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
(
韓國 漢字
:
朴泰遠,
1910年
1月 17日
[3]
[4]
~
1986年
7月 10日
)은
日帝强占期
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親日
性向
社會主義
系派
是認
,
小說家
,
文學評論家
,
政治人
,
大學 敎授
였다.
本館
은
密陽
(密陽)이며
號
(號)는 驅步(丘甫, 仇甫, 九甫), 몽步(夢甫), 박태원(泊太苑)이다. 1929年
日本
호세이 大學
校 法廷學科 1學年을 中退하였다.
그는
1909年
陰曆 12月 7日
,
大韓帝國
의
漢城府
에서 出生하였으며, 叔父(박용남)가 西洋
醫學
小兒
內科
醫師
, 叔母가
普通學校
敎師 等으로 일하는 제법 開化的인 이른바 西歐的 집안 雰圍氣에서 자랐다.
京城第1高等普通學校
在學 中이던 1926年 《朝鮮文壇》에
時
〈누님〉을 發表하며 登壇했다. 1929年 11月,
日本
호세이 大學
法廷學科 1學年 時節에 中退한 後 歸國한 1930年
新生
10月號에 短篇 小說 〈
鬚髥
〉을 發表하고 本格的인 創作 活動을 始作하였으며, 1933年
이태준
,
정지용
,
以上
,
김유영
,
김기림
等과 함께 純文學的, 唯美主義的 性向의
具仁會
를 結成했다. 1934年 10月 27日, 韓醫師(韓醫院 院長)인 김중하 氏와 그의 夫人인 이演士 氏의 無男獨女 김정애(金貞愛, 1912年~1984年)와 結婚. 新婦 김정애 女史는
京城 淑明女高步
를 首席으로
卒業
(1929年)하고,
경성사범학교
餘學部 本科(1931年)라는 곳을 나온 財源이었음.
光復 後인 1946年
左翼
系列의 文學인 團體인
조선문학가동맹
의 中央執行委員 等을 맡는 等 暫時
남로당
系列의 文藝 運動에 몸을 담았다가, 1947年 脫孟(
文童
脫退)을 한 이듬해 1948年
國民報道聯盟
에 事務委員으로 加入하며 轉向했다.
[5]
1950年
韓國 戰爭
勃發 後 서울에 온
리태준
,
安懷南
,
吳章煥
,
정인택
,
리용惡
等을 따라
남조선문학가동맹
平壤視察團員 等의 身分으로 平壤에 건너가 以後 事實上 착(着)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理解 7月頃
조용만
(
高麗大學校
名譽敎授 兼
延世大學校
招聘敎授 等을 지낸 隨筆家 兼 英文學者)에게 目擊된 것이 南쪽에서 朴泰遠을 보았다는 마지막 證言이다.
1950年
韓國 戰爭
中엔 從軍 記者 等으로 活動하였다. 事實上 越北 및 平壤 定着 以後, 1952年 《
勞動新聞
》에 〈리순신 將軍〉을 連載하였으며, 後날 平壤에서 〈壬辰祖國戰爭 360周年 記念 리순신將軍箭〉을 發刊했다. 1953年 9月 以後부터 平壤 文學代學校 敎授로 在職하고, 國立高前예술극장 拷問 兼 專屬作家 等로도 活動. 《
甲午農民戰爭
》은 北韓(平壤)에서 再婚한 計杯 아내 권영희가 口述을 받아 적어 完成했으며, 마지막 3篇은 宿患(熱病)으로 口述 能力마저 잃은 後에 권영희가 代身 執筆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영희(朴泰遠 作家의 再婚 計杯 否認)는 朴泰遠의 京城 第一高普 同窓이자 具仁會 時節 同僚였던
정인택
(1909年~1952年)의 아내로, 1952年 정인택 事後인 1956年 朴泰遠과 再婚한 것이다. 特히
권영희
(1913年~2002年)는 朴泰遠과 莫逆한 文學的 交流를 나누었던
作家
以上
(1910年~1937年)의 옛 戀人이었다는 說이 있다. 朴泰遠의 主要 徐薰으로는 1979年 12月 1日 當時 人民 國旗勳章 1級 授與와 萬70回 生日床 下士 및 1986年 7月 10日 事後 1998年 11月 18日 最高人民會議 常任委員會에서 愛國烈士로 承認하여 平壤 신미리 烈士陵으로 里長函.
作品으로는 日帝 强占期 知識人의 自意識을 모더니즘的인 技法으로 描寫한 中篇 〈
小說家 구보氏의 一日
〉(1934年)를 비롯하여 첫째 男동생
박문원
(朴文遠, 1920年~1973年)李 章程(揷畵)을 맡은 小說集 《川邊風景》(1936年), 越北 後 北韓에서 執筆한 大河 歷史 小說 《鷄鳴山川은 밝아오느냐》, 《甲午農民戰爭》 等이 있다.
韓國 戰爭
中 1951年 越北한 아우
박문원
(朴文遠)은 社會主義 系派 美術評論家로 有名하다.
1973年 4月 28日에는 함께 越北하여 지낸 아우
박문원
을
心筋 梗塞
으로 잃었다. 아울러 朴泰遠은 死亡 時期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남로당 系列 文人들과는 달리 1986年 7月 10日에
高血壓
으로 死亡을 한 卽時 《朝鮮文學》에도 訃告 記事가 실렸다. 또한 遺族으로 長女(박영은)와 3女(박설영)가 平壤에서 같이 함께 있었으며, 特히 무엇보다 한便으로는, 정인택과 권영희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딸(정인택 作家의 次女 정태은)로 現在 北韓(平壤)에서
作家
로 活動하고 있는 정태은이 2000年 平壤에서 〈나의 아버지 박태원〉이라는 글을 《통일문학》에 發表하여, 다른 越北 作家들에 비하여 越北 以後 行跡이 比較的 昭詳히 알려져 있다.
朴泰遠은 2男 3女와 移轉 配偶者(김정애, 1912年~1984年) 等 家族을 모두 서울에 두고 平壤으로 短信 越北했다. 二重 中學生이던 맏딸 박영은과, 셋째딸 박설영은 큰三寸
박문원
(朴泰遠 作家의 첫째 男동생)과 同伴하여 1951年 越北했으며, 大韓民國에 남은 家族 中 둘째딸(박소영 夫婦)의 막내 아들(朴泰遠의 外孫)李 바로
奉俊昊
映畫監督이다.
[6]
以外 履歷
[
編輯
]
事後
[
編輯
]
日帝强占期
末期에 日本의
軍國主義
를 美化한 《軍國의 어머니》(1942年)라는 冊을 낸 바 있다. 그러나 親日 行跡이 露骨的이지는 않아서, '消極的 協力'으로도 불리고 있다.
[7]
2005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친일인명사전
에 收錄하기 위해 豫備 名單을 整理했을 때 包含되었으나, 最終 名單에서는 除外되었다.
2002年
公開된
親日 文學인 42人 名單
에 選定되어 있다. 選定 當時 親日 作品은 逸話 모음집인 《軍國의 어머니》 外에 《
趙匡
》과 《
每日申報
》에 寄稿한 글이 各各 한 篇씩 있어, 總 3篇이다.
[8]
以後 歷史學界를 中心으로 各 分野의 專門硏究者 150餘 名이 編纂委員으로 參與했으며, 180餘 名의 執筆委員, 文獻資料 擔當 硏究者 80餘 名이 關與하여 2009年 民族文化硏究院에서 發行한 『친일인명사전』에는 除外되었다.
作品 目錄
[
編輯
]
- 1926 누님
- 1929 垓下의 일야
- 1930 寂滅
- 1934
小說家 구보氏의 一日
- 1936
芳蘭腸 主人
- 1936 川邊風景
- 1937 聖誕祭
- 1938 右猛
- 1963 鷄鳴山川은 밝았느냐
- 1977 甲午農民戰爭 1部
- 1980 甲午農民戰爭 2部
- 1986 甲午農民戰爭 3部
外部 링크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