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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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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 中世 韓國語 : 션ㅂㆎ )는 朝鮮 社會에서 學問을 닦는 사람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이다. 特히 儒敎 敵 理念을 積極 受容하여 社會에 適切히 具現함으로써 善行을 배푸는 人格體를 가리킨다. [1] 한便, 오늘날에는, 선비 는 官職과 財物에 對한 欲望을 拒否하고 義理와 原則을 所重히 여기는 學識과 禮儀가 있는 사람을 比喩的으로 이르거나, 品性이 얌전하기만 하고 現實에 어두운 사람을 比喩的으로 이르는 말로도 쓰이고 있다. [2]

槪要 [ 編輯 ]

오늘날 韓國語에서 선비는 主로 儒敎 的 意味로서 ‘어질고 學識과 人品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船人들은 선비의 人格的 條件으로 生命에 對한 欲心도 超越할 만큼의 無所有의 德을 要求했다. 孔子가 이에 對해 말하기를 “뜻 있는 社(士)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하여 어진 德을 해치지 않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어진 德을 이룬다.”고 하였다. 論語에서는 “寺(士)가 위태로움을 當해서는 生命을 바치고, 利益을 얻게 될 때에는 의로움을 생각한다.”(견위수명 見利思義)라고 强調했다. 孟子 는 “일정한 生業이 없어도 變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은 社(士)만이 할 수 있다.”고 하여 사(士)의 人格的 條件으로 志操를 꼽았다.

이렇게 사(士)가 儒敎的 人格體로 把握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韓國語의 ‘선비’가 지닌 性格과 一致함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사는 歷史 속에서 身分的 意味로 많이 쓰였다. 士大夫(士大夫), 四君子(士君子), 司書인(士庶人) 等으로 쓰였던 것이 그 例다. [3]

語彙 發生 背景 [ 編輯 ]

'선비'라는 語彙는 記錄上으로 《龍飛御天歌》(1447, 80張, 82張)에 ‘션ㅂㆎ’의 形態로 처음 나타난다. 卽, 이 語彙는 世宗 執權時期(1418~1450)에 처음으로 記錄上으로 나타났다. 다만 그 窮極的인 語源에 對해서는 漢字語로 推定하는 사람도 있으나 不分明한 點이 많다.

世宗은 執權期間 동안 集賢殿(集賢殿)을 設置하여 學問을 積極 奬勵하고, 儀禮制度를 儒敎的으로 改編시켜 朝鮮을 儒敎社會로 만들어간 人物이다. 이렇게 自身의 여러 儒敎的 政策들을 더 積極的으로 推進하고 現實化시키는 過程에서 그는 學問에 밝고, 儒敎的 理念을 積極的으로 實踐하는 人材를 强烈히 願하게 된다.

그의 이러한 政治的인 理由로 인해서, 當時 '學問的으로 뛰어나고 道德的으로 어진 人物'을 指稱하는 선비를 《龍飛御天歌》를 통해 自身이 願하는 意味로 再定義하여 社會的으로 頒布한 것이다.

勿論, 世宗의 《龍飛御天歌》를 통해서만 선비의 意味가 全的으로 再定義된 것은 아니다. 太宗 李芳遠이 선비의 典型的인 標本, 鄭夢周를 社會的으로 追慕하기 始作하면서 선비의 正義가 漸漸 變化하기 始作했고, 地方에서는 鄭夢周를 따랐던 선비一波, 穩健改革派가 地方에서 士林派 를 形成하여 勢力을 넓히기 始作하면서 太宗의 정몽주 追慕를 積極 뒷받침했던 點만을 본다면, 世宗 以前에도 이미 선비에 對한 定義는 漸次的으로 變化하고 있다는 것을 確認할 수 있다. 以後 世宗이 積極的으로 朝鮮을 儒敎化시키며 儒敎的인 人材들을 强烈히 熱望하고, 이들을 積極 登用하면서 선비의 意味가 儒敎的으로 크게 改編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서 선비가 《龍飛御天歌》를 通해서 最初로 記錄上으로 登場했기 때문에, 政治的ㆍ社會的인 方面에서 선비는 거의 全的으로 世宗이 意圖하는 儒敎的인 意味가 된 것이다.

이를 통해 世宗은 앞으로의 朝鮮의 人材들에게 自身이 再定義韓 선비를 理想鄕으로 삼도록 하게 하였고, 追求하도록 하였다. [4]

當時 世宗執權時期의 初期에는 太宗의 强力한 王權强化政策으로 因해, 무를 갖춘 人材보다 門을 갖춘 人材가 相對的으로 더 等閑視되는 傾向이 남아있었는데, 世宗은 이를 解消시키기위해 門을 갖춘 人材들을 더 奬勵하는 政策들을 推進하였다. 하지만, 政治的으로 이를 解消하기엔 限界가 있다는 것을 直感했는지, 當時 通用되고있던 語彙들의 一部를 自身이 意圖한 대로 適切하게 財政依하여 頒布함으로써, 社會的으로 再通用시켜서 社會的으로도 이를 解消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世宗의 이러한 努力의 過程에서, 선비라는 語彙가 위와 같은 正義로 쓰여왔던 것이다.

歷史 [ 編輯 ]

2世紀 末葉인 高句麗 故國川王 을파소 는 隱遁하여 밭갈이를 하고 살다가 推薦을 받아서 宰相의 자리에 올랐던 사람이다. 그는 宰相의 責任을 맡고서 나올 때 말하기를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 살고 때를 만나면 나와서 벼슬하는 것이 선비의 떳떳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乙巴素는 自身의 處地를 선비로 自覺하고 선비의 道理를 提示했다고 볼 수 있다. 이 當時만 해도 선비의 槪念은 身分을 뜻하기보다는 人格의 觀念이었다.

高句麗 小獸林王 2年(372年)에 太學이 세워졌다. 여기서는 儒敎 理念을 敎育하면서 선비를 養成하였다. 博士를 두어 人材를 가르쳤는데, 이 博士制度는 經典에 關한 專門 知識人을 키워냈다. 百濟 新羅 에서도 各各 太學과 國學이 세워졌다. 當時 歷史의 記錄과 編纂은 선비들의 任務였다.

高麗 時代에는 敎育制度가 한層 整備되어 國子監 을 비롯해 地方의 12목에까지 博士를 두어 人材를 養成했다. 過去 制度 가 定立돼 進士科(進士科)와 明經科(明經科)를 통해 선비들이 官職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確保되기 始作했다.

高麗 末葉 충렬왕 安珦 等에 依해 元나라 로부터 朱子學 이 導入되면서 이른바 道學 理念이 定立되었다. 道學 理念을 中心으로 선비들의 自覺도 한層 깊어졌다.

朝鮮 初에 들어와 儒敎 理念을 國家 統治 原理로 삼으면서 선비들은 儒敎 理念의 擔當者로서 그 存在 價値가 뚜렷해졌다. 朝鮮 初 선비들은 高麗 末에 節槪를 잃지 않았던 정몽주 를 追從하였고, 朝鮮 王朝에 節槪를 굽히지 않은 吉再 의 學統에서 선비 精神을 强化시켜갔다. 이들은 朝鮮 王朝 建國期에 革命 勢力을 中心으로 高位 官吏로서 門閥을 이룬 勳舊派 와 對比를 이뤘다. 이들은 節義를 尊重하는 立場을 지닌 自身들을 ‘ 士林派 ’로 區分했다.

이때부터 勳舊派와 士林派의 紛爭이 始作되는데 이를 ‘ 士禍 (士禍)’라고 한다. 士禍에서 많은 犧牲者를 내기도 했지만 마침내 선비들이 政治의 中心 勢力으로 登場하는 士林政治 時代를 이루었다.

朝鮮 時代에는 士大夫에 依한 官僚制度가 定着되었고, 그에 따라 선비는 社會의 가장 重要한 指導層이 되었다. [5]

生活 [ 編輯 ]

《小學(小學)》에서 나오는 선비의 生涯는 다음과 같다.

어린아이가 家庭에서 敎育을 받으며 成長하다가 10살이 되면 男子아이는 사랑에서 아버지와 자며 先生을 찾아가 배우고, 20살이 되면 冠禮를 하고 널리 배우며, 30살에는 아내를 맞아 살림을 하며, 40살에서는 벼슬에 나가고, 70살에는 벼슬을 辭讓하고 물러난다. 이런 生涯는 누구나 비슷하지만 特히 선비에게는 學業과 벼슬이 重要하다.
선비는 限平生 學業을 中斷해서는 안 된다. 선비는 타고난 身分이 아니라 學問과 修鍊으로 形成되는 것이다. 이런 意味에서 선비는 讀書人이요, 學者다. 선비가 배우는 學問의 範圍는 人間의 日常生活 속에서 부딪히는 일의 마땅한 道理를 確認하고 實踐하는 것이다. 선비는 學問을 통해 知識의 量을 쌓는 것이 아니라 道理를 確認하고 實踐하는 人格的 成就에 目標를 둔다.

《大學(大學)》에서도 自身의 內面에 주어진 ‘밝은 德을 밝히는 일’과 ‘百姓과 親愛하는 日’의 社會的 課題를 가르친다. 선비는 恒常 自身의 人格을 닦아야 하지만 同時에 그 人格性을 社會的으로 實現해야 한다. 그래서 선비는 自身의 德을 社會 속에서 實現하기 위해 官職에 나가야 한다. 따라서 일찍부터 過去試驗을 치고 벼슬할 機會를 갖는다. 그러나 大部分의 선비는 科擧試驗에 合格하지 못해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다. 少數의 선비만이 官職에 나갈 수 있었다. 선비가 官職에 나가는 것은 當然한 일이지만 그것을 目的으로 삼아서가 아니라 官職을 통해 自身의 뜻을 펴고 信念을 實現하는 機會를 얻는 것이라고 여겼다.

朝鮮 時代 선비들이 맡은 官職도 主로 自身들의 學問과 信念을 펴는 職責이 많았다. 弘文館 , 藝文館 , 成均館 , 司憲府 , 司諫院 等 學問을 專門으로 하는 機關이거나 言路를 맡아 임금에게 諫言하는 職責이었다.

官職에 오르면 위로는 임금을 섬겨야 하고, 아래로는 百姓을 돌보아야 하는 責任이 있다. 선비는 임금에게 無條件 服從과 忠誠을 하지는 않았다. 선비는 賃金과 義理로 關係를 맺기 때문에 언제나 그 職責의 性格과 賃金의 役割에 對해 省察하여야 했다. 임금에게 잘못이 있으면 아뢰어 바로잡으려 하고, 職責이 道理에 合當하지 않으면 물러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비는 나아가기를 어려워하고 물러서기를 쉽게 생각하는 態度를 가져야 했다. 그것은 富貴의 欲望에 사로잡히지 않고 不義에 對한 批判 精神을 確保해야 했기 때문이다.

선비로서 平生 過去試驗을 보지 않거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 境遇를 흔히 ‘處事(處士)’라고 하였다. 處士가 官職에 나간 선비보다 많은 尊敬을 받았다. 學問에 造詣가 깊어 厚生을 많이 가르치고 바른 道理를 提示하는 사람을 ‘先生(先生)’이라고 불렀다. 先生은 벼슬에 나간 사람의 呼稱인 ‘공(公)’에 비해 훨씬 높은 尊重을 받았다.

선비에겐 志向하는 두 가지 方向이 있다. 하나는 한 時代에 나가서 度를 施行하고, 또 하나는 後世에 말씀을 내려주어 가르침을 베푸는 일이다. 卽 自身의 學問을 弟子들을 통해 傳하기도 하지만 直接 著述을 하여 後世에 가르침을 내려주는 것이다.

이렇게 선비의 一生은 道를 밝히고 自身을 硏磨하여 世上을 바로잡고자 努力하는 過程이라고 할 수 있다. [6]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황훈영, 《우리 歷史를 움직인 33가지 哲學》, 푸른숲, 141쪽
  2. 다음 事前, 선비_1 (2)財物을 탐내지 않고 義理와 原則을 所重히 여기는 學識 있는 사람을 比喩的으로 이르는 말. (3)品性이 얌전하기만 하고 現實에 어두운 사람을 比喩的으로 이르는 말.
  3. 황훈영, 《우리 歷史를 움직인 33가지 哲學》, 푸른숲, 142쪽
  4. 황훈영, 《우리 歷史를 움직인 33가지 哲學》, 푸른숲, 143-144쪽
  5. 황훈영, 《우리 歷史를 움직인 33가지 哲學》, 푸른숲, 143-144쪽
  6. 황훈영, 《우리 歷史를 움직인 33가지 哲學》, 푸른숲, 145-1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