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蕃盛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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蕃盛 戰鬪

방덕과 우금의 曹操軍이 水公에 휩쓸리는 場面.
날짜 219年
場所
結果 劉備軍의 敗北. 형주 攻防戰 의 始作.
交戰國
曹操 劉備
指揮官
調印
棲遑
于今   항복
방덕  
關羽
觀評
妖花
早漏
未方
府使인
兵力
조인 4千 名
于今 3萬 名
棲遑 1萬 2千 名
3萬 名

蕃盛 戰鬪 (樊城 戰鬪)는 紀元後 219年 , 韓中王 劉備 의 側近 關羽 曹操 가 占有 中이던 형주 北部를 侵攻한 事件이다. 처음에는 關羽軍이 曹操軍을 壓倒했으나, 曹操軍은 무너지지 않았고 그 사이 劉備軍과 同盟 關係이던 孫權 軍이 關羽를 背信하여 關羽는 蕃盛에서 撤收한다. 以後 戰鬪는 형주 攻防戰 으로 이어지며, 攻防戰의 結果 關羽는 死亡하고 劉備는 형주를 喪失한다.

背景 [ 編輯 ]

劉備 212年 ~ 213年 서촉 攻防戰 에서 익주 自社 유장 을 무찌르고 익주 형주 두 地域을 차지한다.

이에 曹操 215年 韓中 攻防戰 을 벌여 韓中 長老 를 討伐하고 韓中 을 손에 넣지만 219年 劉備 와의 韓中 戰鬪 에서 크게 敗해 韓中 을 잃고 劉備 는 韓中 王에 오른다. 이에 曹操 孫權 과 同盟을 맺고 關羽 가 지키는 형주 를 친다.

《三國志演義》에서의 蕃盛 戰鬪 [ 編輯 ]

關羽는 卽時 軍士를 일으킬 채비를 해 部下 府使인 未方 을 先鋒으로 삼는다. 그러나 府使인과 未方이 失手로 술을 마시다 불을 내어 軍糧과 마초가 모두 타 버리고 만다.

이에 關羽는 副詞인과 美房을 불러내 處罰을 하고 部下 妖花를 先鋒將으로 세운 뒤 아들 觀評을 部長으로 삼고 스스로 中軍을 統率하며 馬糧 , 移籍 , 湖畔 等을 參謀로 삼아 出征길에 올랐다. 이때 虎班이 비시 와 함께 韓中王 劉備를 뵙기 위해 西天으로 떠나게 된다.

關羽가 襄陽性으로 나가자 曹操의 동생 調印 萬總 에게 蕃盛을 지키게 한 다음 部長 積怨 , 驍將 하후존 과 함께 나가지만 關羽의 計略에 빠져 하후존이 關羽에게 죽고 管坪이 勝勢를 몰아 曹操軍을 追擊하면서 曹操軍의 太半이 양쯔 江에 빠져 죽고 말았다.

結局 조인은 蕃盛으로 後退해 꼼짝하지 않고 城을 지켰고 關羽는 數軍士마 王補 를 시켜 江기슭에 連이어 20里 ~ 30里(8km-12km)마다 烽火臺를 세워 동오의 攻擊에 對備하게 했다. 王보는 關羽에게 未方과 府使인을 注意하게 하라고 諫言하지만 關羽는 置重 반준 을 보내 지키게 하고는 더 以上 그것에 對해서는 對備를 하지 않았다.

한便 蕃盛으로 물러난 조인은 部長 女商에게 軍事 2000名을 주어 關羽와 싸우게 하나 以內 敗하고 調印은 허창의 曹操에게 救援을 要請한다. 이에 曹操는 部下 于今 을 正南將軍, 방덕 을 情緖度先鋒으로 삼고 領軍將校 同型 東樵 , 星河 를 帶同해 關羽를 무찌르게 한다.

關羽와 맞서며 열흘 넘게 代置하였다. 이에 우금은 독葬 城下의 反對를 물리치고 漆君을 蕃盛에서 北쪽 10里(4km)에 떨어진 山기슭에 映彩를 세웠으나 關羽가 큰물을 내어 우금의 진지를 쓸어버린다. 우금은 남은 軍卒들과 함께 붙잡히고 방덕은 同型, 東樵, 星河 等의 長壽와 步兵 500名만 데리고 겨우 둑 위로 避身했다.

이에 同型과 動哨가 방덕에게 降伏을 建議히나 이에 憤怒한 방덕에게 죽임을 當하고 방덕은 끝까지 關羽에 맞서 싸우나 성하는 關羽의 활에 맞아 戰死하고 남은 軍士들도 모두 降伏했으며 房德도 結局 關羽의 部下 主唱 에게 사로잡힌다.

우금은 목숨을 求乞하다가 형주의 監獄에 갇히고 방덕은 끝까지 降伏을 拒否하다가 처형당한다. 이에 조인은 蕃盛에서 百姓들까지 帶同하여 抵抗하고 關羽는 蕃盛을 攻擊하던 途中 팔에 활을 맞고 負傷을 當하나 名의 華陀 의 治療로 목숨을 救한다.

關羽가 于今을 사로잡고 방덕을 處刑하자 曹操는 都邑인 許昌 (許昌)을 옮기려 하지만 四魔의 와 主婦 章帝 가 建議해 棲遑 을 大將으로 與件 을 部長으로 삼아 調印을 救援하게 하여 棲遑은 양릉파에 駐屯한다. 그리고 孫權에게 使者를 보내 關羽의 背後를 치라고 한다. 孫權 도 曹操의 書信을 받고 형주 征伐에 나서 旅夢 을 大都督으로 삼고 손校 는 軍糧과 洋초를 擔當하게 하였고 軍士 3萬 名과 快選 80隻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어 汗黨 , 장흠 , 主演 , 班長 , 酒태 , 徐渻 , 정봉 等 7將帥로 하여금 잇따라 出兵케 하고 나머지는 모두 午後를 따라 뒤에서 後援하게 하였다. 먼저 旅夢의 部下 육손 이 計策을 내어 첫 烽火臺의 軍士들을 사로잡고 이어 다른 烽火臺의 軍士들까지 降伏하게 만들어 烽火臺를 占領한다.

그리고 旅夢은 사로잡은 兄主君으로 하여금 형주誠意 城門을 열게 하고 兄주성은 旅夢에 손에 넘어간다. 旅夢은 性 一帶의 民心을 整備하고 반준을 置重으로 삼아 형주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玉에 갇혀 있던 우금은 釋放해 曹操에게 돌려보내고 右番 을 보내 公安의 府使인을 降伏시킨다.

그리고 府使인은 南軍으로 가 美方道 降伏시키고 蕃盛을 包圍하던 關羽는 棲遑과 對峙하게 된다. 棲遑은 部長 서상과 與件을 먼저 내보내 싸우고 奇襲 攻擊을 하여 關羽를 敗退시킨다. 이에 關羽는 量陽性으로 後退하지만 이미 兄주성이 旅夢에게 넘어갔다는 消息을 듣고 冠量都督 早漏의 建議로 馬糧과 移籍을 聖徒로 보내 救援을 要請하게 한다.

조인은 蕃盛의 包圍가 풀리자 曹操와 合流하고 旅夢은 장흠 을 앞장세워 關羽를 攻擊한다. 그리고 정봉과 서성을 하여금 挾攻하게 하여 關羽는 남은 軍士들을 이끌고 맥성으로 後退한다. 이에 關羽의 部下 妖花 가 常用으로 가 酉峯 猛달 에게 救援을 請하지만 拒絶當하자 性度로 가지 始作한다.

關羽는 맥성을 主唱과 王補에게 맡기고 아들 觀評, 早漏 와 함께 軍事 200名을 이끌고 西北쪽으로 달아나려 하지만 20里(8km) 떨어진 곳에서 곳곳에 埋伏된 東伍軍의 攻擊을 받는다. 맨 먼저 主演 이 關羽를 追擊하고 다시 班長 이 軍士를 이끌고 關羽를 急襲해 亂廛 中 早漏가 죽고 말았다.

關羽는 남은 軍士 10名을 이끌고 가던 中 結石에서 班長의 部長 麻蟲 에게 사로잡히고 觀評度 班長과 主演에게 포위당해 사로잡히고 만다. 關羽와 관평은 孫權의 帳幕으로 끌려가 降伏을 강요받으나 이를 끝내 拒絶하고 孫權은 主婦 座函 의 建議로 結局 關羽와 觀評 富者를 處刑한다.

關羽가 죽자 그가 타던 赤兎馬 는 麻蟲에게 내려지지만 赤兎馬는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다가 그대로 굶어 죽었고 關羽가 쓰던 靑龍偃月刀 는 班長에게 내려졌으나 以後 伊陵 大戰 에서 關羽의 아들 管興 에게 班長이 살해당하면서 다시 서촉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影響 [ 編輯 ]

關羽의 死亡이 原因이 되어 劉備는 동오 征伐을 일으켰으나 222年 伊陵 大戰 에서 大敗했고 劉備가 아끼는 將軍 蝗蟲 等의 많은 將帥와 軍士들이 戰死하고 223年 劉備는 몸져눕고 숨을 거둔다.



情事에서의 蕃盛戰鬪 [ 編輯 ]

韓中을 놓고 劉備와 펼친 大規模 싸움 끝에 敗하고 물러나 그 威勢가 떨어진 曹操는 持續的인 叛亂까지 겪으며 안팎으로 狀況이 말이 아니게 되었는데 이때의 關羽의 北進 時期 自體는 絶妙했다. 關羽의 北進 契機의 理由가 되는 걸로 推測이 되는 記錄은 조인이 218年 9月에 완에서 亂을 일으킨 후음이 南陽태수와 百姓을 붙잡고 있자 關羽를 치기 위해 蕃盛에 駐屯하고 있던 조인은 방덕과 함께 완을 包圍하였고, 다음 해 봄 正月에 완을 陷落하여 喉音을 斬首했다. 그 해에 曹操는 夫人 卞氏를 王后로 세운 後 于장군人 于今에게 조인이 關羽를 攻擊하는 걸 돕게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우금이 調印을 支援하러 갔던 時期는 장마였고 장마에 미리 對備하고 있던 關羽에 依해 우금이 이끌던 軍士들이 水沒되고 우금은 降伏하여 그와 3萬 假量의 軍士들은 捕虜가 되고 방덕은 妻兄이 된다. 于今을 사로잡은 關羽는 조인이 지키는 蕃盛과 襄陽을 包圍했고 水公에 依해 蕃盛에서 困境에 處한 조인은 蕃盛을 버리고 달아나려다 萬總意 必死的인 挽留에 마음을 고쳐 必死的으로 버틴다.

위에서 오랫동안 活躍했던 우금의 降伏과 그가 이끌던 軍士들의 水沒은 曹操 勢力에 커다란 衝擊을 안겨줬고 中院 一帶의 一部 叛亂 勢力들이 關羽에 呼應하여 關羽가 그들에게 一時的으로 벼슬을 내릴 程度로 中國 全體가 振動했다. 持續的으로 狀況이 안 좋던 曹操는 關羽의 威勢까지 겹치자 怯을 먹어 首都를 옮기는 걸 議論하였다. 蕃盛과 蕃盛에 있는 조인이 當하면 그 다음은 晨夜와 완을 잃고, 바로 曹操 勢力의 根據地인 中原이 劉備 勢力의 칼날에 바로 닿고, 各地의 叛亂 勢力들까지 堪當하게 될 수도 있었다. 司馬懿와 葬祭가 挽留하며 孫權까지 끌어들여 關羽를 討伐할 것을 勸하였다.

曹操는 關羽의 北進을 大危機로 看做하여 總力戰으로 關羽를 討伐하기로 한다. 棲遑, 趙曮, 서상, 軟巾, 주개, 女工, 倍잠, 沿線 等은 勿論 합비 戰線에서 孫權을 牽制하던 匠料까지 呼出하고 曹操 自身은 하후돈과 함께 豫備隊가 되어 數만 假量의 軍士를 動員해 5萬 程度의 軍士를 이끌던 關羽를 어떻게든 잡아내려고 하였다.

關羽는 增援軍으로 온 棲遑을 처음에는 잘 對處했으나 持續的으로 充員되는 棲遑의 軍勢에 結局 밀려나 蕃盛의 包圍를 풀고 退却하게 됐다. 漆群水沒로 인한 餘波가 일을 크게 만들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도 關羽는 一生 大部分을 戰場에서 보내왔고 그가 이끌던 兄朱君도 靑泥戰鬪와 益量對峙 等을 거치며 鍛鍊된 精銳軍이었다. 또한 數萬 物量을 한꺼번에 相對하는 狀況에 아직 對面하지 않았기에 無事히 退却만 한다면 追後를 圖謀할 수 있었다.


하지만 以前부터 虎視眈眈 형주를 노리던 孫權은 關羽가 曹操軍과의 싸움에 集中하는 빈틈을 노려 몰래 형주를 攻擊했다. 元來 형주는 赤壁大戰 勝利의 主役이었던 孫權의 몫이었으나 劉備가 가로 채어 내놓지 않았다. 劉備와 孫權은 益量對峙 때 劉備가 自力으로 얻은 땅을 떼어주는 것으로 兩쪽이 合意를 봤었으나 그後에도 劉備는 約束을 지키지 않았다. 元來 關羽와 孫權은 史跡으로 사이가 안 좋았다. 하지만 公的으로는 初와 오는 共同의 敵 曹操와 싸우는 同盟이었고, 孫權 自身도 書信을 보내 關羽의 北進 때 支援을 하겠다는 約束까지 했었음에도 劉備로부터의 反應이 없자 드디어 孫權은 實力으로라도 형주를 되찾겠다는 決心을 굳혔다. 決心 後, 一旦 旅夢을 육손으로 交替 하는등 僞裝術을 써서 關羽의 放心을 誘導했다. 關羽는 砲로 3萬을 먹일 食糧이 不足해지자 名目上 同盟인 吳의 上官에 있는 손權君의 쌀倉庫를 털어 食糧을 充當했는데 그 일이 있은 直後 孫權이 형주를 빼앗은 것을 보면 相關의 食糧 奪取라는 背信 行爲는 형주 奇襲에 對한 孫權의 決心을 굳혔을 可能性이 크다.


孫權은 將帥들과 몇 萬 兵力을 動員해 형주 奇襲을 實行에 옮겼고, 형주를 奪取하는 過程에서 鏃의 開國功臣 中 한名인 美祝儀 동생이기도 한 未方은 死因과 함께 바로 降伏하였다. 平素 未方은 關羽가 未方의 勤務 怠慢에 對해 不當하게 꾸짖은 것을 記憶하고 있었다. 未方의 背反에 衝擊을 받은 美軸은 이 直後 스스로를 묶어 劉備 앞에 나타나 自身이 罪가 있다며 罰을 달라고 하였으나 劉備는 그에게 罪가 없음을 알고 處罰하지 않았다. 美軸은 이 衝擊의 影響으로 다음 해에 世上을 떠났다.

또한 關羽는 蕃盛을 包圍할 때부터 商用에서 關羽를 도와야 하는 乳棒과 猛달에게 支援을 要請했었는데 平素에 關羽는 그들을 忽待하였으로 그들은 關羽를 도와주는 것에 別 熱意가 없었다. 關羽는 더욱 困境에 處하게 되어 結局 아들 觀評과 함께 붙잡혀 生을 마감하였다. 結局 關羽의 平素 傲慢과 人和力 不在가 그 自身의 沒落을 가져 온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