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祚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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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祚榮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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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往
(高王, ?~
719年
3月
)은
渤海
를 建國한 招待
王
이다.
[2]
古往에 關해 中國 側 記錄인 《
舊唐書
》에서는 大祚榮(大祚榮)을 高句麗의 別種 出身으로 敍述했고, 反面 《
新唐書
》에서는 本來 高句麗에 附屬되었던
속말말갈
(粟末靺鞨) 出身이라고 敍述되어 있다.
[3]
韓國 側 記錄인 《
三國遺事
》에 引用된 《
新羅고기
》와
[4]
《
帝王韻紀
》에서는
大祚榮
을
高句麗
區長이라고 記錄하고 있으며
[5]
新羅고기에서 高句麗 球場 造營은 性이 大氏라고 記錄되어 있다.
生涯
[
編輯
]
아버지는
걸걸중상
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史書에 傳하지 않는다. 臺氏와 太氏 族譜에 依하면 大祚榮의 어머니는 시씨(時氏)라고 한다
大韓民國
歷史學界에서는 大祚榮에 關한 많은 見解가 表明되어 왔지만, 一般的으로 舊唐書에 나온 高麗 別種(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으로 보아 高句麗 將軍으로 보는 것이 定說이다. 왜냐면 新唐書의 記錄은 前半部는 발해국機, 後半部는 舊唐書에 依據해 敍述된 것으로 把握되기 때문이다.
그 外의 主張으로는
말갈족
으로서, 高句麗에 復屬된 뒤,
高句麗
禍 過程을 거친 靺鞨系 高句麗人
[6]
또는
쑹화江
(松花江) 流域에 居住하던 高句麗 種族이라고 본다.
[7]
大祚榮이
隋나라
개황
年間
돌持戒
가 이끌고 隋나라로 歸附하여 流星에 定着하게 된
속말말갈
의 後孫으로 보아, 그의 出資에서 高句麗를 排除하는 學說도 存在한다.
[8]
서울大學校
國史學科 敎授인
宋基昊
는 여러 情況上 大祚榮은
말갈족
이지만, 高句麗에 歸屬되어, 一定 部分 高句麗化되었고, 걸걸중상을 거치면서 더욱 加速化되어 靺鞨系 高句麗人으로서, 高句麗 歸屬意識이 나타나게 되어 後날 발해국을 運營하는 基地가 되었다고 主張했다.
[9]
서강대학교
史學科 名譽敎授인
이종욱
은 自身의 著書인 《高句麗의 歷史》에서 渤海에는
高句麗人
들이 많이 살았고, 渤海는 高句麗의 傳統을 이어받으며, 더욱이 속말말갈인 大祚榮은 高句麗의
將軍
으로 있었기에 새로운 王國을 세울 情報와 힘을 갖출 수 있었던 것 等을 생각할 必要가 있다고 强調했다.
[10]
6世紀 後半,
高句麗
는
연개소문
이 死亡한 直後 그의 세 아들인
연남생
·
연남건
·
연남산
의 權力 다툼을 벌였다.
結局 權力 다툼에서 밀려난
연남생
은
唐나라
에 亡命했다. 唐나라는
667年
연남생을 앞세워 高句麗를 侵攻하였다. 最高 權力者였던 연남생의 合流로 高句麗는 크게 무너져 唐나라는 破竹之勢로
平壤城
으로 進擊했다. 結局
668年
平壤城이 陷落되고 高句麗는 滅亡하였다.
高句麗
가 滅亡한 後 옛 高句麗 領土에는
唐나라
가 統制하는
安東都護府
가 세워지고, 남아있던 高句麗 勢力 또한
671年
安市城
陷落을 끝으로 幕을 내리게 되었다. 以後 大祚榮 一家는 高句麗
榮州
(榮州)로 移住했다. 그 이주의 契機가 强制였는지, 아니면 來投였는지 斷定키 어려운 바이나,
乞士비우
와
걸걸중상
이 各各의 同質性이 强하였던 것으로 보아, 이 두 集團은 영주에 隸屬되어 있을 때부터 集團的으로 唐나라에 隸屬된, 곧 一種의
羈縻州
와 같은 樣態下에 處해 있었던 것으로 推定된다.
[11]
[12]
한便,
696年
榮州에서는 唐나라의 지나친 抑壓
政策
에 對한
거란
의 叛亂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생겨난 混亂을 틈타 高句麗 遺民
걸걸중상
과
말갈
의
乞士비우
는 榮州에서의 離脫을 敢行했고,
則天武后
의 懷柔策에도 不拘하고 東쪽으로 移動,
이해고
가 이끄는 唐나라의 追擊軍과 戰鬪를 벌였다.
이때 걸私費우와 걸걸중상이 죽고, 大祚榮은 남은 高句麗 遺民과 乞士비우의 靺鞨을 合倂하여 이끌게 되었다. 大祚榮은
698年
천문령 戰鬪
에서 唐나라의 追擊軍을 擊破해 勝利하고 挹婁의
東牟山
지린省
敦化
附近)에서
渤海
를 建國하였다. 黨의 北進 政策을 威脅하던
突厥
과 손을 잡아 臺當 牽制勢力을 構築했다.
[13]
治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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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國際 關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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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祚榮은
705年
에
唐나라
와 和親하였고,
713年
唐나라는 名目上
古往
(高王)을 左孝위大將軍 渤海郡王(座孝位大將君 渤海君王) 홀한주都督不渡毒(忽汗州都督府都督)으로 冊封하였다.
719年
, 古往이 崩御한 뒤 그의 아들
武王
(武王)이 王位를 이었다.
唐나라는 渤海를 고립시키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高王은
突厥
과 同盟 關係를 形成하며 孤立 關係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는 渤海의 勢力이 建國 初期에 비해 相對的으로 剛해졌음을 意味한다.
700年
에는 渤海가
新羅
에 使臣을 派遣하기도 했다. 新羅와의 關係는 나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親密한 것도 아니었다. 新羅의 儒學者
최치원
은 "渤海의 王인 古往이 新羅와 修交를 맺고 싶어 사람을 보냈는데,
효소왕
이 이를 奇特하게 여겨 高王에게
大阿飡
(大阿飡)이라는 官爵을 하사하였다"라는 記錄을 社不許北國거상장, 《
東史綱目
》에서 確認할 수 있다. 新羅와 渤海는 當時 몇 次例 交流가 있었으나 親善的인 關係로 發展하지는 못했다. 이는 兩國이 그 무렵에는 國境을 接하고 있지 않아 直接的인 接觸이 없었기 때문이다. 新羅와 渤海가 本格的으로 關係를 맺기 始作한 것은 8世紀 初盤에 渤海가 本格的으로
高句麗
의 後裔임을 自處하고 兩國이
咸興
一帶에서 直接 國境을 接하면서 부터다.
[14]
家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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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部 :
대중賞
(乞乞仲象)
- 某 :
시씨
(時氏)
- 古往(大祚榮)
- 왕제 :
대야발
(大野勃)
- 조카 :
隊員機
(大元璣) -
先王
의 曾祖父
- 조카 :
대일하
(大壹夏)
大衆 文化속에 나타난 古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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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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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韓民國 海軍
의
忠武公李純信級 驅逐艦
의 第3番함의 이름은 '
大祚榮艦
(ROKS DDH 977)'이다.
慶山市
남천면 松柏2里
渤海 마을
에서는 每年
春分
에 渤海 古往 大祚榮의 祭祀가 行해진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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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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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舊唐書
,
新唐書
등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族譜上 記錄이다.
- ↑
《
舊唐書
》(
舊唐書
),「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 ↑
《
新唐書
》(
新唐書
),「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姓大氏」
- ↑
『三國遺事』 1, 기이 1, 말갈渤海, “三國史云儀鳳三年, 高宗戊寅, 高麗殘?類聚, 北依太伯山下, 國號渤海. …… 又新羅古記云高麗舊將祚榮姓大氏, 聚殘兵, 立國於大伯山南, 國號渤海.”
- ↑
『帝王韻紀』 下卷, “前麗舊將大祚榮 得擧太白山南城 於周則天元甲申 開國 乃以渤海名.”
- ↑
김기흥, 《渤海의 種族的 淵源》, 東北亞歷史論叢-33, 2011, 437쪽
- ↑
노태돈, 《古代史散策 大祚榮, 高句麗人인가 말갈인인가》 - 歷史批評 1989-겨울號, 316쪽
- ↑
姚中岫(1979), 「海東 盛國-渤海史略」, 『牡丹江師院學報』 2期(『 高句麗渤海硏究集成』. 渤海 卷1, 哈爾濱出版社, 58~59쪽
- ↑
宋基昊(1991), 「大祚榮의 出自와 渤海의 建國過程」『아시아文化』7, 翰林大學校아시아文化硏究所
- ↑
이종욱(2005), 《高句麗의 歷史: 歪曲되고 誇張된 古代史의 眞實을 復元한다》, 김영사
- ↑
劉振華, 〈渤海大氏王室族屬新證《社會科學戰線》1981-3
- ↑
崔茂藏 便역, 《渤海의 起源과 文化》, 藝文出版社, 1988
- ↑
서병국 (2005年 1月 25日). 《渤海帝國史 (西海歷史冊房 11)》. 서해문집. 416쪽.
ISBN
89-7483-242-9
.
- ↑
《統一新羅의 北方進出 硏究》(2001), 조이옥
- ↑
718年 黨에 使臣으로 갔다.
- ↑
725年 黨에 使臣으로 갔다.
- ↑
729年에 黨에 使臣으로 갔다.
- ↑
729年, 730年에 黨에 使臣으로 갔다.
- ↑
732年 黨에 使臣으로 갔다.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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