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나카소네 財政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本文으로 移動

나카소네 財政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나카소네 財政 ( 中?根裁定 )은 1987年 日本 自由民主黨 總裁 選擧 에서 다케시타 노보루 가 選出된 事件을 말한다.

經緯 [ 編輯 ]

1982年 自由民主黨 總裁 로 選出된 나카소네 야스히로 의 任期는 1986年 9月에 滿了될 豫定이었다. 또한 當時에는 總裁 3線이 禁止되어 있었기에 나카소네는 더 以上 總裁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1986年 第38回 日本 衆議院 議員 總選擧 第14回 日本 參議員 議員 通常選擧 等 中참同時選擧를 自由民主黨 의 壓勝으로 이끈 나카소네의 功績을 認定하여 1986年 總裁 選擧를 치르는 代身 나카소네의 任期를 1年 延長하기로 合意했다.

以後 나카소네의 任期 滿了가 다가올 무렵인 1987年 5月 14日 다나카派의 會長을 맡고 있던 니카이度 스스무 前 자민당 副總裁가 突然 總裁 選擧 出馬를 表明했다. 當時 니카이도는 78歲의 高齡이었기에 뉴리더 세 名 中 한 名에 依한 世代交替가 될 것이라는 豫想을 뒤엎은 것이었다. 이는 나가타初 全體에 큰 衝擊을 주었다. 니카이도는 病暇 中이던 다나카 가쿠에이 와 만나 會談을 하는 等 積極的인 行動에 나섰고 다나카파 內에서는 니카이도와 뉴리더 中 한 名인 다케시타 中 누구를 候補로 내세울지를 두고 交涉이 열렸지만 合意는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結局 7月 4日 다케시타는 自身을 支持하는 議員들을 이끌고 다나카파를 脫退해 正式으로 다케시타派를 創設했다.

한便 1985年 굉지回를 宣揚받은 미야자와 기이치 와 1986年 靑華會를 讓渡받은 아베 신타로 도 뉴리더의 一員으로 總裁 選擧에 熱意를 보이고 있었다. 고某토파를 이끌고 있던 고모토 도시오 는 自身이 運營하던 海運會社 山코키센(三光汽船)의 經營이 相當한 危機를 맞이하여 政界에서 求心力을 喪失하고 있었기에 出馬하지 않았으며 나카소네派에서는 와타나베 미치오 가 後繼者로 꼽히고 있었지만 派閥을 完全히 掌握하지도 못했고 같은 派閥에서 두 番 連續 總裁를 排出할 수도 없는 狀況이라 結局 出馬하지 못했다.

合意에 依한 候補一元化 [ 編輯 ]

10月 2日 아베가 總裁 選擧에 出馬할 것을 表明했으며 3日과 5日에는 미야자와와 다케시타가 各各 出馬를 表明했다.

7日에는 호텔 오쿠라에서 자민당 最高顧問懇談會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前職 總理인 후쿠다 다케오 스즈키 젠코 는 政局 安定을 理由로 니카이徒에게 自重할 것을 促求했다. 그럼에도 니카이도는 出馬를 抛棄하지 않았지만 總裁 選擧 出馬를 위한 50名의 推薦議員을 모으지 못해 結局 出馬를 斷念했다. 結果的으로 總裁 選擧에 세 名만 立候補하면서 네 名 以上일 境遇 치러야 하는 豫備選擧는 實施하지 않게 됐다. 따라서 한 番만 치르는 選擧를 두고 國會議員에 依한 投票를 實施할지 合意를 통해 候補者를 一元化하여 無投票를 할지를 選擇해야 했고 이는 事實上 退任하는 나카소네의 뜻에 맡겨졌다.

8日 總裁 選擧가 告示되었다. 물러난 뒤에도 어느 程度의 影響力을 남기고 싶었던 나카소네는 다케시타와 아베의 友好的 關係, 角服戰爭 의 後遺症 等에 注目하면서 다케시타와 아베가 聯合하는 것을 막기 위한 攪亂 作戰을 펼쳤다. 이는 總裁 選擧를 막고 合意를 통한 候補一元化를 이루어내기 위함이었다. 뉴리더 中에서는 미야자와만이 對話에 積極的이었는데 黨內 最大 派閥을 이끄는 다케시타도 結局 合意를 통한 一元化에 贊成했다. 이에 다케시타派의 오자와 이치로 等은 票 수로 이길 수 있는데 왜 合意를 받아들이냐며 强勁하게 나설 것을 主張했다. 하지만 三角大伏中 時代의 熾烈한 黨內 抗爭에 질려 있던 뉴리더들은 合意를 통한 後任 總裁 決定을 摸索하기 始作했다.

뉴리더 세 名은 10日부터 여섯 次例에 걸쳐 合意에 나섰지만 朝廷에는 失敗했다. 結局 總裁 選擧일 前날인 19日 候補單一化를 總裁 나카소네에게 一任할 것을 決定했다. 나카소네는 이를 받아들였고 다케시타, 아베, 미야자와는 候補職 辭退書를 提出했다. 退任을 앞둔 總裁가 候補者를 指名하는 事例는 몇 番 있었지만 有力 候補들이 곧 退任할 總裁에게 指名받을 것을 期待하며 스스로 물러나는 모습은 宏壯히 異例的이었다. 이는 나카소네의 狡猾함을 잘 보여주는 事例이면서 뉴리더가 아직은 弱한 勢力이라는 印象을 주었다. 나카소네는 總裁室에서 후쿠다, 스즈키, 니카이度의 意見을 듣고 選拔 作業을 進行했다.

20日 午前 0時에 나카소네는 黨 4役을 總理 官邸로 불러 結果를 傳達했다. 0時 25分 總裁 應接室에서 待機 中이던 뉴리더들은 이토 마사요시 정조회長으로부터 다케시타가 指名되었다는 얘기를 傳해들었다. 나카소네는 自身의 任期 中에 施行하지 못했던 消費稅 導入 問題, 健康 狀態가 좋지 않다는 報道가 連日 나오고 있던 쇼와 天皇 의 붕어 問題에 對應할 수 있는 사람으로 考慮했다고 밝혔다. [1]

나카소네의 後任 地名은 워낙 極祕裡에 進行되었고 많은 煙幕을 펼쳤기에 臆測이 亂舞했다. 財政問議 첫 番째 페이지가 漏落되었는데 該當 페이지에는 '國際 關係가 重要하다'는 文句가 있어 外交 經驗이 적은 다케시타가 아니라 아베 或은 미야자와가 有力했던 것이 아닌가하는 豫想이 當時에도 있었다고 한다. 지지 通信社 는 '아베 總理 誕生'이라는 誤報를 내기도 했으며 TV 아사히 의 『 뉴스 스테이션 』은 獨自的인 總裁 選擧 시뮬레이션을 통해 아베가 12代 總裁로 選出될 것을 豫測하기도 했다.

다케시타가 選擧가 아닌 合意를 통해 後任 總裁를 定하기로 決定하자 다케시타派 內에서는 不滿이 많았다고 前述했는데 이는 아베波濤 마찬가지였다. 最終的으로 아베가 탈락하자 아베派에 屬하는 政治人들은 肅然해졌는데 뒤늦게 돌아온 아베를 보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가 "當身이 그러니까 무르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고이즈미의 憤怒에 周邊은 놀라서 가만히 있었고 아베는 쓴웃음만을 지었다고 한다. 이 얘기는 當時 同席 中이던 히라누마 다케오 가 述懷하면서 알려진 것이다.

다케시타 內閣의 成立 [ 編輯 ]

다케시타는 總裁로 選任되자 아베를 幹事長에, 미야자와를 副總理 兼 大藏相에 임명하여 뉴리더를 끌어안았으며 나카소네派의 와타나베를 政調會長에, 스즈키派의 이토를 總務會長에 앉혀 擧黨 體制를 만들었다. 고모토派 亦是 다케시타派와 좋은 關係를 維持하고 있었기에 다케시타 內閣은 자민당 政權에서 처음으로 非主流派가 存在하지 않는 內閣이 되었다.

하지만 1988年 6月 리쿠르트 事件 이 世間에 報道되면서 아베, 미야자와, 와타나베 等 內閣의 主要 人物들 大部分이 賂物 疑惑에 휩싸이면서 다케시타의 後任을 노리기 힘들게 되었다. 結局 다케시타는 2年 만에 總裁職에서 물러났고 後任에는 우노 소스케 , 다시 2個月만에 가이후 도시키 에게로 넘어갔다.

總裁로 有力했던 아베는 結局 1991年 5月 兵士하여 끝내 總裁職에 오르지 못했다. 한便 미야자와는 가이후 끌어내리기 의 結果 가이후가 退陣한 뒤 다케시타派의 支持를 받아 1991年 10月 總裁職에 오른다. 하지만 以後 다케시타派가 分裂하면서 內閣不信任案이 通過되고 치러진 第40回 日本 衆議院 議員 總選擧 에서 자민당이 敗北하면서 55年 體制 는 幕을 내리고 미야자와度 55年 體制의 마지막 자민당 出身 總理大臣이 되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 오쿠시마 사다오 (2005年 9月 25日). 《自民?幹事長室の30年》 [自民黨 幹事長실 30年]. 中央公論神社. ISBN   978-4122045934 .  
  • 下野사카 시게兆 (1988年 11月 20日). 《駕籠に?る人??ぐ人―自民?裏面史に?ぶ》 [가마를 타는 사람과 메는 사람 - 자민당의 숨겨진 歷史에서 배우다]. 쇼덴샤. ISBN   978-4396610159 .  
  • 下野사카 시게兆 (1991年 12月 12日). 《?力の司祭たち》 [權力의 司祭들]. 아스카神社. ISBN   978-4870311039 .  
  • 야노 준야 (1994年 9月 1日). 《二重?力?闇の流れ》 [이中 權力 · 어둠의 흐름]. 분게이슌주. ISBN   978-4163492100 .  
  • 다치바나 다카시 (2005年 8月 10日). 《政治と情念》 [政治와 情念]. 분게이슌주. ISBN   978-4167330187 .  

各州 [ 編輯 ]

  1. 一說에 依하면 다케시타와 아베는 나카소네의 後任 자리를 둘러싸고 말싸움을 벌이게 되었고 合意 結果 다케시타가 總裁를, 아베가 幹事長을 맡기로 했으며 다케시타의 後任 總裁를 아베가 맡기로 合意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베 신타로의 아들 아베 新潮 를 비롯한 아베 家門은 이러한 얘기를 否定했다.