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銅修道院
(柏洞修道院)은
惠化洞
161番地에 1909年부터 1927年까지 存在했던
상트 吳틸리엔 베네딕토 宣敎修道會
所屬 修道院이다.
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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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年 朝鮮代牧區長이었던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主敎는 韓半島 地域에 修道院을 設立할 必要를 느끼고 1908年에
상트 吳틸리엔 베네딕토 宣敎修道會
를 訪問한다. 當時
노르베르트 베버
總아빠스는 要請을 受諾하여
보나파시오 사우어
와
도미니쿠스 엔스호프
新婦를 1909年 2月 5日에 派遣한다. 처음에는
맹현
(孟峴)에 設立하고자 하였으나 거절당하고,
의령원
附近,
[註解 1]
光熙門 南쪽, 백운동
김가진
所有의 土地
[註解 2]
等을 考慮하였으나 最終的으로 漢城府 東部 乾德房 百子童系로 決定한다.
[1]
當時 修道院이 位置했던 附近의 地名이 百子童, 곧 百棟
[註解 3]
이어서 白銅修道院으로 불렀으며, 베네딕토修道會 所屬이라는 까닭에
성분도修道院
(聖芬道-),
獨逸修道院
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1909年 12月 6日에 臨時 首都院 建物을 지었는데, 設立 當時
搜査
洋聲과 敎育宣敎만을 目的으로 하여 布敎가 目的인
明洞聖堂
과는 그 設立趣旨가 달랐다. 初期에는 獨逸式 工藝術을 가르치던 숭共學校(崇信學校)를 1910年 9月에, 師範學校인 숭신學校(崇信學校)를 1911年 9月 16日에 設立하여 運營하였다.
[1]
그리고 大學을 設立하고 獨逸人 敎授를 招聘하여 科學技術을 가리키고자 하였으나,
第1次 世界 大戰
의 勃發로 인해 搜査들이 徵集되는 等 어려움으로 旣存의 敎育事業도 모두 撤收하고 神品學校 1開校만 運營해왔다.
[2]
以後 1927 11月에 獨逸 聖 베네딕토會議 管轄知人 咸鏡道-間島로 옮기는데
덕원군
부내면으로 移轉하여
德源修道院
이 되었다.
[3]
移轉하면서 旣存 敷地와 建物은
明洞聖堂
으로 그 管理가 넘어간다.
[2]
숭共學校는 대장間, 木工所, 鐵工所가 지어져 運營되었는데 明洞聖堂의 講論臺를 여기서 製作하였다. 1923年에 廢校된 後, 1927年에 鐘塔을 덧붙여
백동성當
建物로 使用되었다. 以後 1937年에는 혜화幼稚園으로 使用되었다. 숭신學校는 1913年에 廢校 後 숭共學校 學生들의 生活觀으로 利用되다가 1982年 撤去되기 前까지
동성중학교
敎師로 使用된다.
[1]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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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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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령원은
阿峴洞
에 있다가 1949年에 現在의 位置로 옮겨졌다.
- ↑
처음에 2萬엔을 提示했다가 3萬5千엔으로 올려불러 決裂되었다.
- ↑
잣나무골이라는 뜻으로,
駱山
中턱에 잣나무가 많이 심어져있어서 불리던 이름이다.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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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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