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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공원 (大邱)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本文으로 移動

달성공원 (大邱)

달성공원
達城公園
座標 北緯 35° 52′ 26″ 東京 128° 34′ 40″  /  北緯 35.873985° 東京 128.577869°  / 35.873985; 128.577869
面積 12萬 8,700m2
開院 1905年
Map
웹사이트
달성공원

달성공원 大邱廣域市 中區 달성공원로 35에 있는 公園이다. 本來 達成土城이었다.

歷史 [ 編輯 ]

달성공원
達成公園 길

新羅때 달구화현(達句火縣)이라 불렀으며 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742∼765在位)때에 이르러 비로소 臺具現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達成의 옛이름은 이 달구火(達句火) 달佛性 (達弗城)에서 由來된 것이다.

우리나라 城郭發達思想 가장 이른時期에 나타난 形式의 하나로 評價되고 있다. 靑銅器時代(靑銅器時代)以來로 이 地方의 中心勢力을 이루고 있던 集團들이 그들의 生活根據地에 쌓은 城郭(城廓) 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城壁의 아래層에는 조개무지 遺跡이 있고 木柵(木柵)의 痕跡도 있다. 慶州의 月城(月城)처럼 平地에 있는 낮은 丘陵을 利用하여 築成한 것이 特徵이다.

三國史記에는 新羅 沾解王(沾解王) 15年(261)에 달벌성을 쌓고 나마克從(奈麻克宗)을 성주로 삼았다는 記錄이 있다. 新羅에 合倂된 뒤에는 軍事要地로 重視되었으며 그 後 高麗 恭讓王 2年(1390) 土星에 石築을 더했다. 城壁은 主로 흙으로 築造되었고 周圍 길이는 約1,300m 높이는 4m 안팎이다. [1]

宣祖 29年(1596)에 石築으로 改築하고 喪主에 있던 慶尙監營을 現在의 慶尙監營公園 자리로 移轉하기 前까지 이곳에 두기도 했다. 1905年 公園으로 指定되었으며, 日帝强占期 에는 達成公園 안에 大邱紳士(大邱神社)가 세워지기도 했다. 日本에서 發刊한 《日本同盟通信社》에는 大邱紳士의 建立에 朝鮮人 김용주 (創氏名 가네다 類슈)가 2千 원을 寄附하였다고 되어 있다.

達成公園 자리는 本來 達成 徐氏 의 世居地(世居地)였는데 世宗大王 때 門中에서 土地를 國家에 獻納하였다. 世宗大王이 이를 褒賞하려 했지만 ‘서침’은 그 代身 國家에서 庶民의 還穀을 蕩減해줄 것을 建議하였고, 이에 따라 大邱의 償還耗穀은 1席當 誤勝씩 減免케 되었으며 朝鮮 末까지 그 特例가 存續되었다. 大邱 富民은 이와같은 '서침'을 崇慕하여 1665年 大邱 구암書院에 奉享하였다. 한便 世宗大王은 회화나무를 심어 서침의 마음을 기리게 했는데 現在 達成公園 內에 있는 '서침나무'가 그 나무로 알려져 있다. [2]

1963年 史跡 第62號로 指定되었다. 이어 1965年 2月 달성공원 綜合造成計劃을 確定한 後 1969年 公園으로 탈바꿈시켰고, 1970年 5月 달성공원 綜合文化館, 動物園 造成을 完了하고, 公園 內에 李相花 是非, 관풍루, 天道敎 崔濟愚 銅像을 安置하였다. 大邱 都市鐵道 3號線 달성공원驛 에 내려서 조금만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 삼한時代: 달佛性
  • 1596(宣祖29年): 慶尙監營 設置
  • 1905(光武9年): 公園 造成
  • 1963年 1月 21日: 史跡 第62號 指定
  • 1969年 8月 1日: 달성공원 開院
  • 1970年 5月 2日: 動物園 開院
  • 1975年 6月 1日: 달성공원管理事務所로 機構 改編
  • 1976年 5月 21日: 公園管理事務所로 機構 改編
  • 1989年 10月 1日: 달성공원管理事務所로 機構 改編
  • 2000年 4月 1日: 無料 開放.

獨立運動 中心地 [ 編輯 ]

1915年 달성공원에서 大韓光復團員들과 朝鮮國權回復團員들이 모여 大韓光復會를 結成하게 된다. 國權을 回復하고 共和制를 實現하는 것을 目的으로 하면서 各 道(都)에 穀物商과 雜貨商을 열어 軍資金을 모으고 親日符號들을 處斷하면서 獨立軍을 養成하였다. [3]

達成 徐氏 [ 編輯 ]

大邱 土星(土姓)인 達成은 達成 徐氏 들과 大邱 徐氏 들의 世居地이다. [4]

交通 [ 編輯 ]

갤러리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