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1歲 니카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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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1歲
Σ?λευκο? Α?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된 셀레우코스 1세의 그리스 조각상의 로마 복제품
헤르쿨라네움 에서 發見된 셀레우코스 1歲의 그리스 彫刻像의 로마 複製品
셀레우코스 帝國 의 第1代 바실레우스
臺數 1代
在位 紀元前 305年?紀元前 281年
前任 알렉산드로스 4歲
後任 안티오코스 1歲 小테르
이름
셀레우코스
別號 니카토르
身上情報
出生日 紀元前 358年 頃
出生地 마케도니아 王國
死亡日 紀元前 281年 (77歲)
死亡地 트라키아
國籍 셀레우코스 帝國
王朝 셀레우코스 王朝
父親 안티오코스
母親 라오디케
配偶者 아파마
시리아의 스트라오니케
子女 아파마
안티오코스 1歲 小테르
아카이오스
필라
宗敎 古代 그리스 宗敎

셀레우코스 1歲 니카토르 ( 그리스어 : Σ?λευκο? Α? Νικ?τωρ , 힌디어 : ???????? , 紀元前 358年 ~ 紀元前 281年 )는 알렉산드로스 大王 의 事後 分裂된 帝國의 承繼權을 두고 싸웠던 디아도코이 들 中 한名이다.

帝國이 分裂된 後 바빌론 의 總督으로 任命되었고, 後에 시리아 이란 地域에 셀레우코스 帝國 을 세워 紀元前 281年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누스에게 암살당하기 前까지 統治했다. 그의 稱號인 Nicator(니카토르)는 그의 아들인 안티오코스 1歲 小테르 가 붙여준 稱號인데, 그 뜻은 勝利者 란 뜻이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大王 의 페르시아 遠征에 參與하였다가 알렉산드로스 帝王의 民族融合政策으로 페르시아 搜査 에서의 集團 結婚式에서 박트리아 의 王의 딸과 結婚했다.

生涯 [ 編輯 ]

그는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2歲 麾下의 貴族이자 將軍이었던 안티오코스 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때부터 軍事的 關心이 많았던 그는 마케도니아군에 入隊를 하여 漸次 그의 立地를 다져가게되고 後날 필리포스 2世와 알렉산드로스 3世의 눈에 띄게 되었고 特히 알렉산드로스의 東方遠征때 함께하였다. 代表的으로 이수스 戰鬪 , 가우가멜라 戰鬪 에서도 參與한다.

디아코도이의 分裂 [ 編輯 ]

하지만 紀元前 323年 , 아케메네스 王朝 페르시아의 領土 相當 部分을 征服한 大王 알렉산드로스 3歲 바빌론 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4歲 는 아직 엄마인 록社네 의 뱃속에 있었고 大王은 後繼者를 指名하지 못하고 죽었다. 大王의 病勢가 危重하다는 말을 듣고 急히 달려온 마케도니아 將軍들은 明確한 後繼者가 없다는 事實을 알게 되자 곧바로 딴 생각들을 품기 始作한다. 當時 大王의 臨終을 지켜본 將軍들 中 重要한 人物들을 꼽아보면 아래와 같다.

아래는 臨終 자리엔 없었지만 重要한 人物들이다.

  • 안티파트로스 (Antipater) : 마케도니아 攝政, 마케도니아에 滯留中, 將軍들 中 最年長者
  • 카산드로스 (Cassander) :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 크라테로스 (Craterus) : 팔랑크스 指揮官, 後任 마케도니아 攝政, 킬리키아에 滯留中
  • 폴리페르콘 (Polyphercon) : 안티파트로스 事後 마케도니아 攝政
  • 안티고노스 (Antigonus) : 프리기아의 社트라프, 모노프脫모스(Monophtalmos, "애꾸눈")
  • 데메트리오스 (Demetrius) : 안티고노스의 아들, 폴리오르케테스(Poliorketes, "都市 攻擊者")

처음 懸案은 다음 王을 누구로 할 것인가였다. 멜레아그로스 와 步兵 將校들은 필리포스 2歲 의 私生兒, 卽 大王의 異腹 동생이었던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 를 擁立할 것을 主張했지만, 페르디카스 는 알렉산드로스 大王의 第1王妃의 子息이 태어나기를 기다리자고 主張했다. 結局 록社네 는 아들을 낳았고 兩側의 立場을 折衷하여 아리다이오스 와 갓난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各各 필리포스 3歲 (필리포스 3歲 아리다이오스)와 알렉산드로스 4歲 로 擁立하였다. 하지만 필리포스 3世는 癎疾 患者였고, 알렉산드로스 4世는 갓난아이였기에 페르디카스가 王國 攝政 이 되고 멜레아그로스가 그를 補佐하기로 했다. 하지만 페르디카스는 곧 멜레아그로스를 暗殺하고 全權을 차지했다.

바빌론 會議 [ 編輯 ]

權力을 잡은 페르디카스는 바빌론에서 會議를 開催 하여 將軍들에게 帝國 各地의 社트라프 자리를 分配했는데, 프톨레마이오스 는 이 때 이집트 를 받아 基盤을 다질 수 있었다. 에右메네스 를 除外한 모든 有力 將軍들이 마케도니아人이었으로 마케도니아의 向方이 重要해졌는데, 마케도니아는 最古參인 안티파트로스 크라테로스 가 共同 統治하기로 했다. 마침 알렉산드로스의 訃告를 틈타 아테네를 中心으로 한 그리스 폴리스들이 叛亂을 일으켰으나 두 將軍이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에게 慘敗했는데, 이를 〈 라미아 戰爭 〉이라고 한다.

最高 地位를 차지한 페르디카스 는 權力慾이 甚해져 아내와 離婚하고 알렉산드로스 大王의 누이였던 클레오파트라와 再婚하려고 했는데, 그 이혼당한 아내가 안티파트로스 의 딸이었으므로 그의 憤怒를 사게 되었다. 이에 안티파트로스 크라테로스 , 안티고노스 , 프톨레마이오스 가 남몰래 손잡고 페르디카스에 對해 叛亂을 일으키기로 했다.

디아도코이 戰爭 [ 編輯 ]

紀元前 320年 프톨레마이오스의 軍隊가 大王의 管을 마케도니아 아이가이(Aigai)의 王室 墓地로 運柩하던 페르디카스 側 軍隊를 襲擊하여 管을 奪取하면서 兩側의 本格的인 對決이 始作되었다. 統合된 帝國을 維持하고자 했던 에右메네스 가 페르디카스의 命에 따라 叛亂者들 中 하나인 마케도니아 共同 攝政 크라테로스 와 싸워 戰士시켰지만, 이집트 로 遠征을 떠났던 페르디카스가 갑작스레 暗殺되면서 全面戰으로 飛火하지는 않았다.

트리파라데이소스 協定 [ 編輯 ]

以後 〈 트리파라데이소스 協定 〉을 통해 戰後 處理가 이루어졌다. 새 攝政은 안티파트로스 가 되었으며 두 王( 필리포스 3歲 알렉산드로스 4歲 )는 마케도니아로 移送되었다. 社트라프 자리도 再分配되었는데, 리시마코스 트라키아 를 받았고 페르디카스 暗殺에 一助한 셀레우코스 바빌론 을 받았다.

트리파라데이소스 協定 에서 將軍들은 페르디카스의 命令에 따라 크라테로스 와 싸워 그를 죽인 에右메네스 를 없애기로 合意했다. 이에 紀元前 319年 , 안티고노스 가 大軍을 이끌고 카파도키아 에 있던 에右메네스를 攻擊하여 그를 노라라는 山岳 要塞에 고립시켰다. 하지만 마케도니아에서 攝政 안티파트로스가 死亡하면서 새 攝政으로 폴리페르콘 을 指名했고, 同盟할 만한 勢力을 찾던 폴리페르콘이 에右메네스와 손을 잡고 그를 支援하였으므로 에右메네스는 無事히 脫出했다.

안티파트로스 의 아들이던 카산드로스 는 自身을 제치고 폴리페르콘 이 攝政이 된 것에 不滿을 가졌다. 그는 폴리페르콘에 맞서기 위해 안티고노스 , 리시마코스 , 프톨레마이오스 等과 同盟을 맺었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一帶에서 벌어진 內戰에서 카산드로스가 勝利했고, 敗北한 폴리페르콘은 童濯 이 어린 皇帝를 데리고 가듯 어린 알렉산드로스 4歲 록社나 를 데리고 알렉산드로스 3歲 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 와 自身의 故鄕인 에페이로스 로 脫出했다. 에페이로스에서 軍勢를 整備한 폴리페르콘과 올림피아스는 마케도니아를 다시 侵攻했고, 올림피아스는 필리포스 3歲 와 그 아내 에우리디케 를 生捕하여 죽여버렸다. 하지만 그들은 카산드로스 에게 또다시 敗했고, 카산드로스는 올림피아스 를 王을 죽인 罪로 裁判에 부쳐 處刑시키고 마케도니아를 掌握하였다.

안티고노스 에게서 脫出한 에右메네스 메소포타미아 로 移動하여 軍勢를 再整備했지만, 文官 出身에다 그리스人이라는 理由로 다른 將軍들이나 部下들로부터 敬遠視되었다. 그 탓으로 안티고노스에게 漸漸 밀리다가 두 次例의 큰 戰鬪에서 연달아 敗했다. 結局 紀元前 315年 안티고노스의 使嗾를 받은 自己 部下들에게 사로잡힌 에右메네스는 안티고노스에게 引渡되어 처형당했고, 안티고노스는 아나톨리아 에서 시리아 , 메소포타미아 , 이란 에 이르는 領土를 掌握했다. 이때 바빌론의 社트라프 로 있던 셀레우코스 는 안티고노스에 依해 쫓겨나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에게로 逃亡쳤다.

이처럼 안티고노스의 勢力이 너무 剛해지자 紀元前 314年 프톨레마이오스,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가 손을 잡고 안티고노스와 맞섰다. 하지만 안티고노스는 이에 맞서 領土를 더욱 擴張하는 한便 펠로폰네소스 地域에 殘存해 있던 폴리페르콘 勢力과 聯合했다. 이에 카산드로스와 리시마코스가 아나톨리아를 攻擊했고, 안티고노스는 이를 擊退하기 위해 北進했다. 하지만 紀元前 312年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가자 戰鬪 에서 프톨레마이오스에게 敗北하고, 프톨레마이오스의 支援을 받은 셀레우코스가 바빌론을 收復하자 안티고노스는 다시 南下해야 했다. 이쯤 되자 안티고노스와 프톨레마이오스 모두 休戰을 바라게 되었고, 結局 카산드로스-리시마코스-프톨레마이오스와 안티고노스는 休戰 協定을 맺었다.

이 休戰 協定은 重要한 意味를 가지는데, 왜냐하면 이 協定은 마케도니아의 카산드로스, 트라키아 의 리시마코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의 안티고노스가 모두 外交 關係를 樹立할 수 있을 程度로 獨自的인 勢力을 가졌음을 公認한 것이기 때문이다. 實際로 카산드로스 는 이 協定 以後 別 必要가 없어진 알렉산드로스 3歲의 마지막 血肉 알렉산드로스 4歲 와 그 어머니 록社나 를 죽여버렸다. 그리고 폴리페르콘 을 보내 알렉산드로스 3歲의 私生兒이자 그의 마지막 子孫이었던 헤라클레스 마저 毒殺함으로써 알렉산드로스 大王의 代는 斷絶되었다. 한便 바빌론을 차지한 셀레우코스는 東쪽으로 繼續해서 影響力을 擴大했고, 안티고노스는 그를 沮止하기 위해 紀元前 311年 부터 309年까지 바빌론을 攻擊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休戰 協定으로 暫時 숨을 돌리자 디아도코이 들은 곧바로 딴 생각들을 품었다. 紀元前 308年 카산드로스는 폴리페르콘 과 和解했고, 이에 그리스 폴리스들이 動搖하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안티고노스와 慇懃슬쩍 손을 잡고 에게 해와 펠로폰네소스에 쳐들어갔다. 하지만 別 成果를 얻지는 못했고 안티고노스와의 協力도 곧 霧散되었다. 紀元前 307年 카산드로스가 에페이로스에 간 사이 데메트리오스가 아테네를 占領했고, 紀元前 306年 에는 키프로스 로 쳐들어가 프톨레마이오스의 軍隊를 連續으로 擊破하고 키프로스를 掌握했다. 이 때부터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는 公公然히 王을 稱하기 始作했고,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度 뒤질세라 王位를 自處했다.

카산드로스와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모두 한 房씩 먹인 데메트리오스는 紀元前 305年 로도스 를 攻擊했고, 엄청나게 巨大한 孔性塔 헬레폴리스를 動員하기도 했지만 結局 로도스를 陷落하는 데는 失敗했다. 代身 로도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攻擊할 때만 빼면 안티고노스를 支援할 것을 約束해야 했다. 데메트리오스는 그리스로 돌아가 自身을 中心으로 한 새로운 폴리스 同盟을 創設했고, 窮地에 몰린 카산드로스는 休戰 協定을 試圖했으나 霧散되었다.

이에 카산드로스는 안티고노스를 對敵하기 위해 리시마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에게 救援을 要請했고, 가장 가까운 트라키아 에 있던 리시마코스가 아나톨리아 에 侵入하자 그리스의 데메트리오스는 아버지 안티고노스를 돕기 위해 아나톨리아로 撤收했다. 아나톨리아를 휩쓸고 다니던 리시마코스 의 軍隊는 이프소스 에서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의 軍隊에 依해 孤立되었는데, 때마침 셀레우코스의 軍隊가 當到하여 兩側 사이에 大戰鬪가 벌어진다. 이것이 紀元前 301年 벌어진 〈 이프소스 戰鬪 〉로, 디아도코이 戰爭 가운데 가장 큰 規模였으며 셀레우코스의 壓勝으로 끝났다. 當時 80代 老人이던 안티고노스는 戰死했고, 데메트리오스만 敗殘兵을 이끌고 겨우 그리스로 脫出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셀레우코스의 逆襲’이 可能했던 것은 西方에서 디아도코이 들끼리 角逐戰을 벌이는 동안 셀레우코스는 큰 妨害를 받지 않고 땅따먹기 하듯 알렉산드로스 帝國의 東方 領土를 次例次例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를 沮止할 만한 唯一한 勢力은 한창 印度 全域을 席卷하고 있던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帝國 이었으며, 셀레우코스는 마우리아 帝國 의 東方 領土를 攻擊하려고 셀레우코스-마우리아 戰爭 을 일으켰지만, 紀元前 303年 아라코시아 게드로시아 , 드란기아나 및 그 外의 모든 印度 接境 領土를 마우리아 帝國 에게 讓渡하고 딸을 찬드라굽타 와 結婚시키는 代身 印度코끼리 500마리를 받는 條件으로 平和 協定을 맺었다. 이로써 印度 接境 領土를 잃고 代身 코끼리들을 얻은 셀레우코스는 基本的인 數的 優位에 더해 페르시아 騎兵과 人道 코끼리까지 動員한 壓倒的인 戰力으로 안티고노스에게 決定打를 加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알렉산드로스 帝國 의 아시아 領土의 大部分을 차지하여 헬레니즘 國家들 中에서 第一 領土가 넓게 된 것이다.

죽음 [ 編輯 ]

프톨레마이오스 1歲 小테르 의 長男이자 프톨레마이오스 1歲 死後의 後繼다툼에서 밀려나 亡命해 온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 에게 암살당했고, 셀레우코스의 아들인 안티오코스 1歲 小테르 가 그를 이어 王이 되었다.

안티오코스 1世는 自身의 아버지 셀레우코스 1歲 니카토르 死後에 그를 神格化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