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카 叛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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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 叛亂 ( 그리스어 : Στ?ση του Ν?κα , 英語 : Nika riots )은 532年 비잔티움 帝國 의 數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에서 約 一週日에 걸쳐 일어난 叛亂 이다. 當時 비잔티움 帝國 에서 일어난 가장 큰 規模의 叛亂이었고 하기아 소피아 를 비롯한 수많은 建物이 破壞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 1歲 의 鎭壓으로 約 數萬 名(3萬 名 以上)이 죽었다.

背景 [ 編輯 ]

古代 로마에서는 말 네 마리가 끄는 電車 競走 가 相當히 發達했고 人氣를 끌었다. 帝國 全域에 큰 都市는 大部分 히포드롬이라고 부르는 圓形競技場이 있었다. 또한 各 電車競走는 4個의 팀으로 나뉘어있는 境遇가 普通이었는데 이들은 各各 다른 色깔의 유니폼을 입어 서로를 區分했는데 各各 赤色, 靑色, 綠色, 白色이었다. 로마 帝國 에서 비잔티움 帝國 으로 넘어가면서 4個의 戰車競走팀은 2個로 줄어 녹색당과 靑色糖이 남았는데 이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各各 큰 派閥을 이루고 현대의 政黨에 버금가는 位相을 가졌다. 當時 靑色黨은 主로 大地主와 그리스-로마 貴族들의 後援을 받았고 그래서 傳統 基督敎 人들이 많았는데 反해 녹색당은 商人, 技術者 等 中間 階層이 主로 後援했고 宗敎的으로는 單性論 에 가까웠다.

量 派閥은 마치 政黨처럼 組織을 이루고 指導者를 選出했으며 皇帝는 重要한 公共事業을 그들을 통해서 벌였고 甚至於 各各 私兵組織을 가지고 있었다. 兩側은 서로 頻繁히 衝突했는데 아나스타視우스 1歲 皇帝의 時期인 493年 , 501年 , 511年 에 衝突했고 特히 511年에는 皇帝가 直接 나서서 皇帝의 職을 걸고 暴動을 解決해야 할 程度로 深刻한 樣相을 띠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歲 는 卽位할 當時 靑色黨을 支持했고 이들의 支持에 입는 바가 컸는데 漸次 自身의 權力이 鞏固해지자 綠色黨뿐만아니라 靑色糖度 抑壓하는 政策을 폈다. 거기에 트리보니아누스 와 카파도키아의 요한 等 麾下 官吏들의 不正과 腐敗로 市民들의 不滿이 漸次 澎湃해졌다. 532年 1月 10日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롬에서 벌어진 戰車競技가 끝난 後 靑色黨과 녹색당이 서로 衝突하는 事態가 벌어졌다. 皇帝는 卽刻 軍隊를 投入해 秩序를 回復했는데 이것이 니카 叛亂의 發端이 되었다.

叛亂의 經過 [ 編輯 ]

1月 10日 의 衝突을 武力으로 鎭壓하는 過程에서 유스티니아누스는 靑色黨과 녹색당의 指導者를 處刑하고 監禁했는데 이에 反對하는 양 勢力이 서로 힘을 합쳐 示威를 벌였다. 사흘 뒤 電車競走가 再開되었으나 성난 群衆은 便을 갈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모두 皇帝를 向해 勝利를 의미하는 "니카!"를 외쳤다. 雰圍氣가 尋常치 않음을 感知한 皇帝는 避身하고 慶州를 中斷시켰다. 群衆은 더욱 火가 나서 競技場을 뛰쳐나와 暴動을 일으켰고 監獄을 부수고 官吏들의 집에 無差別 放火를 하였다. 이때 發生한 火災로 元老院 議事堂, 하기아 소피아 聖堂 까지 불에 타버렸다.

暴動은 다음날과 그 다음날도 繼續되었고 皇帝는 群衆의 要求대로 官吏들을 更迭했으나 群衆은 前任 皇帝의 조카인 老人 히파티우스를 皇帝로 擁立하며 示威를 繼續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競技場에서 그들을 진정시키려 하였지만 失敗하고 皇宮으로 避身했다. 皇帝와 側近들은 도망갈 채비를 하고 막 逃避를 論議 했다.

그 때 皇后 테오도라 가 會議場에서 皇帝를 꾸짖으며 堂堂히 맞서라고 主張했다. 그女는 도망쳐서 安全할 수 있다하더라도 逃亡가서는 안되며 皇帝로서 부끄럽게 逃亡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自身은 끝까지 皇宮을 지키겠다고 堂堂히 主張했다. 그女의 主張을 듣고 皇帝와 側近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叛亂鎭壓을 謀議하였다. 그들은 젊은 將軍 벨리사리우스 와 문두스라는 將軍을 불러들여 叛亂을 鎭壓하게 했다.

벨리사리우스와 문두스는 몰래 軍隊를 이끌고 히포드롬으로 가서 同時에 無差別로 群衆을 虐殺했다. 또 다른 將軍인 宦官 나르세스 는 群衆들이 逃亡을 치지 못하도록 막았고 競技場 안에서만 約 3萬 名의 群衆이 虐殺당했다. 群衆들로부터 얼떨결에 皇帝로 推戴된 老人 히파티우스도 皇帝 앞에 잡혀왔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가 自身의 意思에 反해 皇帝로 推戴된 것을 알고 있었기에 容恕하려고 했으나 이番에도 皇后 테오도라가 制止하며 處刑을 主張했다. 한番 群衆에 依해 祭官을 받은 몸이니 나중에라도 叛亂의 核心이 될 수 있다는 憂慮에서였다. 結局 히파티우스도 處刑되었고 이로써 叛亂은 모두 鎭壓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