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팔양
(朴八陽,
1905年
8月 2日
~
1988年
10月 4日
)은
韓國
의
是認
이다. 筆名은
김려수
(金麗水),
餘水産人
(麗水山人)이며, 麗水(麗水, 如水)는 雅號이기도 하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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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京畿道
火星
에서 出生하였고, 어릴때
京城府
로 移住하여
배재高等普通學校
를 卒業했다.
정지용
과 함께
搖籃
同人으로 活動하다가 《
東亞日報
》 新春文藝를 통해 〈神의 株(神의 酒)〉(1923)를 發表하면서 登壇했다.
耽美主義的인 傾向의
具仁會
와 參與的 性向의
카프
에 모두 參加한데서 알 수 있듯, 그의 作風은 모더니즘과 階級的 傾向性의 兩面的인 모습을 보여준다.
다다이즘
의 影響을 받은 都市的인 느낌의 詩와 함께, 植民地 現實의 矛盾을 認識하면서 抵抗性이 엿보이는 作品 亦是 發表했다. 詩集으로는 《麗水市初(麗水詩抄)》(1940)와 《박팔양 詩集》(1947年)을 냈다.
光復 當時 《
만선일보
》 記者로
滿洲
에 머물고 있던 박팔양은 歸國하던 中 北韓에 그대로 머물러 越北 作家가 되었고,
勞動新聞
의 前身인 《정로》 初代 編輯局長과 《勞動新聞》 副主筆,
金日成綜合大學
講座長 等을 지냈다.
韓國 戰爭
時期에는 從軍 作家로 參戰해 活潑한 創作 活動을 했으며, 《黃海의 노래》(1958), 《눈보라 萬里》(1961), 《民族의 榮譽》, 《이름없는 한 풀잎의 노래》(遺稿作) 等 長篇 敍事詩를 發表했다. 韓國 戰爭을 背景으로
共和國英雄
조옥희
를 다룬 作品 《黃海의 노래》는 唱劇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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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越北 後
조선작가동맹
副委員長(1956)과
最高人民會議
代議員을 지내는 等 政治的으로도 成功하였으나, 1960年代 中盤 以後 公式的인 活動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肅淸說이 나돌았다. 休戰 以後 곧바로 除去된
조선문학건설본부
系列의
林和
,
김남천
等과 달리 아직 남아있던 카프 舊主流 出身 作家들이
한설야
를 中心으로 大擧 肅淸되었다는 說이었다. 特히 박팔양은
日帝强占期
동안 管制 言論社인 만선일보의 記者를 지내
親日派
로 規定될 수 있다는 弱點이 있었다.
肅淸說의 眞僞는 確認되지 않았으나 2000年代의 北朝鮮에서는 復權된 狀態로, 革命性과 階級性을 잘 드러낸 作品으로 主體文學의 기틀을 세웠음을 認定 받아서 初期作인 〈진달래〉(1930) 等의 作品도 높은 評價를 받고 있다.
非轉向 長期囚
로
2000年
送還된 兩者
박문재
와 함께 代를 이은 愛國者로 指稱된다.
[1]
1988年
越北 作家들이 解禁되면서
大韓民國
에서도 再評價가 始作되어, 詩選集 《太陽을 등진 거리》
[2]
가 發刊됐다.
2008年
發表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中 文學 分野에 選定되었으나 保留되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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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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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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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世紀를 이어 愛國과 信念의 길로 이끌어주시여”. 勞動新聞. 2006年 1月 26日.
- ↑
박팔양 (1991年 11月 1日). 《太陽을 등진 거리》. 서울: 未來事.
ISBN
500014978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