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浪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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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浪郡
樂浪郡
한나라
紀元前 108年 ? 313年

紀元前 107年 警 韓中日 歷史學界가 말하는 漢四郡의 位置
主導 조선현
歷史的 時代 元三國時代
? 設置
紀元前 108年
? 王朝의 叛亂
25年
2世紀 後半
四魔의 의 公孫淵 討伐
238年
? 廢止
313年
Preceded by
Succeeded by
古朝鮮
帶方郡
高句麗
오늘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樂浪郡을 分割하여 帶方郡을 設置(204年)

樂浪郡 (樂浪郡, 文化語 : 樂랑群, 紀元前 108年 ~ 紀元後 313年 )은 傳한 無題 衛滿朝鮮 을 占領하고 세운 漢四郡 中 하나로, 玄菟郡 과 함께 最後까지 남은 卞君(邊郡)이다. 大略 韓半島 北部를 管轄하였다. 한나라 가 滅亡한 後에도 中國 의 卞君으로 存續하였으며 高句麗 미천왕 에 依해 逐出될 때까지 約 420年에 걸쳐 韓半島 및 滿洲 一帶의 民族들과 對立하고 交流하면서 많은 影響을 끼쳤다.

歷史 [ 編輯 ]

紀元前 108年 ( 圓峯 3年), 衛滿朝鮮 을 멸망시킨 武帝는 衛滿朝鮮의 領內에 樂浪· 眞番 · 臨屯 3 을 設置하고, 이듬해에 玄菟郡 을 追加로 設置하여 [1] 直轄 統治 下에 두었다. [2] 紀元前 82年 ( 시원 5年), 眞番·臨屯을 廢止하여 各其 樂浪郡과 玄菟郡에 倂合시켰고, 紀元前 75年 에는 土着民들의 反撥로 玄菟郡이 집안 方面(國內, 還都 地域)으로 理致되었다. 이때 玄菟郡·區 臨屯郡의 一部 들이 樂浪郡에 編入되어 最終的으로 區 衛滿朝鮮의 領域에는 樂浪郡이 남게 되었다. 樂浪郡은 眞番·현도의 領域에 各各 南部都尉(南部都尉)와 동부도위를 設置하여 管理하였다. 不渡위는 邊方의 異民族 들을 統制하고 防禦하는 役割을 가진 附屬 行政區域으로, 南部都尉( 黃海道 )와 동부도位( 咸鏡道 · 江原道 ) 亦是 한(韓)과 藝脈 을 統制하기 위해 設置된 것으로 보인다.

當時 樂浪郡 一帶에는 衛滿朝鮮의 流民뿐만 아니라 衛滿朝鮮 및 그 以前 時期에 移住해 온 中國人들이 살고 있었으며, 이를 ‘樂浪朝鮮人’이라 불렀다고 한다. 樂浪郡의 土着 勢力은 考古學 敵으로 木槨墓 를 남긴 勢力으로 區別된다. 紀元前 1世紀 前半부터 2世紀 까지 樂浪郡은 ' 귀틀 무덤 ' [3] 의 段階로 突入한다. 旣存 土着 樂浪人의 木槨墓를 代替한 귀틀 무덤 集團은 王氏 勢力을 筆頭로 많은 豪華 副葬品들과 鐵製 武器를 副葬하였으며, 相當한 豪族 勢力으로 成長하였다. 樂浪郡은 黃海 를 통한 海上 交流로 산둥半島 一帶와 密接한 關係를 맺었으며, 樂浪의 有力한 한나라人들 가운데는 山東半島에서 移住해온 이들도 있었다. [4] 傳한 時期에 相當한 繁榮을 누려서 25個 縣을 거느리고 人口 가 40萬에 이르렀으며, 周邊의 여러 不足 및 小國들에 朝服과 依冊을 授與하면서 統制하여 韓半島 全域에 影響力을 行使하였다.

新나라 때에도 樂浪郡은 繁榮하였고, 新나라 말의 混亂期에 산동 地方의 人口가 流入되기도 하였다. 25年 에는 樂浪郡에서 叛亂이 일어나 土人(土人) 王朝 (王調)가 樂浪 태수 를 죽이고 大將軍 樂浪太守라고 稱하였다. 後漢 이 建國되고 光武帝 가 軍閥들을 制壓하는 가운데 30年 에 왕준(王遵)을 派遣하여 樂浪의 豪族 王굉(王?) 等과 合勢, 王朝를 죽이고 樂浪郡을 收復하였다. 이때 後漢은 동부도位를 廢止하고 동부도위가 다스리던 嶺東 7絃을 抛棄하였다. 이에 따라 이들 地域에는 여러 小國들이 亂立하였는데, 華麗, 불내 等의 小菊이 傳해진다. 一角에서는 대무신왕 때 征服된 낙랑국 도 嶺東 7絃의 勢力 中 하나라 보기도 한다.

2世紀 後半, 中國의 混亂을 틈타 요동군 을 中心으로 공손탁 (恭遜도)이 獨立的인 勢力을 갖추어 樂浪까지 支配하였다. 이 時期에는 高句麗 및 한(韓)李 强盛하여 樂浪郡은 周邊 小國들을 制壓하지 못하고 多數의 民戶가 삼한으로 有望하기도 하였다. 公孫康 3世紀 初 樂浪郡의 南쪽 玄을 分離하여 帶方郡 을 設置하였으며 恭遜모(公孫摸)·장창(張敞) 等을 派遣하여 삼한으로 有望하는 遺民(流民)을 막아 樂浪·帶方郡의 衰退를 막았다.

위나라 가 建國된 後 238年 命題 四魔의 로 하여금 公孫淵 을 討伐할 때 遺痕(劉昕)과 선우社(鮮于嗣)를 보내 樂浪·大防도 平定하였다. 以後 3世紀 동안 樂浪郡은 高句麗 및 韓半島 一帶에 强力한 影響力을 行使하였다. 毌丘儉 의 高句麗 攻擊에 支援軍으로 參與하였으며, 馬韓 의 小國 勢力에 對한 支配權을 놓고 軍事的으로 衝突하여 莫大한 打擊을 입히기도 했다. 그러나 西進 이 建國된 以後 百濟 및 高句麗의 攻擊이 加速化되어 樂浪郡은 漸次 弱化되었다. 樂浪郡이 衰退하면서 이를 代身해 韓半島 및 南滿洲 一帶의 諸民族을 統制하기 위해 동이敎委 가 設置되었다. 304年 以後 五胡十六國時代 의 混亂이 始作되면서 樂浪郡과 帶方郡은 中國 郡縣으로서의 役割을 完全히 喪失하고 軍閥 長通(張統)의 支配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313年 미천왕 이 樂浪을 攻擊하여 2千의 男女를 捕虜로 잡았으며 醬桶이 一部 民戶를 이끌고 搖動 慕容氏 (摹容氏)에게 投降함으로써 韓半島에서 樂浪郡은 逐出되었다.

以後에도 慕容氏 및 北緯 時期에 樂浪 및 帶方郡은 요서 地域에서 繼續 存續되거나 이름만 存在하는 郡縣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백제와 高句麗는 樂浪, 대방 地域을 두고 서로 다투며 中國에게서 名目上 ‘樂浪太守’, ‘樂浪공’ 等의 作爲 를 받았으며, 樂浪은 高句麗를 가리키는 名稱으로 繼續 이어졌다. 統一新羅 以後에는 新羅 를 가리켜 樂浪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所屬 現 [ 編輯 ]

樂浪郡의 所屬 玄은 時代에 따라 繼續 變化하여 일정하지 않다. 《 漢書 》에는 25個 現, 《 後漢書 》에는 18個 玄이 所屬된 것으로 나타나며, 《 陳書 》에는 樂浪郡 所屬으로 6個 縣, 帶方郡 所屬으로 7個 縣이 記錄되어 있다. 最近에 發見된 樂浪郡의 戶口 調査 木簡( 紀元前 45年 )에는 모두 25個 玄의 戶口가 記錄되어 있다. 아래 表는 木簡 에 나타난 順序를 考慮해 整理한 것이다. [5]

樂浪郡의 所屬 現
玄의 이름 推定되는 位置 沿革
조선현(朝鮮縣) 平壤直轄市 樂浪區域 토성동 樂浪土城 [6] 傳한 無題 가 占領한 後에 朝鮮縣(元來 古朝鮮 王險性 으로 推定)을 치소로 樂浪郡이 設置되었다. 後漢 末期에 공손탁 의 아들 公孫康 이 둔유縣 南쪽에 帶方郡을 設置하였다. 313年 高句麗 에 依해 逐出되었다.
男監縣(?邯縣) [7] 位置 未詳
證紙縣(增地縣) [7] 位置 未詳
點諸賢(?蟬縣) [7] 平安南道 溫泉郡 성현리 어을同苦性(於乙洞古城) [6] [8]
牌수현(浿水縣) [7] 位置 未詳
彈熱縣(?列縣) [7] 位置 未詳
사망현(駟望縣) 位置 未詳
鏤方縣(鏤方縣) 平安南道 成川郡 [9]
수성현(遂城縣) 位置 未詳 (이병도는 黃海北道 遂安郡 에 非情) [10]
昏迷縣(渾彌縣) 位置 未詳
둔유縣(屯有縣) 位置 未詳 (이병도는 黃海北道 黃州郡 에 非情)
대방현(帶方縣) 黃海北道 사리원시 當土星(唐土城) [11] 元來 衛滿朝鮮 의 眞番 땅이었으며, 傳한 無題 가 占領한 後에 眞番郡 이 設置되었다. 紀元前 82年 에 眞番郡이 廢止된 後 樂浪郡에 編入되어 南部都尉 에 屬했으나, 紀元後 30年 에 南部都尉가 廢止되었다.

後漢 末期에 公孫康이 대방현을 치소로 帶方郡 을 設置하였다. 314年 에 高句麗에 依해 逐出되었다.

열구현(列口縣) 黃海南道 은률군 [12]
壯蠶縣(長岑縣) 位置 未詳 - 黃海南道 信川郡 남부면 봉황리 推定 [13] [6]
解明縣(海冥縣) 位置 未詳
소명현(昭明縣) [14] 黃海南道 信川郡 북부면 서호리
제해현(提奚縣) 位置 未詳
함자현(含資縣) 位置 未詳 - 黃海南道 安岳郡 안악읍 유성리 推定 [15] [6]
동이현(東?縣) 位置 未詳 元來 衛滿朝鮮 의 臨屯 땅이었으며, 傳한 武帝가 占領한 後에 臨屯郡 이 設置되었다. 紀元前 82年 에 臨屯郡이 廢止된 後 玄菟郡 에 編入되었으며, 紀元前 75年 樂浪郡에 編入되어 동부도位 가 設置되었다. 前·後恨 交替期에 有名無實해져 中國勢力의 支配에서 벗어났고, 紀元後 30年 에 동부도위가 廢止되었다.
잠태현(蠶台縣) 位置 未詳
불耳峴(不而縣) 位置 未詳
화려현(華麗縣) 咸鏡南道 金野郡 [16]
사두매현(邪頭昧縣) 位置 未詳
前幕玄(前莫縣) 位置 未詳
부조현(夫租縣) 咸鏡南道 咸州郡 [17]

文化 [ 編輯 ]

位置 및 性格 論難 [ 編輯 ]

樂浪郡 位置에 關한 學說
鉏進軍國道의 樂浪郡, 帶方郡, 玄菟郡 位置

位置 [ 編輯 ]

韓國 中國 , 日本 等 大部分의 歷史學界는 各種 文獻 資料와 考古學 發掘 結果를 土臺로 樂浪郡이 平壤 一帶를 中心으로 韓半島 北部에 存續하였다고 보고 있다. 反面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歷史學界와 少數의 大韓民國 歷史學者, 在野史學者 等은 中國의 랴오닝省 이나 허베이省 一帶라고 主張하고 있다. [18]

樂浪郡의 位置를 直接的으로 傳하는 飼料인 《 唐書 》와 《 新唐書 》〈高句麗傳〉에는 高句麗 수도 平壤城이 過去 樂浪郡이라 하였다. [19] 韓國의 正史 (正史)인 《 三國史記 》, 《 高麗史 》, 《 朝鮮王朝實錄 》, 地理書인 《 新增東國輿地勝覽 》 等에서도 모두 樂浪郡이 平壤 一帶에 있었다고 記錄하고 있는 等 多數의 史料에서 樂浪郡의 位置를 平壤 일대로 傳하고 있다. 朝鮮時代의 한백겸 , 안정복 , 한치윤 , 정약용 等 大多數의 實學 자들도 樂浪郡의 位置를 韓半島 北部로 認識하였다. [20]

한便, 《 요사 》〈地理誌〉를 비롯한 一部 記錄에 樂浪郡이 滿洲 西部(搖動 或은 요서)에 있었다고 記錄하고 있어 差異를 보인다. [21] 이를 土臺로 一部 近代 以前의 學者들이 樂浪郡의 位置를 平壤이 아니라고 把握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정복 , 한진서 等은 慕容氏 北緯 時期에 搖動ㆍ夭逝로 樂浪郡을 巧緻 하였던 事實을 《寮舍》를 비롯한 一部 飼料의 編著者들이 混同하여 한나라 때부터 요동ㆍ夭逝에 樂浪郡이 있었던 것으로 잘못 記錄한 것이라 批判하였다. [22]

樂浪郡의 位置에 對한 論難을 일으킨 또 다른 記錄으로 中國의 古代 河川 지리 를 記錄한 《 水經 》이 있다. 《水經》에는 浿水 (浿水)가 東쪽 바다 로 흘러들어 간다고 하여 西쪽으로 흘러 黃海로 이어지는 大同江과 흐름이 다르게 描寫되었고, 이를 根據로 패수가 大同江이 아닌 베이징 近方의 다른 江이며 樂浪郡 亦是 이곳에 있었다고 主張하는 一部 在野史學者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 漢書 》〈地理誌〉는 패수가 西쪽으로 흘러간다고 記錄되어 있으며, [23] 역도원 은 高句麗 使臣에게 直接 패수의 方向과 性의 位置를 듣고는 《水經》에 쓰여진 方向이 틀렸다고 註釋을 달아 옛 樂浪郡의 位置가 高句麗의 首都 平壤城임을 確認하였다. [24] 《三國史記》, 《高麗史》〈地理誌〉, 《世宗實錄》〈地理誌〉, 《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여러 記錄들 亦是 모두 패수를 平壤의 大同江 이라 非情하고 있다. [25]

日帝强占期 現在 에 걸쳐서 平壤 一帶에서는 封泥(封泥)·한나라式 무덤·印章(印章)·甓돌·그릇·漆器 等 漢나라 遺物들이 大量으로 發掘됨으로써 樂浪郡은 평양시 大同江 南岸의 樂浪土城 一帶가 中心이라는 通說을 뒷받침했다. 2007年 에는 2005年 平壤에서 出土되었던 목간을 分析하여 樂浪地域 25個 玄의 人口 規模와 位置 等을 判讀·硏究한 結果 平壤 一帶라고 確實視하고 있다. [26] 이러한 考古學 發掘 結果가 日帝의 造作이라거나 [27] 高句麗에 依해 捕虜로 끌려온 한족 들의 遺跡이라는 少數의 主張이 있으나 [28] 뒷받침하는 根據는 없다. [18] 1993年 랴오닝省 후루다오視 에서 나온 臨屯태수 封泥를 根據로 樂浪郡이 이 地域에 있다고 主張 [29] 하기도 하나 平壤 一帶에서 多數 出土된 封泥에 對해서 說明하지 못하는 限界가 있다.

이러한 點들로 인해 現在 全世界 歷史學界의 支配的 定說은 平壤 中心의 韓半島北部說이다. 反面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歷史學界는 平壤 一帶의 樂浪 古墳 및 遺物들을 樂浪郡의 것이 아닌 낙랑국 의 것이라 보고, 樂浪郡은 韓半島가 아니라 요동 地域에 있었다고 主張한다. [30] 그 밖에 윤내현 , 福期待 等의 夭逝라는 主張을 비롯하여 랴오닝 城이나 허베이省 이라는 主張이 主로 在野史學者들에 依해 提起되었으며 [31] 이러한 非專門家의 主張에 同調하는 國會議員 이 學界에 壓力을 行使하기도 한다. [32] 그러나 大韓民國의 歷史學界에서는 이러한 主張들이 多數의 考古學的인 證據를 根據 없이 無視하고 잘못된 文獻 史料의 聚合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學問的 價値가 없다고 判斷하고 있다. [18] [33]

性格 [ 編輯 ]

  • 樂浪郡은 漢四郡의 代表格으로서 國史編纂委員會에서 編纂한 《韓國史》 및 國史敎科書에는 樂浪郡만이 平安道 一帶에 남아 한나라와의 交易을 管理하는 貿易基地로서의 役割을 했다는 言及 外에는 漢四郡에 對해서 거의 說明되지 않고 있다.
  • 平壤 樂浪古墳에서는 古朝鮮 固有의 緋緞과 [34] 獨特한 細形銅劍 文化가 나타나는 等 古朝鮮 支配勢力의 基盤은 樂浪郡에서도 어느 程度 維持된 것으로 보인다. 墓祭의 變遷 亦是 起源 前後까지는 主로 木槨墓였다가 以後 1世紀를 中心으로 中國 中院 및 다른 韓半島에서는 보이지 않는 귀틀墓가 流行한다. 卽 樂浪郡 設置 以後 한나라界 住民은 古朝鮮化하고, 古朝鮮界 住民은 韓華(漢化)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다만 時間이 갈수록 韓華가 加速化된다. 오영찬은 ‘樂浪文化는 中國과 古朝鮮 勢力의 影響力이 交叉하고 融合해서 이룬 獨特한 文化’라고 보고, 樂浪人이라는 種族集團(ethnic group)을 擧論하였다. [35]

樂浪과 낙랑국 [ 編輯 ]

30年 經에 高句麗의 대무신왕 과 關聯된 好童 舌禍 에 登場하는 최리의 낙랑국을 樂浪郡으로 보는 學說도 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漢書》28卷下 지 제8下 玄菟郡
  2. 《漢書》6卷 本紀 第6 無題 유철
  3. 하나의 墓壙 속에 四角形 形態의 外郭을 造營한 뒤 그 內部에 다시 두 個 以上의 木管을 두는 形態
  4. 《後漢書》76卷 〈順理列傳〉“王卿”(王景)條
  5. 이 表의 全體 內容은 “ 오영찬, 《樂浪郡硏究》, 四季節, 2006 ”을 中心으로 構成하였으며, 두산百科事典 EnCyber Archived 2004年 10月 28日 - 웨이백 머신 이병도, 《韓國古代史硏究》 第2篇 漢四郡問題의 硏究, 박영사, 1976 를 參考하였다.
  6. 오영찬, 《樂浪郡硏究》, 四季節, 2006
  7. 後漢 時期까지 存續하였으나 西進 時期 中에 廢止되었다.
  8. 秥蟬縣神祠碑 出土
  9. 이병도, 《韓國古代史硏究》 第2篇 漢四郡問題의 硏究 第2張 樂浪郡高 149~150쪽, 박영사, 1976
  10. 이병도, 《韓國古代史硏究》 第2篇 漢四郡問題의 硏究 第2張 樂浪郡高, 박영사, 1976, 148
  11. 이병도, 《韓國古代史硏究》 第2篇 漢四郡問題의 硏究 第1張 眞番郡高 125~126쪽, 박영사, 1976
  12. 이병도, 《韓國古代史硏究》 第2篇 漢四郡問題의 硏究 第1張 眞番郡高, 박영사, 1976, 126
  13. 全州弄, 〈信川에서 帶方郡 腸潛藏王卿의 무덤 發見〉, 《文化遺産》 1962-3, 1962年, 76~77페이지
  14. 帶方郡에는 소명현이 없고, 南新縣(南新縣)이 나타남.
  15. 일민銜字王君墓(逸民含資王君墓) 名文展 出土
  16. 이병도, 《韓國古代史硏究》 第2篇 漢四郡問題의 硏究 第4張 臨屯郡高 207~208쪽, 박영사, 1976
  17. 이병도, 《韓國古代史硏究》 第2篇 漢四郡問題의 硏究 第4張 臨屯郡高 206~207쪽, 박영사, 1976
  18. 宋호정, 《檀君, 만들어진 神話》, 山처럼, 2004
  19. 《唐書》199卷上 列傳 第149上 東이 高麗, 《新唐書》220卷 列傳 第145 東이 高麗
  20. 한백겸, 《東國地理志》. 안정복, 《 東史綱目 》. 한치윤, 《 海東繹史 》. 정약용 《 與猶堂全書
  21. 《寮舍》38卷 지 제8 地理誌2 東京도 憧憬療養部 : 遼陽縣, 本渤海國金德縣地. 漢浿水縣. ... 紫蒙縣, 本漢鏤方縣地. 東京도 흥주 : 興州, 本漢海冥縣地. 東京도 숭週 : 崇州, 本漢長岑縣地.
  22. “原位(元魏) 때에 이르러서는 樂浪, 대방 等의 郡縣을 요서(遼西) 地域에 設置하였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와는 關聯이 없는 것이었다....(중략)...중국의 書冊에서 或 搖動의 여러 縣을 漢나라 때의 樂浪 地域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한치윤, 《海東繹史》〈地理고〉4 ‘四君’ / “ 慕容廆 가 樂浪郡을 두어 長通 (張統)으로 태수를 삼았다 하였으니 이것은 別途로 澆季(遼界)에 두어 옛 이름을 그대로 稱하기를 마치 後世의 要領(遙領)하는 例와 같이 한 것이지 漢나라 때의 옛 君은 아니다.” - 안정복, 《東史綱目》〈四郡高〉
  23. 《漢書》28卷 地理誌 第8下 樂浪郡
  24. 《水經注》14卷 浿水
  25. 《三國史記》37卷 雜誌 第6 지리4 高句麗 平壤城, 《高麗史》58卷 지 제12 지리3 北界 書經有數館 평양부, 《世宗實錄》地理誌 平安道 , 《新增東國輿地勝覽》51卷 平安道 평양부
  26. 윤용구 "새로 發見된 樂浪木簡", 韓國古代史硏究 46, 한국고대사학회, 2007
  27. 3ㆍ1節 特輯 SBS스페셜 歷史戰爭 - 禁止된 장난. 一齊 樂浪郡 遺物造作 〉, 2011年 2月 27日
  28. ‘漢四郡 韓半島설’ 根據 木槨墓, 漢四郡 앞서 이미 築造 - 한겨레 記事
  29. 韓民族의 뿌리 - 檀君朝鮮을 찾아서 <4> 잠든 臨屯郡을 깨우다 〉, 《國際新聞》, 2008年 9月 2日
  3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社會科學院, 《平壤一帶 樂랑무덤에 對한 硏究》, 中心, 2001. 〈 木簡에 새겨진 樂浪郡의 實體는? 〉, 《한겨레》, 2007年 4月 26日
  31. 宋호정, 〈南北歷史學의 爭點 古代史의 疆域, 어디까지 우리 땅이었나〉, 《역사비평》13號, 1990
  32. 東北亞歷史財團 推進 歷史地圖, 中 ‘東北工程’ 地圖 베끼기 疑惑
  33. 眞짜古代史-樂浪郡은 平壤에 있었다 한겨레21 記事, 歷史硏究者 基輕量
  34. 박선희, 〈服飾으로 본 古朝鮮文明과 古代史 體系의 再正立〉, 《古朝鮮檀君學》Vol.26, 古朝鮮檀君學會, 2012
  35. 樂浪은 어느 나라 歷史입니까? 京鄕新聞(2013.12.02)
    오영찬, 《樂浪郡硏究》, 四季節, 2006

參考 資料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