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키 사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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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사다코
佐?木 禎子
사사키 사다코 (1955年 撮影)
出生 1943年 1月 7日 ( 1943-01-07 )
日本 히로시마縣 히로시마시
死亡 1955年 10月 25日 ( 1955-10-25 ) (12歲)
日本 히로시마縣 히로시마시
死因 白血病
性別 女性
國籍 日本
職業 學生
웹사이트 https://www.sadako-jp.com/

사사키 사다코 ( 日本語 : 佐?木 禎子 , 1943年 1月 7日 ~ 1955年 10月 25日 )는 日本 의 少女이다. 2世 時節에 히로시마·나가사키 原子爆彈 投下 의 犧牲者가 되었다. [1] 深刻한 放射能 被爆에도 不拘하고 10年 더 살아남으면서 가장 널리 알려진 被爆者 가 되었다. 그는 죽기 前에 1,000마리가 넘는 종이鶴 을 접은 것으로 有名하다. [2]

被爆 當時의 行跡 [ 編輯 ]

히로시마 出身인 사사키 사다코는 히로시마에서 原子爆彈 投下가 일어났을 때 그라운드 제로 에서 1.6k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原子爆彈이 投下되면서 窓門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사다코의 어머니는 自身의 딸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疑心하면서 찾으러 뛰쳐나갔지만 2歲였던 딸이 負傷 없이 살아 있는 것을 發見했다. 그들이 逃亡치는 동안에 사다코와 그의 어머니는 검은 비를 만났다. 사다코의 할머니는 집으로 急히 돌아왔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다코는 한동안 죽은 것으로 推定되었다.

餘波 [ 編輯 ]

사다코는 또래들처럼 자랐고 學級 繼走 팀의 重要한 멤버가 되었다. 그러나 1954年 11月에 목과 귀 뒤에 붓기가 생겼고 1955年 1月에는 다리에 紫斑症이 생겼다. 1955年 2月 21日에 病院에 入院한 사다코는 醫師로부터 急性 惡性 림프선 白血病으로 인하여 1年 밖에 살지 못한다는 診斷을 받게 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原子爆彈이 投下된 以後에 日本에서는 어린이들 사이에서 白血病 症狀이 觀察되었다. 1950年代 初盤까지 日本에서 白血病은 原子爆彈 속의 우라늄에 依한 放射能 被爆에 依해 惹起된 것으로 여겨졌다. 사다코는 治療를 위해 히로시마 赤十字 病院에 入院했고 1955年 2月 21日에 輸血을 받았다. 사다코가 入院했을 때에 그의 白血球 數値는 平均 어린이 수치의 6倍였다.

종이鶴 [ 編輯 ]

사다코는 1955年 8月에 自身보다 2歲 많은 中學生인 키요라는 이름의 少女와 함께 房으로 옮겨졌다. 地域 高等學校 클럽에서 종이鶴을 房으로 데려온 것은 이 룸메이트를 데려온 直後였다. 사다코의 親舊인 하마모토 치즈코는 사다코에게 두루미에 關한 傳說을 들려주었는데 사다코는 그 中에서 종이鶴 1,000마리를 접는 것을 目標로 定했다. 이것은 그 保管函에 所願을 들어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사다코는 病院에 있는 동안에 많은 自由 時間을 가졌다. 하지만 종이가 不足했기 때문에 醫藥品 包裝紙와 病問安 膳物로 받은 종이를 얻기 위해 다른 患者의 病室에 가는 것을 包含하여 그女가 할 수 있는 다른 모든 手段을 使用했다. 사다코의 가장 親한 親舊인 치즈코度 사다코가 使用할 종이를 學校에서 가져왔다.

사다코는 죽기 前에 644마리만 접었기 때문에 1,000마리를 접겠다는 目標에도 못 미쳤고 親舊들이 1,000마리를 完成해 함께 묻었다는 이야기가 人氣를 얻고 있다. 그러나 히로시마 平和記念資料館 에 展示된 한 展示會에 따르면 1955年 8月 末까지 사다코 氏는 目標를 達成했고 300餘 마리의 종이鶴을 繼續 접었다고 한다. 사다코의 오빠인 사사키 마사히로는 自身의 冊인 《사사키 사다코 全集》에서 사다코가 目標를 超過 達成했다고 말한다.

죽음 [ 編輯 ]

棺 속의 사사키 사다코

사다코는 病院에 있는 동안에 몸 狀態가 漸次 惡化되었다. 1955年 10月 中旬 쯤에 自身의 왼쪽 다리는 붓고 보라色으로 變했다. 家族들이 밥을 먹으라고 勸하자 사다코는 밥에 車를 타 달라고 하며 맛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사다코는 마지막 말이 되는 家族들에게 感謝 人事를 傳했다. 사다코는 家族과 親舊들과 함께 1955年 10月 25日 아침에 享年 12歲를 一期로 世上을 떠났다.

사다코가 죽은 以後에 그의 屍身은 原子爆彈이 人體에 미치는 影響에 對한 硏究를 위해 原子爆彈 死傷者 委員會에 依해 調査의 對象이 되었다.

記念 [ 編輯 ]

사사키 사다코가 죽은 以後에 사다코의 親舊들과 學校 同僚들은 그와 또 다른 日本人 少女인 모리와키 요코를 包含한 原子爆彈의 影響으로 死亡한 모든 아이들을 위한 記念碑를 마련하기 위한 基金을 모으기 위해 便紙 모음을 出版했다. 1958年에는 黃金 鶴을 들고 있는 사사키 사다코 銅像이 日本 히로시마 平和記念公園 에 公開되었다. 銅像 아래에는 "이것은 우리의 외침이다. 이것이 우리의 祈禱이다. 世界의 平和"라는 名判이 있다.

美國 시애틀 平和 公園에는 사다코의 凍傷도 있다. 사다코는 核戰爭 의 影響의 代表的인 象徵이 되었다. 사다코는 또한 日本의 많은 少女들에게 女子 主人公이 되었다. 사다코의 이야기는 日本의 여러 學校에서 히로시마 原子爆彈 投下 追慕일마다 傳해지고 있다. 사다코에게 바쳐진 日本 全域의 사람들은 每年 8月 6日을 平和의 날로 記念한다.

美國의 藝術家인 슈 디시코(Sue DiCicco)는 사다코의 遺産을 祝賀하고 平和의 비전으로 全 世界의 學生들을 連結하기 위해 2013年에 平和 종이鶴 프로젝트를 設立했다. 디시코와 사다코의 오빠는 사다코에 對한 冊인 《사사키 사다코 全集》을 共同으로 執筆했는데 사다코의 實話를 英語圈 國家에 가져오기를 希望하고 있다. 그들의 웹사이트는 學生들을 위한 學習 案內書와 "마사히로에게 물어보세요"의 機會를 提供한다.

大衆 文化 [ 編輯 ]

사사키 사다코의 悲劇的인 죽음은 日本 히로시마를 訪問했던 러시아의 詩人인 라술 감자토프 의 詩 〈白鶴〉(Zhuravli)의 令監이 되었는데 이 詩는 러시아 最高의 戰爭 발라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사다코의 生涯와 죽음은 美國의 싱어송라이터인 프레드 스몰의 노래 〈크레인스 오브 히로시마〉(Cranes over Hiroshima)의 主題이기도 하다.

各州 [ 編輯 ]

  1. 日本人名大?典+Plus, デジタル版. “佐?木禎子とは” (日本語) . 2021年 11月 29日에 確認함 .  
  2. 20世紀日本人名事典,367日誕生日大事典. “佐?木 禎子とは” (日本語) . 2021年 11月 29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