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봉은사
봉은사 大雄殿
宗派 曹溪宗
建立年代 794年 ( 원성왕 10)
位置
봉은사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봉은사
봉은사
봉은사(大韓民國)
所在地 서울特別市 江南區 봉은사로 531
座標 北緯 37° 30′ 54″ 東京 127° 3′ 28″  /  北緯 37.51500° 東經 127.05778°  / 37.51500; 127.05778

봉은사 (奉恩寺)는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江南區 三成洞 修道山 기슭에 있는 査察 이다. 曹溪宗 査察이며, 新羅 末期에 創建된 것으로 알려졌다.

歷史 [ 編輯 ]

朝鮮佛敎의 中興度量 [ 編輯 ]

봉은사(奉恩寺)는 新羅時代의 高僧 연회國師(緣會國師)가 794年(元聖王 10)에 견성암(見性庵)이란 이름으로 創建(創建)했다. [1] 三國遺事 에 依하면, 연회國師는 영축산에 隱居했던 高僧으로 원성왕 에 依해서 國事로 任命되었다. [2]


成宗 의 아들이었던 연산군 이 王位에 올랐지만 紀行과 暴政을 일삼다가 異腹同生이었던 盡誠대군 의 反正으로 물러나고 眞聲帶軍이 王位에 오르니 이가 바로 朝鮮의 11代 임금인 中宗 이다. 中宗의 繼妃였던 文定王后 는 特別히 奉恩寺와 因緣이 깊은 人物이었다.

中宗에 이어 王位에 오른 人種 이 卽位 8個月 만에 崩御하자 다음 王位에 오른 사람이 文定王后의 아들 明宗 이다. 明宗이 12歲의 어린 나이에 王位에 오르자 以後 8年 동안 文定王后가 攝政 을 하게 되는데, 8年의 攝政이 끝난 後에도 한 동안 文定王后의 影響力은 絶對的이었다.

이 期間 동안 文定王后는 廢止된 僧科告示를 復活해서 봉은사에서 僧侶를 뽑는 僧科考試를 치르게 한다. 또한, 當代 高僧인 普雨大師를 봉은사 住持로 임명하는 한便 봉은사를 腺腫 數査察로 指定하기도 했다. 以後 僧科考試를 통해 輩出된 瑞山 , 使命 , 碧巖 等의 高僧들이 연이어 이곳 奉恩寺의 住持를 歷任하면서 崇儒抑佛 의 基調 속에서도 봉은사를 中心으로 朝鮮佛敎의 命脈을 維持할 수 있는 契機가 마련되었다.

版殿(版殿) 글씨와 文藝復興期 봉은사 [ 編輯 ]

文定王后의 鐵拳統治가 그女의 죽음으로 끝나게 되자 봉은사 位相이 急激히 衰落하게 된다. 하지만 서울 都城에서 漢江만 건너면 닿을 수 있는 大刹 봉은사는 朝鮮後期 文藝復興期에 많은 詩人墨客들이 드나드는 名所가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代表的인 人物이 茶山 정약용 과 秋史 김정희 다. 特히 秋史는 末年에 봉은사에 머물며 南湖 靈氣 律師가 主導했던 80卷 華嚴經 京板 造成 佛事에 同參했다. [3] 秋史의 글씨 가운데 最高이자 最後의 名作으로 꼽는 版殿 懸板 글씨를 남겼다. 이 글씨는 現在까지도 봉은사 판展에 附着되어 있다.

日帝强占期 봉은사는 京畿 南部의 서울을 비롯한 光州, 高陽, 洋酒, 始興, 水原, 驪州, 利川, 楊平, 坡州 等 8個 郡 78個 末寺를 管轄하는 本社의 位相을 가지고 있었다. 1912年 봉은사 住持 로 就任했던 청호 學밀(晴湖 學密) 스님은 歷史上 最惡의 洪水로 記錄된 1925年 乙丑年 大洪水 때 奉恩寺의 私財(寺財)를 털어 隣近 住民 708名을 求함으로써 佛敎 本然의 役割을 다하기도 했다. [4]

1964年에는 韓國大學生佛敎聯合會의 修鍊道場이 되어 大學生佛子 組織의 嚆矢가 되었으며, 1972年에는 대장경을 한글로 옮기는 동국譯經院 이 봉은사에 設置됨으로써 逆境事業의 産室이 되기도 했다.

特徵 [ 編輯 ]

傳統과 尖端의 共存 [ 編輯 ]

봉은사 周邊은 서울을 代表하는 最尖端 施設이 密集한 곳이다. 韓國과 交易하려는 世界의 여러 나라들이 前哨基地로 삼는 貿易센터가 봉은사 僧科坪 터에 자리하고 있으며, 大規模 컨벤션센터인 코엑스와 테헤란밸리로 불리는 IT業種 密集地域도 옛 봉은사 자리에 있다.

2009年 유네스코에서 指定한 世界文化遺産인 朝鮮의 王陵 가운데 宣陵과 정릉이 徒步로 10分 距離에 있어 그 陵寢寺刹이었던 奉恩寺와 더불어 江南의 허파 役割을 톡톡히 하고 있다. 강남역이나 狎鷗亭, 88서울 올림픽을 치른 綜合運動場 等 世界的인 名所이자 江南을 代表하는 繁華街들이 모두 봉은사 半徑 1킬로미터 안에 散在해 있다.

所長 文化財 [ 編輯 ]

近代까지 서울京畿 一圓의 本社 役割을 遂行했던 봉은사에는 많은 文化財가 남아 있다. 1996年 1月 7日에 奉安된 彌勒大佛이 有名하다. 奉恩寺의 10年 宿願事業이었던 이 彌勒大佛은 높이 23m로서 忠淸南道 論山에 位置한 灌燭寺 恩津彌勒 보다 5m 程度 높다. 高麗 忠惠王 5年(1344年)에 만들어진 靑銅銀入絲 香椀(寶物 321號)은 工藝 技術이 絶頂에 達했던 高麗時代에 만들어진 作品으로 表面에 製作年代와 만든 사람들을 記述한 103字의 名文이 남아 있어 形態美와 더불어 文化財的인 價値가 돋보이는 秀作이다.

大雄殿에 모셔진 木造釋迦如來 三佛座像(寶物 1819號)은 朝鮮 孝宗 2年(1651年)에 當代 最高의 조각承認 乘馹(勝一)스님이 造成한 것으로 17世紀 佛敎彫刻을 理解하는 데 있어 아주 重要한 佛像들이다.

以外에도 앞서 紹介한 秋史의 版殿 懸板 글씨와 朝鮮時代 僧科考試 場所로 使用되었던 先拂當, 版殿 內部에 保管中인 華嚴經 經板과 四天王像, 영산전 十六羅漢上 等의 彫刻像과 大雄殿 三藏菩薩道를 비롯한 10餘 點의 不和 等이 서울市 有形文化財로 指定되어 朝鮮後期 조각과 繪畫의 豐盛한 볼거리를 提供하고 있다.

寶物 [ 編輯 ]

서울特別市 有形文化財 [ 編輯 ]

서울特別市 文化財資料 [ 編輯 ]

템플스테이 [ 編輯 ]

봉은사에서는 내·외국인을 위한 다양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運營하고 있다. [5]

寫眞 [ 編輯 ]

事件 및 事故 [ 編輯 ]

  • 2010年 10月 26日, 讚揚引導者學校 라는 改新敎 團體에서 봉은사를 訪問하여 禮拜를 드리는 動映像이 올라와 論難이 되었다. 이 動映像에는 佛敎 가 偶像崇拜라는 主張이 있으며, 動映像에 出演한 사람이 "主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크고 雄壯한 절이 있어 마음이 아프다."라고 말하는 內容도 包含되어 있다. 이에 對해 宗敎 卑下 論難이 일기도 했다. [6] 이들은 다음날 봉은사를 찾아가 謝過를 하였고, 봉은사 스님은 이를 받아들였다. [7]

둘러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권상로 (1932). 《조선선종갑찰대본산경기도광주군수도산봉은사사적비명(朝鮮禪宗甲刹大本山京畿道廣州郡修道山奉恩寺事蹟碑銘)》.  
  2. 《三國史記》. 卷38.  
  3. 《韓國佛敎人名事典》. 李霆便: 佛敎時代社. 1993.  
  4. 이, 聖水 (2008年 6月 7日). “18.靑好學밀” (報道 資料). 佛敎新聞 . 2015年 11月 18日에 確認함 .  
  5. 봉은사 템플스테이 프로그램
  6. '봉은사 땅밟기' 動映像 論難 外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mbc 2010年 10月 27日
  7. 조채희 記者 (2010年 10月 27日). ' 봉은사 땅밟기' 關聯者, 봉은사 찾아 謝過 (綜合)” . 聯合뉴스 . 2010年 10月 29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