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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生
| 1969年 7月 27日
(
1969-07-27
)
(54歲)
江原道 太白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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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別
| 女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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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籍
| 大韓民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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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住地
| 서울特別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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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 트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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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歷
| 서울藝術大學校
實用音樂學科
專門學士
(卒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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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族
| 男便
김한순 (어머니)
김동건 (아들)
문희자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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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敎
| 改新敎
(
순복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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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 다음 펜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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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옥
(文喜玉,
1969年
7月 27日
~ )은
大韓民國
의
歌手
이다.
現在 居住地는
서울特別市
이다.
生涯
[
編輯
]
문희옥은
江原道
太白市
에서 2男 3女 中에서 4째로 태어났다. 以後 學業을 위해
서울特別市
로 上京하였으며, 서울
은광女子高等學校
2學年에 在學 中이던 1986年에 學校 長技자랑에서
주현미
의 〈비내리는 永東橋〉를 불러 實力認定을 받아 作曲家 안치행이 運營하던 所屬社 安打프로덕션에서 1餘年間 트레이닝을 받았다. 그리고
1987年
에 全羅道, 慶尙道, 咸鏡道 等 地方 사투리 創作曲들을 담은 《8度 디스코 사투리 메들리》(이호섭 作詞/안치행 作曲)를 發表하며 歌手로 데뷔하였다. 데뷔 當時 문희옥은 高等學校 3學年 在學 中에 있었으며 《8度 디스코 사투리 메들리》에 收錄된 노래 《天方地軸》(
全羅道 사투리
), 《三水甲山 비둘기》(
咸鏡道 사투리
) 等 各 地方의 사투리 노랫말로 構成된 創作曲들을 감칠맛나게 불러 當時 一週日 만에 360萬張이라는 어마어마한 音盤販賣量을 記錄했다. 데뷔와 同時에 큰 成果를 거두자 自身이 다니던 高等學校의 周旋으로 學校 講堂에서 生涯 처음으로 리사이틀 公演을 하였다. 하지만 期待했던 만큼이나 成功을 거두지 못했는데 그 理由는 문희옥처럼 하이틴 스타가 트로트 장르를 한다는 것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當時 時代相으로 사투리는 空中波 舞臺에서 活動하기가 禁止되었기 때문에 그 해에 標準語 歌詞로 된 앨범 《빈손》(이정화 作詞/안치행 作曲)을 發表하였다.
1988年 문희옥은 어려운 家庭形便 속에서도 熱心히 工夫하여
서울藝術大學
實用音樂學科에 入學하였고 大學生 歌手가 되었으며 그 해 슬로우 템포의 正統 트로트 《가는 님 가는 情》(정은이 作詞/ 남국인 作曲)을 發表하였다. 데뷔와 同時에 큰 成果를 거두어 大衆들의 사랑을 받았던 문희옥은 1989年에 正統 트롯 리듬을 輕快하게 現代化한
폭스트롯
《사랑의 거리》(정은이 作詞/ 남국인 作曲/ 김용년 編曲)로 放送 音樂茶房 等地의 人氣차트에서 上位圈에 올라 歌手로서의 全盛期를 맞이하면서 트로트 歌手의 막내로서 期待를 모았다. 《
사랑의 거리
》는
정재은
이 1984年에 먼저 吹入하여 불렀는데 2節까지 밖에 없었는데 문희옥이 2輯 타이틀曲으로 리메이크 하면서 2節이 끝나고 1節을 한番 더 反復하면서 3節로 하였다. 또한 日本 오사카에서 僑胞 慰問 公演을 始作으로 日本에도 進出하였다. 문희옥은 1990年에 《江南 멋쟁이》(정은이 作詞/ 남국인 作曲)가 히트하여 人氣街道를 달리고 있을 때 當時 KBS 歌謠大賞을 受賞한 先輩歌手
賢哲
과 混成듀엣으로 《잘했군 잘했어 메들리》를 發表하였는데 旣存에 무명歌手가 混成 듀엣限 音盤이 아닌 人氣歌手로서 混成 듀엣限 音盤으로서 처음이었다. 그리고 《港口 메들리》, 《解禁歌謠 메들리》 等을 發表하면서 旣存의 메들리 音盤을 發表하고 正統 트로트를 固守하던
李美子
,
김연자
,
주현미
의 뒤를 이어 大韓民國에서 몇 안되는 正統 트로트 歌手이자 메들리 歌手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991年에 發表한 엔카風의 正統 트로트 《性은 김이요》(조동산 作詞/ 원희명 作曲)는 문희옥하면 떠오르는 노래 中 하나로 손 꼽히며 當時
第14代 國會議員 選擧
때 金氏 候補者들에게 全幅的인 支持를 받으면서 上位圈에 再導入에 成功했다. 그리고 選擧철을 맞아 各 遊說場에서 歌詞바꿔 부르기 노래로 脚光을 받아 드디어 트로트界 頂上의 자리에 安着했다.
데뷔와 同時에 트로트 장르에서 最高 歌手로 名聲을 떨치던 문희옥은 1990年 代 《純情》, 《海邊의 첫사랑》, 《玄海灘》을 히트시키며 트로트 女帝로 登極하였지만
落
,
댄스
音樂이 1990年 臺에 大韓民國 歌謠界의 主流를 이루었고
포크
,
트로트
音樂은 슬럼에 빠졌다. 그 中에서 正統 트로트를 固守하는 歌手였던 문희옥은 放送出演 比重이 줄어들었다. 1995年에 會社員 金 氏와 結婚한 以後 約 3年間 空白期를 가지게 되었지만 1998年에서야 《情 때문에》(박용진 作詞/ 朴用鎭 作曲)가 히트하면서 歌手 再開에 成功하였다. 문희옥은 主로 트로트 音樂을 하였으나 只今까지의 正統 트로트에서 벗어난 세美 트로트 장르를 試圖하기도 했다. 그 中 2002年에 發表한 《하늘 땅만큼》(정찬우 作詞/ 김정호 作曲)은 패스트 템포 리듬의 트로트로 自身의 音樂的 性向을 다양하게 해주는 색다른 音樂이었다. 2006年에는 《사랑이 남아있을 때》(김병걸 作詞/ 임종수 作曲)를 發表하고 正統 트로트로 性向을 바꿔 다시금 트로트 女帝의 影響力을 行使했다. 特히 문희옥은 다양한 音樂 장르를 消化해내며
SBS
娛樂프로그램 《
挑戰 1000曲
》에서 여러番 優勝을 거머쥐고 2011年에 放送한
tvN
娛樂프로그램 《오페라스타 2011》에 出演하여 實力派 歌手로 認定받았다.
學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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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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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規 앨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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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出演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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放送 出演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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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族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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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要 受賞經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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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年 팝켓 아시아 뮤직 어워드 10代 歌手賞
- 2014年 第20回 大韓民國 演藝藝術尙 成人歌謠 歌手賞
- 2012年 第12回 大韓民國 傳統歌謠對象 女子 7代價受賞
- 2011年 KBS 트로트 大祝祭 올해의 歌手賞
- 2006年 第40回 歌手의 날 特別功勞賞
- 2003年 第5回 韓國藝術室硏子對象 特別功勞賞
- 2002年 第36回 歌手의 날 模範歌手賞
- 1992年 第7回
골든 디스크
SKC 奬勵賞
- 1989年 第4回
골든 디스크
本賞
- 1987年 第2回
골든 디스크
新人歌手賞
- 1987年 MBC 人氣歌謠20 女子新人賞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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