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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浦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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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强占期때의 木浦部
木浦의 歷史

木浦部 (木浦府)는 日帝强占期 光復 1949年 까지 存在했던 行政 區域으로, 現在의 大韓民國 全羅南道 木浦市 에 該當한다. 朝鮮時代 에는 23部制 나主婦 務安郡 地域이였으며, 1896年 13道制 가 施行되면서 務安郡으로 改編되었으며, 1897年 木浦가 開港하면서 1906年 務安部 로 昇格되었다. 日帝强占期 에 들어서 1910年 9月 30日 恐怖, 10月 1日 施行된 〈朝鮮總督府脂肪官官制〉에 따라 務安附加 木浦部 로 改稱되었다. 現在 區 木浦 日本領事館 의 建物이 部廳舍로 使用되었다. 그로부터 4年 뒤 1914年 4月 1日 木浦部가 分解되어, 都市 地域인 부내면만 木浦部 로 남고, 부내면을 除外한 木浦富의 나머지 面과 지도군 轉役, 珍島郡 도초면·안창면·起坐面, 莞島郡 팔금면이 務安郡 으로 改編되었다. [1] 1949年 木浦附加 木浦市 로 改稱되어 現在에 이른다.

行政區域 變遷 [ 編輯 ]

朝鮮總督府令 第111號
舊 行政區域 神 行政區域
木浦部 現畵面(玄化面), 多鏡面(多慶面) 務安郡 玄慶面 一圓
木浦部 鎭下山面(珍下山面) 務安郡 해제면 一部
木浦部 이서면(二西面), 일書面(一西面) 務安郡 청계면 一圓
木浦部 엄다면 , 辛勞面(新老面) 咸平郡 엄다면 一圓
木浦部 金銅面(金洞面), 진례면(進禮面), 左寸面(佐村面) 咸平郡 학교면 一圓
  • 1947年 4月 1日 日本式 情(町)名이 韓國式 同名으로 改正되었다. (죽동, 온금동, 양동, 대성동, 남교동, 북교동은 同名 維持)
同意名稱變更에관한규정
舊 行政區域 (法定洞) 神 行政區域
木浦部 金井(錦町)1·2정목, 影幀(榮町)1·2정목, 抒情(曙町)1~3정목, 築庭(祝町)1~3정목, 상반정(常盤町)1·2정목, 修正(壽町)1·2정목, 補正(寶町)1~3정목, 行政(幸町)1·2정목, 本情(本町)1~3정목, 中庭(仲町)1·2정목, 警正(京町)1·2정목, 對話鄭(大和町)1~3정목, 海岸通1~4정목 木浦部 琴童1·2街, 영해동1·2街, 廣東1~3街, 축복동1~3街, 상락동1·2街, 수강동1·2街, 보광동1~3街, 幸福童1·2街, 중앙동1~3街, 中東1·2街, 京東1·2街, 대의동1~3街, 해안동1~4街
木浦部 앵情(櫻町), 욱情(旭町), 명치정(明治町), 臺訂正(大正町), 송도정(松島町), 山修正(山手町), 하정(霞町), 航程(港町), 複算定(福山町), 호남정, 窓平定, 惟政 木浦部 금화동, 서산동, 대안동, 명륜동, 동명동, 유달동, 측후동, 항동, 복만동, 호남동, 창평동, 流動

都市의 發展 [ 編輯 ]

區 木浦 日本領事館 建物 (1900年 建立, 現 木浦近代歷史觀 )

木浦가 1897年 10月 1日 에 開港한 以後 莞島 를 통해 이어지던 뱃길에 恒常 木浦가 끼게 되었고 木浦-濟州 사이를 定期的으로 航海하는 汽船이 생겨났다. 1921年 設立된 巡航船組合의 船舶을 비롯해 仁川, 釜山, 麗水 를 오가던 배들은 木浦를 中間 寄着地로 삼아 航海를 이어나갔다.

1914年 에는 湖南線 鐵道가 開通되면서 大戰 - 木浦 間 鐵路가 開設되었다. 이미 木浦港의 機能을 穀物 收奪로 設定한 日帝는 1920年 東洋拓殖株式會社 木浦地點을 設置했고 이 建物은 只今까지 남아 木浦近代歷史觀 으로 쓰이고 있다.

鐵道, 造船, 水産加工業이 本格化되면서 朝鮮人들은 各地에서 몰려들어 일거리를 찾았다. 日本人 居住地域에 가깝게 자리를 잡기 위해 작은 움幕 따위를 지어 좁디 좁은 골목을 만들어 지냈다고 한다. 그 자리는 옛 共同墓地로서 朝鮮總督府가 許可하면서 겨우 居住가 許諾된 곳이었다. [2] 各種 施設이 들어서는 한便 木浦劇場 이 생겨났다. 서울을 비롯해 大都市에서 內國人이 所有하고 있던 劇場은 서울의 團成社 光州 의 光州劇場, 木浦劇場 세 곳뿐이었다. [3] 그리하여 1926年 에는 人口가 33,244名으로 急增하여 大都市로 成長했다. 그 中에 日本人이 1/4假量 되었다. [4]

1932年 에는 務安郡 一部 地域 編入으로 面積이 늘어나는 한便 人口 6萬의 6大 都市로 成長했다. 當時 木浦港에 모이던 物品은 一黑 ( ) , 三白 ( 綿花 , , 소금 )의 集散地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5] 日本人들은 全北에 쌀의 群山이 있다면 全南에는 麵의 木浦가 있다고 했는데, 1930年代 初 木綿工場의 數가 20餘 곳에 이르렀던 朝鮮 第一의 木綿 輸出港이었다. 이 木綿은 日本 간사이의 阪神 地域으로 主로 팔려나갔다.

各州 [ 編輯 ]

  1. 朝鮮總督府令 第111號 (1913年 12月 29日)
  2. 고석규, 〈近代都市 木浦의 歷史 空間 文化〉
  3. 李敬載, 嘉藍企劃 《漢陽이야기》 264쪽
  4. 木浦府使(木浦府史)
  5. 木浦歷史文化觀光 홈페이지 中 沿革 參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