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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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기종
本名 변창규
出生 1895年 7月 29日
漢城府
死亡 1977年 5月 1日
大韓民國

변기종 (卞基鍾, 1895年 7月 29日 ~ 1977年 5月 1日 )은 日帝强占期 大韓民國 俳優 이다. 本名은 변창규(卞昌圭)이며, 號는 남계(南溪)이다.

生涯 [ 編輯 ]

서울 鍾路區 仁寺洞에서 태어났다. 明洞聖堂 의 前身인 종현聖堂이 附設한 學校에 1902年 에 入學하여 漢學을 工夫하였다. 이 學校의 高等科를 1911年 에 卒業하고 演劇界에 뛰어들었다.

변기종이라는 이름은 1912年 警 演劇界에 入門하면서부터 使用하기 始作하였다. 1913年 에는 演劇 運動의 先驅者였던 이기세 와 만나 開城 에서 이기세가 創立한 유일단에 入團하였다. 이때부터 이기세와의 因緣이 이어져, 當時로서는 新鮮한 試圖였던 日本의 新派劇 을 輸入하여 公演하는 活動에 參與하였다.

1919年 에는 이기세의 朝鮮文藝團 에 合流하였고, 連鎖劇 《至氣》에서 순이 父親 役으로 出演하였다. 이때 20代 中盤의 젊은 나이였으나 老役을 맡았으며, 勞役 專門 演技者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以後 신극좌, 朝鮮極右回, 朝鮮演劇史를 거쳐 1935年 청춘좌 團長을 맡았다. 演劇 公演과 라디오劇 出演, 劇團 運營을 겸하였다.

美軍政 時期에는 朝鮮演劇同盟 傘下의 自由劇場 委員長에 올랐다. 自由劇場은 청춘좌와 聖君 의 後身 格이었으며, 演劇界에 流行한 左翼 思想에 忠實한 作品인 《3·1 運動과 滿洲靈感》, 《太白山脈》을 公演하였다. 그러나 漸次 美軍政의 左翼 彈壓이 深化되면서 演劇界의 左派 人脈은 越北하여, 自由劇場은 公演을 中斷하게 되었다.

大韓民國에서는 演劇 舞臺를 主要 活動地로 삼으면서 映畫 俳優 活動도 竝行하였다. 데뷔 初期의 連鎖劇 出演을 除外하면, 1949年 에 出演한 《마음의 故鄕》李 本格的인 映畫 데뷔作이다.

1956年 대한민국예술원 會員으로 被選되었고, 韓國舞臺藝術院 副院長, 韓國演劇協會 拷問, 國立劇團 團長 等 演劇界의 要職에서 活動하였다. 1973年 國民勳章 無窮花章을 授與받았다.

參考資料 [ 編輯 ]

  • 강옥희,이영미,이순진,李承姬 (2006年 12月 15日). 《植民地時代 大衆藝術人 事前》. 서울: 소도. 152~155쪽쪽. ISBN   9788990626264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