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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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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민
身上情報
出生 1900年 1月 6日 ( 1900-01-06 )
大韓帝國 忠淸南道 은진군 김포면
(現 大韓民國 忠淸南道 論山市 강경읍 )
死亡 1968年 2月 9日 ( 1968-02-09 ) (68歲)
大韓民國 京畿道 仁川
國籍 大韓民國
本館 溫陽
職業 獨立運動家 , 言論人 , 大學 敎授
學歷 니혼 大學 (日本大學) 社會經濟學部
父母 방규석(簿), 조현정(某)
配偶者 김한배(金漢培)
子女 아들 방준영(方駿榮)
活動 情報
關聯 活動 獨立運動
經歷 朝鮮日報 社會部 記者
東亞日報 記者
인하대학교 經濟學科 敎授
水原農大( 서울大學校 農大 前身) 講師
웹사이트 國家報勳處 - 방한민

방한민 (方漢旻, 1900年 ~ 1968年 )은 日帝强占期의 獨立運動家 , 言論人 利子, 大韓民國 의 敎育者이다. 忠淸南道 論山 出身으로, 本貫은 溫陽 (溫陽)이고, 號는 牙城(牙城)이다.

1920年 『 朝鮮日報 』 創刊을 主導했으며, 編輯 및 社會部 記者로 일하면서 日本 國軍注意를 批判하다 解職됐다. 以後 東亞日報 에 入社했지만 日帝의 監視가 심해지자 日本 東京 에서 留學을 떠나 1922年 6月 11日 文化新聞(文化新聞)을 發刊하였고, 니가타縣 朝鮮人 勞動者 虐殺 事件에 對해 留學生 抗議 데모를 組織하는 等 日帝의 蠻行을 糾彈했다. 1923年 8月 滿洲 遷都輕便 鐵道 開通式에 參席하는 日本 總督 殺害와 日本 銀行 等을 爆破할 計劃이 發覺돼 東亞日報 支局長 김정기(金正璂), 김사국(金思國) 等과 日本 領事館 警察에 逮捕되어 獄苦를 치렀다.

大韓民國 光復 以後 서울大學校 農大의 前身인 水原農大에서 蠶沙農業 講義를 했으며, 1952年 引下大學 을 設立할 때 設立委員으로 參與하고 經濟學科 敎授로 在職하기도 했다. [1]

大韓民國 政府에서는 그의 功勳을 기리기 위해 1990年 建國訓長 愛國章을 追敍했다.

生涯 [ 編輯 ]

出生과 成長 [ 編輯 ]

牙城 방한민 先生은 1900年 1月 16日 忠淸南道 論山郡 강경면 황금정 175番地에서 溫陽 方氏 아버지 방규석(方圭錫)과 어머니 조현정의 次男으로 태어났다. 그의 祖父 방달주(方達周)은 先約將軍과 종2品 龍驤衛副司果를 歷任하였고, 伯父(伯父)인 방관석(方觀錫)은 司憲府 監察을 歷任한 兩班 집안이었다. 그의 父親 방규석은 朝鮮 哲宗 13年인 1862年 壬戌 農民抗爭 時期에 태어나 朝鮮 高宗 22年(1885年) 武科에 合格하여 武班 3品職인 해방영간역청상가좌통정대부(海防營看役請賞加資通政)를 지냈고, 1908年 民會 議長으로 選出되었으며 面民들을 위하여 獻身하였다. 1910年 韓日合倂 以後에도 15年間 강경면과 성동면張으로 推戴된 바 있다.

牙城 방한민 先生은 性質이 溫順하고 英特하였으며 다섯 살 때 書堂에서 受學하였고, 여섯 살 때 普通學校에 入學하여 4年 課程을 마치고 保濕과(補習科) 2年課程을 卒業하였다. 또한 15歲 때 公主농학교를 入學하여 3年 修了 後, 水原권업모범농장(水原農林專門學校)에서 約1年間 蠶業을 工夫하고 自身이 배운 蠶事業種 製造方法을 農民들에게 傳授시켰다. 當時는 暴風前夜와 같은 時期였다. 1905年 日本이 韓國의 外交權을 剝奪하기 위해 韓國 政府를 强壓하여 締結한 乙巳條約 을 始作으로 1907年 痛感에게 莫强한 힘을 실어준 정미7조약 으로 이어지더니 마침내 1910年 8月 29日 庚戌國恥 의 슬픈 歷史가 始作된 것이다. 韓日合邦으로 朝鮮의 外交, 軍事, 行政權을 가로채고 모든 主權을 빼앗은 日本은 朝鮮에 對한 저들의 軍事的 强占과 完全한 植民地支配를 國際的으로 公認化하였다. 이 條約의 恐怖로 어느 곳에 가든지 朝鮮人들의 鬱憤은 極에 達하였다. 父母님의 가르침에 따라 어려서부터 착하고 어진 마음에 正義感을 키워온 牙城은 日本人이 朝鮮 땅에 들어와서 無辜한 百姓들의 財産을 押留하고 罪 없는 農民들을 때리고 虐待하는 것을 目擊하면서 여러 番 抗議하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絶對로 덤벼서는 안된다. 앞으로 壯한 일을 하려면 忍耐心도 키워야 하느니라.'하며 그를 말렸다.

방한민은 19歲에 父母님의 勸誘로 金海 金氏 金鉉圭의 딸 김한배(金漢培)와 結婚한 後 膝下에 讀者 방준영(方駿榮)을 두고 1919年 東京에 있는 書院(西原) 箴戒(蠶系) 專門學校에 留學했다. 그러나 몸이 아파 學業을 抛棄하고 1年 後 故鄕으로 되돌아와 療養하였다. 이 무렵 방한민 先生은 日本帝國主義의 武斷統治에 抗拒하는 全 民族的 抗日運動人 3·1 運動을 겪으면서 漸次 日帝에 抵抗하는 政治意識에 눈을 뜨게 되었다. 故鄕에 病 治療를 하느라 집에 있으면서도 當時의 어수선한 社會雰圍氣와 武斷統治로 이어지는 日帝의 壓制와 나라를 빼앗긴 술픔에 때때로 그의 젊은 가슴을 울먹이게 하였으며 몹시 憤怒케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손에는 蠶業 書籍 代身 文學과 社會科學 書籍들이 쥐어졌다. 日本 도쿄 의 600餘名 朝鮮留學生들이 朝鮮基督敎 靑年會館에 모여 獨立宣言文을 發表하고 '生存을 위해 自由의 行動을 取하여서 獨立을 達成하기를 宣言하노라'라고 외치던 그 우렁찬 喊聲, 在日 韓國人國民會가 發足되어 朝鮮獨立 萬歲를 목청껏 외치던 그 莊嚴한 목소리가 無時로 그의 귓전에 들여오는 듯하였다. 그런가 하면 三千里 錦繡江山에 우레마냥 울려퍼진 3.1 獨立萬歲소리는 더더구나 그의 가슴속에 더운피가 끓어 번지게 하였다. 서울 파고다 公園에서 터지餘 鍾路 네거리를 누비며 나간 群衆示威隊伍에 數萬의 흰옷 입은 사람들이 合勢하였을 때의 그 萬歲 소리는 霎時間에 全國에 波及되여 牙城의 故鄕 論山 에서도 그가 工夫하던 公主나 水原에서도 겨레의 喊聲이 振動하였다. 日本에서 보고들은 일들, 朝鮮에서 보고들은 일들이 머릿속에 走馬燈처럼 떠올랐다. '最後의 한사람까지 自由를 위하여 끓는 피를 뿌리리라' 들려오는 消息마다 그를 刺戟시켰고 그에게 커다란 負擔으로 다가왔다. '왜 섬나라 日本사람들이 우리나라에 寄與 들어와 主人行世를 하는가? 왜 獨立을 要求하는 示威者들에게 日本 軍警과 憲兵들이 彈壓을 敢行하는가?'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政治意識에 눈을 뜨게하는 契機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손에는 蠶業書籍代身 文學과 政治圖書들이 쥐어졌다. 元來 讀書를 즐기고 事理 判斷이 밝은 閑民은 낮과 밤 따로 없이 넓은 世界와 복작한 人生을 내다보게 되었고 特히 피 맺힌 民族의 恨을 가슴 아프게 느끼게 되었다. 1920年 正初에 倒産 안창호 先生이 表明한 '나의 所願'은 그때 人生의 深刻한 陣痛을 겪고 있던 그에게 바람직한 進路를 밝혀 주었으며 鬪爭의 當爲性을 안겨주었다.

抗日 言論 獨立運動의 先驅者 [ 編輯 ]

朝鮮日報 編輯 社會部 記者로 抗日言論鬪爭의 先鋒에 서다

擧國的인 3.1 運動은 朝鮮民衆의 가슴속에 民族獨立의 씨앗을 심어준 方面에 日本 總督政治의 一部政策에도 轉換을 가져오게 하였다. 1910年 韓日合邦 以後 이른바 武斷政治를 부르짖던 日帝는 새로 韓民族의 抗日意識을 약화시킬 目的으로 文化政策을 펴나가기 始作했다. 表面的으로는 以前의 武力的 彈壓에 비하여 너그러운 듯 보였지만 韓民族의 反抗精神을 消耗시키는 가장 知能的인 統治 方法이었다. 文學書籍等을 耽讀하며 社會를 注意깊게 觀察해오던 방한민은 1920年 故鄕인 論山 을 떠나 서울 에 上京하였다. 이 무렵은 3.1 運動 時期 우리 民衆의 激烈한 抵抗에 놀란 日帝가 '文化政治'를 標榜하여 表面的이나마 言論, 出版, 集會, 結社의 自由를 許容하면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等 우리 民族新聞 發刊이 推進되고 있었다.

서울에 올라간 방한민은 '새文明, 進步主義'를 標榜하며 創刊準備를 하는 朝鮮日報 社에 嚴格한 入社試驗을 通過하여 入社하게 되었다.

朝鮮日報 는 3月 5日에 創刊記念式을 가지었으며 總 16面으로 創刊號를 내놓았고 牙城은 이 新聞의 堂堂한 創刊 創刊멤버로서 活動하게 되었다. 當時 조선일보의 記者中에는 방한민外에도 社會部 記者로서 최국현(崔國鉉), 홍덕유(洪悳裕) 等 反日思想이 透徹한 젊은 엘리트 記者들이 網羅되어 있었다. 日帝는 朝鮮民衆을 懷柔하려는 羊頭狗肉의 糊塗策의 하나로 日帝治下 10年동안 暗黑 속에 파묻히어 한치 앞도 豫測하지 못했던 社會雰圍氣를 總督府의 民間新聞의 發行 許可로 創刊한 朝鮮日報 , 東亞日報 , 시사신문 等을 통해 多少라도 알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었다.

當時 방한민은 日帝의 이른바 文化政治의 懷柔策動을 粉碎하기 위해서는 新聞記者의 良心을 지켜 植民地 强占者 日帝와 親日 賣國逆賊들의 罪惡相을 假借없이 暴露 斷罪하면서 民族의 가슴속에 抗日意識을 심어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重要하다고 생각하였다. 牙城은 겨레의 응어리진 恨을 터트리며 當局에 正面으로 挑戰하는 論說과 技士를 連續 揭載하였다. 그리하여 創刊 23日만인 1920年 3月 28日부터 總督府 警務局에 依해 押收處分과 發賣禁止 發行禁止處分을 사흘이 멀다하게 當했으며 따라서 '조선일보는 미친개처럼 總督府를 물어뜯는 新聞이다'라고 朝鮮八道에 소문나게 되었다.

牙城은 1920年 6月 9日子 '朝鮮民衆의 民族的 不平 : 骨髓에 深刻된 大血恨의 眞髓'라는 記事에서 다음과 같이 日本軍國主義를 批判하였다.

일찍이 日本 軍馬의 발굽에 함부로 짓밟힌 朝鮮民衆은 누구누구 할 것 없이 모두 日本 軍人을 두려워하였고 銃과 칼을 무서워하였다. 그뒤로부터 日本政府는 軍人을 내어 보내 當時의 (統監府)로 하여금 朝鮮 全體의 땅덩어리를 한 손에 주무르고 朝鮮民族 全體를 銃끝과 칼끝으로서 주무르려 하였다. 朝鮮民衆은 눈물을 흘리며 벌벌떨기를 오래하였다. 우는 아이가 울 때에 아이고 倭놈 온다 하는 것이 울음을 그치는 오직 한가지 謀策이었다.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만 보아도 어린아이들과 婦女子들은 아이고 倭놈 하고 달아난다. 그러한 것을 보더라도 능히 알바이거니와 그동안에 日本사람이 銃과 칼로서 朝鮮民族을 쓸어 죽이려 한 것은 밝은 事實이 證明하는 바이라. (削除) 銃과 칼로서 印度와 正義로 삼는 日本의 軍國主義는 말할 수 없이 朝鮮 民族을 虐待하고 朝鮮民族을 滅亡케 하려 하였다.

이 '朝鮮 民衆의 民族的 不平'이란 題目의 記事는 總督府의 壓力으로 10回 連載로 中斷되었다. 방한민은 獨立運動 關聯取材에서 數次 特種을 내자 그가 쓴 記事를 問題삼아 朝鮮日報 社에 發行停止를 數次例 命하였다. 1920年 7月 12日 3.1 運動 關聯者 48人의 公判이 京城地方法院에서 改正되자 "昨年(1919年) 3月 1日 鮮明한 빛 아래에서 正義와 印度를 利用하여 大韓獨立萬歲를 높이 부르다가 그대로 西大門 監獄에 들어가 오늘까지 呻吟하여 오던 天道敎 敎主 孫秉熙以下 48名의 公判이 進行됐다 … 푸른날 검정구름 한 彫刻에서는 눈물인지 핏방울인지 굵은 물 몇 방울이 떨어지고 있다"고 3.1 運動 의 感激과 悔恨을 상기시키며 當時 公判 內容을 생생히 報道하였다. 이어 7月 14日 자부터는 48人의 審問 모습을 揭載하여 日帝는 緊急히 發賣禁止 命令을 내려 조선일보는 반포 禁止를 當하였다. 이 記事는 無記名으로 되어 있지만 當時 獨立運動 關聯 取材를 主로 맡고 있던 방한민의 記事로 여겨진다. 1920年 7月 15日子 조선일보에는 言論의 自由를 잃고 입에 자물쇠를 잠근 모습을 그린 諷刺漫畫와 함께 '긴 惡夢'이라고 票制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天下에서 氣分이 좋은 것은 惡夢을 깨었을 때로다 惡夢에서 깨어나는 즐거움을 얻기 위하여 惡夢을 꾸는 것이다.' 朝鮮人은 牛馬(소와 말)가 魚鮓(소나 말을 부리는 사람)에 부림을 當하듯이 채찍을 맞고 叱責을 當하더라도 벙어리가 冷가슴을 앓듯이 아픔을 呼訴할 길이 없어 이를 입 밖에 낼수가 없는데 不過하도다. 이 模樣으로 이미 10年의 星霜이 지났도다. 긴 惡夢이라 할지로다. 이것이 허깨비의 世上이라면 벌써 이 世上을 下直함이 나을 것이고 萬一 꿈이라면 빨리 깨리로다. 검은 鬼神이 파를 뒤집어 쓰고 暗夜에 섰도다 무서워라 무서워. 이 꿈만 깨면 즐겁도다. 묻노라 우리 民族이여 이 꿈을 꿈으로 볼 것이냐 꿈이라면 惡夢이로다, 心身을 激勵하여 活潑한 動作으로서 발을 맞추어 前進할지라. 于先 깨여 있는 사람과 함께 前進할 지라. 前進의 길은 열렸도다. 日帝 警察當局의 '朝鮮出版警察개요'는 當時 조선일보의 抗日論調에 對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조선일보는 1920年 3月 5日 創刊以來 同年 7月 27日에 이르는 不過 3個月餘 동안 發賣, 반포禁止 및 押收處分을 받기 실로 23回에 이르고 언제나 不穩記事를 揭載하여 民心을 煽動하므로 頻繁히 責任者를 불러 警告를 주었음에도 不拘하고 조금도 改悛의 情을 찾아볼 수 없고 特히 大正 9年 7月 13日子 第71號 地上에 揭載하여 發賣, 반포禁止 및 押收處分을 받은 不穩記事를 다시 號外에 再錄하여 發行하는 等의 不信行爲度 나왔다....' 日帝治下의 暗黑期에 겨레의 求心點이 되어 民族再生의 進路를 밝혀주고 民族啓蒙運動, 民族文化運動을 벌려 抗日, 民衆意識의 얼굴이 되었던 조선일보 創刊初期에'아성'은 記者로서의 自身의 聰明과 才質을 유감없이 發揮하여 民族을 위한 좋은 記事들을 많이 取材하고 發表하였다. 또다시 牙城은 3.1 運動 彈壓의 殘虐上을 暴露하는 '骨髓에 맺힌 朝鮮人의 한' 이란 排日記事等을 揭載하여 民族的 鬱憤을 일으키게 하였으며 조선일보는 1920年 8月 27日 '自然의 化'란 社說에서 어찌하여 徹底하게 죽이려고만! 그것이 倭놈의 朝鮮統治 精神이냐? 는 論說을 發表한 것을 問題삼아 1920年 8月 27日부터 9月 2日까지 7日間 韓國 民間 新聞史上 처음으로 停刊 處分을 當하기까지 하였는데 當時 그 記事는 방한민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當時 朝鮮總督府 警務局은 조선일보社 發行人을 呼出하여 排日色彩의 記者 逐出을 强要하여, 結局 방한민을 비롯하여 최국현 等 3名의 朝鮮日報 記者가 解職되고 말았다.

동아일보 編輯記者

熱情的으로 暗黑期의 日帝에 抗拒하면서 記者의 良心을 걸고 記者의 役割을 遂行하다가 日帝의 植民統治機構인 朝鮮總督府의 强要에 依해 朝鮮日報 社에서 물러나온 방한민은 치밀어 오르는 義憤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牙城은 더욱더 徹底히 日本의 武斷統治 狀況을 綿密히 檢討해 보았다. 當時 서울에는 조선일보와 함께 民族代辯紙로서의 旗幟가 뚜렷한 東亞日報 가 있었다. 1920年 4月 1日 創刊한 동아일보는 日帝의 質高下에 呻吟하는 民族을 깨우치기 위하여 '朝鮮民衆의 表現機關을 自任'한다는 創刊의 趣旨를 내걸고 受難을 무릅쓰고 不屈의 意志로 온갖 受難을 무릅쓰고 民族의 進路를 開拓하는데 힘을 다하고 있었다. 抗日記者로 所聞이 藉藉했던 牙城은 兄 방한승의 도움으로 1921年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겨 編輯記者로 活躍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아일보도 3.1 運動의 精神을 繼承하는 民族誌로서 日帝의 總督政治를 猛烈히 批判함과 同時에 國內外의 獨立鬪爭小食과 世界 弱小國家들의 獨立運動 樣相들을 大量 報道함으로써 日帝의 植民地 强占下에 呻吟하는 同胞들에게 鬪爭의 앞길을 밝혀주었던 것이다. 방한민은 當時 3.1運動 2周年을 맞이하여 連載한 東亞日報 社說 '日本 親舊여'는 總督府 警務局에 依해 押收당하였다.

"아! 日本親舊餘, 우리로 하여금 속에 서리고 서린 說話와 가슴이 아프고 쓰린 心情을 充分히 吐露케 하라. … 아! 日本親舊餘, 우리로 하여금 忌憚없이 터놓고 말하고자 하노라. 韓日倂合 後 過去 10年間에 그대는 總督府가 우리들에게 무엇을 주었다고 생각하는가 … 朝鮮 全道에 그물 늘어놓듯 하였던 저 有名한 '憲兵制度'는 무엇을 의미하며 朝鮮 全體에 자갈을 물려 一言半句의 審査를 吐치 못하게 하였던 저 有名한 '言論壓迫'은 무엇을 의미하였던가.

우리는 率直하게 말하노라. 이 모든 것은 곧 朝鮮人이 當時 總督政治에 對하여 不平을 抱한 까닭이며 不平의 爆發을 막고자 한 까닭이라 하노라. 그러나 타는 불을 옷깃으로서 가리울 수 있으며 흐르는 물을 손으로 막을 수 있는가. 이 不平은 暴發되고 말았도다 …

民族의 앞장에 서서 日本의 植民地 統治를 反對하여 용감히 싸우다 조선일보를 떠난 牙城은 東亞日報 에 入社해서도 繼續的으로 反日 色彩가 짙은 글과 記事들을 精力的으로 揭載하였다. 牙城은 表面上으로는 獨立의 煽動을 行하는 記事를 實例를 他國에서 取하고 巧妙하게 防禦와 銀魚를 使用하여 獨立思想의 宣傳에 努力하였다. 때로는 로마의 興亡을 論하면서 朝鮮의 復興을 暗示하였고 때로는 애굽의 現實을 論하면서 朝鮮의 獨立을 說破하였다. <동아일보에 對한 總督府의 政間理由書> . 總督府 警務局의 注目을 받고 無時로 壓力과 恐喝을 當하던 동아일보도 總督府에 依하여 發行停止를 當하자 牙城은 또다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後날 大田刑務所腸은 牙城의 假出獄과 關聯하여 朝鮮總督府에 提出한 報告書에서 그의 이른바 犯罪原因을 '방한민은 동아일보사에 入社하여 編輯을 擔當하고 있던 中 當時는 朝鮮獨立騷擾事件直後로서 人心이 짙고 思想 또한 穩全하지 못한 群衆心理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밝혔다.

東京에서 《 文化新聞 》創刊

이무렵 동아일보는 1921年 6月 ~ 8月까지 無慮 73回에 걸쳐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標題 아래 러시아革命을 成功으로 이끈 레닌의 一生과 活動等이 連載되고 있었다. 또 이 時期에 創刊된 『開闢』, 『控除』, 『牙城』, 『新生活』 等의 雜誌에 마르크스의 階級論, 프롤레타리아 獨裁에 對한 思想, 크로포트킨의 相互扶助論 等 社會主義와 아나키즘에 對한 글들이 揭載되는 等 社會主義 理念이 收容되기 始作하였다. 또 1922年 1月과 4月 '金允植 社會葬事件'과 '詐欺共産黨事件'이 일어나 民族運動 內部에 理念과 路線이 分化되어 그 過程 속에서 社會主義勢力이 民族解放運動의 主導的 勢力으로 浮上하게 되었다. 이 무렵 방한민은 國內 言論에 反日意識을 鼓吹시키는 記事를 통해 日帝에 抵抗하는 活動보다도 더욱 本格的으로 日帝에 鬪爭하는 活動을 摸索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實行에 옮겨 다시 日本에 건너가게 되었다. 留學生을 假裝하여 도쿄 로 건너가 文化新聞 을 創刊하다.

日帝의 總督政治가 날로 더 暴惡해 짐에 따라 3.1 運動以後 朝鮮國內에서는 大規模의 大衆蜂起가 더 以上 일어나지 못하였다. 朝鮮日報 東亞日報 에서의 記者生活을 통하여 더욱 朝鮮人의 恨을 품은 閑民은 將來의 徹底한 鬪爭을 머리속에 그리면서 1922年 4月에 留學生을 假裝하여 玄海灘을 넘어 日帝의 心臟部인 東京에 들어가 獨立運動의 據點을 찾아 나섰다. 當時 朝鮮國內에 훌륭한 大學이 없어 朝鮮學生들은 極東地域 靑年學徒들의 도쿄로 건너가서 大學을 다녔으며 도쿄는 여러 部類에 屬하는 獨立運動家들의 隱身處이기도하였다. 牙城은 도쿄의 小壓政이라는 곳에 宿所를 定하고 國內에서 볼 수 없었던 社會科學圖書와 經濟理論書籍들을 熱心히 耽讀하면서 社會的 矛盾과 不平들의 根本 理致를 더욱 더 깊이 파헤쳐 보았다. '朝鮮에서 總督政治를 끝장내고 倭놈들을 몰아내며 不平等한 社會制度를 뒤집어엎기 前에는 貧富의 差異를 없앨 수 없고 모든 사람들이 平等하게 살수도 없다. 그러니 急先務는 우리民衆을 깨우치고 民衆의 힘을 合致餘 倭놈들을 쫓아내고 나라의 獨立을 되찾는 것이다.' 牙城은 政治 經濟理論을 硏究할수록 鬪爭方向이 보다 明確해 졌으며 그럴수록 그는 世俗에만 파묻혀 있을 수가 없었다.

방한민은 도쿄 에 있는 니혼대학 (日本大學) 社會經濟學部에 入學하여 政治經濟學을 專攻하며 各種 社會科學 書籍을 工夫하였다. 當時 방한민은 大部分의 朝鮮人 留學生들이 그러하듯이 新聞配達이나 牛乳配達 等 苦學을 하면서 大學을 다녔다. 當時 방한민과 文化新聞을 勃起했던 東洋大學 哲學科에 다녔던 정찬선(鄭昌先)은 自身의 留學生活을 다음과 같이 回顧하였다. "나는 그 동안 10里나 되는 먼곳으로 配達을 가서 4百餘張을 配達하였다. 그리다 7, 8日 前에 발에 못을 찔리어서 步行을 엇지 못하야 10里가 넘는 먼 곳에 나의 사랑하는 鄭君을 代身 付託하고 床에 누워서 돌아올 때를 기다리노라고 식은 밥을 怒코 이때나 저때나 바라는 나 四疊 다다미 작은 房 속에서 낫이나 밤이나 鬱鬱한 心思를 抑制치 못하는 나-우리네 同志가 萬若 目見하면 同情의 一淚를 아끼지도 아니하리라. 重傷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 때 完治될는지 期日이 茫然하다." 當時 도쿄에는 3千餘名의 朝鮮學生들이 있었는데 그 三分의 日以上은 苦學生들이였다. 大部分 新聞이나 牛乳를 配達하지 않으면 人力車를 끌었다. 이와같이 牙城도 아침에는 新聞配達을 하면서 苦學을 하고 낮에는 大學을 다니면서 뜻을 같이는 留學生들을 모아 ' 文化新聞 '을 創刊하였다. 日本 도쿄에서 방한민이 發行한 朝鮮語 新聞인 '文化新聞'李 發行되었다는 消息은 國內에 傳해져 1922年 7月 ~ 12月 朝鮮日報 東亞日報 에 다음과 같은 記事가 실렸다.

"東京 留學生 정창선, 방한민氏 外 10女人의 勃起로 組織된 文化新聞은 지난달 18日에 發行하기로 되었던바, 여러 가지 事情으로 인하여 遲延되더니 지난 15日에 創刊號를 發行하였는데 '民族의 哲學으로 본 朝鮮文化의 將來'라는 긴 論文을 始作하여 中國人 기타 優秀한 靑年의 忠實한 論文 10餘件이 되었는데 近來에 發行하는 留學生의 雜誌로는 매우 充實하게 되었으며 그 新聞의 週刊 訪韓閔氏는 事務를 가지고 立身 滯在 中이라더라" "方今 東京 東洋大學에 在學中인 정창선 軍과 日本大學에 在學中인 방한민 君 等 多數 韓流 學生의 勃起로 文化新聞이라는 月刊雜誌를 發行한다는데 創刊號는 來 二十五日에 發行되리라 더라" "東京 留學生 정창선氏와 十女人의 勃起로 11月 15日에 東京에서 創刊號를 發行하려던 文化新聞은 여러 가지 事情으로 發行이 遲滯되던 中 지난 15日에 窓강호가 發行되었는데 內容은 '民族性 哲學으로 본 朝鮮文化의 將來, 敎育의 革命, 民族運動과 社會運動' 外에 여러 가지 趣味있는 記事가 滿載되었더라" "≪文化新聞≫ 한글版, 月 2回, 發行人 변희용(卞熙瑢). 500部, 1922年 1月 創刊"

이러한 當時 新聞 內容을 綜合해 보면 방한민은 정창선 等 10餘名과 1921年 6月15日 頃 月刊誌《文化新聞》을 創刊하였는데, 그 內容은 '民族性 哲學으로 본 朝鮮文化의 將來', '敎育의 革命', '民族運動과 社會運動' 等을 主題로 한 論文으로 構成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留學生들을 모아 ' 文化新聞 '을 朝鮮留學生들과 同胞들에게 配布하였다. 朝鮮 留學生들 속에서 '文化新聞'의 影響이 차츰 커지면서 문화일보의 週間 牙城은 도쿄 朝鮮留學生들의 主軸이 되었다. 한便 1922年 7月에 니가타縣에서 朝鮮人 勞動者 虐殺事件이 發生하였다. 이는 日本 니가타縣(新潟縣) 신월(信越) 電力會社가 1921年 겨울부터 信濃川이란 곳에 東洋 最大의 水力發電所를 建設하는 工事現場에서 奴隸같은 强制勞動으로 苦役을 견디다 못해 逃亡치는 朝鮮人 勞動者 百餘名을 虐殺한 事件으로 徵用者들을 奴隸같은 勞動을 시키면서 勞賃도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暴行과 虐殺을 加하는 倭놈들의 蠻行은 朝鮮國內에서 큰 抗議물결을 불러 일으켰다. 當時 國內와 日本에 있는 朝鮮人 社會團體는 이 事件의 眞相을 糾明하기 위해 50餘名의 社會團體代表들이 '니이가다현조선인노동자학살사건조사위원회'를 結成하고 現地에 調査團을 派遣하였다. 當時 國內에서는 1921年 1月에 組織된 서울청년회가 김사국을 보내어 이 事件의 眞相을 調査하도록 하였다. 當時 방한민 等이 創刊한 《文化新聞》은 이事件의 眞相을 仔細히 報道하고 朝鮮 留學生들의 抗議 데모를 組織하여 日本의 殺人蠻行을 준렬히 斷罪糾彈하였다. 이에 怯을 먹은 日本 當局者들은 治安을 妨害한다는 理由로 文化新聞에 發行 停止處分을 命하고 이 新聞 週間인 방한민을 '共産主義的 思想이 漸次 커지고있다'는 허울을 씌우며, 要注意 人物로 定하고 監視하자 그는 또 다시 日本을 떠나야 했다.

敎育者· 獨立鬪士로서의 삶  : 舂精에서 東洋學院 設立運動 [ 編輯 ]

東京에서 北京, 그리고 舂精으로

日本에서 言論 活動을 더 以上 繼續 할 수 없게 된 先生은 1922年 12月 朝鮮에 돌아왔다. 그리운 아내와 세 살배기 아들 俊英을 오랜만에 만났지만 앞날의 鬪爭에 對하여 생각하면 到底히 마음의 安定을 가질 수가 없었다. ' 東京 에서 理論을 배웠으니 이젠 中國에 가서 行動의 戰術을 배워야겠다'고 다짐하며 5.4運動의 精神을 繼承하여 鬪爭을 繼續하고 있는 中國땅에서 獨立鬪爭을 하는 獨立軍의 抗日思想을 살펴보고자 1923年 1月初 中國 北京에 到着하였다. 牙城은 北京에 머무르고 있는 朝鮮人 學生 및 革命家들과의 接續에서 自由와 獨立과 民主主義에 對한 그들의 主張에 公明되여 熱辯을 吐하기도 했지만 學生團體가 두파로 나뉘어 서로 支配權을 잡으려고 民衆과 떨어져 부질없는 論議만 되풀이 하는 現象을 보고만 있을 수 없자 '말工夫나 하고 民衆을 등지고서는 어떻게 獨立을 成就한단 말인가? 나는 絶對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北京에 短期間 머물면서 그곳의 抗日鬪爭 狀況을 把握하고 우리겨레의 응어리진 恨을 터트릴 수 있는 바람직한 場所는 어디인가? 그는 무엇보다도 日帝治下에 呻吟하는 同胞들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며 鬪爭하고 싶었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主人公 김산은 當時 北京에 對하여 다음과 같이 回顧하였다. "그 무렵 北京에는 學生 300名을 包含하여 800名의 朝鮮人이 살고 있었다. 學生들은 두 派로 나뉘어 서로 支配權을 掌握하기 위해 싸웠다. 民族主義者가 統制하는 '朝鮮學生會'와 共産主義者가 指導하는 '朝鮮人學生同盟'. 두 組織 모두 會員數가 비슷했다. 테러리즘 問題에 對해 많은 論難이 벌어졌다. 朝鮮學生會는 테러리스트 支持派였고 反面에 朝鮮人學生同盟 쪽은 共産黨의 테러리즘 反對方針에 따라 테러에 反對하였다. 나는 朝鮮人學生同盟과 亦是 左派인 朝鮮社會科學硏究所에 加入하였다." , "1921年 北京에 到着하자마자 나는 마르크스주의 文獻을 읽기 始作하였다. 于先 '共産黨宣言'을 工夫한 後, 레닌의 '國家와 革命'을, 그 다음엔 '社會發展史'라는 論文集을 읽었다. 나는 科學的 大衆鬪爭의 重要性과 쿠데타와 테러行爲의 無益함을 今方 깨닫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테러리스트들의 英雄的인 犧牲에 讚歎을 禁할 수 없으며 내 無政府主義者 親舊들 사이에 蔓延한 同志들의 자유로운 精神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失敗할 運命에 놓여 있다는 것을 分明히 느꼈다." 1921年 當時 김산의 나이는 17歲에 不過하였다. 牙城의 北京行 目的과 그곳에서의 活動에 對하여 後날 大田刑務所腸은 朝鮮總督에게 提出한 報告書에서 다음과 같이 指摘하였다. '방한민은 社會學徒로서 硏究의 目的을 가지고 北京으로 가게 되었는데 當時에는 朝鮮의 現 狀態에 싫症을 느끼고 獨立을 希望하는 所謂 不逞分子들이 많아 自然히 그들과 來往이 잦았던 것이다.' 朝鮮學生들은 民族主義者들이 統制하는 朝鮮學生會와 共産主義者들이 指導하는 韓人學生同盟의 두 派로 갈라져 鬪爭理論과 戰術問題를 놓고 猛烈한 論爭을 벌리고 있었다. 1928年 大田刑務所腸이 朝鮮總督에게 提出한 '假出獄執行結果報告書'에서는 방한민이 舂精에서 東洋學院 設立運動을 하게 되는 理由를 "當時 동아일보 主筆이 北京에 있고 社會學 等 硏究의 目的을 가지고 北京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朝鮮의 現 狀態에 充分히 滿足하지 못하고 獨立을 希望하는 所謂 不逞分子들이 많아 自然히 그들과 來往을 거듭하던 中 드디어 本罪를 犯行하기에 이르렀다"고 言及하고 있다.

1923年 舂精 私立 東洋學院 設立

방한민은 1923年 1月 龍井村에 와서 大成學校 에서 敎鞭을 잡았다. [2] 그러나 大成學校가 日本의 敎育理念에 어긋난다는 理由로 學校 閉鎖措置가 내려지자 뜻을 같이하는 김정기(金正琪), 김사국(金思國) 等과 함께 大成學校 內에 卒業生들을 모아 東洋學院(東洋學院)을 設立하였다. 東洋學院 (舊, 대성중학교 現; 용정중學校 )의 設立目的은 우리 同胞의 知識을 깨우쳐 주면서 民族의 主權찾기, 祖國의 光復을 위한 鬪爭 方法等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人力車를 타고 다니는 사람과 끌고 다니는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人間의 平等이란 바로 社會主義 理論으로 뭉쳐야 한다고 力說하며, 丹齋 신채호 의 아(我)와 非我(非我)의 鬪爭理論을 내세워 朝鮮사람과 朝鮮사람이 아닌 日本사람과 싸워서 반드시 朝鮮의 獨立을 찾아야 한다고 力說하였다. 社會的 矛盾과 不平等의 根本理致를 銳利하게 파헤치는 牙城의 講義는 언제나 學生들의 歡迎을 받았으며 그를 따르는 學生들이 많았다. 東洋學院內에 社會主義 宣傳部와 特別部가 設置되면서 東洋學院은 名實共히 하나의 戰鬪的 集團을 이루고 靑年學生들을 先導하였다.

東洋學院에 對한 日帝의 彈壓

當時 淸津地方法院의 判決文에는 다음과 같이 ' 東洋學院 設立過程'과 '방한민 等의 日帝 公館破壞 및 要因暗殺 計劃 事件'을 言及하고 있다. "대정 12年(1923年) 1月 지나 間島 龍井村으로 와서 이곳 私立 大成學校에서 暫時 敎鞭을 잡고 있었으나 校長과 뜻이 맞지 않아서 辭職을 하고 同年 4月頃 피고 김정기, 김사국 等과 함께 私立 東洋學원을 設立하고 自己 自身이 直接 社會學, 經濟學 等의 敎育을 擔任하고 한便 同 學院 學生들을 激勵하고 社會主義 思想 注入에 努力을 傾注해 왔으며… 방한민은 社會主義를 宣傳하여 왔고 마침내 破壞行動을 斷行하려고 이 機會를 期待하고 있던 次 同年(1923年) 5月 上旬頃 피고 韓金福의 紹介로 알게 된 尹喆이라는 사람을 社會主義者로 認定을 하고 同人으로 하여금 直接 破壞行動을 實現하도록 하기 위하여 水車에 亘하여 방한민의 自宅 및 其他 場所에서 同人과 會合을 하고 自身의 意思를 傳達하고 同年 6月 中旬頃에는 朝鮮革命家가 될 사람들을 組織하고 宣傳部와 君師父를 區分하고, 同年 8月 12, 13日頃 天圖輕便 鐵路開通式 擧行視 機會를 잡고 君師父로 하여금 龍井村 국자歌鬪에 있는 日本領事館과 公館 및 銀行 等地에 爆彈을 投擲하여 同 建物 等의 破壞 및 參席豫定인 總督의 殺害와 同時에 主要 官吏들을 暗殺하여 民心을 攪亂시킬 것을 祈禱하고 그것을 信號로 民心을 攪亂하여 民衆 蜂起를 일으킬 모든 行動計劃을, 宣傳部에서는 社會主義 宣傳 삐라를 撒布하는 한便 軍事부는 윤철로 하여금 宣傳部에서는 방한민이 各各 責任을 지도록 組織을 하고 斷行에 完遂를 期하도록 協議 決定을 한 것이다."

위의 判決文과 豫審終結 決定書에 따르면 방한민은 東洋學院內에 社會主義 宣傳部와 君師父를 組織하여 1923年 8月 12日, 13日頃 日帝가 天寶山 鑛山의 銀鑛石과 銅鑛石을 掠奪해 가기 위하여 이른바 '中. 日合作'의 看板을 내걸고 第1段階로 改刪툰 - 舂精사이에 '遷都輕便 鐵道'를 敷設하고 '開通記念式'을 開催할 豫定이었는데, 그때 參席할 豫定인 日本總督을 殺害하고 舂精, 국자가 등에 있는 日本領事館과 公館 및 日本 銀行 等을 爆破하여 日帝의 統治機關에 甚大한 打擊을 加하여 그것을 信號로 民衆 蜂起를 일으킬 行動計劃을 完了하였으나 안타깝게도 擧事 直前 發覺되여 逮捕되었다는 것이다. 當時 爆彈 30餘個와 宣傳文 多數를 押守당하고 主謀者 牙城 방한민 先生과 동아일보 支局長 김정기, 김사국 外에 23名의 逮捕는 日帝의 肝膽을 서늘케 한 重大한 事件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延邊文士資料에 따르면 김사국이 방한민 等과 대성중학교의 敷設로 '東洋學院'을 設立하였는데, 日帝가 '炸彈埋設事件'을 造作하여 東洋學원을 廢校시켰다고 하였다. 이에 對해서 다음과 같이 說明하고 있다. "1923年 3月, 初期共産主義者인 김사국(金思國)李 로씨야 沿海州에서 龍亭으로 왔다. 그는 방한민(方漢民), 김정기(金正琪), 리명희(李明熙)等 人士들과 힘을 합쳐 대성중학교의 附設學校로 《東洋學院(東洋學院)》을 꾸리고 敎師 아래層 2칸을 내여 大聲中學 第1回 卒業生들을 爲主로 70餘名의 學生들을 募集하였다. 東洋學院에서는 共産主義 宣傳部와 特別部를 設置하여 맑스주의와 社會主義 理論을 基本 敎授內容으로 삼고 先進 靑年들을 養成하였다. 東洋學院은 延邊의 첫 無産階級 民主主義 새 敎育을 創始한 學校였다. 이로 因해 東洋學院은 日帝의 눈에 든 가시로 되었다. 日本總領事館에서는 東洋學원을 큰 禍根으로 여기고 없애버리려고 꿍꿍이를 꾸몄다. 1923年 8月 日帝는 저들의 走狗들을 唆囑하여 夜밤에 學校마당에다 炸彈을 埋設하여 놓고는 領事館 警察들을 출동시켜 射出해낸 後 50餘名의 死生들을 逮捕하는 《炸彈埋設事件》을 造作, 끝내 東洋學원을 廢校해버렸다. 逮捕된 大部分 學生들은 인차 釋放되었으나 김정기 等은 서울 西大門刑務所에 押送되여갔다. 김사국과 리명희 等은 로氏야로 亡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革命活動이 活潑히 展開되던 대성중학교는 한때 革命의 低調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 '東洋學院事件'에 對해 日帝는 1923年 12月 24日 訪韓民에게는 '爆發物 取締罰則 '第4條와 '支那在留帝國臣民取締法' 第8條, 第61條를 違反했다고 懲役10年을 言渡하였다. 또한 차병욱, 박종주는 懲役8年, 한금복은 懲役4年, 김시룡·김대규·정기형·김병진·이용운은 懲役3年, 강희적은 懲役 1個月 執行猶豫2年, 이병운·김진택·김정기는 無罪가 言渡되었다. 이 事件의 最大 被害者는 방한민이었다. 그런데 當時 서울靑年會의 指導者 김사국 等은 證據 不充分으로 免訴되었던 것이다. 當時 김사국은 1922年 11月 무렵 '新生活社 筆禍事件'을 被害 間島와 滿洲 等地에 왔다. 以後 1923年 2月 김사국은 考慮共産同盟을 創立한 以後 블라디보스톡의 코민테른 執行委員會 원東部에 派遣되어 코민테른의 承認을 받으려 했으나 成果를 얻지 못하였다. 以後 김사국은 1923年 3月 그의 妻 박원희와 더불어 間島 舂精에 와서 東洋學院 創設을 主導하였다.

當時 民族解放運動과 社會主義運動의 經驗을 볼 때 이 事件의 主謀者는 김사국이어야 하는데 김사국은 證據 不充分으로 面所 處分을 받고 풀려났던 것이다. 그런데 當時 김사국의 '서울派 路線'에 따르면 '建物爆破' 또는 '要人暗殺' 等은 無政府主義의 테러리즘으로 採擇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當時 방한민과 김사국은 東洋學院 設立에는 協力했지만 窮極的인 運動方向은 相異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當時 日帝는 김사국, 방한민 等이 設立한 '東洋學院'李 當時 間島에서 '抗日 革命의 溫床'이었기 때문에 結果的으로 '東洋學院'을 廢校시키는데 成功하게 되었던 것이다.

舂精에서 逮捕되여 淸津 監獄으로 끌려간 後

방한민의 逮捕는 그 當時 延邊의 特種 技士로서 멀리 朝鮮 서울의 新聞들에도 크게 報道되여 强烈한 反應을 일으켰다. "지난 4日 午前 한時頃에 肝도 龍井村에서 赤化陰謀를 세우던 事件이 發覺되여 唐只에 있는 日本領事館 警察大에서는 警察大 3隊로 나누어 第1代는 東洋學院으로, 第2代는 방한민의 집으로, 第3代는 土星步 方面으로 各各 向하여 방한민과 동아일보 支局長 김정기와 김사국外에 아홉名을 逮捕하는 同時에 爆發彈 30個와 宣傳文 多數를 押收하였다더라" <肝도> .-조선일보 1923. 7. 12 "間島 4日밤 國民新聞 到着展에 依하면 4日 새벽에 間島 龍井村에서 赤化陰謀가 發覺되여 방한민, 김정기, 김사국外 4名이 逮捕되었으며 同時에 爆發彈 30餘個와 선준門 多數를 押收하였다더라." <東京特戰> 동아일보 1923. 7. 13 "철천지 怨讐 日帝에게 復讐의 鐵槌를 내리려고 東奔西走하면서 빈틈없이 行動計劃을 세웠으나 그만 事前에 發覺되는 바람에 牙城과 그의 戰友들은 結局 舂精에 있는 日本領事館 軍警들에게 逮捕되여 拘置所에 갇히게 되었다." 當時 牙城과 함께 逮捕된 사람들의 數에 對하여 조선일보 記事에는 11名으로, 동아일보記事에는 6名으로 씌어져 있는 것과는 달리 '연변대詐欺'에는 23名으로 씌어져 있다. '7月 4日 舂精의 日本領事館은 軍警들을 派遣하여 東洋學원을 包圍하고 敎員, 學生住宅을 搜索하였다. 宣傳文들이 多數 索出되었고 방한민等 24名이 逮捕되었다. 그리고 閑民과 그의 同僚들이 日警에게 逮捕된 場所에 對하여 앞의 朝鮮日報 記事에는 東洋學院과 방한민의 집과 土星步 方向 세곳이라고 씌어져 있으나 淸津地方法院의 判決文에는 그들이 새벽에 集合場所인 해란강邊으로 나가는 길에 逮捕되었다고 밝혀져 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한날 한時에 逮捕되었다는 것, 그들을 逮捕하기 위하여 3代의 日本警察代가 動員되었다는 것은 牙城이 組織한 擧事計劃이 實로 日帝의 肝膽을 서늘 케한 重大한 行動 計劃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舂精 日本領事館에서는 牙城等을 營倉에 가두고 酷毒한 取調를 加했으며 얼마 後에 그들을 淸津地方法院에 身柄을 引導하였다. 그 當時 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記事가 실렸다. "지난 4日 새벽에 間島 龍井村 日本領事館에서는 突然히 行動을 開始하여 그곳 東洋學원을 中心으로 赤化大陰謀를 計劃하던 방한민, 김정기等 여덟名을 逮捕하는 同時에 爆彈 30餘個를 押收하였다. 本報에 이미 報道한바 있거니와 그들은 取調를 마치는 대로 立件, 淸津地方法院 豫審에 부칠 터이라더라."

淸津地方法院 公判廷에서

1923年 12月 24日 咸鏡北道의 淸津地方法院에서는 被告 방한민에 對한 公判이 벌어졌다. 植民地 强點自認 日帝의 法廷이고 보니 法이란 것이 있을 수가 없었다. 判事는 初步的인 證據調査의 節次도 거치지 않고 '爆發物取締罰則違反 및 지나在留禁止命令違反罪'의 罪名을 뒤집어 씌우고 懲役 10年을 宣告했다. 判事는 判決文에서 '방한민이 私立 東洋學원을 設立하고 .... 社會主義를 徹底하게 宣傳하여 왔고, 朝鮮 革命家가 될 사람들을 組織하여 宣傳部와 君師父를 區分하고... 日帝를 反對하는 破壞行動을 斷行할 機會를 노리고... 必要한 爆彈搬入을 劃策하였다면서 '爆發物 取締罰則 第4條와 지나在留諸國臣民取締法 第8條, 第61條를 어기였다고 억지다짐으로 罪를 만들어 判決을 한 것이다. 被告席에서서 머리를 굿굿이 쳐들고 判事의 判決文을 듣고 있던 牙城은 놈들의 날 강도식 公判進行에 쓴 웃음을 보내면서 判決文을 듣고 있다가 다음과 같이 堂堂히 抗辯하였다. "日本人들이 朝鮮땅에 들어와서 朝鮮사람을 公判한다는 이 自體가 無法이 아니고 무엇인가? 日本人들은 마치 韓日合邦이 두나라 百姓들의 好意에서 나온 것처럼 主張하고 있지만 우리 朝鮮사람들은 怨恨이 뼈에 사무쳐 있다. 이건 '合倂'李 아니라 '병탐'인 것이다. 民族의 獨立을 짓밟는 곳에 自由가 어디에 있고 平等이 어디에 있으며 選定이 무엇이란 말인가?" 牙城의 抗辯에 判事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그의 抗辯을 中斷시키고 最小限의 要式行爲조차도 없이 미리 만든 脚本대로 부랴부랴 刑을 言渡하고 꽁무니를 빼려고 하였다. 强占者의 몽둥이를 마구 휘두르는 놈들의 判決에 牙城은 斷乎한 抗議를 하면서 朝鮮 靑年의 氣魄으로 '朝鮮獨立萬歲'를 소리 높이 외쳤다. 牙城의'조선독립만세'소리가 公判廷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웨침소리에 場內는 霎時間에 阿修羅場으로 變하였다. 이 公判廷 騷亂 件으로 인하여 방한민은 10年 懲役刑 外에 10日間 便紙와 冊을 읽지 못하는 處罰이 追加로 내려졌다.

淸津監獄에서 自由를 빼앗긴 囹圄生活을 하면서

어둑 컴檢한 複道가 十字形으로 난 한 監房, 쇠窓살이 꽂혀 있어 햇빛조차 비켜드는 비좁은 監房안의 담 壁에는 성에가 하얗게 끼고 뼈 속까지도 추위가 스며드는 차디찬 監房 속에서도 牙城은 뜨거운 情熱로 가슴을 불태우며 지나온 짧은 人生을 돌이켜보고 未來의 鬪爭에 對하여 생각을 하나하나 蓄積해 나아갔다. '世上에는 數千 數萬 갈래의 길이 있다마는 우리 民族 앞에 놓여 진 길은 오직 두길 뿐이다. 그 하나는 日帝를 따라가는 外勢依存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自己 運命을 自己가 開拓해 나아가는 民族主義者의 길이다. 그러 할진대 倭놈의 奴隸가 되기를 願치 않는 사람이라면 모두 다 일어나 倭놈과 싸워야하며 倭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한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牙城은 自身이 舂精에서 東洋學원을 設立하고 學生들에게 民族解放의 進路를 밝혀주었고 倭놈들을 혼내주기 爲한 重大한 決定을 한 것이 正當했다고 생각하며 한便으로 그처럼 嚴密한 行動計劃이 擧事直前에 오히려 놈들에게 붙잡혀 英語의 몸이 된 것이 몹시도 분하기도 하였다. 왜 失敗하게 되었나? 行動計劃은 어디까지나 祕密裏에 짜여졌었는데 놈들이 그것을 어떻게 探知했단 말인가? 우리內部에 日本 놈들의 密偵이 潛入했는가? 그 동안 손잡고 싸우던 同志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생각할수록 牙城은 五里霧中에 빠지기만 하였다.

淸津에서 大田刑務所로 移送

방한민은 淸津地方法院에서 懲役 10年型을 言渡받고 服役을 하던중 1924年 4月 淸津으로부터 大田刑務所로 移送되어 고된 懲役살이를 강요당하였다. 대전형무소 에 옮겨간 뒤에 그는 獨房에 收監되어 다른 災減同僚들과 接觸할 수가 없었다. 淸津 監獄에 있을 때에는 獄中의 同僚들과 자주 마주 앉아 學問도 硏究하고 그들에게 心理學徒 講義해줄 수 있었으나 獨房에 홀로 갇히어 지루한 時間을 보내자니 외롭고 괴로웠다.

當時 대전형무소에 收監된 방한민의 '身上票'에는

  • 作業에 關한 事項; 病監 掃除夫로 就業하여 4等으로 進級함...간병부로 就業하고 表裏없이 努力함.
  • 敎育에 關한 事項 : 본 期間 西洋史, 文藝復興社, 英文 聖書 等을 耽讀함. 敎育에 關해서 恒常 書籍을 熱讀하는데 怠慢夏至 않고 본 期間 近代文藝 12强 및 英文日驛 硏究書等에 趣味를 가지고 있음. 敎育은 恒常 自習 讀書에 努力하며 본 期間 진종성展(眞宗聖典), 日本外交社, 心理學 講義 等을 耽讀함"이라고 되어 있었다.
  • 親族 및 故鄕에 關한 事項; 父母妻子의 健康等 身上을 恒常 念慮하고 있음. 본 期間 父親 硅石 接見 1回 있었고 相互 健康을 念慮하였음. 본 期間 父親 앞으로 郵便 發信 3回, 受信 5回 있었음.

이 外에도 '身上表'에는 그가 술을 마시지 않고 宗敎를 믿지 않으며 讀書를 즐기고 事理 判斷이 明晳하고 政治的으로도 드물게 보는 溫厚하고 寡默하고 自慢하지 않으며 또한 日語에 熟達하고 中國語는 會話, 通譯等 流暢하며 英語는 飜譯까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日常 平易한 繪畫는 할 수 있는 程度라고 씌어져 있다. 한 맺힌 祖國光復을 꿈꾸며 收監生活에 들어간 牙城先生은 해란강의 月色 고요한 銀빛 江물을 더 以上 보지도 못한 채 大田刑務所로 移監李 되어 服役을 하던 中 消化不良等으로 몹시 힘든 受刑生活을 하고 있다는 조선일보, 동아일보等의 新聞紙上에 仔細히 報道되었다. 1925年 4月 4日 朝鮮日報 에는 '間島事件受領 방한민 呻吟中'이란 標題下에 다음과 같은 記事가 실렸다. "再昨年 間島事件의 頭領으로 淸津地方法院에서 懲役 10年型을 宣告받고 只今 대전형무소에서 服役 中인 방한민은 今年 1月 以來로 消化不良으로 病監에서 呻吟中이라더라" 이 消息은 나래가 돋힌 듯 霎時에 朝鮮本土와 延邊地方에 傳해져 舂精 東洋學院事件에 對하여 關心이 많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注意를 끌었으며 特히 그의 故鄕인 忠淸南道 論山郡 강경면 住民들에게 傳해져 不安을 자아내었다. 그렇지 않아도 牙城이 舂精에서 逮捕되어 淸津監獄을 거쳐 대전형무소에서 服役中이라는 所聞을 듣고 가슴 아파하던 故鄕사람들은 그가 病監에서 앓고 있다는 新聞記事를 읽고서는 더 以上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忠南 論山 故鄕 사람들 假出獄 鎭靜運動을 벌리다

그의 故鄕 論山 사람들은 그의 假出獄을 위한 鎭靜運動을 벌렸다. 朝鮮日報 는 1926年 11月 27日子에 '방한민群 假出獄을 대전형무소에 鎭靜'이란 標題로 다음과 같은 消息을 發表하였다. "間島 龍井村에 있던 東洋學원의 講師로 鬪爭組織을 强化하고 各 官公署等을 破壞하여 要人을 暗殺하려던 陰謀가 그 地方 領事館에 發覺되어 淸津地方法院에서 10年 懲役刑의 判決을 받고 大田刑務所로 移監되어 服役 中인 牙城 訪韓民軍을 위하여 강경면 維持一同은 여러가지의 悲慘한 그 家族의 生活을 들어 刑務所 當局에 鎭靜하고 다시 그의 假出獄이라도 될까하여 2百 餘名의 連署로 二十七八日 頃에는 大田刑務所長에게 陳情書를 提出할 터이라더라" 1927年 6月 28日에 大田刑務所腸은 法務局長 앞으로 보낸 報告書에서 "대정 15年(1926年) 11月 30日 論山郡 강경면의 김재형等 211名, 消化 2年(1927年) 6月 4日 冬眠의 박대동外 108名의 連署로 陳情書를 提出해왔다."고 썼으며 1928年 2月 3日 강경면 警察署長은 大田刑務所長에게 "本月 2日 강경면 所在地 事情 德油井에서 방한민이 假出獄의 銀錢을 받도록 運動 中에 있는데 이미 約200餘名의 調印을 받고 있으며 1,000餘名의 調印을 받아서 大田刑務所腸(貴官) 앞으로 陳情書를 提出할 計劃을 하고있다."고 通報하였다. 강경면 의 有志人士 박대동 外 108名은 1927年 6月 4日 朝鮮總督에게 提出한 陳情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방한민은 性品이 溫順하고 父親 兄弟之間 友愛가 두텁고 올바른 敎育을 받아서 自身의 人格을 닦아왔을 뿐 아니라 멀리 東京 그리고 北京에까지 가서 相當한 識見을 所有하고 있는 사람으로 平素에 飛行이 있다는 事實을 저희들은 들은바가 全혀 없었으며 同人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다 같이 將來 有望한 靑年으로 期待가 컷 던 人物이었다. 그러므로 特別히 勝찰하시여 방한민에게 假出獄의 銀錢이 베풀어지도록 해주신다면 同人으로 하여금 올바른 일에 就業을 시켜서 將來를 위하여 完全히 새로운 사람이 되도록 努力할 것이며 同人이 再三 非行을 저질렀을 때에는 저희들은 다 같이 그 責任을 질 覺悟를 가지고 있습니다. 閣下의 특별한 配慮에 依하여 傳道가 洋洋한 靑年의 앞날에 自暴自棄하지 않고 그 人生이 잘못되지 않겠금 懇曲히 請願해 마지 않습니다. 故鄕사람들의 强力한 鎭靜運動은 日帝 權力機關에 對한 壓力이 되었다. 論山郡 강경면 故鄕사람들의 陳情運動이 言論에 알려지는 等 날로 높아가는 陳情과 歎願에 社會問題가 되어가자 怨聲을 撫摩하기 위하여 大田刑務所腸은 1928年 5月 18日 朝鮮總督 앞으로 "방한민의 假出獄을 許可해 주실 것을 바라나이다"라는 報告를 올려보냈다. 어쩔수 없는 狀況이라고 判斷한 總督은 더 以上 붙들어 둘 수 없다고 깨닫고 假出獄을 許可하게 되었다. 마침내 牙城은 論山郡 강경면 維持 319名의 假出獄 運動으로 刑期를 1年 3個月을 남겨둔 狀況에서 1928年 6月 2日 午前 10時 當局의 刑執行停止로 대전형무소 에서 出獄하였다.

出監 後

鐵窓 속에서 풀려나온 牙城의 健康은 몹시 허약하였다. 食事도 形便없이 하였고 벼룩투성이의 監房에서 病으로 오랫동안 앓은 탓으로 廢人이 되고 말았다. 牙城은 故鄕에 돌아가서 한동안 몸調理를 하였다. 父母兩親은 그가 많은 拷問을 當하고 獄에 갇힌 뒤 갖은 苦生을 하느라 집을 떠날 때 보다 몹시 늙어보였으나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아내 또한 結婚한 지 10年 歲月이 되도록 집에서 걱정 속에만 살다 만나니 반가워했다. 牙城은 自身의 假釋放을 위해서 努力한 강경면 有志人士들을 찾아가 眞心으로 感謝를 表示하였다. 洞네사람들은 그가 監獄에서 나온 出所者라해서 避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壯한 일을 하고 돌아온 英雄처럼 尊敬하며 친절히 對해 주었다. 몇 달 동안 집에서 쉬면서 몸調理를 했더니 健康狀態가 차츰 好轉되어갔다. 그는 父親이 '嚴重保護와 監督을 傾注하여 農蠶業에 從事케 할 것이다'고 대전형무소 長에게 保證하였기에 처음엔 집에서 父母님의 일손을 도왔다. 그러나 거의 10年 동안이나 暴風의 激動 속에서 自身의 靑春과 情熱과 思想을 고스란히 외로운 鬪爭에 바쳐온 牙城으로서는 그저 自己 집, 自己의 한 故鄕마을에만 파 묻혀 있을 수 가 없었다. 그는 차츰 다른 洞네, 다른 都市로 나들이를 하면서 다시 意氣投合된 親舊들과 再次 民族이 바라는 鬪爭의 길에 뛰어 들 機會만 엿보게 되었다. 그러던 中 그가 日帝를 辛辣하게 批判하여 民族誌로서의 名聲을 얻은 朝鮮日報 社에서 그가 活動할 健康이 回復된 것을 알고 다시 朝鮮日報 에 와서 勤務해달라는 傳喝이 오자 그는 網서림 없이 承諾을 하고 곧바로 朝鮮日報 編輯部에서 일을 다시 始作하게 되었다. 出監 後 다시 조선일보에 復職하면서 祖國에 對한 線으로'날마다 나의 피와 살과 精神을 穩全히 나라에 바치겠다'는 신명을 가지고 熱心히 勤務하였다. 牙城의 連續的인 抗日記事로 인하여 數次例 停刊을 當한 朝鮮日報 社에서는 牙城의 이름을 假名으로 使用하는 排日記事가 다시 連載되기 始作하였다. 다시 日帝의 서슬퍼런 눈들이 朝鮮日報 로 向하자 總督府에서는 꼬투리를 잡으려는 데 血眼을 세우고 있었다.

熱誠者大會에 連類되어 다시 投獄되다 [ 編輯 ]

1929年 6月 12日 새벽 鏡城의 鍾路서 高等係 刑事들이 學生과 靑年 10餘名을 檢擧하였다. 當時 檢擧된 사람은 協同組合運動社 主要幹部 정헌태, 이시목과 방한민, 안상훈과 學生科學硏究會 檢査委員이며 寶城專門學校 學生 現運筆, 중동學校 學生이며 學生科學硏究會 會員인 박승원, 안상윤, 김상섭, 靑年會館 生徒 이병각, 연희전문학교 學生 姨母(李某), 高學堂(苦學堂) 敎員 이준열, 京元線 列車 內에서 이규송, 6月 13日 午前 안국동에서 서울靑年會 幹部 홍승유, 이준호와 新幹會 會員 한봉석等 16名이 檢擧되었다. 이 事件은 慶尙北道 安東 出身의 社會主義者 안상훈 (安相勳)의 '熱誠者大會 事件'이었다. 안상훈은 火曜派 出身으로 모스크바 東方勞力者共産大學 出身이며 1929年 3月 滿洲 吉林省 돈化現에서 朝鮮共産黨 再建準備會議 發起會가 結成된 直後 國內에 派遣되어 서울에서 黨 再建運動을 準備하다가 檢擧되었던 것이다. 방한민은 이 事件의 背後人物로 逮捕되었다. 當時 朝鮮總督府 警務局長은 이 事件을 '서울派의 再組織運動'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消化3年(1928年) 4月 平安道 新義州 警察署에서 檢擧된 非理論派(서울派) 朝鮮共産黨事件의 黨 中央幹部 政治部委員 이운혁은 當時 逮捕를 면하고 京城府內에 潛在하여 盞當 이준열, 이민용 等으로 하여금 後繼黨 組織을 祕密裏에 計劃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지만 이준열 等은 同志를 糾合하고 다음 해 1月 以來 京城府內에서 여러次例 回合하고 朝鮮共産黨의 暫定 組織을 마칠 무렵 同年 3月 再블라디보스톡 이운혁, 密使 이기순, 김세권은 전후하여 入選하여 同志와 回合하고 코민테른 第6回 大會後 모스크바에서 火曜會系 김단야, 서울 및 傷害界 이동휘, 김규열, ML界 양명, 限해 等의 意見 衝突로 從來의 共産黨은 認定할 수 없게 되어 코민테른은 새롭게 黨組織 決定書를 黨員에게 修交할 뜻을 밝혀, 이에 黨의 暫定 組織을 朝鮮共産黨再組織準備委員會라 改稱하고 組織副委員 정헌태는 知識階級을 中心으로하는 運動方針을 決定하였는데, 同年 4月 上旬 再 吉林 黨指導 幹部 서울契 김영만은 密使로서 안상훈, 송무영을 入選시켜 이준열 等의 一派인 조선일보記者 방한민에게 코민테른 決定書 및 黨 再組織 準備로서 惡티비스(熱誠者)膾를 일으키라는 指令을 修交함으로써 再組織準備는 具體下되어 野涕洟카, 考慮共産靑年會, 朝鮮被壓迫同盟會 等 組織에 着手하기에 이르러 黨再組織準備委員會는 責任祕書 이준열, 調査部責任 방한민, 組織副責任 이민용, 政治部 責任 정헌태, 考慮共産靑年會는 責任祕書 이민용 桐후부 정헌태 京畿道幹部 정관진, 野涕洟카 責任 방한민, 정관진, 주윤흥, 정헌태, 朝鮮被壓迫同盟會는 방한민 等이 中心이 되어 오로지 組織에 服務하고 있는 것을 同年 6月 京城鍾路警察署에서 探知하여 다음의 LL派의 策動과 더불어 檢擧하여 關係 被疑者 86名(美逮捕 41名)을 7月 16日 治安維持法違反으로 管轄 檢事에게 送致하였다"

그러나 當時 日本 警察은 방한민이 그 事件과는 別로 聯關된 것을 찾지 못하자 방한민을 分離하여 審問하였다. 안상훈을 비롯한 이준열, 방한민, 정헌태, 민병로, 박승룡, 주윤흥, 이민용 等 關聯者 8人에 對한 公判은 1931年 4月 23日 京城地方法院에서 進行되었다. 안상훈 은 이 事件에서 治安維持法違反으로 懲役 5年을 宣告받았고, 방한민에 모진고문을 加하면서 牙城이 假出獄 後에도 조선일보사에서의 抗日記事 作成等에 怏心을 품고 治安維持法 違反으로 懲役7年과 未決拘留 300日을 通算하는 判決을 宣告하였다. 當時 總督府는 獨立運動家들을 逮捕할 때 大多數를 社會主義者, 共産主義者, 적火賊 大革命分子로 몰아쳤다.

방한민은 다시 대전형무소에 收監되어 7年의 刑期를 마치고 1937年 10月에야 出獄하였다. 刑期를 마친 방한민은 모진 拷問과 두次例 13年間이란 오랜 監獄生活로 精神異常者가 되어 서울 대방동에 있는 精神異常者 收容所에 들어가 受容生活을 하다가 解放을 맞았다.

大韓民國 光復 以後 [ 編輯 ]

大韓民國 光復 後 서울大學校 農大의 前身인 水原農大에서 잠農業을 講義한 바 있으며, 6·25의 渦中이던 1952年 하와이 僑胞 移住 50周年 記念事業으로 뒤떨어진 우리나라의 工業 水準을 向上시키기 위하여 當時 大統領이던 李承晩 博士의 發議로 하와이 僑胞들의 精誠어린 誠金, 그리고 國內 유지의 誠金 및 國庫補助金等을 基金으로 引下大學 을 出帆할 當時 設立委員으로 參與하고 經濟學 敎授로 活動했다. 방한민은 韓國 最初로 고구마栽培法을 傳授시켜 굶주리던 住民들의 食生活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第2代 國會議員 選擧에 出馬하였으나, 韓國戰爭 中 失踪되었다. [3]

評價 [ 編輯 ]

洪範圖 將軍과 김좌진 將軍이 봉오동戰鬪 (1920年 6月)와 靑山里戰鬪 (1920年 9月)에서 日本軍을 大파시키어 日本軍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였다면 牙城 방한민 先生은 붓(筆鋒)으로 日本에 抗拒한 記者로서 朝鮮의 獨立을 부르짖고 靑少年에게 大韓造船의 光復의 꿈과 希望을 안겨주었던 言論, 出版, 敎育, 啓蒙, 文化, 義烈鬪爭等 多方面의 抗日運動家로서 愛國 愛族의 國家觀을 심어준 先驅者的인 獨立鬪士로 評價된다.

政府는 日帝下 平生을 獨立과 民族解放을 위해 鬪爭한 先生에게 1990年 8月 15日 建國訓長 愛國章을 追敍하고 獨立有功者 로 崇拜하며 愛國 愛族의 民族指導者로 推仰하고 있다.

國家報勳處 는 光復會·獨立記念館과 共同으로 조선일보 創刊멤버로서 排日記事를 連載하고 間島에 東洋學원을 設立하여 民族敎育에 앞장선 방한민 先生을 2010年 1月의 獨立運動家 로 選定하였다. [4]

學歷 [ 編輯 ]

家族 關係 [ 編輯 ]

방한민은 忠淸南道 論山 溫陽 方氏 兩班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방달주(方達周)의 者(字)는 盛擧(聖居)로 朝鮮 後記 先約將軍(종4品)과 龍驤衛副司果(종2品)를 歷任하였다. 그는 忠南 論山 德惟政의 四百(射伯)을 지내기도 했고, 사계좌목 4卷의 序文을 作成하기도 했다. 방달주는 膝下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방한민의 伯父(伯父)인 방관석(方觀錫, 1859年 11月 6日生)은 司憲府 監察을 歷任하였다.

아버지 방규석은 朝鮮 哲宗 13年인 1862年 태어나, 1884年 武科를 合格하고, 以後 海防營(海防營)에 奸逆(看役) 所任을 다해, 情3品 通政大夫(通政大夫)로 加資되었다. 1908年 民會 議長으로 選出되었다. 1910年 韓日合倂 以後에도 15年間 論山 강경면 성동면 場으로 推戴된 바 있다. 방규석은 當時 面民들의 信望을 받아 1921年 성동면 腸 在職時에 面민일동 이름으로 公廉非(淸白吏비)가 세워졌으며 80年이 지난 只今도 오랜 風霜을 이기며 굳굳하게 세워져 있다. 牙城 방한민은 總督府의 가시가 되어 1926年 1月 論山郡守 藤井熊之助에 依해 辭職 勸告를 받았다. 이에 當時 성동면 民들은 面民大會를 열고 不當한 辭職에 對해 激烈히 抗議하며 방규석 面長 留任運動을 大大的으로 벌이기도 하였다.

방한민의 兄 방한승(方漢昇)은 東亞日報 創立 記者를 거쳐 每日新聞 , 京城日報 記者로, 동생 방한호(方漢昊)는 中外日報, 每日申報 記者로서 3兄弟가 모두 記者로 活動한 것으로 有名하였다.

  • 할아버지 : 방달주(方達周, 1826年 12月 24日 ~ 1890年 8月 3日)
    • 큰아버지 : 방관석(方觀錫)
    • 아버지: 방규석 (方圭錫, 1862年 5月 8日 ~ 1944年 9月 1日)
    • 어머니: 조현정
      • 兄 : 방한승 (方漢昇)
      • 동생 : 방한호 (方漢昊)
      • 本人: 방한민 (方漢旻)
      • 否認: 김한배 (金漢培)
        • 아들: 방준영 (方駿榮)
          • 孫子: 房甁件

그의 孫子인 房甁件은 '獨立有功 愛國志士遺族會' 會長을 歷任하였다. [5]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1月의 獨立運動家 방한민 先生 , 《뉴데일리》, 2009年 12月 30日
  2. 방한민 先生이 民族敎育을 펼쳤던 大成學校 , 《뉴시스》, 2010年 1月 2日
  3. 國家報勳處, 1月의 獨立運動家 방한민(方漢旻)先生 , 《政策브리핑》, 2009年 12月 30日
  4. 1月의 獨立運動家 방한민 先生 , 《東亞日報》, 2009年12月 31日
  5. 全國서 太極旗 물결…多樣한 光復節 記念行事 , 《KBS 뉴스》, 2013年 8月 15日

參考 文獻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