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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인 墓와 神道碑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本文으로 移動

변종인 墓와 神道碑

변종인 墓와 神道碑
(卞宗仁 墓와 神道碑)
대한민국 富川市 鄕土文化財
種目 鄕土文化財 第1號
( 1986年 4月 29日 指定)
時代 朝鮮
位置
부천 고강동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부천 고강동
富川 고강동
富川 고강동(大韓民國)
住所 京畿道 富川市 梧亭區 고강동 산 63-7(妙), 63-9(神道碑)
座標 北緯 37° 31′ 46″ 東經 126° 49′ 32″  /  北緯 37.52944° 東京 126.82556°  / 37.52944; 126.82556

변종인 墓와 神道碑 (卞宗仁 墓와 神道碑)는 京畿道 富川市 梧亭區 고강동 산 63-7에 있는 朝鮮 前期의 武臣인 변종인 (1433~1500) 先生의 墓와 神道碑이다. 1986年 4月 29日 부천시의 鄕土文化財 第1號 변종인 神道碑 로 指定되었다가, 2012年 5月 2日 변종인 墓와 神道碑 로 名稱이 變更되었다. [1]

槪要 [ 編輯 ]

工場공 변종인 神道碑(恭莊公 卞宗仁 神道碑)는 富川市鄕土遺跡 第1號로 所在地는 京畿道 부천시 오정구 受注로 64-1(고강동 산 63-9番地)이다.

이 神道碑는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陵골에 位置하고 있다. 碑座는 文匣 무늬를 裝飾하였고, 屋蓋는 변종인 武人이었기 때문에 投球型으로 이루어져 있다. 碑文은 大提學을 지낸 名文章家 聖賢이 지었으며, 백대리석의 材料를 쓴 碑身의 높이는 154cm이고, 幅은76cm, 두께는 20cm이다.

神道碑의 主人公인 변종인은 世宗 15年(1433) 吏曹參判에 推重된 密陽 卞氏 豫生과 配天 조氏 사이의 長男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父母를 여의었으나 스스로 武藝를 熱心히 닦아 1452年 5位에 屬한 軍隊인 忠順衛에서 벼슬을 始作으로 宮內의 警備를 맡는 內禁衛, 堂上官(正3品), 中樞府에 所屬된 僉知事(正3品), 中樞府에 所屬된 冬至使(종2品), 資憲大夫(正2品)까지 올랐으나, 다음달 末日에 辭任意思를 表示하였다. 燕山君 5年(1499) 여름에 巡邊使로 咸鏡南道에서 邊方을 構築하다 理解 過勞로 인하여 風疾이 생겨 다음 해인 1550年 3月 大廳에서 他界하니 그 때 나이 68歲였다고 한다.

변종인의 諡號는 工場(恭莊)이다. 이러한 諡號를 내리게 된 理由에 對해 王朝實錄에는 일을 조심스럽게 하고, 임금 섬기기를 공손이 하여 ‘공’이고 敵을 이기고 뜻이 剛하였으므로 ‘場’이라 하였다. 또한 그는 性品이 寬厚하고 外貌가 俊秀하였으며, 다른 사람이 비록 自己의 뜻을 거슬리더라도 交際를 끊지 않았고, 職務에 臨해서는 부지런하고 삼갔으며 가는 곳마다 功績이 있었다고 하였다.

大提學 聖賢이 지은 信徒碑文에 依하면 변종인은 선품이 寬厚하고 생각함이 남에게 얽매이지 않았다. 벼슬을 지내고 情事에 臨해서는 바른 것을 지키고 阿附하지 않았으며, 여러 次例 重職을 歷任하면서 措置를 잘 하였다. 일이 있을 때마다 힘을 다하였으며 平生 바른 말을 하고 行함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사람을 對할 때에 恒常 火器를 띄고 집에 있을 때에 自身에 嚴格하고, 請託을 行하지 않고 담백하였다. 또한 後孫들에게 淸白함을 본받도록 일렀으며, 公的인 일을 위해 사사로움을 버리도록 敎育하였다.

변종인은 여러 사람을 精誠껏 도와주고 몸소 武藝를 닦아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兵法에 能通하였다. 예(藝)를 즐기며 詩를 敦篤히 하고, 淸白하고 儉素함을 스스로 俊秀하여 子孫들로 하여금 龜鑑을 삼도록 하였다.

現地 案內文 [ 編輯 ]

변종인(1433~1500) 先生은 朝鮮 前期의 文臣으로 자는 自願, 本貫은 密陽이다. 世宗 15年(1433) 便豫生의 아들로 富平 黑良吏에서 태어나 世祖 6年(1460) 武科에 올랐고, 1467年 李施愛의 亂을 平定하는데 功을 세워 堂上官이 되었다. 信徒碑文에 依하면 成宗 5年(1474) 오랑캐가 北邊을 侵入하자 弔電張으로 功을 세워 嘉善大夫에 올라 이산郡守, 1478年 은성府使, 1481年 同志中樞·共助參判, 1483年 全羅道節度使, 以後 永安北道節度使를 거쳐 1488年 嘉靖大夫에 올라 忠淸道節制使를 歷任했다. 1490年 共助參判·資憲大夫에 勝者되어 永安南道節度使·永安北道節度使를 거쳐 成宗 25냔(1494)지중추부사로 正朝使가 되어 明나라에 다녀 왔다. 연산군 1年(1495) 平安道節度使·경상우도水軍節度使를 歷任 前後 12回에 걸쳐 邊方을 지키는 任務를 맡아 國防力 强化에 貢獻했다. 燕山君 4年(1498) 工曹判書를 거쳐 知中樞府事로 있던 中 68歲를 一期로 下世하니, 諡號는 工場공이다. [2]

神道碑의 碑座는 文匣門을 裝飾했고, 屋蓋는 投球型이다. 碑文은 聖賢이 찬했고, 백대리석의 材料를 쓴 碑身의 높이는 154cm, 두께는 20cm이다. [2]

先生의 墓는 夫人 利川 安氏와 雙墳을 이루었으며, 墓 앞 中央에는 비투에 投球型을 彫刻한 卯時와 賞與·香爐石·長明燈, 그 左右에는 文官石이 設置되어 있다. [2]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富川市 公告 第2012-43號,《부천시 鄕土遺跡 指定 및 保護區域 設定 豫告(案) 公告》 Archived 2019年 10月 31日 - 웨이백 머신 , 富川市長, 2012-05-02, 名稱 變更事由: 神道碑 外에 墓도 神道碑와 함께 鄕土遺跡으로의 價値 認定
  2. 現地 案內文 認容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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