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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念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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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念處 (四念處)는 佛敎의 37盜品 修行法 中 한 그룹으로, 몸  · 느낌  · 마음  · 法을 觀察하는 네 가지 알아차림 (sati, 社띠) 遂行 또는 冥想法을 말한다. 이 네 가지를 各各 신념처 (身念處) · 수념처 (受念處) · 심념처 (心念處) · 법념처 (法念處)라고 한다.

4念處는 4念珠 (四念住)라고도 한다.

4念處의 具體的인 修行法은 신념처   · 수념처   · 심념처   · 법념처 文書에서 다루고 있다.

4念處에 對해 읽고 듣고, 생각하여 理解하고, 遂行하여 一定한 또는 相當한 選定力과 智慧를 獲得한 後에 다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對해 大乘佛敎 經典인 《 坐禪三昧頃 》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2] [3] [4]

마땅히 涅槃이라는 最善의 法 가운데 들어가서 머물러야 한다. 정진의 힘으로 깊은 選定에 들어 4念處 中 법념처에서 모든 存在의 實相을 關하건대 모든 것이 괴로움이어서 즐거움이 없으며 괴로움은 愛着 等의 여러 가지 煩惱와 業에서 연유한다는 것을 알아 涅槃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이 괴로움은 一切가 남김없이 사라진다.

卽, 自身의 現在 處地에서 最善을 다해 精進 하여 4念處에 對해 읽고 듣고 [聞所成慧], 4念處에 對해 생각하여 그 理致를 理性的으로 卽 論理的으로 合理的으로 理解하고 [思所成慧], 4念處를 遂行하여 一定한 또는 相當한 修行力을 獲得했다면 [修所成慧], 다시 精進 (精進)을 일으켜 깊은 選定 (禪定)에 들고 그 깊은 選定에서 법념처 를 行함으로써, 卽, 《 般若心經 》에서 說하고 있는 바처럼 제법 을 管[照]하여 그 모두의 實相이 괴로움 無償 임을 알아차림 [見]으로써[照見五蘊皆空], 有爲와 武威 사이에 있는 深淵 (根本無明)을 건너뛸 수 있게 되어, 달리 말하면, 煩惱와 有爲의 波濤가 다 함께 寂滅하여 涅槃 들어가게 된다 고 말하고 있다. 卽, 精進波羅蜜   · 先淨波羅蜜   · 般若波羅蜜 에 依해 涅槃 卽 마하반야 卽 대보리 卽 眞如 無分別智 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모든 괴로움 이 남김없이 사라진다[度一切苦厄]고 말하고 있다.

上座部佛敎 의 理論에 따르면 석가불이 涅槃한 後의 5000年 內에 四念處(四念處, 內觀, 위파사나 ) 遂行은 如前히 須陀洹果 (須陀洹果)와 阿羅漢果 (阿羅漢果)를 얻을 수 있으며, 四念處 遂行은 唯一한 方法이다. 마하視 四野도 또는 레디 四野도 가 쓴 著書 等을 包含한 四念處와 關聯된 書籍을 읽어야 正確한 四念處 遂行을 잘 理解할 수 있다. [5]

4念處 修行法 [ 編輯 ]

팔리어 經典 《 디가 니까야 》 第22景 〈 大念처頃 〉과 《 맛지마 니까야 》 第10景 〈 念處頃 〉에 收錄된 4念處 修行法이 4念處를 다루고 있는 여러 佛敎 經典들 中에서 가장 具體的이고 또한 全體的이다. 그리고 이 經典들을 매우 重視하면서, 只今까지 이어져 온 上座部 佛敎 傳統에 따른 豐富한 註釋書가 있어 經典 自體의 文句만으로는 具體的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事實上 알 수 없는 部分에 對한 解答을 얻을 수 있다. 參考로, 經典 自體에는 各各의 具體的인 修行法이 收錄되어 있을 뿐 이들 수행법에 對한 名稱은 없다. 따라서 修行者들이나 硏究者들 또는 經典 飜譯者들이 붙인 名稱을 使用할 수밖에 없다.

《디가 니까야》 第22景 〈大念처頃〉에 나오는 具體的인 4念處 修行法의 目錄은 다음과 같다. 具體的인 修行法 自體는 신념처   · 수념처   · 심념처   · 법념처 文書에서 다루고 있다.

신념처 [6]

  1. 呼吸의 出入에 對한 알아차림
  2. 몸의 狀態에 對한 알아차림
  3. 몸의 行動에 對한 알아차림
  4. 몸을 構成하는 32가지 要素에 對한 알아차림
  5. 몸의 4大 要素에 對한 알아차림
  6. 죽은 屍體에 對한 觀察
  7. 죽은 屍體를 짐승들이 쪼아 먹는 모습에 對한 觀察
  8. 骸骨에 살과 피와 힘줄이 뒤엉켜 있는 모습에 對한 觀察
  9. 骸骨에 피와 힘줄이 뒤엉켜 있는 모습에 對한 觀察
  10. 骸骨에 힘줄만 남아 붙어 있는 모습에 對한 觀察
  11. 骸骨과 뼈가 흩어져 있는 모습에 對한 觀察
  12. 骸骨이 하얗게 바랜 모습에 對한 觀察
  13. 骸骨이 뼈 무더기로 變한 모습에 對한 觀察
  14. 뼈가 삭아 티끌로 變한 모습에 對한 觀察

수념처 [7]

  1. 즐거운 느낌에 對한 알아차림
  2. 괴로운 느낌에 對한 알아차림
  3.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對한 알아차림
  4. 속된 즐거운 느낌에 對한 알아차림
  5. 속되지 않은 즐거운 느낌에 對한 알아차림
  6. 속된 괴로운 느낌에 對한 알아차림
  7. 속되지 않은 괴로운 느낌에 對한 알아차림
  8. 속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對한 알아차림
  9. 속되지 않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對한 알아차림

심념처 [8]

  1. 貪慾이 있음에 對한 알아차림
  2. 貪慾이 없음에 對한 알아차림
  3. 憤怒가 있음에 對한 알아차림
  4. 憤怒가 없음에 對한 알아차림
  5. 어리석음이 있음에 對한 알아차림
  6. 어리석음이 없음에 對한 알아차림
  7. 萎縮됨이 있음에 對한 알아차림 [9]
  8. 散亂함이 있음에 對한 알아차림 [10]
  9. 넓은 마음이 있음에 對한 알아차림
  10. 넓은 마음이 없음에 對한 알아차림
  11. 優越한 마음이 있음에 對한 알아차림
  12. 優越한 마음이 없음에 對한 알아차림
  13. 고요한 마음이 있음에 對한 알아차림
  14. 고요한 마음이 없음에 對한 알아차림
  15. 解脫한 마음이 있음에 對한 알아차림
  16. 解脫한 마음이 없음에 對한 알아차림

법념처 [11]

  1. 다섯 障礙 [五蓋]에 對한 알아차림
  2. 다섯 執着된 온 [五取蘊]에 對한 알아차림
  3. 여섯 터전 [六入處]에 對한 알아차림
  4. 일곱 깨달음 要素 [七覺支]에 對한 알아차림
  5. 네 가지 거룩한 眞理 [四聖諦]의 法에 對한 알아차림

4念處의 重要性 [ 編輯 ]

4念處는 8程度 의 情念(正念, right mindfulness)에 該當하는 修行法이다. 間接的으로는 訂正(正定, right concentration)을 닦는 修行이다.

고마타 붓다가 涅槃에 들 무렵 아난 이 "부처님께서 涅槃에 드신 뒤에는 무엇에 依支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고타마 붓다는 "4念處에 依支하라"고 對答했다.

4念處 冥想은 고요한 奢摩他 (定, 止)와 關하는 위파사나 (慧, 觀)의 두 가지가 모두 包含되는 修行法이다. 4念處는 테라와다 (남방 上座部)佛敎의 代表的 修行法이며, 大乘佛敎의 曹洞宗 에서도 遂行한다. [12]

用語 [ 編輯 ]

廉(念)과 社띠(sati) [ 編輯 ]

4念處의 (念)은 南方佛敎 팔리어 에서는 社띠 (sati), 北方佛敎 산스크리트語 에서는 스므리티(sm?ti), 英語에선 알아차림 (mindfulness)이라고 한다. 韓國에서는 官(觀)한다고 할 때 官이 大部分 바로 念(念)을 뜻한다. 韓國語로는 마음챙김 또는 알아차림으로 가장 많이 飜譯되지만, 새김, 깨어있음, 注意깊음, 마음集中, 마음지킴, 受動的 注意集中 等으로도 飜譯된다.

英語 mindfulness의 形容詞型 mindful은 웹스터 辭典과 옥스포드 辭典에 따르면 '알아차리는'(aware)의 뜻이다. [13] [14] 콜린스 辭典에 따르면 '알아차리는'(aware)과 '注意를 기울이는'(heedful)의 뜻이다. [15] 따라서 mindfulness는 awareness(알아차림)와 同義語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4念處'라고 할 때의 念은 單純히 (念, sati)이라는 마음作用 自體만을 뜻하지 않는다. 《 阿毘達磨品類族론 》《 阿毘達磨俱舍論 》《 阿毘達磨純情理論 》《 瑜伽師地論 》《 顯揚聖敎論 》《 大勝阿毘達磨집론 》《 成唯識論 》 等 마음作用에 對해 說하고 있는 논書들에 따르면 (念)은 그 自體로서는 記憶力을 뜻한다. [16] [17] 記憶力이란 現在 對象을 明記(明記)하는 것 卽 明確히 記錄으로 남기는 것이다. 過去에 對한 回想으로서의 記憶力은 이 1次 作用에 根據한 2次 作用이다. 4念處에서 意味하는 念, 卽, 記憶力은 明確한 記憶力을 뜻한다. 明確한 記憶力이 되기 위해서는 日常的인 念이 아니라 對象에 意識的으로 注意를 기울이고 그것에 集中하는 形態의 念이 必要하다. 따라서 4念處의 念은 記憶力과 注意力, 卽, 注意集中을 뜻한다. 整理하자면, 念 自體에는 여러 狀態 또는 水準이 있는데 4念處의 念은 注意集中 狀態 또는 水準의 念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4념처에서의 念은 이러한 自體的 높은 水準에서의 念, 卽, 注意集中만이 아니고 (慧)를 根據로 하는 念이다. 그렇기 때문에 判斷力과 識別力, 卽, 알아차림, 卽, 般若 가 함께 하는 念을 뜻한다. [18] 이러한 複合的인 意味가 있기 때문에 4念處의 念은 單純히 '注意集中'李 아니라 '注意集中에 依한 알아차림'이다. 그리고 이 注意集中은 4念處의 具體的 修行法을 보면, 觀察 對象을 制御하려는 意圖 없이 行하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19] [20] [21] [22] '오로지 能動的 注意集中[觀]'이라기 보다는 '受動的 注意集中[止觀]'이다. 따라서 4念處의 念은 '受動的 注意集中[念 = 止觀]에 依한 알아차림[慧]'이다.

이와 같은 念(念), 卽, 觀察을 〈大念처頃〉 《중아함경》《잡아함경》 《별逆잡아함경》經 等 初期佛敎 經典에서는 '몸에서 몸을 觀察하는 것, 몸을 몸 그대로 觀察하는 것, 또는 單純히, 몸을 觀察하는 것', '느낌에서 느낌을 觀察하는 것, 느낌을 느낌 그대로 觀察하는 것, 또는 單純히, 느낌을 觀察하는 것', '마음에서 마음을 觀察하는 것, 마음을 마음 그대로 觀察하는 것, 또는 單純히, 마음을 觀察하는 것', '法에서 法을 觀察하는 것, 法을 法 그대로 觀察하는 것, 또는 單純히, 法을 觀察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고타마 붓다의 陳述을 《 阿毘達磨大毘婆沙論 》《 阿毘達磨俱舍論 》《 大智度論 》《 坐禪三昧頃 》《 淸淨度론 》《 瑜伽師地論 》《 成唯識論 》 等 事實上 모든 佛敎 宗派의 後代의 논서들에서는 붓다의 다른 가르침과 함께 綜合하여 顚倒 (?倒) 없이 觀察하여 傳道 없이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解釋한다. 前途는 4傳道를 뜻한다. 卽, 否定한 法에 對하여 깨끗하다는 뒤바뀐 생각[淨?倒]을 일으키는 것, 괴로움에 對하여 즐겁다는 뒤바뀐 생각[樂?倒]을 일으키는 것, 無常함에 對하여 恒常하다는 뒤바뀐 생각[常?倒]을 일으키는 것, 나가 없는데 對하여 나라는 뒤바뀐 생각[我?倒]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붓다의 陳述에 나타난 '있는 그대로 觀察한다'는 것의 意味 또는 內容을 보다 具體化하여 觀察이란 몸을 否定한 것이라고 觀察하고, 느낌을 괴로운 것이라고 觀察하고, 마음을 無常한 것이라고 觀察하고, 諸法을 無我인 것이라고 觀察하는 것이라고 본다.

법념처의 法 [ 編輯 ]

법념처에서 法( 팔리어 : dhamm? )은 5個 , 5溫 , 6處 , 7各地 , 4성제 를 의미한다.

5個 (五蓋)란 다섯가지 障礙로서, 貪慾, 성냄, 懶怠와 졸음, 動搖와 걱정 및 疑惑을 말한다. 5溫 (五蘊)이란 다섯가지 쌓임이라는 뜻으로, 색수上行式을 말한다. 6處 (六處)란 여섯가지 안팎의 機關 (六處) 現象을 말한다. 各 機關인 眼耳鼻설信義와 그 機關의 對象인 色性向美鏃法, 各 機關과 機關의 對象에 依해 생겨나는 煩惱를 말한다. 7各地 (七覺支)란 일곱 가지 깨달음의 要素라는 뜻으로, 廉各地(念覺支), 택법各地(擇法覺支), 정진각地(精進覺支), 喜各地(喜覺支), 경안各地(輕安覺支), 正各地(定覺支), 平等各地(平等覺支)를 말한다. 4성제 (四聖諦)는 네 가지 성스러운 眞理라는 뜻으로 苦集滅道를 말한다. 4성제는 特히 佛敎에서 가르치는 主要한 眞理(現象의 理致)로서 窮極的으로 4念處 冥想에서 體驗的으로 깨달아야 할 對象이다.

번역어 [ 編輯 ]

4念處의 英文 번역어와 그 意味는 다음과 같다.

  • 신념처(身念處): mindfulness of the body - 몸을 알아차림, 또는 몸에 對한 마음챙김 冥想
  • 수념처(受念處): mindfulness of feelings or sensations - 느낌 또는 感覺을 알아차림, 또는 느낌에 對한 마음챙김 冥想
  • 심념처(心念處): mindfulness of mind or consciousness - 마음 또는 意識을 알아차림, 또는 마음에 對한 마음챙김 冥想
  • 법념처(法念處): mindfulness of dhamm?s - 法을 알아차림, 또는 法에 對한 마음챙김 冥想

經論別 說明 [ 編輯 ]

디가 니까야의 大念처頃 [ 編輯 ]

上座部 佛敎의 代表的인 4念處 關聯 經典인 《 디가 니까야 》 第22景 〈 大念처頃 〉( 大念處經 , Mah?satipa??h?na Sutta )에서 고타마 붓다는 신념처 를 몸에서 몸을 觀察하며[身隨觀] 머무는 것, 수념처 를 느낌에서 느낌을 觀察하며[受隨觀] 머무는 것, 심념처 를 마음에서 마음을 觀察하며[心隨觀] 머무는 것, 법념처 를 法에서 法을 觀察하며[法隨觀] 머무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比丘들이여, 이 도는 唯一한 길이니, 衆生들의 淸淨을 위하고, 근심과 歎息을 다 건너기 爲한 것이며, 肉體的 苦痛과 精神的 苦痛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方法을 攄得하고, 涅槃을 實現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마음챙金의 確立[四念處]'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比丘들이여, 여기 比丘는 몸에서 몸을 觀察하며[身隨觀] 머문다. 世上에 對한 欲心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分明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者 되어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觀察하며[受隨觀] 머문다. 世上에 對한 欲心과 싫어히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分明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者 되어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觀察하며[心隨觀] 머문다. 世上에 對한 欲心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分明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者 되어 머문다. 法에서 法을 觀察하며[法隨觀] 머문다. 世上에 對한 欲心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分明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者 되어 머문다.

 
— 各묵스님 옮김(2015) 《디가 니까야》 第2卷 第22景 〈大念처頃〉 初期불前硏究員. pp.492~495.

중아함경의 念處頃 [ 編輯 ]

고타마 붓다는 《 중아함경 》 第24卷 第98景 〈 念處頃 〉에서 신념처 를 몸을 몸 그대로 觀하는 것[觀身如身], 수념처 를 느낌을 느낌 그대로 觀하는 것[觀覺如覺], 심념처 를 마음을 마음 그대로 觀하는 것[觀心如心], 법념처 를 法을 法 그대로 觀하는 것[觀法如法]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T01n0026_p0582b09?爾時,世尊告諸比丘:「有一道淨
T01n0026_p0582b10??生,度憂畏,滅苦惱,斷啼哭,得正法,謂
T01n0026_p0582b11?四念處。若有過去諸如來、無所著、等正覺,
T01n0026_p0582b12?悉斷五蓋、心穢、慧羸,立心正住於四念處,修
T01n0026_p0582b13?七覺支,得覺無上正盡之覺。若有未來諸
T01n0026_p0582b14?如來、無所著、等正覺,悉斷五蓋、心穢、慧羸,立
T01n0026_p0582b15?心正住於四念處,修七覺支,得覺無上正
T01n0026_p0582b16?盡之覺。我今現在如來、無所著、等正覺,我亦
T01n0026_p0582b17?斷五蓋、心穢、慧羸,立心正住於四念處,修七
T01n0026_p0582b18?覺支,得覺無上正盡之覺。   「云何?四?觀身
T01n0026_p0582b19?如身念處,如是觀覺、心、法如法念處。

그때 世尊께서 比丘들에게 말씀하셨다.
“衆生을 깨끗하게 하고 걱정과 두려움에서 濟度하며 苦惱를 없애고 슬픔을 끊고 바른 法을 얻게 하는 道(道)가 있으니, 곧 4念處(念處)이다. 過去의 모든 如來(如來)ㆍ무소착(無所着)ㆍ等正覺(等正覺)께서는 모두 5個(蓋)와 마음의 煩惱[心穢]와 智慧의 微弱함을 끊고 마음을 세워 4念處에 바르게 머무르고, 7各地(覺支)를 닦아 위없는 精進의 깨달음(無上正盡之覺)을 얻으셨다. 또 未來의 모든 如來ㆍ무소착ㆍ等正覺께서도 다 5個와 마음의 煩惱[心穢]와 智慧의 微弱함을 끊고 마음을 세워 4念處에 바르게 머무르고, 7各地를 닦아 위없는 精進(正盡)의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나는 只今 現在의 如來ㆍ무소착ㆍ等正覺으로서 나도 또한 5個와 마음의 煩惱[心穢]와 智慧의 微弱함을 끊고 마음을 세워 4念處에 바르게 머무르고 7各地를 닦아 위없는 精進의 깨달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몸[身]을 몸 그대로 關하는 念處(念處)이고 이와 같이 各(覺)을 各(覺) 그대로 關하며 마음[心]을 마음 그대로 官하고 法(法)을 法 그대로 關하는 念處이다.

 
— 《중아함경》 第24卷 第98景 〈念處頃〉. 漢文本 & 한글本 . 2022年 6月 18日에 確認.

별逆잡아함경 第102景 [ 編輯 ]

별逆잡아함경 》 第5卷 〈第102景〉에서 고타마 붓다는 4念處에 對해 "몸을 觀察하는 念處[觀身念處], 느낌을 觀察하는 念處[觀受念處], 마음을 觀察하는 念處[觀心念處], 法을 觀察하는 念處[觀法念處]"라고 하여 《디가 니까야》의 〈大念처頃〉과 《중아함경》의 〈念處頃〉과 같은 뜻으로 定義하고 있다.

T02n0100_p0410b10?如是我聞: 一時,佛在優樓頻螺聚落,
T02n0100_p0410b11?泥連河側菩提樹下,成佛未久。佛於樹下,獨
T02n0100_p0410b12?坐思惟,而作是念:「唯有一道,能淨?生,使離
T02n0100_p0410b13?苦惱,亦能除滅不善惡業,獲正法利,所言法
T02n0100_p0410b14?者,?四念處。云何名?四念處耶?觀身念處、
T02n0100_p0410b15?觀受念處、觀心念處、觀法念處。若人不修四
T02n0100_p0410b16?念處者,?遠離賢聖之法,遠離聖道。若離聖
T02n0100_p0410b17?道,?遠離甘露。若遠離甘露,則不免生老病
T02n0100_p0410b18?死、憂悲苦惱。如是等人,我說終不能得離於
T02n0100_p0410b19?一切諸苦。若修四念處,?親近賢聖法者,若
T02n0100_p0410b20?親近賢聖法,?親近賢聖道。若親近賢聖道,
T02n0100_p0410b21??親近甘露法。若親近甘露法,?能得免生
T02n0100_p0410b22?老病死、憂悲苦惱。若免生老病死、憂悲苦惱,
T02n0100_p0410b23?如是等人,?說離苦。」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禹루빈라 마을 니련선하 언덕의 菩提樹 밑에 계셨다. 成佛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
부처님께서는 나무 밑에 혼자 앉아서 思索하시며, 이러한 생각을 하셨다.

‘오직 하나의 道가 능히 衆生을 淸淨하게 해서 괴로움을 여의게 할 수 있고, 또한 좋지 못한 나쁜 業을 없애서 바른 法의 利益을 얻게 할 수 있다. 이 法이란 곧 4念處(念處)를 말한다.

무엇을 4念處라고 하는가? 몸을 觀察하는 念處[觀身念處], 느낌을 觀察하는 念處[觀受念處], 마음을 觀察하는 念處[觀心念處], 法을 觀察하는 念處[觀法念處]이다.

萬若 어떤 사람이 이 4念處를 닦지 않으면 聖賢의 法을 멀리한 것이고, 거룩한 道를 멀리한 것이다. 거룩한 道를 멀리한다면 곧 甘露(甘露)를 멀리 여의는 것이며, 萬一 甘露를 멀리 여읜다면 곧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과 근심  · 슬픔  · 괴로움을 면하지 못하리니, 이런 사람들에 對해서 나는 〈끝내 온갖 괴로움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萬一 4念處를 닦는다면 곧 聖賢의 法을 가까이하는 것이며, 聖賢의 法을 가까이하면 곧 聖賢의 道를 가까이하는 것이며, 聖賢의 道를 가까이하면 곧 甘露의 法을 가까이하는 것이며, 甘露의 法을 가까이하면 곧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과 근심  · 슬픔과 괴로움을 면하게 될 것이며,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과 근심  · 슬픔  · 괴로움을 면한다면 이런 사람에 對해서는 곧 苦痛을 여읜다고 말한다.’

 
— 《별逆잡아함경》 第5卷 〈第102景〉     漢文本 & 한글本 . 한글本은 編輯者가 一部 修正. 2022年 6月 18日에 確認.

不屑先行三十七品警 [ 編輯 ]

《不屑先行三十七品警》(佛說禪行三十七品經)에서는 4念處에 對해 다음과 같은 趣旨로 말하고 있다.

  • 신념처 는 自身의 몸  · 다른 사람의 몸  · 自身과 다른 사람의 몸을 受動的 注意集中으로 알아차려 世間 3係 無償 하고 無我 임을 깨닫는 것이다.
  • 수념처 는 自身의 느낌  · 다른 사람의 느낌  · 自身과 다른 사람의 느낌을 受動的 注意集中으로 알아차려 世間 3係 無償 하고 無我 임을 깨닫는 것이다.
  • 심념처 는 自身의 마음  · 다른 사람의 마음  · 自身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受動的 注意集中으로 알아차려 世間 3係 無償 하고 無我 임을 깨닫는 것이다.
  • 법념처 는 自身의 法  · 다른 사람의 法  · 自身과 다른 사람의 法을 受動的 注意集中으로 알아차려 世間 3係 無償 하고 無我 임을 깨닫는 것이다.

T15n0604_p0180c11?「諸比丘!若能彈指間,惟行自身身止
T15n0604_p0180c12?觀,外身身止觀,內外身身止觀,分別念解世
T15n0604_p0180c13?間癡惱,是?精進,?如佛?,非是愚癡食人
T15n0604_p0180c14?施,何況能多行者,撮取其要;若彈指間,止
T15n0604_p0180c15?觀痛,若止觀意及止觀法,內外分別念,解世
T15n0604_p0180c16?間癡惱,皆如上說,何況多行者;是故可念行
T15n0604_p0180c17?四意止。」

“萬一 능히 손가락을 튀기는 瞬間에도 오직 自身의 몸[身]을 受動的으로 注意集中[止觀]하여 알아차리고[分別念], 다른 사람[外身]의 몸을 受動的으로 注意集中하여 알아차리고, 自身과 다른 사람[內外身]의 몸을 [交代로] 受動的으로 注意集中하여 알아차리고 [그럼으로써] 世間의 어리석음과 괴로움[癡惱, 卽, 無常과 無我 - 치腦는 無常과 無我를 알지 못해 생긴 것이므로]을 깨닫는다[解]면 이것이 바로 精進(精進)이며,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이니, [이제 막 遂行에 進入한] 이 어리석은 사람도 남의 布施만 먹는 것이 아닐진대 어찌 하물며 능히 많이 行한 이가 그렇겠는가?
그 要諦(要體)를 모아 잡아서 萬若 손가락 튀기는 瞬間에라도 느낌[受, 痛]을 受動的으로 注意集中[止觀]하여 알아차리고[分別念], 마음[心, 意]을 受動的으로 注意集中하여 알아차리고, 法(法)을 受動的으로 注意集中하여 알아차리는 것을 自身과 다른 사람에 對해 [交代로] 그렇게 하고 [그럼으로써] 世間의 어리석음과 괴로움[癡惱, 卽, 無常과 無我]을 깨닫는다[解]면, 모두 위에서 說한 바와 같으니, 어찌 하물며 많이 行한 李珥겠느냐? 그러므로 4念處(四念處, 四意止)를 잊지 말고 行해야 하느니라.”

 
— 《不屑先行三十七品警》(佛說禪行三十七品經) 漢文本 & 한글本 , 한글本은 編輯者가 修正. 2022年 6月 18日에 確認.

大智度論 [ 編輯 ]

用水 의 《 大智度論 》 第19卷에 따르면, 4念處를 遂行하는 目的은 4錢도 (四?倒)를 깨뜨리기 위한 것이다. 卽, 아직 見道 (見道)에 들지 못한 凡夫 의 狀態일 때 일으키는, 否定한 法에 對하여 깨끗하다는 뒤바뀐 생각[淨?倒]을 일으키는 것, 괴로움에 對하여 즐겁다는 뒤바뀐 생각[樂?倒]을 일으키는 것, 無常함에 對하여 恒常하다는 뒤바뀐 생각[常?倒]을 일으키는 것, 나가 없는데 對하여 나라는 뒤바뀐 생각[我?倒]을 일으키는 것을 깨뜨리기 위해서이다. [23] [24] [25] [26]

신념처 停電도 (淨?倒)를 깨뜨리기 위한 것이고, 수념처 落錢度 (樂?倒)를 깨뜨리기 위한 것이고, 심념처 上典도 (常?倒)를 깨뜨리기 위한 것이고, 법념처 衙前度 (我?倒)를 깨뜨리기 위한 것이다. [25] [26]

달리 말해, 몸  · 느낌  · 마음  · 法의 各各이 否定함 [不淨]  · 괴로움 [苦]  · 無常함 [無常]  · 없음 [無我]의 性質을 다 지니고 있지만, 몸은 否定한 것이라고 官하고[觀身不淨], 느낌은 괴로움이라고 官하고[觀受是苦], 마음은 無常하다고 官하고[觀心無常], 卽 現象과 存在는 無我라고 關한다[觀法無我]. 卽, 몸을 對象으로 하는 신념처 에서는 否定함을 많이 官하고, 느낌을 對象으로 하는 수념처 에서는 괴로움을 많이 官하고, 마음을 對象으로 하는 심념처 에서는 無常함을 많이 官하고, 卽 現象과 存在를 對象으로 하는 법념처 에서는 나 없음을 많이 關한다. [27] [28]

신념처 는 갖가지 具體的인 理致 또는 論理에 根據하여, 몸이 不正(不淨)하고 無償(無常)하고 괴롭고[苦] 공(空)하고 나 없다[無我]고 具體的인 修行法으로 觀察하여 아는 것이다. [29] [30]

수념처 는 갖가지 具體的인 理致 또는 論理에 根據하여, "世間"(出世間이 아님)의 즐거운 느낌[樂受]을 괴롭다고 觀察하고, 괴로운 느낌[苦受]을 몸에 박혀 있어 시급히 빼내야 하는 화살과 같다고 觀察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을 無常하여 무너지는 特徵 또는 性質을 가진 것이라고 觀察하고, 그리하여 世間의 즐거운 느낌에 對하여는 (참된 즐거움이 아닌 것임을 알기에) 欲心의 執着 을 내지 않고, 괴로운 느낌에 對하여는 (성낼 겨를도 없이 그 화살을 빼내는 일에 集中하므로) 성냄 을 일으키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對하여는 (그러한 一時的인 平穩을 涅槃 卽 眞正한 解決 狀態라고 생각하는) 憂恥 를 일으키지 않게 되는 것이다. [31] [32]

심념처 는 갖가지 具體的인 理致 또는 論理에 根據하여, 한량없는 理由 때문에 마음이 無常한 줄을 觀察하여 아는 것이다. [33] [34]

법념처 는 갖가지 具體的인 理致 또는 論理에 根據하여, 모든 法이 갖가지 因緣의 和合에 依해 생겨난 것이어서 나라고 이름 지을 만한 實際의 法이 없다는 것을 觀察하여 아는 것이다. [35] [36]

또한,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大乘의 修行者, 卽, 菩薩은 더 나아가는데 이것을 大乘의 4念處 , 卽, 菩薩의 신념처, 菩薩의 수념처, 菩薩의 심념처, 菩薩의 법념처라고 한다.

菩薩의 신념처 는 갖가지 具體的인 理致 또는 論理에 根據하여 몸의 實相이 無償(無相)  · 部作원(不作願)  · 無作(無作)  · 무加取(無可取: 잡을 수 없음)  · 無生(無生)임을 觀察할 때, 煩惱에 汚染된 모든 欲望[染欲]과 執着을 떠나서 마음이 恒常 念(念: 受動的 注意集中)을 묶어 몸[身]에 두고[處, 住] 이들의 觀點에서 몸을 따라 살피는 것이다. [37] [38] [39] [40] [41] [42]

菩薩의 수념처 는 갖가지 具體的인 理致 또는 論理에 根據하여 3世 의 모든 느낌이 공(空)  · 無償(無常)  · 無作(無作)  · 無生(無生)임을 觀察하여 解脫門(解脫門)과 不生門(不生門)에 들어가고, 이와 같이 알고 나서는 마음을 對象에 묶어둔 狀態에서  · 괴로움  · 즐거움  ·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느낌이 오면 마음은 받아들이거나 執着하지도 않으며 짓지도 依支하지도 않는 것이다.

菩薩의 심념처 는 마음이 生(生)  · 週(住)  · 멸(滅)의 生滅하는 特徵 또는 性質을 가진 것임을 觀察하여 아는 것이다. 나아가, 갖가지 具體的인 理致 또는 論理에 根據하여, 마음이 공(空)  · 無我(無我)  · 무아소(無我所)  · 無償(無常)  · 무실(無實)  · 無生(無生)임을 觀察하여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番째 觀察에 依據하여 마음의 生滅하는 特徵 또는 性質을 觀察하면서도 實際의 生滅하는 法을 얻지 않으며, 더러움[垢]과 깨끗함[淨]을 分別치 않으므로 마음의 淸淨[心?淨]을 얻는다. 그리고 이와 같이 마음이 淸淨하기 때문에 客塵煩惱[客煩惱]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43] [44]

菩薩의 법념처 는 一切法이 因緣으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에 自省이 없으니, 眞實로 공(空)이고, 眞實로 公認 까닭에 特徵 또는 性質[相]李 없고, 特徵 또는 性質이 없는 까닭에 無作(無作: 지음이 없음)이고, 無作人 까닭에 法의 生(生)과 週(住)와 滅(滅)을 볼 수 없다고 關하여 無生法人 의 文[無生法忍門]과 無相門(無相門)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렇게 觀察할 때 마음을 對象 가운데 묶어두어 모든 法의 特徵 또는 性質을 手順하되 몸  · 느낌  · 마음  · 法의 네 가지 法이 處할 바가 없는[無處所] 줄 아는 것이다. [45] [46]

坐禪三昧頃 [ 編輯 ]

신념처 는 몸은 因緣따라 생긴 것이기 때문에 無償 (無常)하고, 또한 몸은 갖가지로 괴롭기 때문에 (苦)이고, 또한 몸에는 36가지 物件 [三十六物]李 있기 때문에 否定 (不淨)하고, 資材 (自在)하지 않기 때문에 無我 (無我)라고 觀察하는 것이다. [47] [48]

신념처에서 밝힌 바와 같이 몸의 實相이 無償(無常) · 高(苦) · 否定(不淨) · 無我(無我)임에도 不拘하고 顚倒된 見解를 일으켜 몸에 執着하는 것은 몸으로 느끼는 즐거운 느낌[樂痛 = 樂受]을 愛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즐거운 느낌[樂痛 = 樂受]李 '眞實로 얻을 수 없는 것[實不可得]'이라는 것을 關해야만 한다. 卽, 즐거운 느낌이란 '眞實한 즐거움이 아니다'는 것을, 달리 말하면, '늘 있는 즐거움이 아니다'는 것을 關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觀察하는 것을 수념처 라 한다. [49] [50]

마음은 허깨비와 같고 妖術과 같으니, 現在의 마음으로 過去의 마음을 關하면 或은 괴로움이고, 或은 즐거움이며, 或은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다. 마음은 各各 다르고, 各各 없어진다. 欲心이 있든 欲心이 없든 亦是 이와 같아서, 各各 다르고 各各 없어진다. 안의 마음을 管下든 밖의 마음을 管下든, 아니면 안팎의 마음을 管下든 亦是 이와 같다고 觀察하는 것을 심념처 (心念處)라 한다. [51] [52]

앞의 신념처  · 수념처  · 심념처에서 몸과 느낌과 마음이 '얻을 수 없는 것[不可得]'임을 關하였는데, 卽, 實體가 없음을, 卽, 主人이 없음을, 卽 空임을 關하였는데, 이제 4念處 全體를 總括하여 關하여도 主人을 얻을 수 없으며 個別로 關하여도 主人을 얻을 수 없다. [53] [54] 이와 같이 두루 主人이 없음을 觀하면, 一切의 存在는 모두가 공이며 資材하지 못해서, 因緣이 化合하기 때문에 생기고 因緣이 무너지기 때문에 없어진다. 이와 같이 因緣이 和合하여 法이 되니, 이와 같이 觀察하는 것을 법념처 (法念處)라 한다. [55] [56]

위의 4念處 各各의 觀察의 根據가 되는 理致 또는 論理가 《 坐禪三昧頃 》에 記述되어 있는데, 그 中에서 심념처 의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4念處 모두에 對한 觀察 根據로서의 理致 또는 論理는 " 四念處 (坐禪三昧頃) " 文書에 실려 있다.

  • 마음 6式 (安息  · 移植  · 鼻息  · 舌識  · 新式  · 意識)은 無償(無常)하여, 因緣을 쫓아 생겼다가 滅하는 것으로 머물지 않는다. 等類 相續 하여 생겨나기[相似生] 때문에, 이를 알지 못하는 顚倒된 認識으로, 恒常하는 하나의 存在가 있다고 여겨 '마음'이라고 이름붙인 것일 뿐이다. 本來 없다가 但只 只今 있는 것[本無今有 = 空卽是色]이고 只今의 있음이 지나면 없음으로 돌아가는 것[已有還無 = 色卽是空]이다. 그러므로 無常하다. [57] [58]
  • 마음 6式 의 本性을 觀察해 보면 공(空)임을 알게 되니, 무엇을 功이라 하는가? 共이란 因緣 따라 생기는 것을 말한다. [57] [58]
  • 눈이 있고, 物質이 있고, 눈이 볼 수 있고, 記憶할 수 있는 念(念)이 있고, 보고자 하는 欲求가 있어서 이와 같은 것들이 다 和合할 때 비로소 安息이 생긴다. 마치 해가 돋보기를 사랑함이 있고, 해가 있고, 돋보기가 있고, 마른 풀이 있고, 쇠똥이 있어서 이 모든 因緣이 和合하여 거기에서 불이 생기는 것과 같다. 하나하나를 미루어 찾으면 불은 얻을 수 없지만, 모든 因緣 卽 條件이 合하여 불이 있다. [57] [58]
  • 安息도 이 불과 같다. 따라서, 安息은 눈에도 머물지 않고, 物質에도 머물지 않으며, 눈과 物質의 中間에도 머물지 않으므로(즉, 中間에 머문다는 말은 半은 눈에 있고 半은 物質에 있다는 말 外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미 눈에도 머물지 않고 物質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했으니, 다시 半은 눈에 있고 半은 物質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恒常 머물러 있는 곳이 없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허깨비와 같고 妖術과 같다. [51] [52]
  • 現在의 마음 6式 으로 過去의 마음 6式 을 關하면 或은 괴로움이고, 或은 즐거움이며, 或은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다. [51] [52]
  • 마음 6式 은 各各 다르고, 各各 없어진다. [51] [52]
  • 欲心 이 있는 마음 6式 이건 欲心이 없는 마음이건 亦是 이와 같아서, 各各 다르고 各各 없어진다. [51] [52]
  • 안의 마음, 卽, 나의 마음 6式 을 關해 보아도, 亦是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다. [51] [52]
  • 밖의 마음, 卽, 다른 사람의 마음 6式 을 關해 보아도, 亦是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다. [51] [52]
  • 안팎의 마음, 卽, 나의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 卽, 集團의 마음 6式 을 關해 보아도, 亦是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다. [51] [52]

大般涅槃經後分 [ 編輯 ]

T12n0377_p0901a12?爾時阿難聞佛語已,身心戰動,情識?然,悲
T12n0377_p0901a13???咽,深沒憂海,?體迷悶,昏亂濁心,投如
T12n0377_p0901a14?來前猶如死人。爾時,阿泥樓逗安慰阿難,
T12n0377_p0901a15?輕其愁心,而語之言:「?哉!何?愁苦?如來涅
T12n0377_p0901a16?槃時至,今日雖有,明旦則無。汝依我語,諮?
T12n0377_p0901a17?如來,如是四問:『佛涅槃後,六群比丘行?他
T12n0377_p0901a18?家,惡性車匿,云何共住而得示??如來在世
T12n0377_p0901a19?以佛?師,世尊滅後以何?師? 若佛在世依
T12n0377_p0901a20? 佛而住,如來?滅依何而住? 如來滅後,結集
T12n0377_p0901a21?法藏,一切經初,安何等語?』」 爾時,阿難如從夢
T12n0377_p0901a22?中,聞阿泥樓逗安慰其心,令致四問,漸得醒
T12n0377_p0901a23?悟,哀不自勝,具陳上問而以白佛。
...
T12n0377_p0901b27?「阿難!如汝所問,佛去世後,
T12n0377_p0901b28?以何?師者?阿難!尸波羅蜜戒是汝大師,
T12n0377_p0901b29?依之修行,能得出世甚深定慧。「阿難!如汝所
T12n0377_p0901c01?問, 佛涅槃後,依何住者? 阿難! 依四念處嚴心
T12n0377_p0901c02? 而住 :觀身性相同於虛空,名身念處;觀受不
T12n0377_p0901c03?在內外、不住中間,名受念處;觀心但有名字,
T12n0377_p0901c04?名字性離,名心念處;觀法不得善法、不得不
T12n0377_p0901c05?善法,名法念處。阿難!一切行者,應當依此四
T12n0377_p0901c06?念處住。

이때 아난이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서 몸과 마음이 두려움으로 떨리고, 精神이 아득하였다. 슬피 울어 목이 쉬었고, 근심의 바다에 깊이 빠져 온몸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마음이 어둡고 어지럽고 흐릿하여 如來 앞에 쓰러지는데,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이때 아니루두(阿泥樓逗)가 아난을 慰勞하여 그 슬픈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말하였다. “어허, 어찌 근심으로 괴로워만 합니까? 如來께서 涅槃하실 때에 이르렀으니, 오늘은 비록 계시더라도 來日 아침이면 이 世上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대는 내가 말하는 대로 如來께 이와 같은 네 가지 質問을 드리십시오. 부처님께서 涅槃하신 뒤에 여섯 무리의 比丘가 더러운 다른 집에 가는 것과 暴惡한 性質의 車닉(車匿)과 어떻게 함께 머물면서 가르침을 보여야 합니까? 如來께서 世上에 살아 계실 때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世尊께서 涅槃하신 뒤에는 누구로써 스승을 삼아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世上에 살아 계실 때는 부처님을 依支하여 머물렀는데, 如來께서 이미 涅槃하시고 나면 무엇을 依支하여 머물러야 합니까? 如來께서 涅槃하신 뒤 法匠(法藏)을 結集(結集)하매 모든 經典 첫머리에 어떠한 말을 놓아야 합니까?”

이때 아난은 꿈속에서 아니壘頭가 그 마음을 慰勞하고 네 가지 質問을 여쭙게 하는 것을 듣는 것 같았다. 차츰 깨어났으나 슬픔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였다. 위의 물음을 빠뜨리지 않고 次例次例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
아난아, 네가 물은 것과 같이 부처님이 世上을 떠난 後에 무엇으로써 스승을 삼을까 한 것은 이러하다. 아난아, 時波羅蜜(尸波羅蜜)인 戒律이 너의 큰 스승이니 이것을 依支해 닦고 行하면, 世上을 벗어나서 매우 깊은 選定과 智慧를 얻을 수 있다.
아난아, 네가 물은 것과 같이 부처님께서 涅槃한 뒤에는 누구를 依支하여 머물까 한 것은 이러하다. 아난아, (6斤 卽 몸과 마음이 眞理 卽 涅槃과 漸漸 더 契合하는 狀態가 되게끔) 4念處(念處)를 依支하여 마음을 매우 徹底히 바르게 다스림으로써 머물러라(依四念處嚴心而住). [59] 몸의 聖像(性相)李 虛空과 같음을 觀하는 것을 신념처(身念處)라고 이름한다. 境界에서 받아들임이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中間에 머무는 것도 아니라고 觀하는 것을 수념처(受念處)라고 이름한다. 마음은 다만 명자(名字)가 있을 뿐이고 명자와 性(性)李 서로 分離된다고 觀하는 것을 심념처(心念處)라고 이름한다. 法(法)은 善法(善法)을 얻지 못하며 불旋法(不善法)도 얻지 못한다고 觀하는 것을 법념처(法念處)라고 이름한다. 아난아, 一切 遂行하는 사람은 마땅히 이 4念處를 依支해 머물러야 한다.

 
漢文本 & 한글本 . 야나발타라(若那跋陀羅) 漢譯, 심삼진 飜譯. 《大般涅槃經後分》 (大般涅槃經後分) 商圈, 2024年 5月 18日에 確認. 編輯者가 한글 飜譯 一部 修正. 括弧는 編輯者의 主席.

鐘磬錄 [ 編輯 ]

腺腫 法眼宗 (法眼宗)의 硏修 (904~975)의 《 鐘磬錄 》 第39卷에서는 《 大般涅槃經後分 》 商圈에 나오는 內容을 引用하여 4念處에 對해 다음과 같은 趣旨로 說明하고 있다.

  • 몸의 性質과 모습이 虛空과 같다고 觀하는 것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신념처 라고 한다.
  • 몸에 어떤 느낌이 있을 때 이 느낌이 몸이나 몸 바깥에 있지도 않고, 中間에 머물지도 않음을 觀하는 것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수념처 라고 한다.
  •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은 但只 固定된 槪念으로 명자라는 事實을 觀하는 것이니, 이 명자의 性品에서 벗어나는 것을 이름하여 심념처 라고 한다.
  • 衆生의 마음에 일어나는 一切 法은 좋은 法도 좋지 않는 法도 얻을 수 없다는 事實을 觀하는 것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법념처 라고 한다.

T48n2016_p0645a26?夫覺王明勅大?指歸。末法比丘。須於四念
T48n2016_p0645a27?處修道。其旨如何。   答。此出大般涅槃經。最
T48n2016_p0645a28?後垂示。總前?迹。同此指歸。以四念處。?是
T48n2016_p0645a29?宗鏡所明一切?生身受心法。如經云。佛告
T48n2016_p0645b01?阿難。如汝所問。佛涅槃後依何住者。阿難。依
T48n2016_p0645b02?四念處。嚴心而住。觀身性相。同於虛空。名身
T48n2016_p0645b03?念處。觀受不在內外。不住中間。名受念處。觀
T48n2016_p0645b04?心但有名字。名字性離。名心念處。觀法不
T48n2016_p0645b05?得善法。不得不善法。名法念處。阿難。一切
T48n2016_p0645b06?行者。應當依此四念處住。

【門】 大抵 부처님[覺王]께서 큰 가르침의 뜻을 밝게 申飭하셨으므로 말法(末法)에 있는 比丘들은 모름지기 4念處(念處)에서 道를 닦아야 하니, 그 뜻은 어떤 것인가?
【答】 이것은 『大涅槃頃(大涅槃經)』에서 最後에 드리워 보이신 것으로서 앞의 敎義 자취[敎迹]를 總括하여도 이 뜻과 같아지나니, 4念處 바로 이것은 종경(宗鏡)에서 밝힌 바 一切 衆生의 몸[身]과 느낌[受]과 마음[心]과 法(法)이다. 經에서 이르되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묻는 바와 같아서 부처가 涅槃한 뒤에는 무엇에 依하여 머무르느냐 하면, 아난아, 4念處에 依하여 마음을 嚴正히 하면서 머무를 것이니라. 몸의 性品과 模樣이 虛空과 같다고 官銜을 신념처(身念處)라고 하고, 느낌은 안팎에도 있지 아니하고 中間에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官銜을 수념처(受念處)라고 하며, 마음은 이름만이 있을 뿐이요 이름이라는 性品조차도 여의었다고 官銜을 심념처(心念處)라고 하고, 法은 착한 法도 얻지 못하고 착하지 않은 法도 얻지 못한다고 官銜을 법념처(法念處)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一切 遂行하는 이들이 이 4念處에 依하여 머물러야 하느니라’ ”고 하셨다.

 
漢文本 & 한글本 . 硏修 지음, 송성수 飜譯. 《鐘磬錄》 第39卷, 2022年 6月 18日에 確認.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구마라집 漢譯(T.614). 《坐禪三昧頃》(坐禪三昧經) 下卷 . 對精神수大藏經. T15, No. 614, CBETA:
    T15n0614_p0279a23?若行者得法念止,厭世間空老病
    T15n0614_p0279a24?死法,都無少許常樂我淨,我於此空法復何
    T15n0614_p0279a25?所求?應當入涅槃最善法中住。建精進力,得
    T15n0614_p0279a26?深舍摩陀故(深舍摩陀者,住心一處名也,此土無是名)。是時得深舍摩
    T15n0614_p0279a27?陀,住第四法念止中,觀諸法相,皆苦無樂,無
    T15n0614_p0279a28?樂是實,餘者妄語。苦因愛等諸煩惱及業,
    T15n0614_p0279a29?是非天、非時、非塵等種種妄語中生,是煩惱
    T15n0614_p0279b01?及業出生,此苦是苦。入涅槃時一切滅盡
  2. 구마라집 漢譯, 차차석 飜譯 (K.991, T.614). 《坐禪三昧頃》 下卷 :
    萬一 修行者가 법념지를 얻는다면 世間의 공(空)ㆍ늙음ㆍ병듦ㆍ죽음의 法을 싫어하여 도무지 조금도 上(常)ㆍ樂(樂)ㆍ아(我)ㆍ정(淨)을 許諾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이 公翰 法에서 다시 무엇을 求하는가?
    마땅히 涅槃의 最善의 法 가운데 들어가서 머물러야 하며, 精進의 힘을 세워서 깊은 奢摩他(舍摩陀)를 얻는다.깊은 奢摩他라는 것은 마음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이곳에서는 適切히 表現할 이름이 없다. 이때 깊은 奢摩他를 얻어서 第4의 法念地 가운데 머문다.
    모든 存在[諸法]의 모습을 關하건대 모든 것이 괴로움이어서 즐거움이 없으며, 즐거움이 없는 것이 眞實이요 나머지는 거짓말이니, 괴로움은 愛着 等의 여러 가지 煩惱와 業에서 연유한다. 이것은 하늘이 아니며, 時間이 아니고 티끌 等이 아니다.{티끌이 아니라는 等의} 이와 같은 갖가지 거짓말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갖가지 거짓말 속에서 생기니,} 이 煩惱와 業이 이 괴로움을 發生시킨다. 이 괴로움은 涅槃에 들어갔을 때 一切가 남김없이 사라진다.
  3. "坐禪三昧經(坐禪三昧頃)" , 耘虛. 《佛敎事前》:
    坐禪三昧經(坐禪三昧頃)
    2卷. K-991, T-614. 引渡의 僧伽羅刹 지음. 要津(姚秦)時代에 구마라집(鳩摩羅什, Kum?raj?va)李 402年에서 407年 사이에 長安(長安)에서 飜譯하였다. 줄여서 『선경(禪經)』이라 하고, 別稱으로 『菩薩選法經(菩薩禪法經)』ㆍ『阿蘭若濕癬法(阿蘭若習禪法)』ㆍ『坐禪三昧法聞慶(坐禪三昧法門經)』ㆍ『旋法요(禪法要)』라고도 한다. 勝友의 『出三藏器什』에 依하면, 이 佛殿은 어느 한 사람에 依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손에 依해서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大乘의 選菅(禪觀)을 말한 卿이다.
  4. "坐禪三昧經" , 星雲. 《佛光大辭典》(불광대事前) 3板:
    坐禪三昧經
    梵名 Dhy?na-ni??hita-sam?dhi-dharmapary?ya-s?tra。凡二卷(或三卷)。姚秦弘始四年(402)鳩摩羅什於長安譯出。弘始九年復校。又稱坐禪三昧法門經、菩薩禪法經、阿蘭若習禪法、禪法要。略稱禪經。收於大正藏第十五冊。此經係抄集諸家禪要,闡明五門禪之法,?論大小二乘綜合之禪觀。據僧叡關中出禪經序,諸家係指鳩摩羅陀、馬鳴菩薩、婆須蜜、僧伽羅叉、?波?、僧伽斯那、勒比丘等諸師。
    本經與覺賢在廬山譯出之達摩多羅禪經相同,論說大小二乘綜合性之禪觀。未譯出以前,我國佛?初期之禪觀,均係根據後漢安世高所譯之禪經;其後由於道安之倡導,北方前秦與後秦之禪觀始漸興隆,?盛行實修方法,然均不出小乘禪之領域。鳩摩羅什譯出本經後,大乘佛?與小乘禪乃至大乘禪與小乘禪之關係明確。故天台止觀之成立、我國禪宗之誕生,本經促發之功實不可滅。〔出三藏記集卷二、卷九、開元釋?錄卷四、中國佛?初期之禪觀(橫超慧日)〕p3576
  5. “Dhamma Talks (((((0))))) Attaining PEACE with KNOWING & SEEING a Handful of Leaves” . 2024年 4月 11日에 確認함 .  
  6. 大韓佛敎曹溪宗 敎育院 불學硏究所 編著(2005). 《修行法 硏究》 pp. 740-741
  7. 大韓佛敎曹溪宗 敎育院 불學硏究所 編著(2005). 《修行法 硏究》 p. 741
  8. 大韓佛敎曹溪宗 敎育院 불學硏究所 編著(2005). 《修行法 硏究》 pp. 741-742
  9. 大韓佛敎曹溪宗 敎育院 불學硏究所 編著(2005). 《修行法 硏究》 p. 741에서는 修行法의 이 順序에서 '散亂함이 있음에 對한 알아차림'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經典의 內容을 보면 經典에서 이 部分은 "萎縮된 마음을 萎縮된 마음이라 알아차린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註釋書에서는 萎縮된 마음이란 해태와 昏沈에 빠진 마음, 卽, 5個 中 混綿個(?眠蓋)에 빠진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萎縮됨이 있음에 對한 알아차림'으로 編輯者가 訂正하여 表記하였다.
  10. 大韓佛敎曹溪宗 敎育院 불學硏究所 編著(2005). 《修行法 硏究》 p. 741에서는 修行法의 이 順序에서 '散亂함이 없음에 對한 알아차림'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經典의 內容을 보면 經典에서 이 部分은 "散亂한 마음을 散亂한 마음이라 알아차린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註釋書에서는 散亂한 마음이란 들뜸과 함께하는 마음, 卽, 5個 中 도회개(掉悔蓋)에 빠진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散亂함이 있음에 對한 알아차림'으로 編輯者가 訂正하여 表記하였다.
  11. 大韓佛敎曹溪宗 敎育院 불學硏究所 編著(2005). 《修行法 硏究》 p. 742
  12. For an example of a Zen master's explicit use of this type of meditation, see Nhat Hanh (2005).
  13. " mindful ", 네이버 英英事前. 2022年 6月 17日에 確認.
    Merriam Webster 事前:
    mindful:
    1. bearing in mind; aware
    be mindful of how you use your power
    2. inclined to be aware
    a stirring and important book for all mindful Americans
  14. " mindful ", 네이버 英英事前. 2022年 6月 17日에 確認.
    Oxford Press 事前:
    mindful:
    1. conscious or aware of something
    I arrived home for the summer, ever mindful of my obligations to my parents
    2. focusing one's awareness on the present moment, especially as part of a therapeutic or meditative technique tune in to your body and be mindful
    3. [formal] [with infinitive]
    inclined or willing to do something
    the judge said that he was not mindful to postpone the eviction again
  15. " mindful ", 네이버 英英事前. 2022年 6月 17日에 確認.
    Collins 事前:
    mindful:
    1. (usually postpositive and foll by of) keeping aware; heedful
    mindful of your duties
  16. (中國語) 細雨 兆, 現場 漢譯 (T.1542). 《阿毘達磨品類足論》(阿毘達磨品類族론) 第1卷 . 對精神수大藏經. T26, No. 1542, CBETA
    念云何。謂心明記性。
  17. 細雨 지음, 現場 漢譯, 송성수 飜譯 (K.949, T.1542). 《阿毘達磨品類族론》 第1卷 . 佛敎記錄文化遺産 아카이브.
    廉(念)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分明히 記憶하는 性品[明記性]이다.
  18. 世親 兆, 現場 漢譯, 권오민 飜譯,《阿毘達磨俱舍論》 第23卷
    그렇다면 4念珠의 本質[體]은 무엇인가?
    이러한 4念珠의 本質에는 各其 세 가지가 있으니, 自省(自性)과 上잡(相雜)과 소연(所緣)의 差別이 있기 때문이다. 卽 自省念珠(卽 念珠 그 自體)는 慧를 本質로 하는데, 이러한 慧에도 亦是 세 가지 種類가 있으니, 이를테면 門(聞) 等에 依해 成就되는 慧可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亦是 3種 念珠라고도 이름하는 것이다. 그리고 賞잡念珠는 이러한 慧와 그 밖의 具有하는 法을 本質로 하며, 소연念珠는 이러한 세 가지 惠義 소연이 되는 諸法을 本質로 한다. 5)
    5) 自省念珠의 本質은 文  · 社  · 水素誠意 세 가지 慧로서, 4念珠는 各其 이러한 慧를 本質로 하여 成立하기 때문에 亦是 세 가지 種類로 分類된다. 上잡念珠란 慧와 相應  · 具有하는 審  · 心所法과 得(得)과 4像을 말하며, 소연念珠란 慧에 依해 觀察되는 몸  · 수  · 마음  · 法 等을 말한다. 卽 念珠는 그것을 소연으로 하여 成立하였기 때문이다.
    自省念珠의 本質은 바로 慧로서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는 事實을 어떻게 안 것인가?
    經에서 說하기를, “몸에 對해 純新館(循身觀, k?y?nup??in:몸을 쫓아 觀하는 것)으로 머무는 것을 信念주라고 이름하며, 그 밖의 세 가지도 亦是 그러하다”고 하였다. 6) 卽 ‘쫓아서 觀하는 것[循觀, anupa?in]’이라고 이름하는 모든 것은 오로지 慧 自體에 根據한 것이니, 慧可 存在하지 않는다면 [몸을] 쫓아서 關하는 觀法의 作用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6) 『잡아함경』 勸第24(臺正裝2, p.171床, p.商), “이른바 4念妻家 있으니,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한 것인가? 몸을 몸이라고 關하는 念處이며, 地殼을 知覺으로, 마음을 마음으로, 法을 法으로 關하는 念處가 바로 그것이다.” 『중아함경』 勸第24 「念處品」(臺正裝1, p.528) 參照.
    어떠한 緣由에서 慧에 對해 念珠라고 이름한 것인가?
    비바私私(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說하고 있다. “이러한 品類는 記憶[念]李 增大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記憶의 힘이 慧를 維持시켜 일어날 수 있게 한다는 뜻으로, 마치 도끼가 쐐기의 힘에 依해 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다.” 7)
    7) 念珠의 本質이 慧라면 왜 ‘惠主(慧住)’라고 이름하지 않고 ‘念珠(念住)’라고 이름한 것인가 하면, ‘廉’李 增大하여 그 힘에 依해 慧可 소연에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論奏 世親은 이와 反對로 念은 慧에 依해 觀察된 것만을 능히 明記(明記)하는 것으로, 惠義 힘이 ‘廉’을 소연의 境界에 머물게 하기 때문에 ‘念珠’라고 이름한 것이라고 하였다.(후술)
    그러나 理致上으로 볼 때 實로 慧可 鹽으로 하여금 [소연에] 머물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慧에 對해 ‘念珠’라는 名稱을 設定한 것이라고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이니, 慧에 依해 觀察된 바에 따라 능히 明記(明記)하기 때문이다. 곧 이 같은 事實에 따라 無滅(無滅)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萬若 어떤 이가 능히 몸에 對해 純新館(循身觀)으로 머물 때라면, 몸을 소연으로 하는 ‘廉’李 머물 수 있다. ……(以下 仔細한 內容은 省略함)” 8) 世尊께서도 亦是 설하시기를, “萬若 어떤 이가 몸에 對해 純神官으로 머물 때라면, ‘廉’은 바로 틀림없이 머물게 된다”고 하셨던 것이다 9)
    8) 『잡아함경』 勸第19 第535景(臺正裝2, p.139重). 여기서 無滅은 尊者 아나율(阿那律, Aniruddha). “무엇을 일러 4念處를 즐기는 것이라고 하는가? 尊者 대목건련이시여! 萬若 어떤 比丘가 몸을 몸으로 關하는 念處[身身觀念處]에서 마음이 몸을 소연으로 삼아 情念(正念)으로 머물어 朝服받고 知識(止息) 適正(寂靜)하여 한 마음이 增進(增進)하면, 이와 마찬가지로 수ㆍ審ㆍ법념처에서 情念으로 머물어 朝服받고 知識 滴定하여 한 마음이 增進하면 이를 4念處를 즐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卽 本論의 뜻은 惠義 心所가 純信管에 依해 몸을 觀察할 때 同時에 염의 心所가 惠義 心所가 觀察한 바를 記憶하여 그 소연(卽 몸)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9) 『잡아함경』 勸第11 第281景(臺正裝2, p.77하), “어떻게 4念處를 닦아 7角分의 圓滿함을 獲得하는 것인가? 目犍連 比丘는 이와 같이 몸에 따라 神觀(身觀)에 머무니, 그는 몸에 따라 新館에 머물 때 記憶[念]을 모아 安住하여 決코 잊지 않았다.(云何修四念處得七覺分滿足? 目?連比丘如是順身身觀住, 彼順身身觀住時 攝念安住不忘.)”
  19. (韓國語) 大林스님 옮김(2014) 《맛지마 니까야》 第4卷 第118景 〈들숨날숨에 對한 마음챙김 警〉 初期불前硏究員. pp.183~184.
    18. "① 길게 들이쉬면서는 133)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는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② 짧게 들이쉬면서는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는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③ '온몸을 經驗하면서 들이쉬리라.' 134) 며 工夫짓고 '온몸을 經驗하면서 내쉬리라.'며 工夫짓는다. ④ '몸의 作用[身行] 135) 136) 을 便安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工夫짓고 '몸의 作用을 便安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工夫짓는다.”
    133) '들이쉬면서는'은 assasanto를 옮긴 것인데 이 單語는 assasati(?+??vas, to breathe )의 現在 噴射이다. '길게 들이쉬면서는'은 길게 들이쉴 때라는 뜻으로 길게 들이쉬어야겠다.'거나 '짧게 쉬어야겠다.'거나 하는 그런 一切의 意圖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길게 들이쉴 때는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안다는 뜻이다. 『淸淨度론』 (VIII.168)은 『無㝵해도』의 說明을 認容히여 '이렇게 꿰뚫어 알 때 熱意(chanda)가 일어나고, 또한 환희(p?mojja)가 일어난다.'라고 說明하고 있다.(Ps.i.177)
    135) 여기서 '몸의 作用[身行,kaya-sa?kh?ra]'은 들숨날숨을 말한다. 『상윳따 니까야』제4권 까마部 警」2(S41:6/iv.293) §5에서 까마部 尊者는 찟따 長子에게 “莊子여,들숨날숨은 몸에 屬하는 것이고 이런 法들은 몸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들숨날숨은 몸의 作用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本署 第2卷 「敎理問答의 짧은 警」(M44) §14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淸淨度론』의 伏誅書인『빠라맛타 滿洲史』도 “여기서 '몸의 作用[身行,k?ya-sa?kh?ra]'이란 들숨날숨을 말한다. 비록 이것은 마음에서 생긴 것이지만 그것의 存在가 몸에 묶여 있고 몸을 통해 形成되기 때문에 몸의 作用이라 부른다."(Pm. 220)라고 說明하고 있다.
    『상윳따 니까야』 第3卷 「앗사지 警」 (S22:88) §7의 주해도 參照할 것.
    136) '新行(身行)'으로 漢譯되는 kaya-sa?kh?ra를 本署 全體에서 譯者는 크게 두 가지로 옮기고 있다. 여기서처럼 '몸의 作用'으로도 옮기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는 '몸의 意圖的 行爲'로도 옮긴다.
  20. 世親 兆, 現場 漢譯(T.1558). 《阿毘達磨俱舍論》(阿毘達磨俱舍論) 第22卷 . 對精神수大藏經. T29, No. 1558, CBETA:
    T29n1558_p0118a23?數
    T29n1558_p0118a24?謂繫心緣入出息不作加行。放捨身心唯
    T29n1558_p0118a25?念憶持入出息數。從一至十不減不增。
    T29n1558_p0118a26?恐心於現。極聚散故
  21. 世親 지음, 現場 漢譯, 권오민 飜譯 (K.955, T.1558). 《阿毘達磨俱舍論》 第22卷 :
    ‘水(數, gana??)’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마음을 들숨과 날숨에 集中하여 어떠한 加行道 짓지 않고, 몸과 마음을 便安히 놓아둔 채 오로지 들숨과 날숨만을 생각하고 記憶하여 하나에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게 헤아리는 것[數]을 말하니, 마음이 警戒(卽 入植ㆍ출式)에 너무 매이거나 흩어지는 것을 念慮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22. Gelong Lodro Sangpo, Louis de La Vallee Poussin, Xuanzang, Vasubandhu (2012). 《Abhidharmako?a-Bh??ya of Vasubandhu: The Treasury of the Abhidharma and its (Auto) commentary》 Vol. 3. p.1904. 漢字는 編輯者가 追加.
    1. Counting (ga?an? 數). - One fixes one's thought 繫心 on 緣 in-breathing and out-breathing [??vasapra?v?sa 入出息], without effortful exertion or instigation (abhisa?sk?ra 加行) 不作加行, leaving 捨 the body and thought 身心 as they are;148 through mere mindfulness [sm?ti 念] 唯念憶持入出息, one counts 數 from one up to ten 從一至十. <155> Through fear of 恐 being too brief (abhisa?k?epa) for thought 心於現 and of distracting (vik?epa 散) (vii. 11) thought 極聚散, one does not [count] below ten or above ten 不減不增.
  23.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T.1509). 《大智度論》(大智度論) 第19卷 . 對精神수大藏經.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198a21?   有?生多念,亂心?倒故,著此身、受、心、
    T25n1509_p0198a22?   法中作邪行,?是人故說四念處。
  24.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 김성구 飜譯/김형준 個驛 (K.549, T.1509). 《大智度論》 第19卷 :
    衆生은 생각이 많고 어지러운 마음으로 뒤바뀌었기에 이 몸ㆍ느낌ㆍ마음ㆍ法에 執捉되어 삿된 行을 짓나니, 이런 사람을 위하는 까닭에 4念處를 說한다.
  25.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T.1509). 《大智度論》(大智度論) 第19卷 . 對精神수大藏經.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198c14?   何以
    T25n1509_p0198c15?   故?凡夫人未入道時,是四法中,邪行起四
    T25n1509_p0198c16?   ?倒:諸不淨法中淨?倒,苦中樂?倒,無常
    T25n1509_p0198c17?   中常?倒,無我中我?倒。破是四?倒故,
    T25n1509_p0198c18?   說是四念處;破淨倒故說身念處,破樂倒
    T25n1509_p0198c19?   故說受念處,破常倒故說心念處,破我倒
    T25n1509_p0198c20?   故說法念處。以是故說四,不少不多。
  26.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 김성구 飜譯/김형준 個驛 (K.549, T.1509). 《大智度論》 第19卷 :
    그것은 왜냐하면 凡夫가 아직 道에 들지 않았을 때 이 네 가지 法에서 삿된 行을 하거나 네 가지 뒤바뀐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모든 否定한 法에 對하여 깨끗하다는 뒤바뀐 생각[淨?倒]을 일으키며, 괴로움에 對하여 즐겁다는 뒤바뀐 생각[樂?倒], 無常함에 對하여 恒常하다는 뒤바뀐 생각[常?倒], 나가 없는데 對하여 나라는 뒤바뀐 생각[我?倒]을 일으킨다.
    이런 네 가지 뒤바뀜[四?倒]을 깨뜨리기 위한 까닭에 이 4念處를 말하는 것이다.
    깨끗하다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리려는 까닭에 신념처(身念處)를 말하고, 즐겁다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리려는 까닭에 수념처(受念處)를 말하고, 恒常하다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리려는 까닭에 심념처(心念處)를 말하고, 나가 있다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리려는 까닭에 법념처(法念處)를 말한다.
    이런 까닭에 넷을 말하니, 이는 모자라지도 많지도 않은 것이다.
  27.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T.1509). 《大智度論》(大智度論) 第19卷 . 對精神수大藏經.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198c11?   觀四法四
    T25n1509_p0198c12?   種:觀身不淨,觀受是苦,觀心無常,觀法
    T25n1509_p0198c13?   無我。是四法雖各有四種,身應多觀不淨,
    T25n1509_p0198c14?   受多觀苦,心多觀無常,法多觀無我。
  28.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 김성구 飜譯/김형준 個驛 (K.549, T.1509). 《大智度論》 第19卷 :
    네 가지 法을 네 種類로 觀察하니, 곧 몸이 否定하다고 觀察하고, 느낌은 괴롭다고 觀察하고, 마음은 無常하다고 觀察하고, 法은 나가 없다고 觀察한다.
    이 네 가지 法이 各各 네 가지 法을 갖추고 있으나, 몸에서는 不正을 많이 官하고, 느낌에서는 괴로움을 많이 官하고, 마음에서는 無常함을 많이 官하고, 法에서는 나 없음을 많이 關해야 한다.
  29.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T.1509). 《大智度論》(大智度論) 第19卷 . 對精神수大藏經.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199c02?   行者思惟是身,如
    T25n1509_p0199c03?   是不淨、無常、苦、空、無我,有如是等無量過
    T25n1509_p0199c04?   惡。如是等種種觀身,是名身念處。
  30.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 김성구 飜譯/김형준 個驛 (K.549, T.1509). 《大智度論》 第19卷 :
    修行者는 이 몸이 이렇게 否定하고 無常하고 괴롭고 貢하고 나 없다고 思惟한다. 이러한 한량없는 허물이 있으니, 이러한 갖가지 方法으로 몸을 觀察하는 것을 신념처라 한다.
  31.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T.1509). 《大智度論》(大智度論) 第19卷 . 對精神수大藏經.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200a16?   如是種種
    T25n1509_p0200a17?   因緣,觀世間樂受是苦,觀苦受如箭,不苦
    T25n1509_p0200a18?   不樂受觀無常壞敗相;如是則樂受中不
    T25n1509_p0200a19?   生欲著,苦受中不生?,不苦不樂受中不
    T25n1509_p0200a20?   生愚癡。是名受念處。
  32.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 김성구 飜譯/김형준 個驛 (K.549, T.1509). 《大智度論》 第19卷 :
    이와 같은 갖가지 因緣으로 世間의 즐거운 느낌을 괴롭다고 觀察하고, 괴로운 느낌은 화살과 같다고 觀察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無常하여 무너지는 特徵 또는 性質{모습}이라고 觀察한다.
    이와 같다면 즐거운 느낌에 對하여는 欲心의 執着을 내지 않고, 괴로운 느낌에 對하여는 성냄을 일으키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對하여는 愚癡를 일으키지 않게 된다. 이것이 수념처(受念處)이다.
  33.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T.1509). 《大智度論》(大智度論) 第19卷 . 對精神수大藏經.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200b25?   如是無量因緣故,知心無常,是名
    T25n1509_p0200b26?   心念處。
  34.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 김성구 飜譯/김형준 個驛 (K.549, T.1509). 《大智度論》 第19卷 :
    이와 같은 한량없는 理由{因緣} 때문에 마음이 無常한 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심념처(心念處)이다.
    如是無量因緣故,知心無常,是名心念處。
  35.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T.1509). 《大智度論》(大智度論) 第19卷 . 對精神수大藏經.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200c27?   如是等種
    T25n1509_p0200c28?   種因緣,觀諸法和合因緣生,無有實法有
    T25n1509_p0200c29?   我,是名法念處。
  36.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 김성구 飜譯/김형준 個驛 (K.549, T.1509). 《大智度論》 第19卷 :
    이 같은 갖가지 因緣으로 모든 法이 和合의 因緣으로 생겨난 것이어서 나라고 이름 지을 만한 實際의 法이 없다고 觀察하니, 이것을 법념처(法念處)라 한다.
  37.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T.1509). 《大智度論》(大智度論) 第19卷 . 對精神수大藏經.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203b27?  
    T25n1509_p0203b28?   身觀是身無我、無我所故空,空故無男女
    T25n1509_p0203b29?   等諸相,無相故不作願。
  38.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 김성구 飜譯/김형준 個驛 (K.549, T.1509). 《大智度論》 第19卷 :
    몸을 따라 觀察[循身觀]해보면, 이 몸은 나[我]가 없고, 나가 없음 卽 無我(無我)이기에 실(實)李 없고, 실이 없음 卽 공[空]하기에 男女 等의 모든 特定할 수 있는 特徵 또는 性質{模樣}李 없고, 特定할 수 있는 特徵 또는 性質이 없음 卽 無償(無相)이기에 이 몸은 部作원(不作願)이다, 卽, 짓고자 하는 (自身의 또는 他者의) 元에 依한 存在 卽 짓고자 하는 圓이 있는 存在라고 말할 수 없다[不作願].
    {몸을 따라 觀察[循身觀]해보면, 이 몸은 나[我]가 없고, 無我(無我)이기에 실이 없고, 공[空]하기에 男女 等의 모든 特徵 또는 性質{模樣}李 없고, 無償(無相)이기에 이 몸은 짓고자 하는 圓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不作願].}{몸을 두루 觀察하건대 이 몸은 나 없고, 나 없기에 貢하고, 공하기에 男女 等의 모든 特徵 또는 性質{模樣}李 없고, 特徵 또는 性質{模樣}李 없기에 원(願)을 짓지 않는다.}’
  39.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T.1509). 《大智度論》(大智度論) 第19卷 . 對精神수大藏經.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203c04?   如是思惟,知是身從本以來無有
    T25n1509_p0203c05?   生相,知是身無相無可取。無生故無相,無
    T25n1509_p0203c06?   相故無生,但?凡夫故名?身。
  40.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 김성구 飜譯/김형준 個驛 (K.549, T.1509). 《大智度論》 第19卷 :
    이와 같이 事由하여, 이 몸은 本來부터 生相(生相)이 없다는 것을 卽 나게 하는 特徵 또는 性質{모습}李 없다는 것을 卽 無生(無生)이라는 것을 알고, 이 몸은 無償(無相)이며 무加取(無可取: 잡을 수 없음)라는 것을 안다. 無生(無生)이므로 無償(無相)이며 無償이므로 無生이건만 다만 속임을 當한[?] 汎否認 까닭에 [實在하는] 몸이라 이름한다는 것을 안다. {이와 같이 思惟한다면 이 몸은 本來부터 나는 特徵 또는 性質{모습}李 없음을 아나니, 이 몸은 無償(無相)이며 잡을 수 없다.
    無生이기에 特徵 또는 性質{모습}李 없고, 特徵 또는 性質{모습}李 없기에 無生이거늘 오직 어리석은 汎否認 까닭에 일컬어 몸이라 함을 안다.}
  41.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T.1509). 《大智度論》(大智度論) 第19卷 . 對精神수大藏經.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203c06?   菩薩如是
    T25n1509_p0203c07?   觀身實相時,離諸染欲著,心常繫念在身。
    T25n1509_p0203c08?   循身觀如是,名?菩薩身念處。
  42.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 김성구 飜譯/김형준 個驛 (K.549, T.1509). 《大智度論》 第19卷 :
    菩薩이 이와 같이 몸의 實狀을 觀察할 때, 煩惱에 汚染된 모든 欲望[染欲]과 執着을 떠나서 마음이 恒常 생각[念]을 묶어 몸에 두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몸을 따라 살피는 것을 일컬어 菩薩의 신념처라고 한다.
    {菩薩이 이와 같이 몸의 實狀을 觀察할 때, 煩惱에 汚染된 모든 欲望[染欲]과 執着을 떠나서 恒常 마음을 묶어 몸에 두고 이와 같이 몸을 따라 살피는 것을 일컬어 菩薩의 신념처라고 한다.}
    {菩薩이 이와 같이 몸의 實狀을 觀察할 때 모든 물들은 欲望[染欲]과 執着心을 여의고 恒常 마음을 묶어 몸에 두고 몸을 두루 살피니, 이와 같음을 일컬어 菩薩의 신념처라고 한다.}
  43.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T.1509). 《大智度論》(大智度論) 第19卷 . 對精神수大藏經.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203c21?   菩薩云何觀心念處?
    T25n1509_p0203c21?   菩薩觀內心,
    T25n1509_p0203c22?   是內心有三相:生、住、滅;作是念:是心無所
    T25n1509_p0203c23?   從來,滅亦無所至,但從內外因緣和合生。
    T25n1509_p0203c24?   是心無有定實相,亦無實生、住、滅,亦不在
    T25n1509_p0203c25?   過去、未來、現在世中。是心不在內、不在外、
    T25n1509_p0203c26?   不在中間。是心亦無性無相;亦無生者,無
    T25n1509_p0203c27?   使生者。外有種種雜六塵因緣,內有?倒
    T25n1509_p0203c28?   心相生滅相續故,?名?心。如是心中實
    T25n1509_p0203c29?   心相不可得。是心性不生不滅,常是淨相,客
    T25n1509_p0204a01?   煩惱相著故,名?不淨心。心不自知,何以
    T25n1509_p0204a02?   故?是心,心相空故。是心本末無有實法,是心
    T25n1509_p0204a03?   與諸法無合無散,亦無前際、後際、中際,無
    T25n1509_p0204a04?   色、無形、無對,但?倒虛?生。是心空,無我、無
    T25n1509_p0204a05?   我所,無常無實。是名隨順心觀。知心相無
    T25n1509_p0204a06?   生,入無生法中。何以故?是心無生,無性無相,
    T25n1509_p0204a07?   智者能知。智者雖觀是心生滅相,亦不得
    T25n1509_p0204a08?   實生滅法,不分別垢淨而得心?淨。以是
    T25n1509_p0204a09?   心?淨故,不?客煩惱所染。如是等觀
    T25n1509_p0204a10?   內心。觀外心、觀內外心亦如是。
  44.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 김성구 飜譯/김형준 個驛 (K.549, T.1509). 《大智度論》 第19卷 :
    菩薩은 어떻게 심념처(心念處)를 觀察하는가?
    菩薩은 먼저 안의 마음을 觀察하여 안 마음에 生(生)ㆍ週(住)ㆍ멸(滅)의 세 가지 特徵 또는 性質{모습}李 있음을 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마음은 온 곳도 없고, 滅해도 가는 곳도 없으며, 오직 안팎의 因緣이 和合해서 생긴 것이다. 이 마음은 固定된 實際의 特徵 또는 性質{모습}李 없고, 實際의 生ㆍ週ㆍ滅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으며, 過去의 世上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未來의 世上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現在의 世上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이 마음은 안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밖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中間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이 마음은 性品이 없고 特徵 또는 性質{모습}李 없다. 또한 이 마음은 스스로 낳는 이도 없고 또한 낳도록 시키는 이도 없다. 밖으로는 갖가지 뒤섞인 6陣(塵)의 因緣이 있어서 그리고 안으로는 뒤바뀐 마음作用[心相]李 生滅하고 相續하기 때문에 存在하는 것으로 억지로 마음[心]이라 한다.’
    이와 같이 마음 가운데서는 實로 마음의 特徵 또는 性質{모습}[心相]을 얻을 수 없다.
    이 마음의 性品은 생겨난다고도 말할 수 없고 消滅한다고도 말할 수 없는데 恒常 깨끗한 特徵 또는 性質{모습}이지만 客塵煩惱[客煩惱]16)의 特徵 또는 性質{모습}가 서로에게 들러붙었기 때문에 不正한 마음[不淨心]李 된 것이다.
    마음은 自身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마음의 特徵 또는 性質{모습}李 공하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根本에서나 지말에서나 實有하는 法이 아니다. 이 마음은 모든 法과 合한다고도 말할 수 없고 흩어진다고도 말할 수 없으며, 過去ㆍ未來ㆍ現在의 時間에 存在한다고도 말할 수 없으며, 無色이며, 無形이고, 舞臺이다. 다만 뒤바뀌고 거짓되어 생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마음은 貢하여 無我이고, 無我所이고, 無償이고, 無實이다.
    이것을 일컬어 ‘마음을 隨順하는 觀法’[隨順心觀]이라 한다.
    마음의 特徵 또는 性質{모습}李 無生임을 알면, 卽, 생겨난다고도 말할 수 없고 消滅된다고도 말할 수 없음을 알면 無生法(無生法)에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無生이고 卽 생겨난다고도 말할 수 없고 消滅된다고도 말할 수 없고, (固定된) 性品[性]李 없고, 特徵 또는 性質{모습}李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智慧로운 이는 능히 안다. 지혜로운 이는 비록 이 마음의 生滅하는 特徵 또는 性質{모습}을 觀察하면서도 實際의 生滅하는 法을 얻지 않으며, 더러움[垢]과 깨끗함[淨]을 分別치 않으므로 마음의 淸淨[心?淨]을 얻는다. 이와 같이 마음이 淸淨하기 때문에 客塵煩惱[客煩惱]에 물들지 않는다.
    이와 같이 안의 마음을 觀察하고, 밖의 마음도 觀察한다.
    안팎의 마음을 觀察함도 또한 이와 같다.
    {곧 菩薩이 안의 마음을 觀察하건대, 이 안 마음에 세 가지 特徵 또는 性質{모습}李 있으니, 生(生)ㆍ週(住)ㆍ멸(滅)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마음은 온 곳도 없고, 滅해도 가는 곳도 없으며, 오직 안팎의 因緣이 和合해서 생긴 것이다. 이 마음은 一定한 實際 特徵 또는 性質{모습}李 없고, 實際의 生ㆍ週ㆍ滅度 없으며, 過去ㆍ未來ㆍ現在의 世上에 있지도 않다. 이 마음은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지 않으며, 中間에 있지도 않다. 이 마음은 性品 없고 特徵 또는 性質{모습} 없으며, 또한 내는 이도 없고 나게 하는 이도 없다. 밖으로는 갖가지 뒤섞인 6陣(塵)의 因緣이 있고, 안으로는 뒤바뀐 생각[心想]李 生滅하고 相續하기 때문에 억지로 마음이라 한다.’
    이와 같이 마음 가운데서는 實로 마음의 特徵 또는 性質{모습}[心相]을 얻을 수 없다.
    이 마음의 性品은 나지도 않고 滅하지도 않아 恒常 깨끗한 特徵 또는 性質{모습}이거늘 客塵煩惱[客煩惱]16)의 特徵 또는 性質{모습}에 執着되기 때문에 不正한 마음이라 한다.
    마음은 스스로가 알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이 마음은 마음의 特徵 또는 性質{모습}李 공하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根本이나 지말에 眞實한 法이 없다. 이 마음은 모든 法과 合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지나간 時間ㆍ다가올 時間ㆍ現在의 時間도 없으며, 빛 없고 形象 없고 對할 수도 없다. 다만 뒤바뀐 虛妄에서 생긴 것이다. 이 마음은 貢하여 나 없고 내 것도 없으며, 無常하고 眞實됨이 없다.
    이것을 일컬어 ‘마음을 隨順하는 觀法’이라 한다.
    마음의 特徵 또는 性質{모습}李 無生임을 알면 無生法[無生法]에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남이 없고, 性品이 없고, 特徵 또는 性質{모습}李 없는 까닭이다.
    지혜로운 이는 능히 아나니, 지혜로운 이는 비록 이 마음의 生滅하는 特徵 또는 性質{모습}을 觀察하면서도 實際로 生滅하는 法을 얻거나 더럽고 깨끗함을 分別치 않으나 마음의 淸淨을 얻는다. 이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客煩惱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안의 마음을 觀察하고, 밖의 마음을 觀察한다.
    안팎의 마음을 觀察함도 또한 이와 같다.}
  45.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T.1509). 《大智度論》(大智度論) 第19卷 . 對精神수大藏經.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204a19?   是時作是念:一切諸法因緣生故,無有
    T25n1509_p0204a20?   自性,是?實空,實空故無有相,無有相故
    T25n1509_p0204a21?   無作。無作故不見法若生若滅,住是智慧中,
    T25n1509_p0204a22?   入無生法忍門。爾時雖觀諸法生滅,亦入
    T25n1509_p0204a23?   無相門。何以故?一切法離諸相,智者之所解。
    T25n1509_p0204a24?   如是觀時,繫心緣中,隨順諸法相,不念身、
    T25n1509_p0204a25?   受、心、法,知是四法無處所。是?內法念處。
  46. 用水 지음, 구마라집 漢譯, 김성구 飜譯/김형준 個驛 (K.549, T.1509). 《大智度論》 第19卷 :
    이때 이렇게 생각한다.
    ‘一切法이 因緣으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에 自省이 없으니, 이것이 眞實한 공이다. 眞實한 公認 까닭에 特徵 또는 性質{모습}李 없고, 特徵 또는 性質{모습}李 없는 까닭에 지음이 없고, 지음이 없는 까닭에 法이 일어나거나 或은 滅하거나 머무름을 보지 않는다.’
    이러한 智慧에서 無生法人(無生法忍)의 門에 들어간다.
    이때 비록 모든 法의 生滅을 觀察하나 또한 無相門(無相門)에도 들어가나니, 왜냐하면 一切法이 모든 特徵 또는 性質{모습}을 여읨은 지혜로운 이라야 깨닫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觀察할 때 마음을 對象 가운데 묶어두어 모든 法의 特徵 또는 性質{모습}을 手順하되 몸ㆍ느낌ㆍ마음ㆍ法을 생각하지 않으며, 이 네 가지 法이 處할 바가 없는 줄 안다. 이것이 안의 법념처이다.
  47. 구마라집 漢譯(T.614). 《坐禪三昧頃》(坐禪三昧經) 下卷 . 對精神수大藏經. T15, No. 614, CBETA:
    T15n0614_p0278c07?從因緣生故無常,種種惱故苦,身有三十六
    T15n0614_p0278c08?物故不淨,以不得自在故無我。習如是觀,觀
    T15n0614_p0278c09?內身、觀外身、觀內外身,習如是觀,是謂身念
    T15n0614_p0278c10?止。
  48. 구마라집 漢譯, 차차석 飜譯 (K.991, T.614). 《坐禪三昧頃》 下卷 :
    因緣 따라 생기기 때문에 無償(無常)이며, 갖가지로 괴롭기 때문에 高(苦)이며, 몸에는 36가지 物件이 있기 때문에 不正(不淨)하며, 資材하지 않기 때문에 無我(無我)이니, 이와 같이 官銜을 익혀서 內申(內身)을 官하고 外信(外身)을 關하며, 나아가 內外信(內外身)을 關한다.
    이와 같은 觀法을 익히면, 이것을 일러 信念地(身念止)라고 한다.
  49. 구마라집 漢譯(T.614). 《坐禪三昧頃》(坐禪三昧經) 下卷 . 對精神수大藏經. T15, No. 614, CBETA:
    T15n0614_p0278c10?身實相如是!何故於此,而起?倒愛著此
    T15n0614_p0278c11?身?諦思惟念,身邊樂痛,以愛樂痛故著此身,
    T15n0614_p0278c12?當觀樂痛實不可得
  50. 구마라집 漢譯, 차차석 飜譯 (K.991, T.614). 《坐禪三昧頃》 下卷 :
    몸의 實狀(實相)이 이와 같은데, 무슨 까닭에 여기에서 뒤바뀐 見解를 일으켜 이 몸을 愛着하는가?
    몸으로 느끼는 즐거운 느낌[樂痛 = 樂受]을 仔細히 思惟하고 알아차려라. 즐거운 느낌을 愛着하기 때문에 이 몸에 執着하는 것이니, 마땅히 즐거운 느낌은 眞實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關해야만 한다.
  51. 구마라집 漢譯(T.614). 《坐禪三昧頃》(坐禪三昧經) 下卷 . 對精神수大藏經. T15, No. 614, CBETA:
    T15n0614_p0279a07?眼識亦爾,不住眼中,亦非
    T15n0614_p0279a08?色中住,不兩中間住,無有住處,亦復不無。是
    T15n0614_p0279a09?故佛言:「如幻如化」。現在心觀過去心,或苦、或
    T15n0614_p0279a10?樂、或不苦不樂,心各各異各各滅,有欲心、無
    T15n0614_p0279a11?欲心亦如是,各各異各各滅,觀內心、觀外心、
    T15n0614_p0279a12?觀內外心亦如是。是名心念止。
  52. 구마라집 漢譯, 차차석 飜譯 (K.991, T.614). 《坐禪三昧頃》 下卷 :
    安息도 이 불과 같다. 따라서, 安息은 눈에도 머물지 않고, 物質에도 머물지 않으며, 눈과 物質의 中間에도 머물지 않으므로, 恒常 머물러 있는 곳이 없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없는 것은 아니다.{안식도 또한 그러해서, 눈에도 머물지 않고 物質에도 머물지 않으며, 두 가지 中間에도 머물지 않고, 머무는 곳이 있지 않으며, 또한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허깨비와 같고 妖術과 같으니, 現在의 마음으로 過去의 마음을 關하면 或은 괴로움이고, 或은 즐거움이며, 或은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다. 마음은 各各 다르고, 各各 없어진다. 欲心이 있든 欲心이 없든 亦是이와 같아서, 各各 다르고 各各 없어진다. 안의 마음을 管下든 밖의 마음을 管下든, 아니면 안팎의 마음을 管下든 亦是 이와 같다”고 하셨으니, 이것을 心念地(心念止)라고 이름한다.
  53. 구마라집 漢譯(T.614). 《坐禪三昧頃》(坐禪三昧經) 下卷 . 對精神수大藏經. T15, No. 614, CBETA:
    T15n0614_p0279a12?復次觀心?
    T15n0614_p0279a13?屬誰?觀想、思惟、念欲等諸心相應法不相應
    T15n0614_p0279a14?法,諦觀其主,主不可得。何以故?從因緣生故
    T15n0614_p0279a15?無常,無常故苦,苦故不自在,不自在故無主,
    T15n0614_p0279a16?無主故空。前別觀身、痛、心法不可得,今更總
    T15n0614_p0279a17?觀四念止中主不可得,離此處求亦不可得。
  54. 구마라집 漢譯, 차차석 飜譯 (K.991, T.614). 《坐禪三昧頃》 下卷 :
    또한 마음은 누구에 屬한다고 關하는가?
    上(想)ㆍ事由(思惟)ㆍ廉(念)ㆍ辱(慾) 等의 온갖{여러 가지} 마음이 서로 應하는 法[心相應法]과 서로 應하지 않는 法[不相應法]을 觀察하여{관하고}, 그 主人을 仔細히 찾으려고 해도{관하여도} 主人은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因緣 따라 생기기 때문에 無償(無常)이며, 無常하기 때문에 괴로움이고, 괴로움이기 때문에 資材하지 못하며, 資材하지 못하기 때문에 主人이 없고, 主人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
    앞에서는 몸과 느낌과 마음의 法이 얻을 수 없는 것임을 特別히 管하였으니, 이제 다시 4念地(念止)를 總括하여 關하여도{중에서도} 主人을 얻을 수 없으며 個別로 關하여도 主人을 얻을 수 없다{이곳을 여의고 求하여도 얻을 수 없음을 總體的으로 關한다}.
  55. 구마라집 漢譯(T.614). 《坐禪三昧頃》(坐禪三昧經) 下卷 . 對精神수大藏經. T15, No. 614, CBETA:
    T15n0614_p0279a18?若常不可得,無常亦不可得;若常應當常苦
    T15n0614_p0279a19?常樂,亦不應忘;若常有神者,無殺惱罪,亦無
    T15n0614_p0279a20?涅槃;若身是神,無常身滅,神亦應滅,亦無後
    T15n0614_p0279a21?世,亦無罪福。如是遍觀無主,諸法皆空不自
    T15n0614_p0279a22?在,因緣合故生,因緣壞故滅,如是緣合法,是
    T15n0614_p0279a23?名法念止。
  56. 구마라집 漢譯, 차차석 飜譯 (K.991, T.614). 《坐禪三昧頃》 下卷 :
    萬一 恒常函[常]을 얻을 수 없다면, 無償(無常)도 亦是 얻을 수 없다. 萬一 恒常하다면 마땅히 恒常 괴롭고 恒常 즐거워서 亦是 마땅히 잊어서는 안 된다.
    萬一 恒常 精神이 存在하는 것이라면 죽임도 괴롭힘도 罪도 없고{살뇌죄(殺惱罪)가 없고} 亦是 涅槃圖 없으며, 萬一 肉身이 바로 精神이라면 無常한 몸이 없어지면 精神도 亦是 없어져야만 하며, 또한 후세度 없고 罪와 福도 없다.
    이와 같이 두루 主人이 없음을 觀하면, 一切의 存在는 모두가 공이며 資材하지 못해서, 因緣이 化合하기 때문에 생기고 因緣이 무너지기 때문에 없어진다.
    이와 같이 因緣이 和合하여 法이 되니, 이것을 法念地(法念止)라고 한다.
  57. 구마라집 漢譯(T.614). 《坐禪三昧頃》(坐禪三昧經) 下卷 . 對精神수大藏經. T15, No. 614, CBETA:
    T15n0614_p0278c29?應知心受苦樂、
    T15n0614_p0279a01?受不苦不樂。云何心?是心無常,從因緣生故。
    T15n0614_p0279a02?生滅不住,相似生故,但?倒故,謂是?一。本
    T15n0614_p0279a03?無今有,已有還無,是故無常。觀知心空。云何
    T15n0614_p0279a04??空?從因緣生,有眼有色,可見憶念,欲見如
    T15n0614_p0279a05?是等,和合眼識生。如日愛珠,有日有珠,有
    T15n0614_p0279a06?乾草牛屎똥 時,?緣和合,於是火生。一一推求,火
    T15n0614_p0279a07?不可得,緣合有火。
  58. 구마라집 漢譯, 차차석 飜譯 (K.991, T.614). 《坐禪三昧頃》 下卷 :
    마음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고 또한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는 것도 받는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무엇이 마음인가?
    이 마음은 無償(無常)하여, 因緣을 쫓아 생겼다가 滅하는 것으로 머물지 않는다. 等類 相續하여 생겨나기[相似生] 때문에, 이를 알지 못하는 顚倒된 認識으로, 恒常하는 하나의 存在가 있다고 여겨 '마음'이라고 이름붙인 것일 뿐이다. 本來 없다가 但只 只今 있는 것[本無今有 = 空卽是色]이고 只今의 있음이 지나면 없음으로 돌아가는 것[已有還無 = 色卽是空]이다. 그러므로 無常하다.
    마음의 本性을 觀察해 보면 공(空)임을 알게 되니, 무엇을 功이라 하는가?
    共이란 因緣 따라 생기는 것을 말한다.
    눈이 있고, 物質이 있고, 눈이 볼 수 있고, 記憶할 수 있는 念(念)이 있고, 보고자 하는 欲求가 있어서 이와 같은 것들이 다 和合할 때 비로소 安息이 생긴다. 마치 해가 돋보기를 사랑함이 있고, 해가 있고, 돋보기가 있고, 마른 풀이 있고, 쇠똥이 있어서 이 모든 因緣이 和合하여 거기에서 불이 생기는 것과 같다. 하나하나를 미루어 찾으면 불은 얻을 수 없지만, 모든 因緣 卽 條件이 合하여 불이 있다.{마음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을 받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엇이 마음인가?
    이 마음은 無償(無常)하여 因緣을 좇아 생기기 때문에 생기고 없어져 머물지 않는다. 認識이 對象에 一致하고 對應하여 일어나기[相似生] 때문에, 다만 뒤바뀌었기 때문에, 이것을 恒常하는 하나라고 말할 뿐이니, 本來는 現在의 存在[今有]도 없고 過去의 存在[已有]도 또한 없다. 그러므로 無償이다.
    마음의 本性을 觀察해 보면 공(空)임을 알게 되니, 무엇을 功이라 하는가?
    因緣 따라 생기는 것이다.
    눈이 있어서 物質이 있음을 볼 수 있고 記憶해서 보고자 하니, 이와 같은 것들이 和合하여 安息(眼識)이 생긴다. 마치 해가 구슬을 사랑하여 해가 있고 구슬이 있으며, 마른 풀과 쇠똥이 있어서 뭇 因緣이 和合하여 여기서 불이 생기는 것과 같으니, 하나하나를 미루어 찾으면 불을 얻을 수 없지만 年(緣)이 合하여 불이 있다.}
  59. "嚴" . 네이버 漢字辭典. 2024年 5月 18日에 確認.
    嚴 嚴
    嚴할 嚴
    附隨 口 (入口, 3劃)
    模樣자 ?(부르짖을 훤) + ??(險峻할 음)
    1. 嚴하다(嚴--: 매우 徹底하고 바르다)
    2. 酷毒하다(酷毒--)
    3. 嚴格하다
    4. 嚴密하다
    5. 至毒하다(至毒--)
    6. 빈틈없다
    7. 甚하다(甚--: 程度가 지나치다)
    8. 急하다(急--), 切迫하다(切迫--)
    9. 尊敬하다(尊敬--)
    10. 嚴肅하다(嚴肅--)
    11. 모질다
    12. 戒嚴(戒嚴), 警備(警備)
    13. 아버지, 父親(父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