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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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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
東明聖王
국학원 역사 문화 공원 내에 있는 동명성왕 동상.
國學院 歷史 文化 公園 內에 있는 동명성왕 銅像.
第1代 高句麗 國王
在位 紀元前 37年 2月 ~ 紀元前 19年 9月 (陰曆)
後任 瑠璃明王
이름
朱蒙(朱蒙) · 追慕(鄒牟) [1]
重해(衆解) [2] · 秋몽(鄒蒙) [3]
別號 東明王(東明王) · 추모왕(鄒牟王)
追慕聖王(鄒牟聖王) · 中모王(中牟王)
廟號 太祖(太祖)
시호 桐名聲(東明聖)
身上情報
出生日 紀元前 58年 4月 (陰曆)
出生地 북부여 또는 東扶餘
死亡日 紀元前 19年 9月 (陰曆) (39歲)
死亡地 高句麗 졸본성
父親 해모수王 或은 금와왕
母親 유화부인
兄弟姊妹 해부루王 , 대소왕 , 갈사왕
配偶者 豫氏 否認 · 소서노
子女 瑠璃明王 · 沸流 · 온조왕
陵墓 龍山(龍山)
東明王陵

동명성왕 (東明聖王 紀元前 58年 陰曆 4月 ~ 紀元前 19年 陰曆 9月 , 在位 : 紀元前 37年 陰曆 2月 ~ 紀元前 19年 陰曆 9月 )은 高句麗 의 初代 國王이다. 이름은 朱蒙 (朱蒙), 廟號 (廟號)는 太祖 (太祖)이다. [4]

局社 》(國史) 高句麗本紀를 引用한 《 三國遺事 》 및 《 三國史記 》에 姓은 (高)이고 朱蒙 (朱蒙)이라 하였다. 또한, 《三國史記》 等에는 追慕(鄒牟)·中모(中牟)·重해(衆解)·상해(象解)·도모(都牟)·도모(都慕)라는 이름도 傳하고 있다. [5] 扶餘 금와왕 의 아들인 對蘇 의 迫害를 避해 南쪽으로 내려와 高句麗 를 建國하였다.

生涯 [ 編輯 ]

誕生 說話 [ 編輯 ]

초등대恨歷史에 실린 동명성왕 上

三國史記 》와 《 三國遺事 》 및 《 東明王篇 》은 追慕聖王의 誕生 說話를 다음과 같이 記錄하고 있다. 現在 傳해지는 朱蒙 說話는 高句麗 扶餘 를 倂合하여서 인지 夫餘의 始祖인 東明王의 說話와 高句麗의 建國說話가 비슷함을 보인다. 歷史學界에서는 扶餘의 東明王 과 高句麗의 朱蒙을 다른 人物로 여긴다. 朱蒙은 햇빛에 依한 懷妊이라는 傳說을 가지고 있는데 선비족을 統合한 단석괴 (壇石槐)도 햇빛에 依한 懷妊이라는 傳說을 가지고 있다.

三國史記 》와 《 三國遺事 》에는 해모수 가 朱蒙의 아버지로 登場한다. 解慕漱의 '害'는 太陽을 뜻한다. 卽, 天孫을 意味한다. 따라서 解慕漱는 高句麗의 天孫意識이 擬人化 된 結果物로 解釋할수도 있다.

講을 다스리는 神 하백 (河伯)의 어여쁜 세 딸 油畫 (柳花) · 喧譁(萱花) · 위化(葦花)가 더위를 避하여 淸夏(只今의 鴨綠江 )의 雄深淵(熊心淵)에서 놀고 있었다. 이때 天帝의 아들 解慕漱가 오룡거 (五龍車)를 타고 내려오다가 蓮못 안에 세 處女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였다. 喧譁 · 위화는 돌아갔으나 柳花는 解慕漱와 만나게 되었다.

하백이 이러한 消息을 듣고 크게 怒하였다. 하백은 天帝의 아들이라는 解慕漱와 術法을 겨루어 그의 能力을 試驗해 본 뒤, 解慕漱와 油畫의 結婚을 認定하여 油畫를 하늘나라로 보내주었으나, 如前히 해모수에 對한 疑心을 거두지 아니하였던 하백은 꾀를 써서 解慕漱를 다시 試驗해보기로 하였다. 가죽負袋에 들어 있던 解慕漱를 주머니에 묶어 가둔 뒤에 올려보내었으나, 물 밖으로 나오기도 前에 술에 깨버린 解慕漱가 크게 怒하여 홀로 昇天하였다.

이에 하백은 油化에게 크게 怒하여 귀양을 보냈다. 以後 東扶餘 의 王 금와왕 이 偶然히 우발수 (優渤水)로 나들이를 갔다가 油畫를 만나고, 그 處地를 불쌍히 여긴 金蛙王은 油畫를 宮闕로 데려왔다. 그런데 그女를 向하여 햇빛이 繼續해서 비치는 奇異한 일이 繼續되더니, 마침내 그女는 孕胎하였다. 하지만 油畫가 5되나 되는 커다란 을 낳자, 이 消息을 들은 金蛙王은 이를 不吉한 徵兆로 여기어 油化로부터 알을 빼앗아 돼지우리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돼지들은 이 알을 먹지 않았을 뿐더러 도리어 所重히 하였다. 그 뒤 金蛙는 소와 말이 짓밟도록 알을 길가에 버리기도 하였는데, 소와 말들이 알을 避해가자, 이番에는 새들이 쪼아 먹도록 들판에 놓아 두었다. 하지만 새들은 오히려 알을 품어 주었다. 때문에 金蛙는 도끼로 알을 내리쳐보기도 했지만 알은 穩全하였다. 金蛙王은 하는 수 없이 油化에게 알을 돌려주었다. [6]

油化는 그 알을 따뜻하게 덮어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아이 하나가 알을 깨고 나왔다. 그 아이는 날 때부터 普通 아이들과는 달라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百發百中이었다. 이에 이 아이의 이름을 扶餘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인 “ 朱蒙 ”이라고 지었다. 朱蒙은 對蘇 王子 等 金蛙王의 7名의 아들보다 能力이 出衆하여 그들의 時期를 받았고, 虎視眈眈 그를 죽이려 하였다.

大小家 朱蒙을 죽이려고 한다는 事實을 눈치챈 柳花는 朱蒙에게 東扶餘를 떠나라고 忠告하였다. 어머니의 忠告에 따라 朱蒙은 오이 (烏伊), 마리 (摩離), 挾輔 (陜父) 等 세 親舊와 함께 東扶餘를 떠나 追擊者들을 避해 南쪽으로 내려가 엄리대수 (淹利大水)에 이르렀다. 自身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엄리대수를 向해 朱蒙은 “나는 天帝의 孫子이며, 江의 神의 外孫子이다. 只今 나를 쫓는 者가 뒤를 따르니 그 危險이 急한 데 江을 건널 수 없으니 도와 달라.”라고 하니, 이에 感應한 자라 물고기 가 물 위로 떠올라 띠를 이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朱蒙이 無事히 江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돌아가 버렸고, 追擊者들은 江을 건너지 못해 더以上 쫓아오지 못했다 하는데, 이 다리를 가리켜 魚鼈性交 (魚鼈成橋)라 일컫는다.

속일본기 》에 따르면, 百濟 元祖(遠祖) 圖謀王은 하백 의 딸이 日程(日精)에 感應하여 태어났다라고 한다. 이는 朱蒙 舌禍 와 類似하다.

高句麗의 建國과 發展 [ 編輯 ]

平壤에 있는 東明聖王의 무덤

扶餘 에서 자란 朱蒙 은 총명하고 활을 잘 쏘아 屬望을 받던 中 對蘇 금와왕 의 일곱 아들이 그 재주를 猜忌하여 죽이려고 하자 火를 避하여 移住하였다.

大小의 威脅에서 無事히 벗어난 朱蒙은 悠悠히 南쪽으로 向하여 마침내 卒本 에 定着하여 卒本(이름 未詳, 建國 說話 中에 다른 說話에는 연타발 이라고 되어 있다)의 둘째 딸 (이름 未詳, 建國 說話 中에 다른 說話에는 소서노 라고 되어 있다)과 結婚하여 漸次 勢力을 擴張하기 始作한다.

紀元前 37年 , 朱蒙은 卒本 扶餘王의 뒤를 이어 高句麗 를 建國했다. '高'氏로 傳해지지만 朱蒙의 元來 姓氏는 아버지인 해모수 에 따른'해'씨이며, 高句麗 태조왕 當時 桂婁部 高氏가 執權하자 正統性을 위해 始祖인 朱蒙의 姓氏를 '高'氏로 바꾸었다. 그리고 國家의 位相을 一新하기 위해 大大的인 領土擴張 戰爭을 벌이기 始作했다. [7] 朱蒙은 領土擴張을 위해서는 于先 邊方을 안정시킬 必要가 있다고 判斷하고 邊方에 살고 있던 말갈족 部落을 平定하여 말갈족이 더以上 國境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紀元前 36年 에는 勳江 (沸流水) 上流에 있던 沸流國 (沸流國, ‘宋兩國’이라고도 한다)의 王 宋孃 (松讓)에게 활쏘기 競爭으로 이겨서 降伏을 받아내어 ‘옛 땅을 回復했다.’라는 뜻의 高句麗 말인 다물(多勿)로 改稱하고, 宋孃을 그곳의 逃走로 삼았다.

沸流國을 征服한 朱蒙은 紀元前 34年 마침내 졸본성 과 宮闕을 完成하여 나라의 位相을 한層 높였다. 紀元前 32年 에는 오이(烏伊)와 部憤怒(扶芬奴)를 보내 太白山( 白頭山 ) 東南쪽에 있던 행인국(荇人國)을 征服하였으며, 紀元前 28年 에는 不胃炎을 보내 北沃沮 를 征服하였다.

紀元前 24年 가을 陰曆 8月에 扶餘 에 남아있던 朱蒙의 어머니 油畫 가 죽었다.

平壤의 追慕王陵 [ 編輯 ]

東明王陵 卒本 近處의 용산에 마련되었으며, 諡號는 追慕聖王(東明聖王)이라고 하였다. 後날 高句麗 平壤 으로 遷都할 때 함께 平壤 으로 옮겨왔다고 推定된다.

朱蒙이 記錄된 여러 司書들 [ 編輯 ]

誕生年度 [ 編輯 ]

三國史記 》는 朱蒙의 誕生 年度를 紀元前 58年 으로, 《 三國遺事 》는 紀元前 48年 으로 記錄하고 있다.

高句麗 [ 編輯 ]

三國史記 》에는 朱蒙의 高句麗 建國 神話가 記錄되어 있다. 高句麗 建國 神話의 두 가지의 建國 過程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三國史記 》에 記錄된 高句麗 建國 說話이다. [8]

東明聖王이 卒本 에 定着하여 卒本 扶餘王(이름 未詳)의 둘째 딸(이름未詳)과 結婚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兄은 沸流 로, 동생은 온조 로 이름 지어졌다. 以後 追慕聖王이 高句麗 를 建國하고 沸流 온조 는 王位에 오르는 가장 有力한 順位에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沸流 온조 를 얻기 以前에 동명성왕과 북부여 의 豫氏 사이에서 태어난 有利 高句麗 에 찾아오자 追慕聖王이 반겼다. 게다가 追慕聖王은 첫째 아들인 有利 太子 로 임명하자, 沸流 온조 兄弟는 後日이 두려워 南쪽 으로 내려가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이것은 中國人이 쓴 中國史書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高句麗 建國 說話이다.

북부여 의 王인 해부루 의 아들 雨態 소서노 라고 불리는 卒本 사람 연타발 의 딸과 婚姻하였다.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바로 兄 沸流 와 동생 온조 이다. 그러나 雨態 가 죽자 卒本 으로 亡命한 朱蒙 과 再婚하였다고 한다. 朱蒙은 소서노 와 두 兄弟를 잘 보살펴 주었고, 소서노 는 王妃가 되었다. 그러나 扶餘 예씨와 婚姻하여 얻은 아들 有利 가 찾아 誤字, 朱蒙의 마음은 有利 쪽으로 기울었고, 結局 有利 太子 로 삼는다. 그러자 兄인 沸流 가 아우인 온조 에게 말하기를, 大王의 業績이 크고 우리를 잘 보살펴 주었으나, 이제는 나라가 有利 의 손에 들어갔으니 다른 나라를 세우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두 兄弟는 어머니 소서노 와 함께 代數와 패수를 건너 彌鄒忽에 나라를 建國하였다

소서노 雨態 와 婚姻하여 沸流 를 낳았고 雨態 가 죽자 朱蒙 과 再婚하여 온조 를 낳았다는 說도 있다. [8] [9]

一部 中國 史學者들과 北朝鮮의 史學者들은 《 三國史記 》 〈 高句麗本紀 〉의 保障王 代의 記事( 27年 陰曆 2月 :“高(高)氏는 나라를 세운 지 이제 900年 이 된다.”)를 내세워 高句麗 의 建國時期를 紀元前 200年 頃으로 推定한다. [10]

위와 같은 《 三國史記 》의 記錄을 綜合해 볼 때, 朱蒙은 東扶餘 에서 도망친 後, 卒本扶餘 의 貴族인 連打翠髮 과 婚姻關係를 맺은 後, 卒本扶餘 君主 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 高句麗 900年 歷史 '라는 保障王 代의 記事는, 朱蒙 以前의 卒本扶餘 의 歷史까지를 합친 것으로 判斷하기도 한다.

朱蒙(朱蒙)과 동명성왕(東明聖王) [ 編輯 ]

論衡 》, 《 偉略 》 等의 中國 史料에는 夫餘의 時調로 同名 (東明)을 들고 있다. 同名의 夫餘 建國 過程은 朱蒙의 高句麗 建國 過程과 完全히 一致하며, 따라서 本來 東明王은 扶餘 의 始祖이고, 동명성왕은 朱蒙과 東明王이 겹쳐지면서 붙여진 後世의 名稱이라는 見解가 一部 提起되기도 한다. [11]

또한 『三國遺事』에서 북부여가 西紀前 59年에 建國되었다고 한 것은 高句麗의 建國者인 朱蒙說話와 夫餘 建國說話를 合한 것으로 理解할 수 있을 것이고, 夫餘國의 建國 時期는 이보다 훨씬 앞선 時期로 보아야 한다. [12] [13]

백제 始祖설 [ 編輯 ]

日本 에서는 朱蒙을 百濟 의 始祖로도 본다. 속일본기 에는 "百濟 元祖(遠祖) 圖謀(都慕)王은 하백의 딸이 日程(日精)에 感應하여 태어났다."라고 年力 8年 1月朝에 收錄되어 있다. 또한 新撰姓氏錄 日本書紀 에도 백제의 始祖를 圖謀(朱蒙)으로 設定하고 있다. 백제王室의 後裔인 認定(仁貞)은 百濟의 太祖를 온조왕 이 아니라 朱蒙으로 指目하고 있다.

또한 칸무 天皇 의 生母인 고야申砬 의 墓碑銘에는 "百濟의 먼 祖上인 圖謀王(都慕王)이라는 사람은 하백(河伯)의 딸이 太陽의 정기에 感應해서 태어난 사람인데 皇太后는 곧 그 後孫이다. [14] "라고 記錄되어 백제에서 朱蒙을 始祖로 본 것으로 推定되고 있다.

家計 [ 編輯 ]

大衆 文化속에 나타난 追慕聖王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三國史記 》, 〈 廣開土王陵碑 〉, 〈모두루 墓誌銘〉
  2. 三國史記
  3. 三國遺事
  4. 三國史記 》 卷 第6 安勝을 高句麗의 王으로 冊封하다
  5. 김부식 (1145) 勸第13 〉 “姓高氏 諱朱蒙  一云鄒牟 一云衆解 ”(性은 高氏, 휘는 朱蒙이다. 또는 追慕, 重해라고도 한다 )
  6. 김부식 (1145) 勸第13 〉 “於是時 得女子於太白山南優渤水 問之 曰 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心山下鴨邊室中私之 ?往不返 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優渤水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所 引身避之 日影又逐而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許 王棄之與犬豕 皆不食 又棄之路中 牛馬避之 後棄之野 鳥覆翼之 王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이때에 (金蛙는) 太白山 南쪽 우발수에서 한 女人을 얻었다. 事緣을 물으니 (그 女人이) 答하기를, “저는 하백의 딸이고 이름은 油畫라 하는데, 여러 동생들과 함께 놀러 나갔다가 어느 男子를 만났습니다. 그는 스스로 天帝의 아들 解慕漱라 하였습니다. 저를 誘惑하여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수(鴨?水) 街의 집으로 꾀어 나와 四通(私通)하고 곧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父母는 제가 仲媒없이 남을 좇았음을 꾸짖어 마침내 우발수로 귀양을 온 것입니다.” 金蛙가 이를 異常히 여겨 房 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햇빛이 비추어 (柳花는) 몸을 당겨 避하였으나 햇빛이 또 좇아와 비쳤다. 그래서 孕胎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 王은 알을 버려 개,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또 길 가운데에 버렸으나 소와 말이 避하였다. 그 後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 주었다. 王은 (알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하자 마침내 그 어미에게 돌려 주었다.)
  7. 紀元前 37年 ~:《[[:s: 三國史記 / 新羅本紀 /第1卷# 赫居世 居西干 | 三國史記 》( 新羅本紀 第1卷, 二十一年...以下) 參照.
  8. 조법종 (2007). 《이야기 韓國古代史 古朝鮮에서 渤海까지, 우리 歷史를 찾아서》. 청아출판사. ISBN   9788936803599 .  
  9. 백제의 始祖 比流王의 아버지 雨態(優台)는 北部女王 解夫婁의 庶孫(庶孫)이고 어머니 소서노(召西奴)는 卒本人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當時의 時期나 場所 等의 여러 가지 情況으로 소서노는 雨態에게 시집가서 비류와 온조를 낳고 雨態가 죽은 뒤 추모왕과 結婚한 것으로 解釋하고 있다.
  10. 高句麗는 언제 建國되었을까? , 《 오마이뉴스
  11. 理獄, 〈朱蒙 硏究〉《韓國史硏究》7, 1972 / 이복규, 〈夫餘建國始祖神話고〉《인문과학연구》1, 1982
  12. 박승범, 〈夫餘國의 神話的 變動과 東明神話의 時·空間的 推移〉, 《韓國史學報》 第37號, 考慮史學會, 2009年 11月, 486쪽.
  13. 나하나,〈附與의 變遷과 東扶餘 問題〉강원대학교 《人文科學硏究》 第23輯, 2009.12. 309쪽. 『 三國遺事 』에는 해모수 가 西紀前 59年에 북부여 를 建國하였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中國 側 史書에 依하면 扶餘 關聯 記錄은 中國 春秋전국時代부터 登場하고 있으므로 해모수 에 依한 西紀前 59年 建國說은 問題가 있다. 朱蒙이 西紀前 37年에 高句麗 를 建國할 當時 나이가 22歲였으므로, 西紀前 59年은 朱蒙이 태어난 해이다.(윤내현, 「附與의 分裂과 變遷」. (『上命私學』 3 ·조경래博士停年退任記念論文集, 1995), 459쪽 參照)
  14. [詩論] 日王發言과 한.일 關係..李道學 <國立 한국전통문화학교 敎授>

參考 文獻 [ 編輯 ]

  • 김부식 (1145). 《 三國史記 》.  
    • 勸第13 〉 (高句麗本紀 第1 時調 東明王 兆)
    • 勸第23 (백제본기 第1 時調溫祚王 兆)
    • 勸第37 (雜誌 第6 地理 第4)

參考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前 代
금와왕 ( 扶餘 )
第1代 高句麗 國王
紀元前 37年 - 紀元前 19年
後 臺
瑠璃明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