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혼마쓰 요시쓰구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니혼마쓰 요시쓰구
二本松 義?
無事 情報
時代 센고쿠 時代 ~ 아즈齒모모야마 時代
出生 덴分 21年( 1552年 )
死亡 덴쇼 13年 10月 8日 ( 1585年 11月 29日 )
別名 시치로( 七? , 兒名)
시호 月峰円公
무쓰國 아다치群 니혼마쓰 性 週( 二本松城主 )
官位 사쿄노스케( 左京亮 ), 우쿄다유( 右京大夫 )
고즈케 노스케( 上野介 )
氏族 니혼마쓰 하타케야마 氏 ( 二本松?山氏 )
父母 아버지: 니혼마쓰 요시쿠니 ( 二本松義? )
子女 요시쓰나 ( 義綱 ), 요시타카 ( 義孝 )

니혼마쓰 요시쓰구 ( 日本語 : 二本松義? , 1552年 ~ 1585年 11月 29日 )은 센고쿠 時代 부터 아즈齒모모야마 時代 에 걸쳐 活躍했던 武裝이다. 니혼마쓰 家門( 二本松氏 )의 9代 堂主로, 무쓰國 아다치群 니혼마쓰 星州( 日本語 : 二本松城主 )였다. 하타케야마 요시쓰구 ( 日本語 : ?山義? )라고도 한다.

生涯 [ 編輯 ]

덴分 21年( 1552年 ), 니혼마쓰 家門의 8代 堂主였던 니혼마쓰 요시쿠니( 二本松義? )의 嫡男으로 태어났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 에게서 「요시( )」 1字를 下賜받아, 「요시쓰구( 義? )」라 이름하였다. 덴쇼 8年( 1580年 ), 아버지 요시쿠니의 死亡으로 家督 (家督)을 이어받아 니혼마쓰 하타케야마 家門의 15代 堂主가 되었다.

덴쇼 13年( 1585年 ), 다테 마사무네 가 그의 丈人 다무라 기요아키( 田村?? )와 함께 오우치 마사쓰나( 大內定綱 )를 攻擊해 왔다. 이때, 사다쓰나와 姻戚 關係였던 요시쓰구는 아시나 家門( 蘆名氏 )과 손잡고 社다쓰나를 支援하였다. 하지만 사다쓰나는 마사무네에게 크게 敗하여 요시쓰구에게로 달아났고, 요시쓰구는 社다쓰나를 받아 주었다. 이 때문에, 요시쓰구도 마사무네의 侵攻을 받게 되었다. 이어 다테 軍은 요시쓰구의 領內로 쳐들어와 大部分을 占領하기에 이르렀다.

結局, 요시쓰구는 할 수 없이 마사무네에게 降伏을 約束하였으나, 니혼마쓰 家門의 領地 大部分을 빼앗을 생각이던 마사무네는 이를 拒否한다. 게다가 마사무네는 니혼마쓰 性 附近의 몇 안 되는 土地를 除外하고 니혼마쓰 家門의 領地를 全部 沒收하여, 요시쓰구가 센고쿠 다이묘 로서의 地位를 維持할 수 없는 狀況에까지 몰아넣으려고 했다. 當時 軍事力 面에서 다테 郡에 비해 劣勢였던 요시쓰구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條件은 마사무네의 아버지로, 當時 隱居 中이었던 다테 데루무네 다테 시게자네 의 斡旋으로 緩和되었다. 結局 마사무네는 아버지의 挽留로, 占領한 땅의 一部를 요시쓰구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하지만, 요시쓰구는 마사무네가 提示했던 苛酷한 條件으로 인해 마사무네에게 깊은 怨恨을 품게 되었다. 그해 10月 8日 , 요시쓰구는 데루무네에게 感謝 意思를 表示하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 當時 마사무네는 매사냥을 나가 있었기 때문에, 美야모리 性( 宮森城 )에 있던 데루무네가 代身 요시쓰구와 會見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일이 如意치가 않자, 요시쓰구는 데루무네를 拉致하여 人質삼아 安全하게 니혼마쓰 城으로 데리고 돌아가려 했다(일설에는 칼을 갈고 있는 다테 君을 目擊한 요시쓰구가 態度를 바꿨다고도 한다).

이때 매사냥을 나가 있던 마사무네는 이 消息을 듣고, 卽時 요시쓰구를 追擊했다. 結局, 요시쓰구는 途中에 아부쿠마江 邊의 다카다하라( 高田原 )에 이르러 마사무네에게 따라잡혔다. 그리고 데루무네와 함께 다테 君의 銃擊으로 射殺되었다(최후를 覺悟한 요시쓰구가 데루무네를 殺害하고 自殺했다는 說도 있다. 或은, 이때 데루무네와 함께 서로 찔러 죽었다고도 한다). 이때 요시쓰구의 나이 34歲였다. 마사무네는 요시쓰구의 屍體를 남김없이 亂刀질하여 말로 질질 끌고 가서, 巨星에 到着하자마자 이를 藤나무 덩굴로 縫合하여 城壁 아래에 내걸었다고 한다. 이 事件은 約 2個月 뒤인 그해 11月 17日 ( 1586年 1月 6日 )에 벌어진 히吐토리바시 戰鬪 의 導火線이 되었다.

前任
니혼마쓰 요시쿠니
第9代 니혼마쓰 氏 堂主
後任
니혼마쓰 요시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