖추지 않았는데 攻擊하는 것은 君子가 取할 道理가 아니다" 라고 對答하였고 목이는 이것을 듣고 氣가 막혀서 "싸움이란 이기는 것이 目的인데 어찌 平時의 禮儀가 適用되겠습니까."라고 했다.

以後, 秦나라 의 孔子仁 중이(重耳, 後의 문공 )가 亡命 中에 宋나라를 訪問했다. 양공은 厚하게 歡待하였고, 馬車 20勝을 보냈다.

紀元前 637年 , 洪水 戰鬪에서 받은 넓적다리의 傷處가 原因이 되어 死亡하였다.

先代
아버지 송 桓公 瘀熱
第20代 宋나라 君主(誦功)
紀元前 651年 ~ 紀元前 637年
後代
아들 송 成功 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