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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三國 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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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三國 / 列國
原三國 / 列國
國家 扶餘 高句麗 沃沮 東濊 三韓
수도 부여성 1. 졸본성
2. 國內城
3. 平壤城
未詳 未詳 多數
君主
 -建國君主
 -滅亡君主
?? 國王
東明王
孱王
28 國王
동명성왕
保障王
邑郡, 三老 邑郡, 三老 多數
成立 紀元前 2世紀 紀元前 37年
(朱蒙 졸본성 定着)
紀元前 3世紀 紀元前 1世紀 紀元前 1世紀
滅亡 494年
(高句麗에 合倂)
668年
(平壤城 陷落)
3世紀
(高句麗에 合倂)
6世紀
(新羅에 合倂)
6世紀
( 新羅 , 百濟 , 伽倻 로 各其 合倂)
1世紀 京義 版圖.

元三國 時代 (原三國時代) 또는 列國 時代 (列國時代)는 紀元前 後로부터 紀元後 2世紀 中盤까지의 初期 鐵器 時代 以後를 말하며, 歷史的으로는 古朝鮮 이 滅亡 또는 衰退하고 扶餘 가 建國되는 時期부터 三國이 建立 된 以後의 2世紀 에서 3世紀 에 걸친 時期에 該當한다. [1] 韓半島에서 鐵器를 使用하기 始作한 紀元前 300年부터 祈願後 300年까지 600年을 原三國이라 부르기도 한다. [2]

이 時期에는 鐵器文化가 急速히 普及되면서 農耕의 改善, 牧畜의 盛行, 漁業의 發達 等과 같은 産業의 全般的인 發達과 함께 여러 系統의 文化가 融合하게 되었다. 또한 다양한 施設을 構築한 扶餘 , 三韓 , 高句麗 , 沃沮 , 東濊 等의 初期 國家가 多數 登場하게 된다.

該當 時代의 國家들 [ 編輯 ]

開館 [ 編輯 ]

恨의 郡縣 (郡縣)李 衰退함에 따라 土着 社會의 여러 部族 國家는 統合의 趨勢를 보였다. 이런 形勢 속에서 古代 國家로 登場하게 된 것이 이른바 新羅 · 高句麗 · 百濟 의 三國이었다. 그 當時 三國은 各其 大陸의 위진 南北朝 (魏晉南北朝) 文化를 受容하고 文物制度를 整備하여 國家 體制를 갖추는 한便, 中國으로부터 받아들인 철기 文化를 再編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三國은 古代 國家的 體制를 갖출 때 同一한 世紀 階層을 가진 것이 아니어서 高句麗와 백제 사이에는 約 2世紀, 新羅 와 高句麗는 約 3世紀, 新羅 와 百濟의 사이에는 約 1世紀 程度의 年次(年差)가 있었다. 이러한 年次는 곧 三國이 不足 國家로 남아 있던 歲年(歲年)의 길고 짧음을 比較케 하는 同時에 三國 社會 發展의 持續相(持續相)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扶餘 系列의 一派로 고(故) 현도에서 일어난 高句麗 는 元來 周圍에 많은 强敵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과의 싸움 속에서 初期 不足 聯盟을 形成하여 갔다. 6代 太祖王 때에는 不足 聯盟 勢力의 領導權이 確立되어 古代 國家 成立을 위한 一連의 努力을 기울였다.

高句麗의 對外 關係는 中國과 塞外(塞外)의 關係가 竝行하고 있어서 文化上으로나 政治·經濟上으로 中國 一邊倒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이리하여 三國 中 高句麗는 代(對)한족 鬪爭 勢力으로서 먼저 擡頭하여 北方에서 充分히 自立性을 가지면서 古代 國家를 성립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全般的인 面에서 볼 때 高句麗史의 展開가 積極的이었던 原因은 그 社會 基盤의 急速한 發展이라든가, 그 地理的 位置에서 오는 利點(利點)이라든가 또는 戰死(戰士)組織體的人 機動性이 剛한 社會 制度라든지 기타를 들 수 있다. 이와 比等할 만한 하나의 要因으로서 高句麗는 다른 土着 社會가 오랫동안 中國의 植民地인 郡縣과 交通함에 그치는 데 反하여 高句麗는 그렇지 않아서 東川王 때는 吳(吳)와 通交하기도 했으며, 塞外 民族과도 外交關係가 있어서 國際 關係上의 自己 位置를 일찍부터 自覺했다는 것이다. 勿論 成長 過程에서 공손氏(公孫氏)의 侵入, 毌丘儉(?丘儉)의 侵入, 全然(前燕) 慕容氏(慕容氏)의 侵入 等 많은 壓力을 받았지만, 그러한 侵入에 對한 抗爭 過程이 곧 高句麗 古代 國家의 設立 過程이었다.

십제 가 어떠한 經路를 거쳐 部族 聯盟國家로 發展했는지는 분명치가 않다. 本來 漢江 以南 地域에는 土着 勢力으로 目支國 (目支國)이 있어 馬韓王으로 君臨하고 있었으며, 馬韓 뿐 아니라 弁韓과 진한에서도 宗主權을 主張하였다. 이들은 北의 高句麗 地域에 있었던 土着民인 예군(濊君)·南呂(南閭)에 對等할 만한 勢力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삼한 地域에 한4軍 의 成立, 古朝鮮 社會의 解體 等으로 인해 流離民(流移民) 集團들이 南下하여, 수많은 流離民과 土着族 들이 國家를 이루어 各處에 자리 잡게 되었다. 따라서 目支國의 支配力은 漢江 流域엔 集中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여기서 樂浪·대방의 土着 社會에 對한 政治的·經濟的 操縱冊이 있어 이 地域에서의 國家 形成 勢力의 形成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십제는 위에서 이야기한 流離民 集團의 하나로서, 여러 遺物들로 미루어 보아 夫餘系로 推定된다. 이들은 漢江 北쪽 地域인 只今의 서울 附近의 慰禮(慰禮) 部落에 都邑을 定하고 不足 國家의 基盤을 마련하였다. 以後 이들은 漢江 南쪽으로 移住한 것으로 보이며, 풍납土城과 夢村土城 遺跡이 이를 뒷받침한다. 십제가 眞正한 中央 集權的 古代 國家의 基盤을 마련하게 되는 것은 古爾王(古爾王) 때였던 것 같다.

십제 王室은 高句麗의 한 갈래로서 高句麗의 始祖 傳說과도 關聯이 있으나, 漢江 流域에 高句麗와 같은 6部族 組織의 基盤이 없었기 때문에 高句麗만큼 强力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社會가 支配 機構를 성립시킬 때, 自然히 樂浪·大防이 그 周圍의 土着 社會에 준 影響力이 더 優勢한 것으로 나타나지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십제는 그 領域을 5房으로 나눠 整備할 때 高句麗를 본받은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卽 5放(五方)의 이름에서 不足名이 나타나지 않는다거나 8大聲(八大姓)李 십제 王室과 關聯이 적은 勢力이라든가가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管制에서도 高句麗的인 性格보다 整備된 中國의 官制를 模倣하여 6錢(六典) 組織의 모습까지도 나타나고 있다.

東쪽의 고요한 나라였던 新羅 가 三國의 勢力 版圖에 登場한 것은 高句麗가 이미 그 絶頂을 맞이하려던 때였다. 現在까지의 考古學的 發見에 依하면, 韓國에서 靑銅器가 가장 많이 發見된 것은 大同江 流域과 慶州 地域이다. 新羅 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朴(朴)·碩(昔)·김(金)氏의 始祖 說話와 系譜로 보아, 大略 3世紀 前半에 强國으로 登場하였다. 新羅 의 始祖 說話는 高句麗나 백제와는 달리 複雜하게 세가지로 나타나 있다. 이들 3星 部族이 徐羅伐 一帶에 자리 잡고 組織한 初期 不足 聯盟에서는 朴·碩 量(兩) 部族이 土着的인 金不足(金部族)보다 優勢하였으므로 不足 聯盟長은 미추 尼斯今을 除外하고는 主로 朴·碩 量 不足에서 交代로 選出되다가 내물 麻立干을 전후하여 金氏 世襲權이 確立된 것 같다.

新羅 의 6寸(六村)과 朴·碩·김 3不足과의 關係는 初期의 新羅 不足 聯盟이 朴·碩·김 3不足이 主體로 되어 있다가 다른 6不足과의 聯盟關係로 成長하고, 그 뒤 3不足이 新羅의 主體勢力으로서 大聯盟으로 擴大되고, 古代 國家가 形成됨에 이르러서 主體部族들이 徐羅伐에서 貴族組織을 編成한 것이 6寸 說話로 反映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論難 [ 編輯 ]

考古學界에서 原初 三國時代와 原史時代(Protohistory, 先史時代 歷史時代 의 中間)를 合해 規定한 用語가 '元三國 時代'이다. 이 用語에는 우리 歷史에서 이 時期에는 國家가 存在하지 않았다는 뜻이 담겨 있고, 三國時代 初期( 1世紀 ~ 3世紀 )를 否定하는 뜻이 된다. [2] 한便 名稱을 두고 考古學的으로 元三國 時代에 나타나는 特徵이 없는 等의 問題點이 提起되었으나, 元三國 時代라는 用語가 慣行的으로 굳어져 用語가 하나로 統一되지는 않는다. 列國 時代나 삼한 時代로도 불린다. [3]

한便, 歷史學系 非主流인 윤내현 은 이 時期를 古朝鮮의 諸侯國들이 獨立하게 되어 작은 國家로 나뉘게 된다는 意味로 ‘列國 時代’로 指稱하고 있다. 그의 著述에 따르면 古朝鮮 의 王 基準 은 衛滿에게 王權을 簒奪 當하여 바다를 건너 馬韓 을 建國하며 古朝鮮은 衛滿朝鮮이라 일컫게 되었다고 主張한다. 甚至於 馬韓의 屬國으로 辰韓 變한 이 建國되며, 閨怨士禍 에서는 이 勢力을 弁辰으로 부르며 考試(高矢) 氏의 後裔라고 主張한다. 작은 部族國家로 東濊 沃沮 等이 建國되었다고 하며, 夭逝에 자리잡고 있던 古朝鮮의 諸侯國인 肅愼 (肅愼), (濊), 沃沮(沃沮) 等이 東쪽으로 移動하여 肅愼은 黑龍江 附近에 位置하게 되고 挹婁 라 불리게 되었다고 主張한다. 例는 江原道 에 定着하여 東濊(東濊)라고 불리며, 沃沮度 咸鏡道 附近으로 移動하여 東沃沮(東沃沮)라 불리게 되었다고 主張한다. 한便 대릉하 에 자리잡고 있던 樂浪 大房 의 勢力은 淸川江 大同江 으로 移住하게 되었다고 主張한다. [4] 2020年 現在 海南 出身의 윤내현의 이와 같은 主張은 恣意的인 史料 解釋과 根據 不足을 理由로 一般的으로 學界에서 認定되지 않고 있다. [5]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國史敎材硏究會 篇, 《韓國史槪說》, 학문사, 2000年.
  2. 이덕일 (2003年 8月 25日). 《살아있는 韓國史》 初 1刷판. 서울: 휴머니스트. 80~83쪽쪽. ISBN   89-89899-58-3 .  
  3. 鐵器時代의 設定과 問題點 Archived 2007年 9月 29日 - 웨이백 머신 〉, 최성락, 木浦大學校 博物館, 1998年.
  4. 윤내현, 《韓國 熱局社 硏究》, 1999年.
  5. 宋호정, 《檀君, 만들어진 神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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