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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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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교
사이교 法師(기쿠치 요사이 그림/ 에도時代 )

사이교 ( 日本語 : 西行 , 겐에이 元年( 1118年 ) ~ 盆地 6年 陰曆 2月 16日 ( 1190年 3月 31日 ))는 헤이안 時代 僧侶 , 와카 作家 (歌人)이다. 俗名은 사토 노리키요 ( 佐藤義淸 ).

生涯 [ 編輯 ]

사이교의 아버지는 北面武士였던 사에몬勞組 ( 左衛門尉 사토 야스키요 ( 佐藤康淸 ), 어머니는 겐모쓰 (監物)· 미나모토盧 기요쓰네 (源淸經)의 딸이다. 후지와라노 料理나가 ( 藤原賴長 )의 日記인 《다이키》(台記)에는 "先祖 代代로 勇士(勇士)"라고 적고 있다. 사토 氏는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 藤原秀? )에게서 비롯된 無價로, 노리키요의 高祖夫人 幾微키요(公淸)의 代부터 처음 사토 氏를 稱하기 始作했고, 以後 代代로 위부에 勤務하였으며, 基異國 ( 紀伊? ) 다나카 장원( 田仲? )의 例疏( 預所 , 管理人)에 補任되기도 하는 等 裕福한 집안이었다. 노리키요 本人은 후지와라노 히데사토의 9歲 손에 該當한다.

《다이키》에서는 俗世의 몸임에도 佛敎에 뜻을 두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또한 도쿠다이지 氏( ?大寺氏 )는 16歲 때부터 主君으로써 섬기고 있었고, 그런 因緣으로 도쿠다이지 社네요시( ?大寺?能 )나 기미요視(公能)와도 親交가 있었다. 號엔 (保延) 元年( 1135年 )에 18歲의 나이로 四爻에노이(左兵衛尉, 四爻에후左兵衛府의 第3等館)에 任命되었고, 號엔 3年( 1137年 )에는 도바 法皇의 北面無事로써 섬겼다는 記錄이 있다.

와카 (和歌)와 高詩쓰 ( 故? )에 能通하였던 人物로 스토쿠 天皇 의 와카 相對를 맡기도 했던 그였으나, 號엔 6年( 1140年 ) 23歲로 出家해 엔機( 円位 )라 이름하였다가 뒤에 사이교(西行)로도 稱하였다. 僧侶로써 隱遁하게 된 뒤 사이교는 구라마 山 等, 히가시야마와 社가 近郊에 草幕을 짓고 살며 前에 일한 적 있는 다이켄몬仁義 뇨보들과도 交流하였고, 요시노와 구마노, 무쓰, 社누키 等 日本 곳곳을 돌며 佛道를 遂行하거나 우타마쿠라(歌枕) [1] 를 찾기도 하고, 때로 와카를 지었다.

사이교의 곳곳에서의 行跡은 저마다 달랐다. 요시노에서 꽃구경을 하기도 했지만 오미네( 大峰 )에서는 嚴格한 修行을 繼續했고 고야 山에서는 도바 法皇과 가스家奴 쓰步네(春日局) 사이에서 태어난 잇쓰지(五?院)의 依賴로 렌겐쇼인( 蓮華乘院 )의 照映에 힘을 쏟기도 했다. 후지와라노 料理羅哥의 日記에는 그가 料理羅哥의 집을 訪問해 一品經( 一品經 )의 寫經을 勸한 일도 記錄되어 있다.

덴요 (天養) 元年( 1144年 ) 무렵 오우( ?羽 )地方을 돌던 그는 규안 (久安) 4年( 1149年 ) 前後 고야 산 (高野山)에 들어갔다. 닌亂 (仁安) 3年( 1168年 ) 시코쿠 (四?) 中部를 旅行하며, 사누키국 ( ?岐? )의 先統社(善通寺)를 訪問하기도 하고, 옛 駐軍人 스토쿠 狀況의 陵을 찾아 그 靈魂을 慰勞했다고 傳한다. 이 때의 일을 後날 에도 時代 의 우에다 아키나리(上田秋成)가 《 우게쓰 이야기 》(雨月物語) 속의 한 篇 「時라미네」(白峰)라는 題目의 小說로 다루기도 하였다. 한便 이 旅行은 구카이 臺詞의 遺跡을 巡禮하는 것도 겸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地域으로 旅行할 機會가 적은 貴族들에게 自身이 돌아보고 온 各 地方의 모습을 傳해 주었다.

뒤에 다시 고야 山으로 들어갔지만, 지쇼 ( 治承 ) 元年( 1177年 )에 二世 國( 伊勢? ) 異見抛(二見浦)로 옮겨 살았다. 盆地( 文治 ) 2年( 1186年 )에 超겐(重源)의 依賴로 도다이지(東大寺) 再建을 위한 喜捨를 求하고자 오슈 후지와라 氏 ( ?州藤原氏 )의 땅인 무쓰 地方으로 向했고, 그 途中에 들른 가마쿠라( 鎌倉 )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 源?朝 )를 만났던 것이 아즈마카가미 (吾妻鏡)에 실려 있다.

二世 국에 몇 年間 居住하며 사이교는 旺盛한 創作 活動을 벌였고, 그의 와카는 후지와라노 도시나리 ( 藤原俊成 )나 지엔, 후지와라노 사다이에 (藤原定家) 사이교는 가와치 國( 河?? )의 高텐地(弘川寺)로 옮겨 庵子를 짓고 居住하다 겐큐( 建久 ) 元年( 1190年 ) 2月 16日 그곳에서 入寂하였다. 享年 73歲. 그의 죽음은 生前 그가 읊었던 「할 수 있다면 봄 벚꽃 아래에서 죽고 싶구나 저 釋迦가 入滅한 2月 보름 무렵에」( 願はくは花の下にて春死なん そのきさらぎの望月のころ ) 그대로 되었고, 그 生涯는 후지와라노 社다이에나 지엔 等의 感動과 共感을 얻어 稱頌받았다고 한다.

그 무렵에는 이미 世上은 戰國 時代 로 기울고 있었다.

評價 [ 編輯 ]

歎息하는 달이 궁금해서인지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네.
なげけとて 月やは物を 思はする かこち顔なる わが?かな

사이교는 그 自身이 몸소 가려 뽑은 《미소스소가와우타아와세》( 御裳濯歌合 ), 《미야카와右打아와세》(宮河歌合) 等의 歌集을 남겼고, 後世 사람들이 사이교의 노래를 모아 編輯한 《山카슈》(山家集) 等이 傳한다. 主로 二世로 移住할 때까지 와카를 收錄하고 있는데 佛敎的 思想을 基礎로 自然을 노래하고 人間味 넘치는 노래가 많아 當時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愛讀되었다. 特히 벚꽃 을 노래한 와카가 많고 사랑을 읊은 노래의 境遇 痛切한 哀調를 띤 노래가 大多數이며 조카(雜歌)로는 自己 體驗의 노래가 많다.

高토바 狀況이 編輯한 《申告킨와카슈》(新古今和歌集)에 실린 사이교의 와카는 모두 94首로 가장 많은 分量을 차지하고 있다. 自然을 사랑하고 벚꽃과 달와 戀人을 노래하며 슬픔을 연주하는 歌人 사이교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큰 影響을 주었는데, 特히 隱遁者로써의 삶의 態度는 많은 사람들에게 感動을 주었다. 先祖 代代로 내려온 武士의 身分을 버리고 出嫁했음에도 武士의 마음이나 道를 잃지 않고 살아간 사이교의 一生은 오히려 武士의 精神에 拘束되어 살았다고도 할 수 있다. 《高킨草墳슈》에는 사이교가 있던 도쿠다이지를 訪問했다 失望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들은 사이橋에 對해 "世俗에서 벗어나 몸은 떠났지만 마음은 예전 그대로 굳세고 剛健하다"고 評하고 있다.

사이교 死亡 뒤 그의 生涯를 그린 《사이교 이야기》나 에마키가 만들어지는가 하면, 사이교의 모습을 描寫한 說話集 《센주쇼》(撰集抄)가 製作되기도 했다. 日本에서 各 時代마다 사이교의 이야기는 재해석되고 再創造되었다. 간토 地方을 旅行하는 隱遁者로써의 사이교의 모습은 가마쿠라 時代 요시다 겐코 에게, 旅行하며 詩歌를 읊은 放浪 詩人으로써의 行動은 무로마치 時代 의 小技(宗祇) 같은 렌카 作家 및 에도 時代의 마쓰오 바쇼 等 하이쿠 作家들에게 影響을 주었다.

各州 [ 編輯 ]

  1. 와카의 舞臺가 된 各處의 名勝地.

參考 文獻 [ 編輯 ]

  • 苦味 후미히코 等 《日本人 이야기》(한은미 役) 圖書出版 이손, 2003年
  • 민병훈 《한 卷으로 읽는 日本文學史》 韓國學術情報, 2013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