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立協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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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協會의 모임 場所로 利用되던 獨立館 (2020年, 서울硏究院 )

獨立協會 (獨立協會)는 1896年 7月 2日 設立된 大韓帝國 의 協會이다. 初期에는 社交 形式으로 出發하여 民衆啓蒙團體, 近代的인 政治團體 및 近代的인 政黨으로 發展하였다. 1897年 에는 淸나라 로부터의 獨立을 記念해 迎恩門 을 헐고 獨立門 을 세웠다. 1898年 12月 解散되었다.

1896年 4月 7日 獨立新聞 을 創刊한 서재필 은 그해 이어 7月 2日 , 內部的으로는 民衆 스스로 人權과 參政權 을 主張하게 하고, 對外的으로는 自主國을 標榜, 獨立門 建立과 獨立公園 造成을 目的으로 獨立協會를 創設하였다. 獨立協會의 參與者 數가 늘면서 各地의 百姓들이 參與하는 萬民共同會 를 開催하였고, 學生들에게 討論과 妥協을 가르치는 協成會 를 傘下 機關으로 組織, 後援하였다.

高宗의 還宮을 성사시켰고, 1896年 11月 只今의 西大門區 자리에 있던 迎恩門 (迎恩門)을 헐고 獨立門 을 세웠으며, 그 옆에 있던 慕華館 (慕華館)을 獨立館 으로 改稱하였다. 1897年 부터는 鍾路에서 各界各層이 參加한 萬民共同會 를 열어 國民들의 愛國心을 높였다. 1898年 10月 漢城府 鍾路 네거리에서 官民共同會 를 組織, 時局에 關한 6個 弔意 改革 案을 高宗에게 建議하는 것을 始作으로 積極的인 革新運動을 展開하였다. 1898年 11月 政府의 外郭團體인 皇國協會 等의 誣告로 이상재 , 남궁억 等 獨立協會 幹部 17名이 檢擧 投獄되고, 皇國協會 의 使嗾를 받은 千餘 名의 褓負商들이 獨立協會를 襲擊했다. 高宗 은 勅令으로 兩會 解散을 命令하였다. 韓國 最初의 近代的인 社會政治團體로 民權 參政權 을 主張하던 서재필 等의 開化派 政府 의 外勢 依存 政策에 反對하는 知識層 等이 參與하여 朝鮮 의 自主獨立과 民權, 民衆 政治 參與 , 內定 改革 等을 主張하고 活動하였다. 出處-大韓民國依賴社

設立 背景 [ 編輯 ]

獨立協會는 1896年 (高宗 33年) 7月 2日 漢城府 에서 이완용 , 서재필 , 안경수 , 윤치호 , 이상재 , 박정양 等에 依해 結成, 組織되었다. 協會의 結成을 主導하던 開化派는 淸나라 가 宗主權을 主張하던 時期에 反淸(反淸) 立場에 섰으며, 美國 , 러시아 , 프랑스 , 日本 等에 友好的이며 西歐의 文物을 積極 受容해야 된다는 見解를 提起하였다. 이들은 '정동파' 또는 '外國人派'로도 불렸다.

甲申政變 에 加擔했다가 失敗하여 美國 으로 亡命했던 서재필 은 甲申政變 勢力에 對한 赦免令이 내려지자 11年 만에 歸國한다. 서재필 1894年 12月 政府의 赦免令이 내려지고 1895年 박영효 , 유길준 等의 勸告로 歸國해 1896年 4月 7日 獨立新聞 을 發刊했다. 歸國 直後 徐載弼은 百姓이 나라의 主人이며 百姓들이 政治에 參與할 權利가 주어져야 한다고 力說하고, 百姓들이 政治에 參與하려면 于先 말과 글, 國內外 事情을 알아야 되므로 新聞을 發刊할 것을 主張하여 1年만인 1896年 獨立新聞 을 發刊한다.

그러나 獨立新聞 의 發刊 外에도 徐載弼은 말과 글, 國內外 事情을 안다고 해도 百姓들 스스로가 自己 權利를 主張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百姓들에게 權利를 주지 않는다, 自由와 權利는 空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며 調整과 官廳을 向해 民衆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機關을 만들 것을 力說했다. 이에 윤치호 , 이상재 , 유길준 等은 積極 同調했다.

本來 開化派에 屬하는 서재필 을 中心으로 이상재 , 윤치호 等이 主導했고, 이완용 , 안경수 , 박정양 等 當時 政府 高位官僚들度 參加했으며, 남궁억 과 같은 知識人도 參與하였다. 1896年 2月 結成되었다가 活動이 遲遲不進했던 김윤식 建陽協會 를 吸收하여 規模를 키웠다.

徐載弼은 政府 官僚들을 相對로 太宗 때의 申聞鼓 世祖 以後의 擊錚, 英祖 以後 復活된 申聞鼓 의 事例를 例로 들며 百姓들의 意見을 收斂할 機關이나 團體의 組織 또는 百姓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組織의 必要性을 力說하였다. 또한 申聞鼓는 아는 사람만 接近이 可能하고, 地方과 山골의 百姓들이 쉽게 接近할 수 없음을 들어 百姓들이 쉽게 接近할 수 있는 하나의 團體를 組織해야 함을 說明하였다. 이에 1896年 7月 2日 漢城府 에서 獨立協會를 結成하게 되었다.

獨立協會 討論會를 보기 위해 모여든 民衆들.

初期에는 知識人들과 士大夫 , 官僚들의 社交클럽과 時事 討論 形式으로 進行되었으나, 其他 士大夫와 中人層, 知識人層까지 참여시켰고, 以後 本來 設立 目的인 民衆 啓蒙을 위해 一般 百姓들도 集會에 참여시켰다. 白丁과 奴婢 等의 參與를 놓고 最初에는 論難의 餘地가 있었으나 徐載弼, 尹致昊, 이상재의 積極 支持로 白丁 奴婢 들도 參與하게 되었다.

協會는 1896年 7月 부터 1898年 12月 까지 西歐 文物 受容과 內政 改革, 民衆의 政治 參與를 要求했고, 列强의 主權 侵奪에 抵抗하였으며 支配層의 中世的 人權蹂躪의 狀況 속에서 主權 獨立 運動, 民權運動, 自强運動, 內政改革 等을 主張하고 活動을 展開해 나갔다.

設立者와 參加者 [ 編輯 ]

主要 設立者 [ 編輯 ]

獨立協會의 設立者 서재필

獨立協會 創立에 主導的인 役割을 하였던 사람은 안경수 , 서재필 等이었다. 이들은 所謂 開化派에 屬하는 人物들로서 特히 美國이나 러시아에 가까운 立場이어서 정동파 또는 外國人派 [1] 라고 불리었다. 이들은 淸國이 宗主權을 主張하던 時期에 穩健開化派의 半晴的人 立場에 있었으며, 따라서 甲午改革 에 參與하였다. [2] 그 밖에 이상재 , 윤치호 , 남궁억 等이 積極 參與하여 協會를 指導하였다. 獨立協會 綱領은 忠君愛國 (忠君愛國)과 民權爭取 , 自主獨立 , 國權回復 이며, 百姓의 人權 參政權 을 主張하던 開化派와 政府의 外勢依存政策에 反對하는 知識層의 參與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日本 이 保護菊花 政策을 推進하면서 疏外되었다는 主張도 있으나 [2] 反對로 안경수 等이 積極的으로 親日行爲를 했다는 主張도 있다. [3] 또한 이들은 朝鮮 에서 外勢가 均衡을 이룸으로써 國權을 維持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2]

參與 階層 [ 編輯 ]

初期의 獨立協會에는 開化派와 知識人層 外에 政府의 高官들도 會員으로 加入하였으나, 漸次 一般 百姓들의 參與도 擴大시키면서 百姓들도 地域 支會의 指導者로 이끌어 나가기도 했다. 漢城府 鍾路에서 처음 出帆된 以後 水原府 楊州郡 等의 據點都市에서도 開催되고 이어 地方으로도 擴散되어 全國 18度에 獨立協會의 支會가 組織되면서 協會는 全國的인 團體로 發展하였다. 이러한 地方 支會에는 知識人과 有力階層 外에도 民間人 出身 指導者들이 登場하였다.

獨立協會는 1896年 4月 出帆 初期부터 會員資格에 對해 制限을 두지 않았으므로, 地域으로 擴大되면서 社會的으로 賤待받던 階層까지도 參與하였다

活動 過程 [ 編輯 ]

設立 初期 [ 編輯 ]

迎恩門

1896年에 創立된 獨立協會는 本來 官僚들의 社交 團體로, 靑으로부터의 獨立을 記念하기 위한 獨立門 建立 推進委員會로 出發했다. 안경수, 李完用 等 이른바 '정동 俱樂部'라 불린 親美, 親러 性向의 官僚들이 主流를 이루었다. [4]

組織 [ 編輯 ]

서재필 殷 會長 職이나 委員長 職을 固辭하다가 이완용 全羅北道 觀察使 로 나가면서 會長 職을 떠맡게 되었다.

그 무렵 美國에서 돌아온 徐載弼은 順 한글 獨立新聞 을 發刊하여 啓蒙運動에 나섰는데, 獨立新聞은 獨立協會의 機關紙 <對朝鮮 獨立協會補> 못지 않게 忠實한 協會의 代辯紙 役割을 했다. [4]

出帆 初期 獨立協會는 百姓들이 自己 主張을 하고, 參政權 을 要求하려면 政府 官僚나 知識人과 討論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고, 政治와 內政 改革에 앞서 討論會와 演說會를 開催하였다. 많은 젊은이들을 모았으며 이러한 討論會와 演說會로 民衆啓蒙運動을 推進하였으며, 이 討論會와 演說會는 漢城府 에서 始作되었다가 漸次的으로 양주목 , 水原府 와 朝鮮 16度의 有力 大都市로 擴散되었다. 1896年 (高宗 33年) 2月 김윤식 甲午更張 主導勢力 50餘 人에 依해 結成되었다가 活動이 遲遲不進했던 建陽協會 를 吸收하여 規模를 擴散시켰다.

設立 初期 獨立協會는 迎恩門 (迎恩門) 자리에 獨立門을 세우고 慕華館을 獨立館 으로 改名하여 獨立精神의 象徵으로 삼았다. 1896年 11月 淸나라 使臣을 맞이하던 場所인 慕華館 (慕華館)을 改稱한 獨立館 으로 改稱하여 集會場으로 使用하였다.

本格的인 革新運動을 일으켜 全國 16度의 有力 地方마다 獨立協會의 支會(支會)가 생기고 젊은 知識人層과 基督敎 人들이 많이 參加하여 하나의 큰 勢力團體를 이루었다. 서재필 乙 週間으로 1896年 4月 7日 에 發刊된 獨立新聞 (獨立新聞)에 獨立協會의 立場과 討論 內容, 協會에 온 百姓들의 主張을 記事로 싣다가 徐徐히 獨立協會의 氣管支가 되어 啓蒙과 輿論喚起를 꾀하였다.

各 地方의 腐敗한 守令과 觀察使 및 地域 土豪, 有志들의 行爲, 一部 商人들의 賂物과 密賣, 密貿易 等을 摘發하는 한便 地域社會의 鄕班과 儒林, 土豪들의 弊端 等을 集會를 통해 示威하여 撤回시키거나 處罰하게 했다. 1897年 2月 에는 俄館播遷 以後 繼續 週 朝鮮 러시아 總領事館에 머물러 있던 高宗 에게 還宮할 것을 呼訴하여 이를 決行하게 하였다. 그러나 獨立新聞 을 통한 民主, 民權 思想의 普及活動이 큰 힘을 發揮하여 朝廷의 大臣들에 對한 彈劾運動 等 指導者의 政府에 對한 批判·非難이 激化되자 當時 會長으로 있던 이완용 全羅北道 觀察使 로 赴任한 것을 契機로 大多數 政府官僚 會員들이 脫退하였다. 이어 顧問으로 있던 서재필 李 會長이 되어 獨立協會를 運營하였다.

社會 改革, 啓蒙 運動 [ 編輯 ]

윤치호

1897年 中盤부터 協會는 漢城府 鍾路 에서 各界各層이 參加한 萬民共同會 를 開催, 主管하여 討論과 演說을 통해 百姓들에게 自己 主張을 펼치는 契機를 마련하였다. 이로써 討論과 雄辯 , 演說에 對한 것이 一般人에게 普遍化되기 始作하였다. 獨立新聞 과 協會의 活動을 危險要素로 여긴 戚臣과 皇帝派 大臣들이 서재필 을 攻擊하게 되면서 窮地에 몰렸고, 刺客까지 浸透하게 되자 結局 그는 떠나게 된다. 서재필 1898年 5月 協會를 윤치호 , 유길준 , 이상재 等에게 引受하고 濟物浦 港을 통해 朝鮮 에서 떠나게 되었다. 徐載弼이 追放되자 協會는 윤치호 , 이상재 等에 依해 指導되었다.

윤치호 가 會長이 된 以後로는 主로 靑年層에 對한 討論 活動과 天賦人權思想을 說明하는 것으로 活動이 縮小되었다. 이어 이상재 主導로 남궁억 , 李承晩 等 靑年層이 中心이 되어 運營되었고 美國 으로 追放된 서재필 은 本會員의 身分은 아니었지만 繼續 이들과 連絡하며 뒤에서 協會를 地圖, 後援하였다. 이때 外國人 拷問과 敎官 招聘을 猛烈히 反對하는 한便, 朝鮮人 留學生을 外國으로 派遣하여 直接 배워오게 할 것을 主張하였고 美國 人, 프랑스 人, 러시아 人, 日本 人들에 依한 地下資源 開發과 鐵道 事業 介入을 批判했다.

協會는 外國 勢力에 依한 地下資源 開發權 및 鐵道附設權 許容은 朝鮮 의 經濟를 外勢에 國家經濟를 隸屬시키는 結果를 가져온다며 이를 批判하고, 高宗 에게 이를 拒否하라는 上疏를 올렸다. 以後 政府는 朝鮮 人 軍隊에서 敎官과 助敎로 訓鍊을 擔當하던 日本 人 軍事顧問官과 러시아 人 軍事顧問官을 解任시켜 本國으로 돌려보내고, 한러銀行 (韓露銀行) 等도 閉鎖시켰으며, 外國人에 依한 金鑛開發 許可 規定 또한 制限하기 始作했다.

反러 開放, 自由主義 運動 [ 編輯 ]

獨立協會 法人 圖章, 윤치호 가 所藏하고 있던 것

1897年 中盤 獨立協會는 러시아 에 反對하는 立場으로 變貌했다. 李完用 等 親러派는 大擧 協會를 떠났다. 1898年 3月 獨立協會는 서울 鍾路에서 萬民共同會를 열어 러시아의 侵略을 激烈히 聲討하고 政府의 政策을 批判했다. 누구나 參與해서 自身의 意見을 發表할 수 있는 討論의 場, 萬民共同會는 朝鮮 民衆에게 아주 새로운 經驗이었다. [4] 以後 萬民共同會는 獨立協會와 無關하게 自發的으로 열리는 境遇가 많았다. [4]

獨立協會를 이끈 사람들은 市場開放을 통해 商業을 振興시키고 그를 바탕으로 工業과 農業을 발달시킨다는 構想을 갖고 있었다. [4] 이는 朴趾源과 박제가, 박규수, 劉大致, 吳慶錫 等의 重商主義 思想의 影響을 繼承한 것이었다.

獨立協會를 이끌던 時期에는 러시아와 그 同盟國 프랑스가 調整을 掌握하고 利權侵奪이 甚했기에 相對的으로 日本, 英國의 利權侵奪 危險性은 낮게 보았다.

政府, 社會의 對應 [ 編輯 ]

1895年 乙未事變 以後 高宗 이 身邊 安全을 理由로 1896年에 俄館播遷 을 斷行한 뒤, 駐 朝鮮 러시아 公使館 에 머물며 政務를 보며 決裁하였다. 知識人層과 一部 大臣들은 外國 公使館은 外國의 領土나 다름없으므로 國王의 還宮을 要請하였으나 默殺되었다. 이에 朝鮮에서는 러시아의 影響力이 커져 淸나라 , 日本 美國 勢力과 政治的인 對立을 하게 되었다. 獨立協會는 이러한 狀況을 批判하며 高宗의 러시아 公使館 滯留가 問題임을 指摘하고, 高宗의 還宮을 要求하여 성사시켰다. 朝鮮이 中立國이고 自主獨立權을 가졌음을 宣言할 것을 要求하였다.

1897年 부터 萬民共同會 (萬民共同會) 等을 開催하여 百姓의 政治 參與를 圖謀하고, 時局에 對한 '6個組 改革案'을 發表하였으며 政府의 腐敗限 官吏들을 彈劾, 糾彈하는 等의 活動을 推進해 나갔다. 百姓의 參政權 主張과 政治 參與 要求, 腐敗 또는 無能力한 政府 官僚들에 對한 彈劾이 繼續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親政府勢力과 大臣들은 獨立協會가 王을 몰아내고 共和政을 實施하려 한다는 所聞을 퍼뜨리고, 褓負商 等을 통해 이러한 所聞을 擴散시켰다. 또한 獨立協會 一角에서 提起된 立憲君主론 亦是 皇帝의 權威에 抵抗하는 行爲로 몰고 가기 始作하였다.

政府 高官들은 褓負商 들과 地域 兩班들을 中心으로 高宗 皇帝 를 支持하고 皇帝의 絶對君主權을 主張하는 皇國協會 를 結成케 하여 獨立協會와 對立시켰다. 皇國協會 會員들은 獨立協會의 示威나 集會 場所 周邊에 나타나 이들의 示威를 妨害하거나 獨立協會 幹部들에 對한 테러 및 流言蜚語를 流布하여 攻擊하였다. 君主에게 충성하는 것을 絶對的인 美德으로 여기던 性理學 者들 亦是 獨立協會의 參政權 主張과 民衆의 政治參與를 反逆으로 規定하였고, 衛正斥邪系列에서는 獨立協會의 西歐 思想과 文物의 受容論을 걸고넘어지게 되었다.

奴婢 解放 宣言 [ 編輯 ]

徐載弼의 歸國 直後부터 奴婢 解放問題를 相議하던 윤치호와 徐載弼은 1897年 10月 獨立協會와 萬民共同會 에 奴婢 解放 問題를 上程시키기로 計劃한다. 한便 윤치호와 徐載弼은 奴婢 들을 解放시킬 것을 決意하고 1897年 11月 1日 獨立協會의 討論에 奴婢制度가 必要한 것인가에 對한 輿論을 公論化시켰다.

1897年 11月 1日 의 第8回 討論會의 光景을 보면, 約 500 名의 會衆이 參席 한 가운데 먼저 會員의 呼名이 있었고 다음 至難會의 討論會 記錄의 確認이 있었으며, 來賓 紹介와 新入 會員 紹介가 있었다. [5] 徐載弼은 獨立協會의 會長에게 奴婢 解放에 對한 것을 建議하였고 11月 1日 獨立協會 會議의 主題로 採擇된다. 이날 討論會의 主題인 '同胞 兄弟間에 男女를 팔고 사고 하는 것이 義理上 에 대단히 不可하다'를 宣言하였다. 이에 따라 贊成便은 힘껏 主題의 正當性을 說明하고 反對便은 討論이 잘못된 方向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發言을 했으며 討論會에 參席한 一般 會衆은 討論 에 자유롭게 討論하였다. [5]

이 中 한 發言者가 用役은 '하나의 必要한 制度이며 奴婢 制度 (奴婢制度)는 그러한 用役의 하나라고 發言하자, 會中의 하나가 일어서서 討論者가 命題를 正確히 말하고 있지 않다고 醫師 規則 違反을 들어 抗議 했으며 많은 會員들이 主題의 贊成便에 서서 發言하였다. 1897年 11月 1日 尹致昊는 奴婢制度의 弊害와 非人間性을 具體的 事例를 들면서 說明하는 演說 을 하고 徐載弼은 美國 에서의 아프리카 黑人 奴隸 들의 慘狀을 들어 說明하였다. [6]

다음으로 主題에 對한 會中의 意見을 投票에 붙인 結果 滿場一致로 主題에 對한 贊成이 議決되었으며 主題에 贊成한 사람은 自己가 實際로 所有한 奴婢를 모두 解放시키도록 하자는 同意가 可決됨으로써 討論會를 끝내었다. [6] 獨立協會의 決意에 따라 漢城府의 兩班 가에서는 奴婢文書를 불태우고 奴婢들을 석방시키는 이들이 나타나기 始作하였다.

當時 參觀者에 依하면 討論이 매우 진지 하였으며 土른 會議 結果 100名 以上의 奴婢들이 自發的으로 解放되었다고 斷言할 수 있다고 한다. [7] 윤치호와 徐載弼은 各各 人間은 物件이 아니며 財産이 되어서는 안된다, 人間의 生命은 하늘이 附與한 것이라고 力說하고 다녔다. 市中에서는 이들의 思想을 危險한 思想이며 班常의 秩序를 무너뜨리는 駭怪한 妖說, 詭辯으로 取扱하였다. 그러나 1897年 11月 1日 의 奴婢解放에 對한 奇襲 討論 以後 奴婢 解放 風潮가 漸次的으로 擴散되었다.

議會 樹立運動, 守舊派와의 對立 [ 編輯 ]

1898年 11月 2日 새로운 中樞院 管制가 發表되었다. 大韓民國 最初의 議會 設立案이었다. 中樞院 議官 50名 中 半數(25名)는 政府가 國家에 功勞 있는 者를 薦擧하고 半數는 獨立協會에서 27歲 以上의 政治, 法律, 學識에 通達한 字로 投票 選擧 하게 되었다. 獨立協會와 서울 市民들은 歡呼聲을 질렀다. [8]

獨立協會는 11月 5에서 選擧하기로 했다. [8] 그런데 11月 5日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巡檢들에 依해 副會長 李商在를 비롯하여 獨立協會 幹部 17名이 逮捕되었다. 會長 尹致昊는 逮捕 直前 몸을 避했다. [8] 官民共同會에 參席했던 박정양 以下 政府 官僚들도 解任되고 代身 조병세(趙秉世), 조병식(趙秉式), 박제순, 민영기(閔泳綺) 等이 그 자리에 앉았다. 守舊派가 다시 政權을 잡은 것이다. [8]

選擧 前날, 守舊派는 獨立協會가 立憲君主制가 아닌 共和制를 하려 한다며 皇帝를 몰아내고 大統領에 박정양, 副統領에 윤치호, 內部大臣 이상재, 外務大臣 精巧(鄭喬) 等으로 政權을 쥐려 한다는 匿名書를 거리에 내다붙였고, 匿名書에 놀란 皇帝가 獨立協會 幹部 逮捕令과 協會 解散令을 내렸던 것이다.

激忿한 萬民共同會 總代委員人 [9] 李承晩 은 앞장서서 徹夜 籠城을 벌였고 날이 밝자 大規模 萬民共同會 를 召集하여 事件 經緯를 解明하라고 要求했다. [10]

여러분! 只今 이 警務廳 안에는 우리들 獨立協會의 同志들이 갇혀 있습니다. 侵略해 들어오는 外國 勢力을 防止하고 慶尙道의 한 쪽이 러시아의 손아귀에 들어가려 할 때에 盜壘 찾아낸 우리들 獨立協會員들의 功績과 事業은 여러분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자리에서 바로 萬民共同會를 다시 열어 代表를 뽑아서 警務廳에 交涉하고 우리 同志들을 한時바삐 빼내어 기울어져 가는 내 나라의 運命을 건지도록 합시다! [10]

以後 지나던 群衆들은 한 사람씩 모여들어 警務廳 앞은 文字 그대로 人山人海를 이루게 되었고 群衆은 李承晩 에게 그를 萬民共同會의 代表者로 選定하고 逮捕된 獨立協會원의 釋放을 正式으로 警務使에게 要求할 것을 그에게 付託하였다. [11] 그러나 警務使 金正根 은 面會 온 李承晩에게 "빨리 解散하라"는 말만 反復할 뿐이었다. [11]

그 날 저녁 警務廳에 갇혔던 17人의 同志는 平理院 [12] 으로 옮기어 갔다. 李承晩 은 다시 群衆을 이끌고 平理院 앞으로 몰려가서 그곳에 모닥불을 피우고 밤을 밝혀가며 釋放을 외쳤고 [13] 政府는 한 떼의 북을 울리는 暴力輩들을 動員하였지만 저들을 制壓하기엔 力不足이었다. [14] 王은 正式 勅使로 민영환 을 共同會長에 보내 鍾路의 한구석에 遮日을 치고 단(壇)을 모으게 한 다음 王의 調書를 公布하게 하였다. [14]

結局 11月 10日 逮捕된 17名 全員이 釋放됐다. 이 事件으로 李承晩 은 長安의 一躍 스타로 데뷔하게 된다. [15] [16] [17] 李承晩 과 같은 開化勢力 內에서도 急進的인 者들은 成就感에 取해 이 氣勢를 몰아 다른 것도 더 얻어낼 心算으로 示威를 멈추지 않고 持續하였다. [8] [18] 甚至於 王이 居住하는 러시아 公使館의 大漢門 앞까지 몰려가 '獻議 6兆 實施'를 要求했고 [8] 匿名書를 造作한 조병식, 이기동(李基東) 等의 處罰, 獨立協會 復活 等을 要求했다. [8]

政府와의 葛藤과 解體 [ 編輯 ]

1898年 10月 鍾路 네거리 廣場에서 開催한 萬民共同會 에서 '6個組 改革案'을 決意하고 그 實行을 高宗 에게 奏請하였다. 時局에 關한 6個 弔意 改革案을 皇帝에게 建議하는 等 革新運動을 展開하던 中 마침내 保守的인 政府와 衝突을 일으키게 되었다. 高宗 은 처음에 時局 6個組 改革案의 實行을 約束하였으나 政府 大臣들이 利權에 눈이 어두워 約束한 지 며칠이 지났으나 履行을 拒否하였다. 協會에서는 政府 批判과 大臣들 彈劾의 외침이 繼續되었고 代身들이 彈劾되어 罷免, 政府 首腦級은 不安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政府는 御用團體人 皇國協會를 통해 皇國協會를 支持하는 千餘 名의 褓負商 들을 動員, 漢城 에 불러들여 獨立協會를 襲擊했다. 皇國協會 의 使嗾를 받은 褓負商 數千 名은 獨立協會 會員들에게 테러를 加하게 하여 流血事態를 빚었다. 興奮한 民衆은 政府 大臣들의 집을 襲擊하는 等 騷亂을 일으키게 되었다. 여기에 김덕구 라는 靑年이 청파골에서 부상배에게 맞아 죽는 事態가 發生하자 獨立協會에서는 일부러 大漢門 앞에서 그의 葬禮式을 지내어 공동회의 群衆으로 하여금 한層 더 氣勢를 올리는 行態까지 恣行하였다. [19] 이어 政府에서는 皇國協會와의 衝突을 問題 삼아 1898年 獨立協會의 解散을 建議한다.

1898年 11月 民衆들의 政府 代身 彈劾에 高宗 은 不得已 內閣을 改編하고 兩 協會 代表者에게 그들의 要求를 모두 受容할 것을 約束하고 解散을 命하였다. 皇帝는 勅令으로 洋灰의 解散을 命令하였다. 그러나 協會는 해산되지 않았고, 同年 11月 朝廷의 重臣은 '獨立協會가 皇帝를 廢하고 共和制 를 實施하려 한다'고 無故하였고, 政府의 外郭團體인 皇國協會 亦是 獨立協會의 皇帝 廢位說과 共和政 樹立說을 流布시킨 뒤 이를 根據로 이상재 , 윤치호 , 남궁억 等을 彈劾하여 獨立協會를 瓦解시켰다.

12月 25日 高宗은 軍隊를 動員하여 萬民共同會를 强制解散시키고 獨立協會를 永久히 不法化했다. [4] 그後 協會는 1年餘 肝을 더 存續하다가 1899年 12月 解散되었다. 獨立協會에서 開設한 萬民共同會 1900年 까지 存續하였다. 그 後 獨立協會에서 推進하려던 民權 運動과 民衆의 參政權 要求 主張은 大韓自彊會(大韓自?會)와 大韓協會(大韓協會)로 繼承되었다.

內容別 主要 活動 [ 編輯 ]

獨立協會의 첫 事業은 參政權 運動과 民權 運動 으로 百姓들이 自己 목소리를 내고, 自己 權利를 主張하게 하는 것이었고, 두 番째 事業은 自主國權 運動으로 淸나라 隸屬에서 脫皮하는 것이었다. 淸나라 를 宗主國으로 認定하는 것을 拒否하고, 朝鮮 이 自主 獨立國 또는 零細 中立國임을 對內外에 闡明하며, 各種 公文과 書籍에서 淸나라 年號를 撤廢하며, 獨立의 象徵인 獨立門 建立과 獨立公園 造成을 비전으로 提示하였다.

獨立協會는 朝鮮이 淸나라 로부터 獨立함을 記念하는 獨立門 을 建立하였다. [3] [20] 이때 獨立門 建立에 쓰일 誠金을 낸 사람은 王室 人士와 高位 官僚, 職業을 알 수 없는 많은 國民이었다. 그들에게는 獨立協會 會則에 따라 會員의 資格이 주어졌다. [2] 그밖에 雜稅 收奪의 禁止, 도고 權의 廢止, 이들의 政治 參與의 機會 附與 等을 推進하였다. [2]

이러한 活動은 크게 자주 國權, 自由 民權, 自强 改革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21] 自由 民權 運動을 통해 國民의 基本權 報狀을 主張하는 한便, 議會 制度의 導入을 主張하여 中樞院 을 設立하여 民衆 代表를 政治에 參與하게 하였고, 外國人의 金鑛採掘權 과 政府 政策에 介入하는 問題 等 列强의 利權 侵奪을 强力히 糾彈하는 國權 守護 運動을 벌였다.

자주 國權 運動 [ 編輯 ]

獨立協會는 利權 侵奪에 反對하였고, 外國의 힘에 依存하지 않고, 自己의 힘으로 自主國權 을 굳게 지켜야 함을 主張하였다. [2] [21] 이에 外勢가 政府 政策에 介入하는 것과 外部 勢力의 金鑛 및 石炭 採掘權 許可가 쉬운 點 等을 批判하여 是正하게 했다.

이 過程에서 外國 勢力에 利權 讓渡를 許可한 이완용 을 協會 會員에서 除名處分해버리기도 한다.

細部 活動 [ 編輯 ]

批判 [ 編輯 ]

그러나 이들이 實踐한 方案은 市場 開放과 投資 誘致를 통한 列强의 朝鮮에 對한 利害關係를 重疊시킴으로써 그 勢力 均衡에 依한 朝鮮의 主權이 維持되는 “ 保護中立論 ”이었다는 限界를 지닌다는 主張이 있다. [2] 保護 中立 期間 동안 自强 改革을 통해 國力을 確保하려 했기에 木浦 增南浦 의 罵倒는 反對하였지만 個項에는 贊成하게 된다. 또한 全體的으로 日本에 親和的인 立場을 堅持하였다.

自由 民權 運動 [ 編輯 ]

獨立協會의 個人의 生存權 財産의 自由權 , 言論과 集會의 自由權과 國民의 平等權 을 主張하였다. [2] [21] [22] 이를 實現하기 위해 國民 參政權 을 主張하였으며, 그 實現을 위해 西歐式 議會 設置를 提議하였다. [2] [21] [22]

細部 活動 [ 編輯 ]

議會 設立 運動 [ 編輯 ]

獨立協會는 1896年 부터 議會 制度의 導入을 主張하여 中樞院 을 設立하여 民衆 代表를 政治에 參與하게 하였다. 協會는 百姓이 政治에 參與하는 것이 當然한 것을 力說했고, 少數 門閥에 依해 獨占된 政府 高位職에 平民 出身의 任命 要求와 政府 政策에 百姓들이 參與하여 可否를 論하거나 修訂하게 하는 等 參政權 을 許容할 것을 要求했다. [2] [21] [22] 西歐式 議會 導入을 통해 民衆 代表의 政府 政策 監視와 腐敗 官僚, 無能한 官僚의 逐出할 權利를 附與할 것 等도 追加的으로 要求하였다.

細部 活動 [ 編輯 ]

自强 改革 運動 [ 編輯 ]

朝鮮 스스로 强國이 되기 위해서 對外的으로는 中立化를 宣言하고 零細中立國火 할 것을 主張하였다. 또한 民衆을 啓蒙하기 위해 新聞 等 言論 活動을 許諾하고 積極 奬勵할 것과 自由 民權 運動을 實現하기 위한 國民 參政權 을 主張하였으며, 그 實現을 위한 하나의 代案으로 西歐式 議會 設置로 보았다. [2] [21] [22] 그러나 皇帝의 謹愼들은 이를 두고 獨立協會가 共和政 樹立 陰謀를 꾀한다는 陰謀論을 流布하고 그 根據로 삼는 原因이 된다.

細部 活動 [ 編輯 ]

  • 1894年 3月: 議會 設立 運動 을 展開.
  • 1898年 10月: 保守派 內閣을 退陣시키고 改革 內閣을 樹立하였고 官民 共同會 를 開催하여 獻議 6條를 採擇하였다.

獻議 6兆 [ 編輯 ]

獻議 6條는 1898年 獨立協會에서 大韓帝國 政府에 提出한 決議文이다. 內容은 다음과 같다.

1.外國人에게 依支하지 말고 官吏와 百姓들이 마음을 함께하고 힘을 합쳐 專制 皇權을 굳건히 한다.
2. 鑛山 , 鐵道 , 石炭, 山林 및 次官, 차병은 政府가 外國人과 條約을 맺는 것이니, 萬若 各 部의 大臣들과 中樞院 議長이 合同하여 署名하고 捺印한 것이 아니면 施行할 수 없다.
3.全國의 財政은 어떤 稅金이든지 莫論하고 모두 다 度支部 에서 管轄하고, 다른 部와 部 및 私的인 會社에서 干涉할 수 없으며, 豫算과 決算을 사람들에게 公布한다.
4.이제부터 重大한 犯罪에 관계되는 것은 特別히 公判 을 進行하되 被告에게 徹底히 說明해서 마침내 被告가 自服한 後에 刑을 施行한다.
5. 勅任官 은 大皇帝 陛下가 政府에 諮問해서 過半數의 贊成에 따라 임명한다.
6.規定을 實地로 施行한다.

獨立協會는 裁判의 公開化와 裁判結果의 公開, 透明性을 要求하였다. 이 規定이 받아들여져 義禁府 에서 非公開로 審問하던 것이 公開 裁判化 되고, 記者들을 통해 報道하게 되었다.

詔勅 5兆 [ 編輯 ]

詔勅 5兆 1898年 大韓帝國 光武 2年 高宗 이 獨立協會의 要求에 副應하여 獻議 6條를 補完하는 詔勅이다. 詔勅 5兆 의 前文은 다음과 같다.

1. 諫官을 廢止한 後 言路가 막혀 上下가 힘쓸 것을 勸하고 가다듬을 것을 깨우치는 뜻이 없게 된 만큼 中樞院 에서 빨리 壯丁을 定하여 實施할 것이다.
2. 各 項目의 規則은 이미 한결같이 定하였으니, 各 回와 新聞 亦是 訪韓이 없을 수 없다. 會規는 議政府 中樞院 에서 參酌해서 時期에 알맞게 하여 新聞 條例를 財政하고 內部 農商工部 에게 各 國의 規例에 依據하여 裁定하여 施行할 것이다.
3. 觀察使 以下 地方 官吏와 地方 部隊 長官들은 現職에 있건 交替되었건 間에 官廳의 財物을 空짜로 가진 者가 있으면 長律(에 關한 法條文에 따라 施行하며, 百姓들의 財産을 빼앗은 者는 낱낱이 모두 본 임자에게 챙겨 넘겨준 다음 法條文 을 適用하여 懲戒 處決할 것이다.
4. 御史 나 視察員( 等이 弊端을 빚어낸 것에 對해서는 본 고장의 百姓들에게 內部 法部 에 가서 告訴하도록 해서 事實을 調査하고 懲戒하여 罪를 다스릴 것이다.
5. 商工學校를 設立하여 百姓들의 産業을 奬勵할 것이다.

商工學校 設立과 管理의 官公署 物品 私的 有用 禁止 條項에 共感한 高宗은 詔勅 5兆 亦是 積極 受容하였다.

批判 [ 編輯 ]

獨立協會에서 國民 參政權을 主張했다는 데에는 反論이 있고, 또한 西歐式 議會 設立 運動이 國民 參政權의 實現 方案이라는 데에도 疑問이 있다. [2]

獨立協會에서 提議한 議會 制度는 美國의 共和政 도, 英國의 立憲君主制 도 아닌 獨逸과 日本의 外見的 立憲君主制였다. 이는 獻議 6條의 第1條(“前提 皇權을 鞏固히 할 것”)에도 나타나 있고 [2] 敎科書 [21] [22] 에서 말하는 “專制 皇權의 制限”과는 距離가 있었다. 그러나 實際 適用에서는 外見的 立憲君主制가 아닌 英國의 立憲君主制를 志向함으로써 [3] 敎科書에 나타난 대로 專制 皇權을 制限하려고 함으로써 高宗 및 保守派와 葛藤을 빚는다.

또한 이들이 主張한 中樞院의 改編은 國民 參政權과는 距離가 멀었다. 獨立協會에서는 오히려 朝鮮 民衆은 無知하여 政治에 參與할 能力이 없다고 分明히 前提하였으며 朝鮮보다 훨씬 앞선 日本도 하지 못하는 것을 朝鮮이 어떻게 하겠느냐고 揶揄하였다. 그들의 構想은 改名 官僚의 政治 過程 參與를 위한 制度的 裝置의 마련이며, 中樞院 議官의 半數를 獨立協會가 차지했음은 그러한 脈絡이다. [2] [3]

沒落과 解體 [ 編輯 ]

이들은 朝鮮 이 零細中立國을 標榜해야 하고, 朝鮮에서 여러 外勢가 均衡을 이룸으로써 國權을 維持해야 한다는 立場을 갖고 있었다. 獨立協會는 어느 外國 勢力의 便도 들어주지 않았고 反對로 러시아, 淸나라, 日本 等 列强의 朝鮮 利權 侵奪行爲에 對한 批判으로 오히려 이들 勢力의 牽制를 받아 沒落하게 된다. 獨立協會의 民衆 參政權과 政治 參與 主張을 못마땅하게 여긴 保守勢力들은 高宗에게 獨立協會가 王政을 廢止하고 共和政을 實施하려 한다고 謀陷해 왔고, 1898年 初부터는 박정양 大統領 설, 윤치호 副統領 설, 윤치호 大統領 說 等을 市中에 퍼트리기 始作하였다.

1898年 7月 안경수 가 現役, 退役 軍人 들을 買收하여 皇帝 兩位를 計劃하다가 失敗하였고, 또 9月에는 流配되어 있던 김홍륙이 車에 毒藥을 타는 事件이 發生하는 等 高宗 을 威脅하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23] 高宗 에 對한 繼續된 威脅은 高宗 으로 하여금 獨立協會나 萬民共同會 에 對한 疑心을 품게 한다. 그 무렵 獨立協會 會員들을 中心으로 萬民共同會가 만들어져 猛烈하게 自由 民權 運動을 展開하고 있었다. 그러나 高宗 褓負商 과 軍隊의 힘을 빌려 이들을 鎭壓하게 [23] 된다.

1898年 , 所謂 匿名書 事件 이 發生한다. 이 事件은 獨立協會와 守舊派 사이에 對立이 深化되는 가운데 獨立協會에서 中樞院 官制 改編 을 試圖하려 했을 때, 새로 政權을 掌握한 조병식 等 守舊派가 獨立協會 官民共同會 人士들을 謀陷하기 위해 “獨立協會가 王政을 肺外하고 共和國 을 세우려고 한다.”라는 거짓 報告를 올렸던 事件이다. 이 報告는 뒷날 守舊派에 依한 造作으로 誣告로 判明되었지만 高宗 은 이를 根據로 獨立協會에 解散 命令을 내리고 이상재 , 남궁억 等 獨立協會 主要 人士 17名을 拘束했다. [24]

1898年 11月 5日 以後 李承晩 을 中心으로 한 배재學堂 學生들은 匿名書 事件 眞相 糾明과 關聯者 處罰과 ‘獻議 6兆’와 ‘詔勅 5兆’의 實踐 및 獨立協會의 附設과 皇國協會 의 行動 勢力이었던 褓負商 革罷 等을 要求하며 約 50餘 日間 景福宮 앞에서 상소 運動을 통한 政治 鬪爭을 벌이기 始作했다. 結局 拘束되었던 17名을 釋放되었으나 이에 滿足하지 않고 박영효 等을 大韓帝國 中樞院 議官으로 薦擧하는 等 國王과 守舊勢力에 對한 壓迫 水位를 높여 나갔다. [25] [26] 高宗과 保守 勢力은 12月 25日 에 民會 金押領을 내려 民會 活動을 禁止했고, 이로써 獨立協會는 事實上 解體되었다. [24]

主要 活動 人物 [ 編輯 ]

評價와 批判 [ 編輯 ]

評價 [ 編輯 ]

獨立協會는 淸나라 等 中國의 隸屬下에 있던 것과 列强의 影響力을 批判하여 자주 獨立을 主張한 것과, 百姓들의 權利를 確立하며, 百姓들의 人權을 最初로 主張한 點과 政治 參與를 最初로 主張했다는 點이 높이 評價된다. 改革을 통해 나라를 富强하게 하는 것을 目標로 하였다. 獨立 協會는 外勢의 朝鮮 政治 介入을 批判하고 象徵的인 存在인 獨立門 의 建立을 推進했으며 1898年에는 萬民 共同會를 開催하여 革新的인 改革 政治를 要求하였다. 朝鮮 이 滅亡한 뒤에도 獨立協會는 逆賊集團으로 取扱되다가 大韓民國 樹立 後인 1960年 代부터 民衆의 參政權과 民權 思想을 鼓吹한 點에 對한 點이 注目되면서 肯定的인 評價가 나타나기 始作하였다.

19世紀末 韓半島를 둘러싼 列强의 勢力均衡이 이루어졌던 時期에, 自主國權·自由民權·自强改革의 思想을 가지고 獨立協會가 推進한 民族主義·民主主義·近代化運動은 後에 日帝時期의 獨立運動과 國民國家 樹立運動의 內的 推進力이 되었다. [27]

批判 [ 編輯 ]

獨立協會 會員들은 如前히 動搖하고 있다. 하지만 나를 가슴 아프게 만드는 것은 一般 對中 의 可恐할 만한 無關心이다. 大衆은 이 鬪爭을 獨立協會 會員들과 政府 의 私的 紛爭으로 看做한다. 몇 百 年 동안 奴隸 狀態에서 抑壓받아온 이 아이들은 '獻議六曹'가 國家와 國民 모두의 利益과 關聯된 것이라는 事實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런 國民한테 希望을 갖다니, 우리가 더 바보였다. 이나 國民 이나 모두 똑같다!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은 奴隸狀態 뿐이다!
?  尹致昊 日記 , 1899年 6日 (陰曆 23日) 日曜日

獨立協會의 指導그룹은 極甚한 社會進化論과 愚民官 [28] 에 사로잡혀 있었고 民衆의 支持를 얻는 데에도 疏忽했다. 甚至於 自身들과 같은 階層인 庶民 地主, 窯戶와 富農 및 思想인(私商人, 自由 商人)李 獨立協會 活動에 參與하려고 要請한 支會 設立조차 매우 消極的이었으며, 解散되機 얼마 前에야 그 要請을 받아들였다. [2]

또 獨立協會의 反外勢運動이 러시아 와 그 同盟國이었던 프랑스 等에 局限되었다는 批判도 있다. [2] 이는 李承晩 의 言及에서도 仔細히 알 수 있는데, 李承晩은 1912年 執筆한 自身의 自敍傳 日記에서 배재學堂 을 다니던 中 自身이 日本의 아시아主義 에 傾倒되었던 緣由가 日本에서 資金이 들어와 協會員들을 買收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回顧한다.

그러나 그때에도 보이지 않는 陰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特히 日本人들은 猛烈한 工作을 展開하고 있었다. 그들은 日本으로 亡命했던 開化黨을 利用해서 樞密院 안의 獨立協會 出身 議員들과 손을 잡으려고 努力하였다. 日本人들은 우리 獨立의 참다운 協力者인 듯이 假裝하고 러시아, 中國 그리고 西洋의 帝國主義者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日本의 協助가 必要하다고 力說하였다.

多數의 亡命客들은 日本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와서 돈을 물쓰듯 써가면서 樞密院 議員들을 待接했다. 李承晩 은 너무나도 어리고 經驗이 不足했기 때문에 그들의 目的과 그 돈의 出處를 充分히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이 亡命客들과 東亞人(東亞人)의 團結을 促求하는 大東亞合倂(大東亞合倂)의 構想에 關하여 祕密裏에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 計劃은 훨씬 뒤에 부르짖게 된 日本의 大東亞共榮圈 (大東亞共榮圈) 計劃의 前奏曲이었다. 日本에서 돌아온 亡命客들은 次次 러일戰爭 計劃을 밝히기 始作하더니 다음에는 美日戰爭 을 일으키려는 計劃을 말하였다. 日本은 西洋의 列强이 極東을 侵犯하려는 것을 防禦하기 위하여 最善을 다하고 있다고 主張하였다. 따라서 中國과 우리도 이 성스러운 일 에 合勢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ㅡ 李元淳. 《人間 李承晩》, 1965, 新太陽社, p. 68.

같은 時期 安重根 도 비슷한 世界觀을 共有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日本은 이미 오래前부터 緻密한 宣傳을 통해 朝鮮人들을 自身들의 願하는 方向으로 끌고갈 準備를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當代의 批判 [ 編輯 ]

經難錄(經亂錄)을 지은 이범석(李範奭, 1862~?)은 獨立協會를 倫理 綱常 을 蔑視하고, 賃金과 父母를 無視하는 者들, 밤낮으로 騷亂피우고 집을 부수는 못하는 짓이 없는 무리들로 規定하였다. 李範奭에 依하면 '여러 선비들의 새로운 모임이 出現하기 始作하였는데, 民權黨(民權黨)이라고 稱하면서 獨立協會(獨立協會)라고 이름 하였다. 數千 名이 鍾路 및 闕文 밖에서 모여 演說하고 討論하였는데 倫理江上을 蔑視하고 임금과 어버이를 無視하는 일이 아님이 없었다. [29] ' 하였고, 또 이들은 '밤낮으로 騷亂을 피우고 各 大臣의 家宅 을 부수는 等 그 行動이 못하는 짓이 없을 程度였다. [29] '라고 典型的인 儒敎的 觀點에서 批判하였다.

최익현 은 獨立協會의 活動을 두고, 特定 勢力이나 個人이 政府의 高位層에게 壓力을 行使하거나 利權을 要求하거나 할 것을 내다보았다. 崔益鉉은 '本人은 外國에는 所謂 自由議員(自由議員)과 國民의 權利를 위한 民權黨(民權黨) 또는 民權至當(民權之黨)이 있으며, 國民이 그들의 指導者를 自發的으로 選出하는 實例가 있다고 들었다. 이들 政黨員(黨人)들이 이미 그들의 政府 代身(大臣)들을 되풀이해서 脅迫하고 逐出해낸 일이 여러番 있었은즉, 그들은 目的達成을 위해 그 어떤 일을 망설이겠는가? 이들 追從者들이 나라에 對한 眞正한 忠誠心과 祖國愛를 지니고 있다고 假定할지라도 그들을 道理(道理)로 생각할 때에 우리들은 그들이 自己네의 計劃들을 持續하게끔 放置할 수 없다. [30] '고 하였다. 또한 '더군다나 그들은 아무렇게나 모여든 새들의 무리와 같고, 紀律(紀律)없는 暴徒들과 같다. 그들이 어떻게 國家를 統治하는 올바른 길을 알 수 있겠는가,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脅迫한 그들의 罪는 어떻게 容恕받을 수가 있겠는가? [30] '라고 指摘했다.

최익현 獨立協會 에 對해서는 上疏文에 市政(市井)의 無識한 무리들을 불러 모은 것으로서, 苟且하게 牌거리를 糾合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다는 名分을 빌려서 代身(大臣)들을 멋대로 命하여 오라 가라 하고 임금을 指摘하여 탓하며 나라의 政丞을 凌辱한다고 批判하기도 했다. 白丁 박성춘의 演說이 있자 牌거리들의 作黨이라며 이를 批判하였다.

關聯 書籍 [ 編輯 ]

  • 康俊晩, 《韓國 大衆媒體史》 (人物과사상사, 2007)
  • 서희경, 《大韓民國 憲法의 誕生- 韓國 憲政史 萬民共同會에서 制憲까지》 (創批, 2012)
  • 이황직, 《獨立協會 討論共和國을 꿈꾸다》 (圖書出版 프로네시스, 2007)
  • 윤성렬, 《道袍입고 ABC 갓 쓰고 맨손體操:新文化의 發祥地 배재學堂 이야기》 (학민사, 2004)
  • 이종각, 《刺客 고영근의 명성황후 復水器》 (동아일보사, 2009)
  • 이정식, 《李承晩의 舊韓末 改革運動》 (배재대學校出版部, 2005)
  • 尹孝貞, 《大韓帝國아 亡해라》 (박광희 驛, 茶山草堂, 2010)
  • 김영희, 《佐翁 윤치호 先生 藥典:윤치호選集 2》 (佐翁윤치호文化事業委員會, 1999)
  • 康俊晩, 《韓國 近代史 散策 3》 (人物과사상사, 2007)
  • 강만길, 《고쳐 쓴 韓國近代史》 (창작과비평사, 2006)
  • 김남수, 윤종배 外, 《100年 前의 韓國史》 (휴머니스트, 2010)
  • 신동준, 《開化派 列傳》 (圖書出版 푸른역사, 2009)
  • 이근호, 박찬구 外, 《韓國史를 움직인 100代 事件》 (청아출판사, 2011)
  • 이광린, 《韓國文化史:近代便》 (圖書出版 일지사, 2001)
  • 윤치호, 《尹致昊 日記 1916~1943》 (김상태 便역, 人物과 思想史,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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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歷史學硏究所, 《바로 보는 우리 歷史》(서해문집, 2004)
  • 박현모, 《正祖 事後 63年》 (創批, 2011)
  • 崔起榮, 《徐載弼이 꿈꾼 나라》 (푸른역사, 2010)
  • 신용하, 《獨立協會와 開化運動:敎養國史叢書 2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
  • 강재언, 《新編 韓國 近代史 硏究》 (圖書出版 한울, 1995)
  • 강재언, 《韓國近代史硏究:한울叢書 1》 (圖書出版 한울, 1992)

參考資料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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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영신, 〈獨立協會 指導勢力의 象徵的 意識構造〉, 慶熙大學校 私學回, 《東方學地 20》 (경희대학교 私學回, 1978)
  • 신용하, 〈獨立協會의 議會民主思想과 議會建立運動〉, 서울大學校社會科學硏究所, 《韓國社會의 變動과 發展》 (범문사, 1985)
  • 신용하, 〈19世紀 韓國의 近代國家形成問題와 立憲共和國 樹立運動〉, 韓國史學會, 《한국사회학회論文集1》 (韓國史學會, 1986)
  • 신용하, 《獨立協會 硏究》 (일조각, 1976)
  • 이 文書에는 서울硏究院 에서 公共누리 第1類型 으로 配布된 資料를 바탕으로 한 內容이 包含되어 있습니다.

各州 [ 編輯 ]

  1. 이완용 은 初期에 親日派가 아니라 친 美國 敵, 친 러시아 敵 志向의 人物이었다.
  2. 주진오 (1993). 〈敎科書의 獨立協會 敍述은 잘못되었다〉. 歷史問題硏究所 篇. 《바로 잡아야 할 우리 歷史 37場面 1》. 역사비평사. 31~40쪽쪽.  
  3. 이태진 (2000年 8月 30日). 《高宗時代의 再照明》 初 2刷판. 서울: 太學士. 32~92쪽.쪽. ISBN   89-7626-546-7 04910 |isbn= 값 確認 必要: length ( 도움말 ) .  
  4. 박은봉, 《韓國史 100場面》 (嘉藍企劃, 1993) 270페이지
  5. 신용하, 《獨立協會 硏究 (上)》 (일조각, 2006) 330페이지
  6. 신용하, 《獨立協會 硏究 (上)》 (일조각, 2006) 331페이지
  7. 三歸文化史, 《韓國近現代史論文選集 開花(10)》 (三歸文化史, 2002) 58페이지
  8. 윤치호, 《國譯 尹致昊 日記 4》 韓國史데이터베이스
  9. 獨立新聞 (1898年 5月 5日). “光武 이년 四月 三十日 萬民 共同會 總代委員 최정식 정항모 李承晩 諸氏가”.  
  10. 徐廷柱. 《미당 서정주 全集 19 : 金佐鎭 將軍箭, 雩南 李承晩全》 2017板. 銀杏나무. p. 338쪽.  
  11. 徐廷柱. 《미당 서정주 全集 19 : 金佐鎭 將軍箭, 雩南 李承晩全》 2017板. 銀杏나무. p. 339쪽.  
  12. 現 高等法院
  13. 許政. 《雩南 李承晩》 1970板. 太極出版社. p. 62-74쪽.  
  14. 徐廷柱. 《미당 서정주 全集 19 : 金佐鎭 將軍箭, 雩南 李承晩全》 2017板. 銀杏나무. p. 340-341쪽.  
  15. 獨立新聞 (1898年 3月 12日). “三月 十日 午後 두時에 죵로에서 萬民 共同會가”.  
  16. 每日新聞 (1899年 1月 24日). “法部에서 高等 裁判所에 訓令하기를”.  
  17. 獨立新聞 (1899年 1月 13日). “傾聽 所聞”.  
  18. 徐廷柱. 《미당 서정주 全集 19 : 金佐鎭 將軍箭, 雩南 李承晩全》 2017板. 銀杏나무. p. 342쪽.  
  19. 徐廷柱. 《미당 서정주 全集 19 : 金佐鎭 將軍箭, 雩南 李承晩全》 2017板. 銀杏나무. p. 343쪽.  
  20. 주진오 (1993). 〈敎科書의 獨立協會 敍述은 잘못되었다〉. 歷史問題硏究所 篇. 《바로 잡아야 할 우리 歷史 37場面 1》. 역사비평사. 33쪽쪽. 獨立協會는 但只 獨立門을 建立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推進委員會의 性格을 지닌 것이었다.  
  21. 김한종; 홍순권, 김태웅, 이인석, 남궁원, 남정란 (2004年 3月 1日). 《高等學校 韓國 近·現代史》. 서울: 금성출판사. 84~89쪽쪽.  
  22. 國史 編纂 委員會; 國政 圖書 編纂 委員會 (2004年 3月 1日). 《高等學校 局社》. 서울: (週)두山. 338~339쪽.쪽.  
  23. 朴榮圭, 《한 卷으로 읽는 朝鮮王朝實錄》(圖書出版 들녘, 1996) 438페이지
  24. “<네이트 百科事典> 獨立協會” . 2009年 11月 30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5. 徐廷柱. 《미당 서정주 全集 19 : 金佐鎭 將軍箭, 雩南 李承晩全》 2017板. 銀杏나무. p. 348쪽.  
  26. 李元淳. 《人間 李承晩》 1965板. 新太陽社. p. 69쪽.  
  27. 獨立協會
  28. 百姓은 어리석어서 賢明한 사람이 啓導해야 한다는 思考觀으로, 여기에서는 獨立協會 指導部가 나서서 어리석은 百姓을 啓導해야 한다는 뜻이다.
  29. 이범석, 《經難錄 (經亂錄)》, 1895年 乙未年
  30. 정재식, 《意識과歷史: 韓國의 文化傳統과 社會變動》, (一潮閣, 1991) 266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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