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원
(朴宗源,
1793年
~
1840年
1月 31日
)은
朝鮮
의
天主敎
迫害
때에
殉敎
한
韓國 天主敎
의
103位 成人
中에 한 사람이다.
洗禮名
은
아우구스티노
(Augustinus)이다.
그는
殉敎者
고순이 바르바라
의 男便이다.
生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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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원은
1793年
에
漢陽
의 한
兩班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溫和한 性品을 지녔었으며 親切한 사람이었다. 그는 뛰어난 學者였으며 手腕家이기까지 했다.
그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읜 以來 가난하게 살았지만, 不平 한番 없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忠實하였고 그女와 함께 篤實한 信仰生活을 이어나갔다. 그는 交友
고순이
와 結婚하여 3男妹를 두었다. 그는 매우 자비로웠다. 그는 여러
天主敎
信者들과 豫備 信者들을 가르치고 激勵하였다. 그는 죽을 危險에 處한 많은 아이들에게
洗禮
를 베풀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
예수님
께서 저를 사랑하시므로, 저 또한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저를 위하여
苦痛
받으셨으므로, 저 또한 苦痛 받아야 합니다." 그는
殉敎者
가 되기 위한 熱烈한 欲求를 갖고 있었다.
박종원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指摘하며 忠告하려 들었다. 그는 누군가가 罪 있는 狀態에 있는 것을 볼때면,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對하는 그의 態度는 親切하여 그들을 不快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그에 對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박종원이 화난 것을 한番도 본 적이 없어요." 박종원은 어려운 狀況 속에서도 率先하였다. 그는
宣敎師
들을
朝鮮
에 데려오는데 엄청난 努力을 쏟았다. 그의 才能과 德行이
앵베르
主敎
에게 알려져, 主敎는 그를
敎理
敎師
로 임명하였다. 박종원은 敎理 先生으로서 그의 義務를 훌륭히 遂行하였다.
1839年
己亥年에 迫害
가 勃發하자, 박종원은 집을 떠나 8個月 동안 收監된 敎友들과 連絡하는 한便 흩어진 敎友들을 찾아가 돌보기를 繼續하던 中,
10月 26日
에
逮捕
되었다. 그는 여러 次例의 激甚한
審問
과
拷問
을 받아서
팔
과
다리
를 쓸 수 없는 地境이 되었지만,
苦痛
을 表出하지 않았다. 그의 살가죽이 떨어져 나갔지만, 그는
하느님
을 위해 苦痛받는 것을 幸福해 했다.
關聯 記錄에 따르면, 박종원은 確信을 가지고
天國
과
地獄
에 對해 說明하였고 自身의
祖上
에게
祭祀
를 지내는 것을 拒否한 罪目이 있다고 한다.
박종원은
漢陽
近郊의
당고개
로 押送되어 아내
고순이
가 殉敎한지 約 한 달만인
1840年
1月 31日
에 48歲의 나이로 다섯 名의 敎友와 함께
斬首
되어
殉敎
하였다.
諡福 · 詩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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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원 아우구스티노는
1925年
7月 5日
에
로마
聖 베드로 廣場
에서
敎皇
비오 11歲
가 집전한 79位
[2]
諡福式
을 통해
福者
품에 올랐고,
[3]
1984年
5月 6日
에
서울特別市
汝矣島
에서
韓國 天主敎
創立 200周年을 記念하여 訪韓한
敎皇
요한 바오로 2歲
가 집전한
미사
中에 이뤄진 103位
諡聖式
을 통해
成人
품에 올랐다.
參考 文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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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各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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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