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메이 皇后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데이메이 皇后
貞明皇后
데이메이 황후 (1912년)
데이메이 皇后 (1912年)
日本의 皇后
在位 1912年 7月 30日 ~ 1926年 12月 25日
前任 쇼켄 皇太后
後任 고준 皇后
이름
救助 사다코(九? 節子)
시호 데이메이(貞明)
身上情報
出生日 1884年 6月 25日 ( 1884-06-25 )
死亡日 1951年 5月 17日 ( 1951-05-17 ) (66歲)
父親 救助 미치打카
母親 노마 이쿠코
配偶者 다이쇼 天皇
子女 쇼와 天皇 · 야스히吐 親王
노부히토 親王 · 다카히吐 親王

데이메이 皇后 ( 日本語 : 貞明皇后 , 1884年 6月 25日 ~ 1951年 5月 17日 )는 다이쇼 天皇 (大正天皇)의 皇后이다. 結婚前 이름은 救助 사다코 (九?節子)이고, 데이메이(貞明)는 諡號이다. 아들 히로히토( 쇼와 天皇 )가 卽位한 뒤에는 '데이메이 皇太后'로 불렸다.

生涯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1884年 (메이지 17年) 6月 25日 , 옛 셋케 (攝家)의 工作 救助 미치打카 의 넷째 딸(庶女)로, 外家가 있던 도쿄 間다센마치(神田錦町)에서 태어났다. 고메이 天皇 의 뇨高(女御)였던 에이쇼 皇太后 (英照皇太后)가 그女의 姑母였고, 언니 노리코(範子)는 皇族 야마시나노미야(山階宮) 기쿠마로 王(菊?王)의 비였다. 親女同生 가즈코(籌子)는 니시혼간지 의 문주(門主) 오타니 고즈이 에게, 이福 男동생 救助 요시무네(九?良致)의 아내는 가인(歌人)으로도 有名한 構造 多케코(九?武子)이다. 메이지 天皇 과는 寸數上 從兄弟에 該當하는 셈이다.

태어난 해 7月에 도쿄部 히가시타마群(東多摩郡) 高엔지무라(高円寺村, 只今의 스기나미 區) 近郊 農家의 오가와라 緊初(大河原金?) ? 데이(てい) 部處의 집에 養女로 보내져, '構造의 九老히메 님(?姬?)'이라 불릴 程度로 씩씩하고 豁達하게 자라났다. 이러한 그女의 健康함은 病弱했던 요시히吐 親王(嘉仁親王, 後날의 다이쇼 天皇)의 비로 揀擇되는 가장 決定的인 要因이기도 했다.

幼年 時節 [ 編輯 ]

1888年 (메이지 21年)부터 아카사카 後쿠키치마치(福吉町)에 있는 構造 집안에서 살게 되었다. 1890年 (메이지 23年) 9月 1日에 華族 女學校(華族女?校, 後날의 女子 가쿠슈인 의 初等小學校(初等小?校)에 入學하여, 1893年 (메이지 26年)에는 高等小學校과(高等小?校科)로 進學, 1896年 (메이지 28年)에는 初等中學科(初等中?科)로 進學하였다. 華族 女學校에서는 시모다 禹타코(下田歌子), 이시이 後데코(石井筆子), 쓰다 禹메코(津田梅子) 等이 그女를 가르쳤는데, 特히 後데코와의 師弟 關係는 公社(公私)를 莫論하고 平生 이어졌다. [1]

婚姻과 皇太子妃 冊封 [ 編輯 ]

1900年 (메이지 33年) 2月 11日 에 15歲의 나이로 다섯 살 年上의 皇太子였던 요시히吐 親王과 約婚하고, 같은 해 5月 10日 에 宮中의 玄素(賢所)에서 神 앞에서 結婚式을 올렸다. 이때 結婚을 祝賀하기 위해 지은 것이 아카사카 离宮(赤坂離宮), 只今의 迎賓館 (迎賓館)이다. [2]

다이쇼 天皇과의 夫婦 關係는 몹시 良好했으며, 慣例를 無視하고 男便의 身邊을 돌보는 것을 도맡아 하기도 했다. 男便을 자주 無視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 에게 不滿이 많아서 그가 支持하는 女性을 長男 히로히토의 約婚女로 삼지 않고, 히로히토가 아내가 될 사람을 直接 選擇하도록 젊은 貴族 女性들을 招待해 茶菓會를 여러 次例 열었다는 逸話가 있다. 또한 結婚한 이듬해 4月 29日 에 長男 히로히토(裕仁, 後날의 쇼와 天皇 )를 낳은 것을 始作으로 1902年 (메이지 35年) 6月 25日 에 次男 지恥部노미야 야스히吐 를, 1905年 (메이지 38年) 1月 3日 에 3男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 1915年 (다이쇼 4年) 12月 2日 에 막내 미카사노미야 다카히吐 를 出産하는 等 연달아 네 名이나 되는 皇子(皇子)를 낳음으로서 一夫一妻制 確立에 寄與하여, 그女의 宮中에서의 地位는 絶對的인 것이 되었다.

皇后 時節 [ 編輯 ]

1912年 (메이지 45年) 7月 30日에 메이지 天皇 의 崩御로 皇太子였던 요시히吐 親王이 王位를 이어받으면서 그女도 皇后가 되었다. 3年 뒤인 1915年 (다이쇼 4年) 11月 10日에 교토 御所 에서 卽位 意識이 치러졌는데, 마침 皇后는 第4皇子(미카사노미야)를 妊娠中이었기 때문에 缺席하였다. 皇室이나 신토 祭祀(神道祭祀)의 慣例나 傳統을 所重히 하면서도 노구치 유카 等 近代 女性敎育者를 相談 相對로 자주 宮中에 부르기도 했으며, 媤어머니 쇼켄 皇太后 의 뒤를 이어 養蠶 事業을 奬勵하여 그女 自身도 養蠶에 臨했고, 한센病 救濟 事業에 힘써서 燈臺지기를 支援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다이쇼 天皇이 病으로 執務를 볼 수 없게 되면서는 天皇을 몸소 看病하는 한便, 天皇을 代身해 皇室을 管理하며 調整의 元老나 重臣들과도 대립각을 세웠다. 1926年 12月 25日에 다이쇼 天皇이 下야마(葉山)에 있던 皇室 別邸에서 崩御하고 攝政 皇太子 히로히토 親王이 皇位를 이어받으면서(쇼와 天皇) 皇太后가 되었다.

皇太后 時節 [ 編輯 ]

다이쇼 天皇이 崩御한 뒤 데이메이 皇太后는 日과의 나머지 時間, 午前과 午後의 하루 두 番씩 다이쇼 天皇의 肖像畫가 安置된 房에서 지냈는데, 次男 지恥部노미야 야스히吐 親王의 證言에 따르면 그 모습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對하는' 것과 같았다고 하며, 손주인 쇼와 天皇의 黃子女나 막내아들 미카사노미야의 子女를 귀여워했다고 한다.

1931年 (쇼와 6年), 데이메이 皇太后의 下賜金을 土臺로 日本에 '癩病 豫防 協會'가 設立되었으며, 그女의 生日의 前後가 '癩病 豫防의 날'로 指定되었다(현재는 '문둥病을 올바르게 理解하는 週間'이라고 改稱). [3] 敗戰 뒤에는 시즈오카 의 皇室 別莊에서 보냈다.

死亡 [ 編輯 ]

1951年 (쇼와 26年) 5月 17日, 狹心症으로 死亡하였다. 享年 66歲였다.

皇太子妃 時節에 잠깐 장티푸스 를 앓았던 것을 빼면 별다른 重病에도 걸리지 않은 健康한 몸이었던 데다 死亡한 날도 恒例대로 勤勞 奉仕團을 訪問할 豫定이었지만, 準備 途中에 發作을 일으켜 急逝한 것이다. 또한 쇼와 天皇은 當日 進講을 받고 있었는데, 皇太后가 死亡했다는 消息을 듣고 한동안 失語症 症勢를 보였다고 한다. 6月 8日 에 《 逆境 》의 ‘일월의 길은 正名(貞明)한 것이다’라는 句節에서 딴 ‘데이메이’(貞明)라는 諡號가 올려지고 6月 22日에 國喪이 擧行되었다.

陵墓는 다마 東陵 (多摩東陵)으로 日本의 歷代 皇后 中 最初로 간토 땅에 陵이 造成된 皇后이다. 또한 敗戰으로 日本 帝國 憲法 이 廢止된 뒤의 日本국 憲法 皇室典範에 따라 墓가 造成된 最初의 皇族이기도 하다.

天皇 및 皇室 家族들과의 關係 [ 編輯 ]

쇼와 天皇 의 아내인 나가코 에게는 媤어머니로서 어려운 存在였다고 한다. 皇族 出身 구니노미야(久邇宮) 家門의 摘出(嫡出) 所生으로 神位가 女王(女王)이었던 며느리에 對한 時期(데이메이 皇后 自身은 고셋케인 救助 집안 出身이지만 嫡統이 아닌 庶出이었다)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구니노미야 家門도 外戚이라는 點을 내세워 제멋대로 구는 일이 많았으므로, 이 點도 데이메이 皇太后가 나가코 皇后를 좋게 봐주지 않았던 要因으로 여겨지고 있다). 더군다나 多少 차분한 性格이었던 나가코 皇后에 비해, 學校에 들어가기 前까지 高엔지 附近의 農家에서 豁達하게 뛰어놀며 자라난 데이메이 皇太后는 서로 性格도 맞지 않았다. 데이메이 皇太后가 나가코 皇后에게 주는 注意는 與館長(女官長)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當時 皇太后를 섬겼던 餘館長 다케야 쓰네코(竹屋津根子)와 나가코 皇后를 섬겼던 餘館長 다케야 시즈코(竹屋志計子)는 姊妹였음에도 좀처럼 서로 마주 보기 어려웠다고 回想하고 있다.

宮中에서 가까이서 섬기던 餘灌腸이나 旅館이 實際로 姑婦間 衝突을 目擊한 것은 다이쇼 天皇이 死亡하기 數個月 前의 일로, 쇼와 天皇(當時 皇太子) 夫婦가 浮黃의 療養處仁 下야마 別莊에 問病했을 때였다. 나가코 皇太子妃는 媤어머니인 데이메이 皇后 앞에서 緊張한 나머지 熱을 내리기 위해 물을 적신 손手巾을 맨손이 아니라 掌匣(日本의 女性 皇族은 外出 때는 掌匣을 着用한다)을 着用한 채로 짜느라 掌匣이 젖어버렸고, 그걸 본 데이메이 皇后가 "너는 무엇을 시켜도 如前히 서투르구나!!"라고 쏘아붙이는데 나가코 皇太子妃는 아무 말도 못하고 默默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頭腦가 明敏하고 多少 다부진 性格이긴 했지만 손아랫사람에게도 直接 叱責하는 일이 없었던 데이메이 皇后였기에, 이 일을 지켜본 旅館들에게 이 事件은 姑婦 間의 不和를 드러낸 셈이 되었다.

反面 다른 며느리로 지恥部노미야 · 다카마쓰노미야 · 미카사노미야 다카히吐 親王의 碑들과는 고쇼에서의 食事나 茶菓會에도 種種 불러 귀여워했다고 한다. 特히 次男 至治부노미야의 比였던 세쓰코(勢津子) 비를 마음에 들어하여 서로 親交가 깊었고, 每年 3月 3日 히나마쓰리 마다 세쓰코 비가 시집올 때 가져온 히나 人形을 邸宅에 裝飾해놓고 그것을 데이메이 皇后에게 보이곤 했다고 한다. 세쓰코는 晩年의 回想에서 이때의 일을 "아드님 네 분이 모두 親王 殿下(아들)셨으므로 每年 즐거운 마음으로 期待하고 계셨겠지요"라고 말하고 있다.

旅館 制度를 廢止하는 等 宮廷內 改革을 推進했던 長男 쇼와 天皇에게 反撥해 自身의 오미야 고쇼에서만은 旣存의 宮廷 制度를 維持하게 했지만, 쇼와 天皇과의 關係가 決코 나쁜 것은 아니었으며, 戰爭 때는 戰況이 惡化되는 渦中에도 避難을 拒絶하는 어머니를 念慮한 것이 쇼와 天皇이 끝까지 도쿄를 떠나지 않았던 한 要因이기도 했다. 그러나 皇后의 愛情은 次男인 지恥部노미야에게 多少 쏠려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皇后가 至治부노미야를 그女의 生日에 낳았다는 것에서 皇后가 强한 因緣을 느낀 탓이었다고도 한다. 至治부노미야의 비로 幕府 末期 組積(朝敵)으로 몰렸던 마쓰다이라 伽陀모리(松平容保)의 孫女 세쓰코를 强하게 推薦한 것도 데이메이 皇后로 實際로 婚姻이 成立된 것 또한 皇后의 意向이 크게 作用한 結果였다는 것이다.

家族 關係 [ 編輯 ]

父母 [ 編輯 ]

配偶者 [ 編輯 ]

寫眞 이름 生日 死亡 기타
夫君     다이쇼 天皇   
大正天皇
1879年 8月 31日 ( 1879-08-31 ) 1926年 12月 25日 ( 1926-12-25 ) (47歲)
  • 第123代 天皇
  • 1900年 5月 10日 婚姻   

子女 [ 編輯 ]

寫眞 이름 生日 死亡 기타
長男 쇼와 天皇
昭和天皇
1901年 4月 29日 ( 1901-04-29 ) 1989年 1月 7日 ( 1989-01-07 ) (87歲)
次男 지恥部노미야 야스히吐 親王
秩父宮雍仁親王
1902年 6月 25日 ( 1902-06-25 ) 1953年 1月 4日 ( 1953-01-04 ) (50歲)
3男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親王
高松宮宣仁親王
1905年 1月 3日 ( 1905-01-03 ) 1987年 2月 3日 ( 1987-02-03 ) (82歲)
4男 미카사노미야 다카히吐 親王
三笠宮崇仁親王
1915年 12月 2日 ( 1915-12-02 ) 2016年 10月 27日 ( 2016-10-27 ) (100歲)

各州 [ 編輯 ]

  1. 平生 華族 女學校 時節의 恩師였던 이시이 後데코와 그 男便인 이시이 료이치가 經營하던 多키盧哥와 學院(?乃川?園, 日本 最初의 知的障礙人 施設)을 物心兩面으로 支援하였는데, 1921年 에 院生의 失手로 불이 나서 多키盧哥와 學院이 타버리고 院生 가운데서도 死亡者가 나온 것에 事業을 一時 斷念하려 했던 이시이 夫婦에게 再起할 것을 激勵한 것도 皇后 自身이었다고 한다.
  2. 結婚할 當時에는 敎育界의 늙은 旅館(女官)으로부터 宮中에서의 禮儀 凡節을 배우느라 困辱을 치렀는데, 後날 이때의 指導가 自身의 素養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監査하고 있다.
  3. 皇太后의 經濟 支援으로 生活이 救濟된 患者도 있지만 한便으로 '豫防'이라는 이름으로 强制隔離가 正當化된 面도 否定할 수 없다. 또, 이러한 活動이 皇太后의 眞心과는 相關없이 '仁慈하신 皇室의 姓은'으로서 政治的으로 利用된 側面도 있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