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
(星漢, ? ~ ?) 또는
김성한
(金星漢)은
新羅
金氏
王朝의 始祖로 推定되는 人物로,
性한王
(星漢王), 또는
太祖 性한王
(太祖 星漢王)이라고 한다.
歲寒
(勢漢),
열한
(熱漢) 等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
三國史記
》와 《
三國遺事
》 等
高麗
以後의 文獻 史料에는 登場하지 않으며,
碑石
과
金石文
에서
新羅 金氏 王朝
의 始祖로 나타난다. 廟號는
太祖
이다.
三國史記
나
三國遺事
에는 登場하지 않지만 現在 傳하는
新羅
時代의 墓碑文과 金石文에 依하면 그는
문무왕
과
김인문
의 15代祖,
흥덕왕
의 24大棗라 한다. 그밖에
新羅
末期의 僧侶
眞空
과
진철
의 墓碑에도 그를 始祖로 非情하고 있다.
朝鮮
後期의 書畫家 秋史
김정희
는 성한 또는 歲寒이라 불리던 人物과
김알지
를 同一人物로 推定하기도 하였다.
表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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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性(星)="金(金)", 漢(韓)="알<閼>", 王(왕)="地<智>"에 對應시켜 性한王<星漢王>과 김알지<金閼智>를 同一人으로 非情하는 見解가 있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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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成漢의 出生 年代는 正確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出生地度 正確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939年
에 建立된
眞空臺詞 步法塔碑
에 依하면 성한의 先祖들은 어디선가 내려왔다는 뜻의 機船强磁性한(其先降自聖韓)이라 하였다. 成漢은
문무왕릉
비,
金仁問墓碑
名,
興德王陵
비,
진철大使塔碑門
(眞澈大師塔碑文),
原州 흥법사誌 眞空臺詞塔 및 石棺
(原州 興法寺址 眞空大師塔 및 石棺) 等에 登場하는 人物이다.
碑石
과
金石文
에 따르면, 成漢은 新羅 金氏 王朝의 時調 格으로 나타나며,
太祖
(太祖)라고 呼稱되기도 한다.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는 성한이 아닌
김알지
를 金氏의 始祖로 敍述하고 있는 것과 달리, 金石文 속에서는 金閼智가 登場하지 않고 成漢을 金氏 王室의 時調로 指稱한다. 新羅 金氏는
朴赫居世
代身 成漢을 太祖라 稱하였고,
김부식
은 三國史記에 그를 金閼智의 아들로 記述하였지만
新羅
當代人들은 성한을 始祖로 보았다. 이에 따라 成漢의 正體에 對하여 많은 主張이 있어왔다.
《
三國史記
》와 《
三國遺事
》 等 文獻 史料에는 登場하지 않는데, 《
三國史記
》와 《
三國遺事
》 等은
高麗
以後에 編纂된 史料들이고, 三國史記에는 歲寒, 三國遺事에는 열한으로 나타난다.
문무왕릉
비,
金仁問墓碑
,
진철大使塔碑門
,
原州 흥법사誌 眞空臺詞塔 및 石棺
(原州 興法寺址 眞空大師塔 및 石棺),
興德王陵
非文 等에는 모두 성한이 金氏 王室의 始祖로 되어 있다.
문무왕릉
碑文에는 성한을 太祖(太祖)라 하고, 性한王이 家計上
문무大王
의 15大棗라 하며
[1]
,
興德王陵
碑文에도 성한을 太祖라고 指稱하는 한便,
흥덕왕
은 그의 24代孫이라 하였다.
김인문
의 墓碑文에는 太祖 한王으로 나타난다.
한便 慶州金氏나 新羅 金氏의 族譜 및
三國史記
,
三國遺事
의 味鄒王篇에는 歲寒 또는 成漢의 最終 벼슬이
伊飡
이었다는 것만 簡略하게 收錄되어 있다.
信賴度는 多少 不分明한, 族譜資料人
朝鮮
時代 以後에 發刊된 犯 新羅 金氏 系列 族譜에는 그의 最終 官職이 伊飡(伊二+倉)으로 나타난다.
미추 尼斯今
이 아닌 그 4代祖인 成漢에게 太祖라는 廟號를 追尊한 理由는 알려져 있지 않다.
大體로 成漢을 金閼智와 同一 人物로 보는 見解
[2]
,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서 遏止의 아들로 登場하는 歲寒(勢漢) 또는 열한(熱漢)으로 보는 見解
[3]
, 遏止의 7歲손으로 金氏 中 最初로 王位에 오른
味鄒王
(味鄒王)으로 보는 見解
[4]
, 昔氏 中 最初로 王位에 오른
脫解王
(新羅王)으로 보는 見解
[5]
等이 있다.
慶州 金氏
世譜에는 歲寒(勢漢)으로 記錄되어 있고, 다른 이름으로 열한(熱漢), 성한(星漢), 성한(聖漢) 等의 이름이 있다고 傳해진다.
한便, 문무왕 碑文에 따르면, 成漢은 투後
김일제
와 聯關이 있는 것으로 推定된다. 一部에서는 “투後(?侯) 堤川지윤(祭天之胤)李 7臺를 傳하여”(5행), “15代祖 性한王(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6행)라는 두 句節을 直接的으로 聯關이 있는 것으로 解釋하여 투後 김일제의 7代孫을 성한이라 非情하기도 한다. 一部 在野史學者들은 김일제의 後孫들이 中國에서 敗亡하여 新羅로 移住하였다고 主張하며, 그 詳細한 過程을 紹介하기도 한다.
[6]
그러나 歷史學界에서는 成漢과
김일제
를 관련시킨 記錄은 新羅 王族의 觀念的인 時調意識의 所産으로 보고 있다. 前近代에는 家計를 神聖視하기 위해 古代의 傳說的인 帝王 또는 有名한 爲人들을 始祖로 看做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김일제 後孫說은 事實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7]
[8]
死亡 年代와 날짜, 死亡 場所는 未詳이고, 凌遲와 諡號에 對한 것도 未詳이다. 事後 新羅 金氏 王室은 그를 太祖라 稱했으며, 그가 어떤 理由로 王(王)으로
推尊
되었는지 與否는 未詳이다.
家族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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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金氏 船員世界道와 三國史記, 심국유사에 依하면 興德王은 그의 21世孫이다. 그런데 興德王陵 墓碑文에 依하면 興德王은 成漢의 24世孫이다. 文武王은 新羅金氏 船員世界道나 三國史記, 심국遺事의 記錄으로는 그의 15世孫이고 문무왕릉碑文에도 15歲손으로 나타난다.
- 父親 :
김알지
- 母親 : 마정부人(摩貞夫人), 석강조(昔康造)의 딸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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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聯 書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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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氏의 뿌리(上, 中, 下)(강준식)
- 韓國 7大 不可思議(이종호, 歷史醫아침, 2007)
- 千年의 王國 新羅(김기흥, 創批(창작과비평사), 2000)
- 氏姓으로 본 韓日民族의 起源(金聖灝, 푸른숲, 2000)
- 主題別로 풀어쓴 韓國史 講義錄(古代便)(김기섭, 嘉藍企劃, 1998)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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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문무왕릉非 事實上 다 찾은 셈
京鄕新聞 2009.09.03
- ↑
秋史 金正喜(朝鮮 後記)의 見解 / 今西龍, 〈新羅文武王陵碑に就きて〉, 《藝文》, 1933.
- ↑
前間恭作, 〈新羅の世次と其名につきて〉, 《東洋學報》, 1925.
- ↑
김창호, 〈新羅 太祖姓韓醫 再檢討〉, 《歷史敎育論集》5號, 1983.
- ↑
《興德王陵非》
- ↑
韓國 7大 不可思議(이종호, 歷史醫아침, 2007) 108쪽.
- ↑
김창호, 〈문무왕릉비에 보이는 新羅人의 祖上認識 - 太祖姓韓醫 添補 -〉, 《韓國史硏究》, 韓國史硏究會, 1986年.
- ↑
문경현, 〈新羅建國說話의 硏究〉, 《大邱私學》, 大邱史學會, 197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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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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