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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 다카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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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 다카사와 肖像畫

도도 다카사와 ( 日本語 : 藤堂高兌 , 덴메이 元年 陰曆 4月 2日 ( 1781年 4月 25日 ) ~ 分歲이 7年 陰曆 12月 17日 ( 1825年 2月 4日 ))는 二世 쓰번 第10代 번주이다. 以前에는 二世 히社이番 第12代 번주였다. 도도 宗家 第10代 堂主. 히社이番 도도가 第12代 堂主. 쓰번 先代 번주 도도 다카사토 의 長男이며 兒名은 고치요 (庚千代)이다.

情實은 다카쓰키番 나가이 나오老父 의 딸이다.

農民 蜂起로 어려워진 番을 儉素와 節約, 制度 改革 을 통해 刷新했으며, 以後 本家인 이세국의 쓰번 으로 돌아와 훌륭하게 이끌었다. 그는 番情 改革을 성공시킨 것은 勿論 番의 百姓들에게도 選定을 베풀었다. 그렇기 때문에 百姓들의 支持를 한 몸에 받았고, 두곳의 番을 일으켜 세우는 데 成功한, 에도 時代 後期의 代表的 名君主로 꼽히는 人物이다.

生涯 [ 編輯 ]

도도는 1781年 에도에서 도도 다카사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790年 不過 10歲의 나이로 도도 다카나오의 뒤를 이어 二世 國 히사이 番의 第12代 番株價 되었다. 히社이番은 도도 다카미치 分家하여 생겨난 집안이 代代로 統治해왔는데, 11代 번주였던 다카나오가 後嗣없이 夭折瑕疵 本家인 쓰番에서 多카사와를 養子로 들인 것이다. 이때 다카社와는 10살의 어린 나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家門의 長老들에게 補佐를 받았다.

當時 히社이番은 以前에 發生했던 農民 蜂起로 인해 財政的으로 크게 어려운 狀況이었다. 다카社와는 이를 回復하고자 儉素와 節約을 奬勵하는 等 番正義 刷新을 꾀하였다. 또한 凶年이나 非常時를 對備해서 穀食을 貯藏해두는 義昌(義倉)을 設置하고, 灌漑 施設 및 開墾 工事를 實施하였다. 特히 義昌制度는 徹底하게 公的으로만 使用할 수 있도록 했고, 이는 1871年까지 持續될 수 있었다. 그 外에도 숲을 造成하는 産業과 누에를 기르는 産業을 奬勵해 振興시켰고, 家臣들의 子弟들을 교육시키 위한 番校(藩校)를 創設했으며, 法令을 整備하고 行政機構를 改善하는 等 混亂했던 番을 다시 일으켜 세운 名君으로 評價받는다.

1806年 다카社와는 親아버지가 死亡하자 本家인 쓰番으로 돌아가 번주를 繼承하게 되었다. 理由는 쓰番世子 도도 다카토시 가 夭折하는 바람에 後繼者가 空席이었기 때문이다. 그 代身 히社이番은 동생 多카토 가 이어받았다. 當時 쓰번 亦是 反正이 매우 不安定했고 財政이 窮乏한 狀況이었다. 다카社와는 히사이 番과 마찬가지로 法과 行政機構를 整備하고, 番校를 創設하는 等 改革을 꾀하였다.

다카社와는 1825年 12月 44歲의 나이로 에도에서 病死했다.

前任
도도 다카나오
第12代 히社이番 번주 (도도가)
1790年 ~ 1806年
後任
度도 多카토
前任
도도 다카사토
第10代 쓰번 번주 (도도가)
1806年 ~ 1824年
後任
도도 다카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