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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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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해 (盧鐘海, 1922年 1月 14日 ~ 1950年 6月 25日 )는 黃海道 安岳 出生으로 1950年 2月 警察幹部候補生 4期로 經緯 에 引用되었고, 같은 해 江原道 春晴群(春川) 북산면 內評 支署長 [1] 으로 任命되었다. 6.25 戰爭 當時, 內評支署에서 決死抗戰을 통해 北韓軍의 進擊을 늦추고, 國軍의 主抵抗線 構築에 寄與한 功을 致賀하여 2014年 忠武武功勳章 이 追敍되었고, 2019年 5月 이달의 護國人物로 指定되었다.

노종해
盧鐘海

6.25 戰爭 初期 國軍이 거둔 첫 勝利인 春川地球戰鬪의 礎石이 된 內評戰鬪를 이끈 內評支署의 支署長
出生地 黃海道 安岳
死亡地 江原道 春川
國籍 大韓民國
性別
任官 1950年 經緯 任用
勤務 1950年 江原 春川警察署 內評支署長
最終階級 輕減
主要 參戰 春川地區戰鬪 內評支署 戰鬪
徐薰 2014年 忠武武功勳章

生涯 [ 編輯 ]

1922年 1月 14日 黃海道 安岳面에서 태어났다. 1950年 2月 經緯에 任用되어 江原道 춘성군 [2] 북산면 內評 支署長으로 勤務했다. 1950年 6月 25日 6.25 戰爭 이 勃發하자 江原道 內評支署에서 抗戰 끝에 死亡하였다.

內評支署 戰鬪 [ 編輯 ]

內評支署 戰鬪에 對한 첫 記錄은 1952年 江原警察國이 發刊한 "榮光의 序曲"이라는 冊子에 簡單히 言及되어있다.

6.25 戰爭 當時 江原 警察의 任務는 國軍이 防禦線을 構築할 수 있도록 敵의 攻勢를 遲延시키는 것이었다. 노종해 經緯 는 警察 12名, 大韓靑年團 團員 3名과 함께 春川 市內에 進入하려는 北韓軍을 막아내야 했다. 當時 北韓軍은 春川을 占領한 後 加平, 水原 方面으로 進出하여 首都圈 에 集中되어 있었던 國軍의 退路를 遮斷하여 殲滅한다는 計劃을 세우고 春川으로 進擊하였다.

노종해 輕減이 防禦하던 內評支署는 내평리 마을 한복판의 46番 道路邊의 若干 높은 곳에 位置한 貧弱한 塹壕였다. 그러나 이곳은 春川市內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하는 要衝地였기에, 通信이 끊기고 孤立되었지만 그들은 죽음을 覺悟하고 熾烈한 交戰을 벌였다. 변변한 武器도 없이 電車를 앞세운 北韓軍을 相對로 熾烈한 抗戰을 펼쳐, 小規模 警察支署라고 얕본 北韓軍이 結局 82mm 迫擊砲로 大擧 動員하여 內評支署를 完全 廢墟로 만든 뒤에 占領할 수 있었다.

이 戰鬪로 노종해 支署長을 包含한 12名이 戰死하였지만, 이들의 묵숨을 건 戰鬪 德分에 約 3千名에 達하는 北韓軍의 南下를 遲延시켜 國軍 6師團이 春川 南쪽에 沮止線을 構築할 수 있는 時間을 벌 수 있었다. 이는 곧 國軍의 昭陽江 防禦線 構築 等 春川地區戰鬪 勝利의 礎石이 되었고, 北韓軍의 春川-洪川-水源으로 내려오려는 計劃을 水泡로 만들 수 있었다.

賞勳과 追慕 [ 編輯 ]

大韓民國 政府는 노종해 輕減을 6.25 戰爭 初期 戰鬪에서의 功績을 認定하여 輕減 으로 1階級 特進과 함께 2014年 忠武武功勳章 을 追敍하였다. 그의 遺骸는 국립서울현충원 에 安葬되었다. [3] 같은해 國家報勳處 는 노종해 警監의 國家 守護에 對한 寄與와 그의 功勳을 宣揚하기 위해 6月의 6.25戰爭英雄으로 選定하였다. 그리고 2019年 戰爭記念事業會 가 大韓民國 戰爭記念館 에서 2019年 5月 이달의 護國人物 로 指定하였다.

終戰 後 每年 6.25 春川大捷 全勝記念 行事를 열면서도 春川戰鬪의 勝利를 可能하게 만든 礎石人 內評支署戰鬪는 잊힌 채 제대로 評價를 받지 못했다. 內評支署 戰鬪 戰死者들 또한 내평리의 交戰地域이 昭陽江댐 建設로 水沒되어 사라지면서 함께 잊히고 말았다. 그 以後로 內評戰鬪 戰死者를 包含한 6.25 戰死者의 犧牲과 貢獻을 再照明하고 追慕하는 過程에서 江原警察 名譽의 殿堂, 江原警察忠魂塔, 參戰警察 記念碑 等을 設立하였다.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各州 [ 編輯 ]

  1. 春川으로 가는 46番 道路 내평리 마을 한복판에 位置한 內評의 小規模 警察支署의 腸
  2. 現在의 春川
  3. 노종해 輕減과 그의 部下들의 遺骸를 北韓軍은 全部 한 웅덩이에 묻어 놓았는데, 노종해 警衛의 夫人이 다시 돌아와 遺骸를 收拾하여 隣近 高等學校의 뒷山에 모셔두었다가, 다시 국립서울현충원에 安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