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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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셔 디스카우의 옆모습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Dietrich Fischer-Dieskau, 1925年 5月 28日 ~ 2012年 5月 18日 [1] )는 獨逸 바리톤 歌手이다. 슈베르트 歌曲 等으로 有名하다. 2005年 폴라音樂賞 을 受賞하였다. [2]

20世紀 世界 最高의 바리톤으로서 活躍한 베를린 胎生의 歌手이다. 高等學校 校長이자 테너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아래에서 자라, 11歲 때 指揮 콩쿠르에 立像. 15歲 때에는 《바흐의 칸타타에 關하여》라는 論文을 發表하였다. 라이즈너의 노래를 들은 後로는 歌手가 되기를 決心하여 베를린 高等音樂學校에서 헤르만 바이젠보른에게 師事하였으나 第2次大戰이 일어나 獨逸 國防軍 으로 參戰하여 이탈리아 戰線에서 捕虜로 잡혀 美國의 砲로 로 2年을 보냈다. 1947年에 베를린 리아스 放送局에서 錄音한 《겨울의 旅行》李 널리 알려져 다음해 베를린 市立歌劇場과 契約하였으며 많은 曲 中 特히 피가로와 볼프람에 成功하였다. 1950年에 에든버러 音樂祭에서 오토 클렘퍼러 의 指揮로 《 大地의 노래 》를, 브루노 발터 獨逸 레퀴엠 》을 불렀고, 1951年의 잘츠부르크 音樂祭에서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의 指揮로 《죽은 아기를 그리는 노래》를 公演. 이 錄音은 名演으로서 레코드에 남아 있다. 1955年에 바이로이트에 出演한 以後 全 世界에 걸쳐 活躍하였으며, 特히 獨逸 歌曲의 分野에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 程度이다. [3]

生涯 [ 編輯 ]

獨逸 베를린에서 태어났고 父母는 아마추어 音樂家였다. 처음에는 테너를 志望했으나 陰性이 바리톤으로 變하여 베를린高校에 入學하면서부터 게오르크 발터를 스승으로 하여 바리톤을 배웠다. 1943年 1月 卒業 後 故鄕에서 歌曲 歌手로 데뷔했으며 이듬해 베들린音大에서 퀸터 바이젠보른에게 師事하던 中 2次 世界大戰에 參戰하게 된다. 이탈리아에서 捕虜가 되어 2年 동안 美 捕虜收容所에서 生活하였다. 戰爭이 끝나자 프라이부르크에서 브람스의 《獨逸 레퀴엠》에 出演하여 널리 알려졌다. 1948年부터 베를린市立오페라의 歌手가 되었다. 오페라. 歌曲. 聖歌 等에서 두루 明礬을 남겼으며 難解한 現代 歌曲의 初演을 맡거나 音樂 著述 및 後進 養成에도 큰 寄與를 하였다. [4]

2012年에 老患으로 死亡하였다.

著書 [ 編輯 ]

  • 《리트, 獨逸藝術歌曲》(홍은정 役, 포노, 2015). 韓國語版. 《Das deutsche Klavierlied》(2012)를 韓國語로 옮긴 冊.

各州 [ 編輯 ]

  1. Der Tagesspiegel 18 May 2012
  2. 폴라音樂賞 公式 웹사이트 , 2015年 8月 19日 確認.
  3.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 〈聲樂家 > 테너 >피셔디스카우〉
  4. 정윤수, <<20世紀 人物 100과 事前>>, 숨비소리, 2008年, 240쪽

外部 링크 [ 編輯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聲樂家 > 테너 >피셔디스카우"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