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道育種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南道育種 (南都六宗)은 日本 나라 時代 (奈良時代: 710 ~ 794 )에 헤이조쿄 를 中心으로 繁昌한 다음의 6個의 佛敎 宗派의 總稱으로 나라 佛敎 (奈良??)라고도 한다. [1]

겐메이 天皇 헤이조쿄 (平城京: 只今의 나라시 )로 薦擧한 直後부터 都城을 헤이안쿄 (平安京: 只今의 교토시 )로 옮겨 갈 때까지의 80餘 年間( 710 ~ 794 )을 나라 時代 라고 한다. [1] 이 時代 中에서 쇼무 天皇 (在位 724 ~ 749 )의 時代는 나라 佛敎의 最高 全盛期였다. [1]

日本 에 傳來된 佛敎 宗派 가운데 나라 時代 에 가장 盛行한 것은 三論宗 法相宗 이었다. [1] 비록 以後에 華嚴宗 律宗 의 2種이 傳播되었지만, 이 두 宗派는 流行한 時期가 比較的 짧기 때문에 가장 盛行한 流派로 볼 수 없다. [1] 나라 時代 에는 佛敎 制度가 漸次 完備되어 僧官 의 設置, 僧位 의 授與, 의 品行과 衣食住 等에 關한 詳細한 規定이 있었다. [1] 佛敎 는 國家를 守護하는 宗敎 로 認定되어 政治 와 緊密하게 連繫되어 있었다. [1] 僧侶 政治 에 參與하였으며 調整은 僧侶 에 對해 相當한 待遇를 해주었다. [1]

形成 背景 [ 編輯 ]

쇼토쿠 太子 ( 574 ~ 622 ) 時代부터 支配階級 가운데에는 佛敎 를 國家 統一의 思想的 基盤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1] 이러한 생각은 律令國家의 成立과 더불어 더욱 强烈해졌다. [1]

스이코 天皇 (在位 593 ~ 628 ) 時代에는 佛敎 의 강학이 거의 韓國 의 僧侶들에 依해 傳受되었고, 後에 遣隋使   · 遣唐使 가 나타나고 그들과 함께 留學僧들이 活躍하면서 中國 에서 온 高僧도 漸次 많아지게 되었다. [1]

쇼무 天皇 (在位 724 ~ 749 )은 社會 動搖가 深刻해지자 佛敎 의 힘을 빌려 社會를 안정시키려고 地方 各地에 을 세웠다. [1] 쇼무 天皇 은 勅令을 내려 經典 을 筆寫하게 하고 마다 땅을 하사하였다. [1]

나라 時代 (奈良時代: 710 ~ 794 )에는 韓國 中國 에서 온 僧侶들과 中國으로 留學갔던 僧侶들이 돌아와 佛敎 를 硏究하였다. [1] 그 結果 三論宗   · 成實宗   · 法相宗   · 俱舍宗   · 華嚴宗   · 律宗 의 이른바 南道育種 (南都六宗)李 形成되었다. [1] 여기에서 말하는 "종(宗)"이란 佛敎 의 宗派나 宗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學派와 類似한 集團을 가리키는 것이다. [1] 나라 의 對社員에는 수많은 "종"李 事實上 함께 存在하고, 한 僧侶가 여러 種을 겸하여 배우거나 硏究할 수도 있었다. [1] 特히 獨立된 種을 形成할 能力이 없는 成實宗 俱舍宗 은 다른 種과 겸하여 硏究되었다. [1] 그리하여 이 두 "종"은 寓宗 (寓宗: 다른 宗派에 딸려 있는 宗派)이라 불렸다. [1]

三論宗 [ 編輯 ]

南道育種 中에서 가장 먼저 日本 에 傳播된 것은 三論宗 이었다. [1] 625年 高句麗 僧侶 慧灌 원흥사 에서 처음으로 三論宗 의 講義를 始作하였다. [1] 그러므로 日本 에서는 慧灌 三論宗 의 始祖로 삼고 있다. [1] 慧灌 은 일찍 唐나라 로 들어가 吉藏 으로부터 三論 을 傳受받았다. [1]

慧灌 의 弟子는 매우 많았는데, 그들 中에는 唐나라 에 가서 佛法을 硏究한 이도 많았다. [1] 服量 (福亮)은 本來 中國 吳나라 사람으로 日本 에 歸化한 後 머리를 깎고 僧侶가 되어 慧灌 의 門下生이 되었고, 658年 에는 《 維摩經 》을 講論하였다. [1] 慧灌 의 弟子로 支障 (智藏)李 有名하며, 支障 에게는 陶瓷 (道慈)  · 지광 (智光)  · 예광 (禮光)이라는 세 名의 弟子가 있었다. [1] 日本 三論宗 은 이들로부터 興盛하게 되었다. [1]

成實宗 [ 編輯 ]

成實宗 韓國 中國 에서는 매우 盛行하였으나, 日本 에서는 그다지 流行하지 못하였다. [1] 그러나 덴무 天皇 때에 이르러 百濟 의 僧侶 圖章 (道藏)李 日本 에 와 日本 成實宗 의 始祖가 된 以後부터 成實宗 은 活氣를 띠게 되었다. [1]

法相宗 [ 編輯 ]

三論宗 日本 에 傳播된 지 30餘 年이 지나 사이메이 天皇 (在位 642 ~ 645 , 655 ~ 661 ) 때에 日本 의 僧侶 都所 (道昭)가 法相宗 을 傳播하기 始作하였다. [1] 그는 653年 遣唐使 를 따라 唐나라 에 건너가 現場 에게서 法相宗 을 배웠다. 唐나라 에 있는 7年 동안 그는 腺腫 에도 接近하였다. [1] 都所 는 죽을 때 火葬 해 달라고 遺言하였는데, 이로부터 日本 火葬 의 風習이 뿌리내렸다. [1]

658年 智通 (智通)과 지달 (智達) 두 사람이 新羅 의 배를 타고 唐나라 에 건너가 現場 窺基 에게서 法相宗 을 배웠는데 이것이 第2錢(傳)이다. [1]

703年 에는 芝峯 (智鳳)과 지웅 (智雄) 等의 新羅 사람들이 唐나라 에 들어가 法相宗 3代祖인 地主 (智周)에게 가르침을 받은 後 日本 으로 왔다. 이것이 第3錢(傳)이다. [1]

以上 세 番의 傳來 中에서 첫 番째와 두 番째의 傳來를 남辭典 (南寺傳) 或은 원흥사展 (元興寺傳)이라 하고, 세 番째 傳來는 北事前 (北寺傳) 或은 興福寺展 (興福寺傳)이라 稱한다. [1]

그런데 남사(南寺)의 都所   · 지달 아래에는 行氣 (行基) 菩薩 이 있었고, 北史(北寺)의 芝峯 (智鳳) 僧正 아래에는 依然 (義淵) 僧正 이 있었다. [1]

行氣 는 일찍이 依然 에게서도 배운 적이 있는데, 나라 時代 法相宗 依然 以後 敎勢가 크게 發展되었다. [1] 依然 芝峯 을 스승으로 모시고 後에는 査察 을 開創하며 弟子들을 養成하였다. [1] 그는 728年 에 入寂하였는데, 學德은 當代 最高에 이르렀다. [1]

依然 門下의 弟子 가운데서는 겐步 (玄昉)의 名望이 가장 높았다. [1] 겐步 717年 遣唐使 를 따라 唐나라 에 가서 地主 (智周)에게서 法相宗 의 敎義를 배웠는데, 18年間 唐나라 에 머무르다 734年 에 歸國하여 興福寺 에 머물렀다. [1] 737年 쇼무 天皇 (在位 724 ~ 749 )은 겐步 에게 紫色 歌詞를 하사하였다. [1]

겐步 의 弟子로는 船主 (善珠)가 있었고 行氣 의 아래에는 勝友 (勝虞)가 있었는데 各其 南北 兩司를 繼承하여 傳하였다. [1]

華嚴宗 [ 編輯 ]

736年 中國 僧侶 道詵 (道璿: 702 ~ 760 )이 日本 으로 왔는데, 그는 (律)을 講述한 同時에 《 華嚴經 》도 講義하였다. [1]

또 當時 華嚴宗 에 精通한 新羅 僧侶 心象 (審祥: ?~ 742 )이 日本 다이안地 (大安寺)에 머무르고 있었다. [1] 때마침 이를 알게 된 日本 僧侶 兩邊 (良辨)은 華嚴宗 을 隆盛시킬 目的으로 心象 을 請해 《 華嚴經 》의 강술을 請하였다. [1] 이것이 日本 華嚴宗 의 始作이었다. [1] 그러므로 日本 華嚴宗 의 始祖는 心象 理라 할 수 있다. [1] 도다이지 (東大寺)는 華嚴宗 의 根本 度量이었다. [1]

律宗 [ 編輯 ]

律宗 日本 에 가장 늦게 傳播되었다. [1] 754年 中國 에서 日本 으로 건너온 鑑眞 (鑒眞: 687 ~ 76 3)은 日本에 律宗 을 傳播하였다. [1]

그러나 이보다 앞서 스슌 天皇 (在位 587 ~ 592 ) 時代에 이미 日本 最初의 僧侶들이 百濟 에 가서 受戒 를 받았다. [1] 736年 日本 에 온 道詵 (道璿: 702 ~ 760 )도 代案社 에서 이미 律宗 을 講論하였다. [1]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